이반 일리치의 생각

수궁원 2008. 9. 1. 18:43

내가《의학의 한계》를 썼던 1974년에는, 나는 죽음의 '의료화'에 관해서 말하는 게 가능했다. 서양적인 죽음의 기술(이것은 유럽의 기독교화의 소산인데)은 안락이 보증된 말기(末期) 치료에 이미 자리를 양보해놓고 있었다. 내가 '의료화'라는 말을 만든 것은 의료체제가 종래에 교회가 해오던 역할을 떠맡았고, 그래서 이러한 의료체제의 상징적 효과 가운데는 사람들의 신념과 지각(知覺), 기본욕구와 욕망을 형성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의료 전문가들이 치료의 궁극적인 실패로 본 것(죽음 ― 역주)을, 보통사람들은 충분한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결과가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다. 그때는 '의인병(醫因病)'이라는 말을 쓰는 게 타당했다. 그것은 단지 의사나 약품이나 병원과 접촉함으로써 개인들이 겪게 되는 부작용 증상 때문만이 아니라, 의료의 신화를 내면화함으로써 사회와 문화가 미신적으로 재형성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의료관계 책을 쓴다면) 매우 다른 책을 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예전에 내가 의료에 대해서 쓴 것은 20세기 중엽에 주요한 제도적 기구들이, 그 기구들의 존립 목표에 대다수 고객들이 도달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반생산적인 기구로 변해버린 일반적인 성격을 예시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면, 학교는 배움을 방해하고, 수송(輸送)은 인간의 발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간의 대화를 왜곡시켰다. 나는 현대의료가 하는 일을, 그 신봉자들의 마음속에 통증과 장애와 죽음에 대한 예리한 두려움을 심어넣어주는, 포스트-기독교적인 전례(典禮)로서 분석하였다. 오늘날, 다양한 제도적 기구들, 특히 사회복지 서비스의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들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교육과 의료는 군사, 경제 및 그밖의 다른 시스템들과 서로 얽혀진 시스템으로 조직되어 있다.

  20세기 중엽에 많은 사람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의료 서비스에 연루되는 것은 그들이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였다. 나는 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쓸모없는 의료적 의식(儀式)과 관행 때문에 어떠한 비현실적인 기대가 고취되고, 의료화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들 혹은 성직자의 일이 얼마나 힘들게 되었는지 알고 있다. 즉, 죽어가는 사람이 기꺼이 필연적인 사태를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기억에서 힘을 발견하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들이 어려워진 것이다.

  갈레노스(고대 그리스 의학을 집대성하여 서양 중세, 르네상스의 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소아시아 출신 로마시대의 의사 ― 역주)의 전통에서는, 의사들은 레테(희랍신화에 나오는 명계(冥界)의 강, 즉 죽음을 의미함 ― 역주)의 손짓을 존중하고, 사람들이 카론(명계의 강을 지키는 뱃사공 ― 역주)의 배에 옮겨타는 것을 돕도록 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히포크라테스의 상(相), 즉 그들의 환자가 죽음의 공간으로 이동했음을 알려주는 징후들을 인식하는 것을 배웠다. 이 경계 지점에서, 자연 그 자체가 치료를 위해 맺어졌던 (의사와 환자 사이의) 계약을 파기했고, 치료자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순간에는, 물러서는 것이 자기의 환자의 좋은 죽음에 대해 베풀 수 있는 의사의 적절한 서비스였다.   

  죽음과 싸우는 흰옷 차림의 의사는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회화예술에 나타난다. 치료 가능한 환자와 치료 불가능한 환자를 어떻게 분간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은 1910년의〈플렉스너 보고서〉(근대적 의료 및 의학교육의 확립을 제안한 미국의 의료개혁 보고서 ― 역주)가 나온 이후 미국의 의학교에서 사라졌다. 의사들이 죽음과 싸우는 데 열중해 있는 동안 환자는 하찮은 대상물이 되고, 그러고는 하나의 기술공학적인 구축물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묻는다. 죽음이라는 행위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자율적인 자아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가?

  1995년 지금, 나는 이러한 발전에 대해서 의료화를 비난할 수 없다. 텔레비전에서 새로운 기술은 연기(演技)의 본질을 바꿔놓았다. 의료 시스템에서 새로운 기술은 저 오래된 '죽음의 춤'을 완전히 내쫓아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학문적 훈련이나 기재, 실험실, 병원으로 구성된 덩어리를 '의료'라는 영역으로 분리할 수 있게 한 구조는 점차로 사라졌다. 식품, 약품, 유전자, 스트레스, 나이, 공기, 에이즈 혹은 아노미와 같은 것은 이제 더이상 의료적인 문제가 아니라, 포괄적인 '시스템'의 문제가 되었다. 병인학(病因學)은 더이상 어떤 특정한 병인의 문제가 아니라, 피드백으로 순환하는 하나의 위계구조의 문제가 되었다. 환자는 이제 '유전자 풀(pool)'로부터 생태계 속으로 출현하는 하나의 '생명'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은 질병에 대한 진단을 요청하고, 그로부터 회복되기 위한 치료를 기대했다. 오늘날에는 '생명'이 관리되고, 최적화(最適化)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제 바이오(생명) 관리는 산업적 불소 방출이나 가정용 쓰레기 수집, 마약과의 전쟁, 그리고 (마약중독자를 위한) 주사침 무료분배 문제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1978년에 '면역체계'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같은해에 마이크로소프트가 DOS라는 운영체계를 출범시켰다. 5년 후, 통속적인 과학저술에서도 건강은 생물학적 시스템이 기능을 하고 있는 상태로, 죽음은 생명의 돌이킬 수 없는 기능정지로 언급되었다. 그 이후, 건강관리를 위해 추가된 자원의 대부분은 실제로 전체적인 관리 시스템에 의한 의료부문의 흡수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시스템 분석은 건강관리에서 새로운 개념과 실천을 조장했지만, 또한 그것은 사람들의 자기자신을 지각하는 방식에 은밀히 영향을 끼쳤다. 점차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나의 시스템의 상태"로서 말하게 된 것이다. 시스템 분석 개념은 우리의 자기 지각(知覺)을 변화시켰다.

  의료화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두 다리를 가진 진단 다발[束]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료화는 자기 지각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시스템적 사고(思考)는 그렇게 한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기계가 그려보여주는 파라미터의 곡선을 응시한다. 생애의 마지막에 다가갈 때에 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자신을 다만 '생명'으로서 경험해왔다.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은 전문가에 의한 관리를 받아왔던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나는 좋은 죽음을 죽고 싶다(I hope to die a good death.)"라고, 능동태로 말하였다. 또한, 이 동사(die)는 자동사로도 말해질 수 있었다. 즉, "나는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I know I shall die.)"라고. 사람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고, 훌륭한 자세를 배워서 얻을 수 있다. 최근에, 그러나 아주 최근은 아니지만, 나는 (임종 직전 병원 중환자실에서의) 집중치료의 한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자기의 가족 속에 전통이 되어왔던, 죽음의 기술에 대한 기억을 회복하는 것을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법률과 교회는 죽음의 의료화에 있어서 의사들을 지지하였다. 의료전략의 돈키호테적인 영웅주의와의 협력은 환자에게도, 그 가족에게도, 하나의 의무로서 제시되었다. 때때로, 종교적 혹은 도덕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의료수단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발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보는 의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의무를 보다 강화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었다. 번민은 의료팀의 노력으로 비쳐지고, 죽음은 소비자(=환자)의 최종적인 저항행위에 의한 의료팀의 노력이 좌절한 것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절차와 문화적 규범의 의료화는 일생에 걸친 자기진단, 자기규제, 예후를 염려하는 자기치료에 의해서 성취된 자기 지각으로부터 심각하게 몸을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자기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의 지각이 어느만큼 깊이 몸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의료화는 의존성을 길렀지만, 아직 사람은 자신의 신체로부터 분리된, 추상적인 존재가 되지는 않았다. 몸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되게 하지는 않았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마치 개인용 컴퓨터의 RAM 드라이브처럼, 관리됨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생명으로서 자기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생명은 죽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기능정지될 뿐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금욕주의자로서, 쾌락주의자로서, 혹은 기독교인으로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기능정지는 다가오는 자기완결적인 행위로서 상상될 수가 없다. 생명의 종말은 단지 연기(延期)될 수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리된 연기는 살아있는 동안 내내 계속된다. 죽음은 단지 그때까지 계속되어온 메모리의 중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초음파 화면에서 태아를 보았을 때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생명으로서, 환경적·교육적·생명의료적 건강정책의 일개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위태로운 생존을 쓰라리면서도 달게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데 주요 장애물은 세련된 말기 치료가 아니라 일생에 걸쳐 행해지는 '잘못된 구체성'의 훈련이다.

  이러한 상황이 확산되면, '죽음이 없는 사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주위에 죽은 자는 없고, 있는 것은 생명들에 대한 기억뿐이다. 보통사람들은 죽을 수 있는 능력의 결핍으로 고통당한다. '죽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죽을 수 있는 능력, 즉 살 수 있는 능력은 더이상 문화가 아니라 우정에 의존한다. 지금은, 지혜로운 인간은 자기에게 (죽음에 관한) 쓰디쓴 진실을 말해주고, 가차없는 종말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함께 있어줄 '죽음의 벗(amicus mortis)'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 벗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지중해 세계의 오랜 규범이 부활해야 할 때이다. 나는 의료를 행하는 인간이 오늘날에도 그러한 벗이 될 수 없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의 생각

수궁원 2008. 9. 1. 18:42

요시카츠 사카모토 교수님. 당신께서 나를〈아시아 평화연구 학회〉의 창립에 즈음하여 기조강연의 연사로 초청해주신 데 대해 나는 영예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한 신뢰를 보여주신 데 대해 감사드리면서, 또한 일본적인 것에 대한 나의 무지를 여러분들께서 참아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그 언어에 대하여 완전한 무지상태에 있는 나라에서 공적인 강연을 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내가 오늘 말하도록 초대받은 주제는 현대영어의 쓰임새로는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핵심적인 영어단어 속에는 폭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존 F. 케네디는 빈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고, 지금 평화주의자들은 평화를 위한 '전략'(문자 그대로의 전쟁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이처럼 공격성으로 틀지워진 언어를 가지고 나는 여러분에게 평화의 진정한 의미의 회복에 관해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여러분들의 토착어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 염두에 두면서 말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내가 말하는 모든 낱말 하나하나는 평화를 말로 드러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 자신에게 상기시켜주게 될 것입니다. 내게는 한 인간사회가 누리는 평화는 그 사회구성원들이 향유하는 시(詩)만큼 개성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의미를 번역한다는 것은 시를 번역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인 것입니다.

  평화는 각 시대와 각 문화영역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케시 이시다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처럼, 각 문화영역 내에서도 평화는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중심부에서는 "평화의 유지"가 강조되지만, 주변부의 사람들은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30년간의 이른바 '개발의 시대' 동안에 후자의 의미, 즉 '민중의 평화'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이 나의 주된 논제입니다. '발전'이라는 외피 밑에서 세계 전역을 통하여 민중의 평화를 깨트리는 전쟁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발전이 이룩된 지역에서는 민중의 평화는 사실상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는 경제발전에 대한 제약 ― 풀뿌리에서 시작하는 ― 이야말로 민중이 자기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믿습니다.

 

  평화의 다양한 의미

  문화는 늘 평화에 의미를 부여해왔습니다. 각각의 '에스노스' ― 민중, 공동체, 문화 ― 는 그 자신의 '에토스' ― 신화, 법률, 여신, 이상 ― 에 의해 비쳐지고,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강화되어왔습니다. 평화는 말처럼 토착적인 것입니다. 이시다 교수가 선정한 예들 속에서 에스노스와 에토스 사이의 이러한 교응(交응)관계는 극히 명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유태인의 경우를 보십시다. 유태인 가장(家長)이 팔을 들어 자신의 가족과 양떼들에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평화로 번역합니다. 그는 '샬롬'을 "먼 조상 아론의 턱수염을 통해서 올리브 기름처럼 뚝뚝 떨어지면서" 하늘로부터 흘러오는 은총으로 여깁니다. 셈족의 아버지에게 평화는 유일하고 진정한 신이 최근에 정착한 양치기들로 된 열두 부족 위에 내려주는 정의의 축복인 것입니다.

  유태인에게 천사는 '샬롬'이라고 말하지, '팍스'라는 로마어를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총독이 팔레스타인의 땅에서 보병군단의 군기를 치켜들 때, 그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지 않습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를 봅니다. 그는 그 도시에 법과 질서를 부과합니다. '샬롬'과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같은 장소, 같은 때에 존재하더라도 그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공통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그 둘은 이제 모두 퇴색해버렸습니다. '샬롬'은 사사화(私事化)된 종교영역으로 물러나버렸고, '팍스'는 '평화'라는 말로 세계를 침략해왔습니다. 팍스는 2천년 동안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사용되어왔고, 그 과정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용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십자가를 이데올로기로 전환시키는 데 이용했습니다. 카알 대제는 이 용어를 삭손족의 대학살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이노센트 3세는 칼[劍]을 십자가에 종속시키는 데 '팍스'라는 용어를 동원했습니다. 현대에 와서 정치지도자들은 이 용어를 조작하여 정당으로 하여금 군대를 통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클레망소가 다같이 사용했던 말인 '팍스'는 이제 그 의미의 경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용어를 체제 쪽에서 사용하든 반체제 쪽에서 사용하든, 그 정통성을 동서 어느쪽이 주장하든, 그것은 종파적이고 선교적(宣敎的)인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팍스'라는 개념에는 다채로운 역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거기에 대해 별로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전쟁과 그 기술에 관한 논저로 도서관의 서고를 채우는 데 열중해왔을 뿐입니다. 오늘날 중국어 '화평(和平)'과 힌두어 '샨티'는 과거의 것과 다르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어서 서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중국어 '화평'은 하늘(天)의, 위계질서 속에서의 부드럽고 고요한 조화를 의미하는 것인 반면에 인도의 '샨티'는 친밀하고 개인적이고 우주적이며 비위계적인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간단히 말해서, 평화에는 동일화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평화는 '나'를 그에 대응하는 '우리들' 속에 자리잡게 합니다. 그러나 각 언어영역에 있어서 이 대응 내용은 각각 다릅니다. 평화는 제일인칭 복수의 의미를 고정시킵니다. '배타적인 우리들' ― 말레이어의 '카미' ― 의 형태를 규정함으로써 평화는 '포괄적인 우리들' ― 말레이어에서는 '키타' ― 이 대두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이 말레이어의 '카미'와 '키타' 사이의 차이는 태평양권의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이것은 유럽에서는 전혀 낯선 문법적 구분이며, 서구적인 '팍스' 개념에는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습니다. 현대 유럽어의 미분화된 '우리들(we)'은 의미론적으로 공격적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아시아의 연구자들은, '키타'에 대하여 아무런 존중심이 없는 '팍스'에 대하여 철저한 경계심을 품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여기 극동에서는 평화연구가 서구에서보다는 좀더 쉽게 다음과 같은 자명한 원리에 토대를 두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즉, 전쟁은 문화의 차이를 없애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평화는 각 문화가 독자성을 가지고, 다른 문화와 비교될 수 없는 방식으로 꽃피는 조건이 된다는 기본원리 말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결코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화는 옮겨가면 반드시 타락합니다. 평화의 이전(移轉)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평화연구가 이러한 자명한 인종학적 사실을 무시할 때, 그것은 평화유지를 위한 테크놀로지로 전환됩니다. 즉, 어떤 종류의 도덕 재무장론으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고급장교와 그들의 컴퓨터 게임에 의한 네거티브한 전쟁과학으로 전락해버릴 것입니다.

  평화는 인종학적, 인류학적 현실에 입각하지 않는 한, 비현실적인 단순한 하나의 추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의 역사적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때도 역시 평화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극히 최근까지, 전쟁은 평화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었고, 또한 평화의 모든 수준에 침투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계속되려면 전쟁을 지탱해주는 풀뿌리 민중의 자급의 문화(subsistence culture)가 존속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전쟁은 민중의 평화의 지속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전쟁의 역사를 넘어서

  너무도 많은 역사가들이 이 사실을 간과해왔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전쟁 이야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강자들의 흥망성쇠를 기록하려고 하는 고전적인 역사가들에게 명백히 나타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불행하게도, 정복당한 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좀더 최근의 역사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됩니다. 이들 새로운 역사가들도 너무나 빈번히 가난한 사람들의 평화보다도 폭력에 대해서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로 저항운동과 노예, 농민, 소수자, 소외된 사람들에 의한 반역과 반란과 폭동에 대해서 보고하고, 좀더 최근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여성해방투쟁을 다루어왔습니다.

  권력의 부침을 주목하는 역사가들에 비해서, 민중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가들은 어려운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엘리트 문화와 군대가 일으킨 전쟁을 취급하는 역사가들은 문화의 중심부에 관해 기술합니다. 그들은 기념비, 돌에 새겨진 포고문, 상업거래 통신문, 왕들의 자서전, 그리고 진군하는 군대가 남겨놓은 족적들을 자료로 활용합니다. 그러나, 패배한 쪽에 서있는 역사가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증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지구의 표면에서 소거(消去)된 사람들, 그 족적이 적에 의해 말살되거나 바람에 날려가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보고를 합니다. 농민과 유목민, 마을문화와 가정생활, 여성과 아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검토할 만한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육감으로 과거를 재구축해야 하고, 속담과 수수께끼와 민요에 담겨있는 암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흔히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남겨놓은 기록물은 '마녀'와 부랑자들이 고문을 당하면서 보여준 반응, 법정기록으로 남은 진술들입니다. 현대 인류학사(민중문화의 역사, 멘탈리티의 역사)는 이러한 '잡동사니' 기록들을 해독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테크닉을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역사도 흔히 전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약자들이 스스로의 방어를 위해 적들과 싸운 충돌장면들이 주로 역사가들의 시선을 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쟁의 이야기들이 다시 서술되고, 오직 함축적으로만 과거의 평화가 언급될 뿐입니다. 충돌은 적대관계에 있는 쌍방을 비교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과거는 단순한 것으로 취급되고, 과거의 모든 것이 20세기적인 사고로 포착될 수 있다는 착각이 생겨납니다. 그리하여, 여러 문화를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전쟁이 너무도 빈번히 역사가들의 서술의 틀이나 뼈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평화의 역사입니다. 전쟁의 역사보다도 무한히 더 다양한 것이 평화의 역사입니다.

 

  경제권력들간의 균형으로서의 평화

  지금 평화연구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흔히 역사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의 주제는 문화적, 역사적 내용이 제거된 '평화'입니다. 역설적으로, 평화라는 것이 자원의 희소성을 전제로 한 경제적 권력들 사이의 균형으로 환원되었을 때 평화는 하나의 학문적 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평화연구는 제로섬 게임에 갇힌 경쟁자들간의 최소한의 폭력휴전에 대한 연구로 제한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희소성이라는 개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희소한 것이 아닌 것의 평화로운 향유, 즉 민중의 평화는 깊은 그림자 속에 가리워져버리는 것입니다.

  자원의 희소성이라는 것은 경제학의 근본가정이며, 공식적인 경제학은 이러한 가정 밑에서 제가치(諸價値)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희소성은 ― 그리고 공식적인 경제학에서 중시되는 것들은 모두 ― 대부분의 역사에 걸쳐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에서 오직 주변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였습니다. 생활의 모든 국면으로 희소성의 개념이 확산된 과정은 역사적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세 이래 유럽문명에서 발생했습니다. 희소성에 대한 가정(假定)이 확산되면서 평화는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전례가 없었던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즉, 평화는 이제 '팍스 에코노미카'를 의미하게 된 것입니다. '팍스 에코노미카'는 공식적인 경제권력들간의 균형을 말합니다.

  이 새로운 현실의 역사적 전개는 우리의 주목을 요합니다. '팍스 에코노미카'가 평화의 의미를 독점해버린 과정은 특히 중요합니다. '팍스 에코노미카'는 평화의 의미를 처음으로 세계적 규모로 받아들여지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독점은 당연히 크게 염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강연에서 '팍스 에코노미카'와 반대편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보완하고 있는 민중의 평화(popular peace)에 비교하여 '팍스 에코노미카'를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근대적 '팍스 에코노미카'의 출현

  유엔 창설 이후 평화는 점진적으로 '발전' 개념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와 같은 연결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새로운 현상인지 40세 이하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기묘한 상황은 1949년 1월 10일에 나와 같이 성인이었던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트루먼 대통령이 '4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한 날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바로 그날 지금처럼 사용되는 '발전'이라는 용어에 처음으로 마주쳤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들은 '발전'을 생물종의 발달이나 부동산 개발, 또는 체스게임에서의 상황전개를 말할 때 사용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발전이라는 말은 사람들, 국가, 경제전략 등에 관해 쓸 수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대가 채 경과하기도 전에 서로 대립하는 발전이론들이 홍수처럼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 대부분은 이제 단지 골동품 수집가의 관심거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조금 당혹한 심정으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일인당 소득의 향상", "선진국 따라잡기", 또는 "의존상태의 극복"이라는 목표를 내건 연속적인 프로그램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끊임없이 희생을 요구받아왔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성취지향성"이니 "평화를 위한 원자력", "고용창출", 그리고 오늘날에는 "대안적 라이프 스타일", 또는 전문가의 조언 밑에서 이루어지는 "셀프 헬프(自助)" 등 한때는 수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지금 여러분은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각기 물결을 이루어 밀어닥치곤 하였습니다. 한 물결은 기업활동을 강조하는 실용주의자들을 데려왔고, 다른 물결은 외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도록 민중들에게 설득하는 정치가들을 등장시켰습니다. 두 진영 모두 성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습니다. 그들은 생산을 높이고, 소비에 대한 의존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진영의 전문가들 ― 구세주들 ― 은 평화를 향한 발전에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평화는 그렇게 발전개념에 연결됨으로써 하나의 당파적인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전을 통한 평화의 추구는 검증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공리가 되었습니다. 경제성장의 방법이 아니라 경제성장 그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 평화의 적으로 비난받게 되었습니다. 간디조차도 바보, 낭만주의자이거나 아니면 정신병자로 취급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간디의 가르침은 이른바 발전을 위한 비폭력적 전략으로 왜곡되었습니다. 평화에 관한 간디의 관점도 성장에 연결되었습니다. '카디'(물레로 짠 직물로서 간디가 제창한 삶의 자립성의 도구이자 상징 ― 옮긴이)는 '상품'으로 재정의되고, 비폭력은 하나의 경제적 무기로 간주되었습니다. 희소성이 없는 가치는 보호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근본전제에 의해서 '팍스 에코노미카'는 민중의 평화를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발전 . 개발과 평화

  평화가 발전개념에 연결되어버린 결과 '발전'에 대해 도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도전이야말로 이제 평화연구의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발전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에 따라서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발전은 다국적기업 중역들, 바르샤바 조약의 각료들, 신국제경제질서의 수립자들에게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발전이 필요한 것이라는 데 대한 그들의 일치된 견해는 발전개념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해왔습니다. 그 일치된 견해 때문에 발전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19세기적 이상을 ― 희소성이라는 전제 밑에서 제한될 수밖에 없지만 ― 추구할 수 있는 조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누가 무엇을 차지하느냐"라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 밑에서 모든 발전 . 개발에 불가피하게 내재된 비용은 은폐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70년대 동안 이러한 비용의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몇몇 명백한 '진실'이 돌연히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즉, 에콜로지라는 이름 밑에서 자원의 한계와 감내할 수 있는 오염과 스트레스의 한계가 정치적 이슈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의 유용화 가치에 대해 저질러지고 있는 폭력적인 공격은 지금까지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이상의 모든 성장에는 민중의 자급문화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이 함축되어 있지만, 이것은 '팍스 에코노미카'에 의해 은폐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내게는 래디칼한 평화연구의 일차적인 과제로 생각됩니다.

 

  민중의 자급적 생존에 대한 전쟁

  이론과 실제 어느쪽이든 모든 발전 . 개발은 민중의 자급지향적 문화를 변용시켜, 그것을 경제시스템 속으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발전은 언제나 민중의 자립, 자급적 활동이 희생되고, 공식적인 경제영역이 확대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제로섬 게임의 틀 내에서 교환이 행해지는 영역을 갈수록 확대해 나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대는 모든 전통적인 교환형태를 희생시키면서 진행됩니다.

  이와 같이 발전은 언제나 희소한 것으로 간주되는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의존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발전은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편리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민중의 자급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거해버립니다. 그렇게 하여, 발전은 필연적으로 모든 형태의 민중의 평화를 희생시키면서 '팍스 에코노미카'를 강요합니다.

  민중의 평화와 '팍스 에코노미카' 사이의 대립을 예시하기 위하여, 유럽의 중세를 돌아보기로 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과거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다만 평화의 두가지 보완적인 형태 사이의 역동적인 대립을 예시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내가 사회과학의 이론이 아니라 과거를 탐사하는 것은 유토피아적 사고와 '계획화 멘탈리티'를 피하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계획이나 이상(理想)과 같이 언젠가 실현될지 모르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내가 사실에 입각해서 현재를 보게 해줍니다. 내가 유럽의 중세로 눈을 돌리는 것은 중세말기에 폭력적인 '팍스 에코노미카'가 그 형태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평화는 '팍스 에코노미카'라는 위조된 평화로 대체되었고, 이것은 유럽의 수출품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중세의 평화

  12세기에, '팍스'는 영주들 사이에 전쟁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나 황제가 보장하려고 했던 '팍스'는 기사(騎士)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팍스' 곧 평화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자급적 생존수단을 전쟁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평화는 농민과 수도승을 보호했습니다. 이것이 '신(神)의 평화', '땅의 평화'의 의미였습니다. 그것은 특정의 시간과 장소를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영주들간의 충돌이 아무리 피비린내 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평화는 소와 밭의 곡물을 보호했습니다. 그것은 비상용 식량창고와 씨앗과 수확기를 안전하게 지켜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땅의 평화'는 민중이 공유하는 환경의 유용화 가치를 폭력적인 침해로부터 막아주었습니다. 그것은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서 달리 의존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 물과 목초지, 숲과 가축을 이용할 수 있도록 보증해주었습니다. 따라서, '땅의 평화'는 전쟁 당사자 사이의 휴전과는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엇보다도 민중의 자급적 생활에 겨냥되어 있던 평화의 의미는 르네상스와 함께 상실되었습니다.

 

  '팍스 에코노미카'의 폭력

  민족국가의 대두와 더불어 전혀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계는 새로운 종류의 평화와 새로운 종류의 폭력을 맞아들였습니다. 그 평화와 폭력은 모두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형태의 평화와 폭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평화는 영주들간의 전쟁을 지탱해주는 토대가 되었던 민중의 최소한의 자급생활에 대한 보호를 의미했던 것임에 반해 이제부터는 민중의 자급적 생활 그 자체가 공격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자급의 문화는 재화와 서비스에 있어서 확대되는 시장의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종류의 평화가 대두됨으로써 하나의 유토피아가 추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민중의 평화는 위태롭기는 하지만 진정한 공동체가 완전히 절멸되는 것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평화는 하나의 추상을 둘러싸고 건설되었습니다. 새로운 평화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생산한 상품의 소비에 의존하는 '경제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 ― 보편적 인간으로 간주된 ― 의 척도에 따라 새겨졌습니다. 민중의 평화(pax populi)가 토착적 자율성과 그것이 번창할 수 있는 환경과 그 재생산을 위한 다양한 패턴을 보호해주었던 것에 반해 새로운 '팍스 에코노미카'는 생산을 보호합니다. 그것은 민중문화와 공유지(共有地)와 여성에 대한 공격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첫째, '팍스 에코노미카'는 민중이 스스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가정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엘리트의 힘을 강화하고, 엘리트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교육과 건강관리, 경찰에 의한 보호, 아파트와 슈퍼마켓에 민중의 생존이 의존하게 합니다. 일찍이 예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것은 생산자를 드높이고, 소비자를 격하시킵니다. '팍스 에코노미카'는 자급적 생존방식을 '비생산적'이라고 규정하고, 자율적인 것을 '비사회적'이라고 부르며, 전통적인 것을 '미개발된'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제로섬 게임에 맞지 않는 모든 지역적 관습에 대한 폭력을 의미합니다.

  둘째, '팍스 에코노미카'는 환경에 대하여 폭력을 조장합니다. 새로운 평화는 면죄부를 부여합니다. 즉, 환경이 상품의 생산을 위하여 채굴되는 원천으로서, 또 상품의 유통을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서 이용되는 것을 보장합니다. 그것은 공유지의 파괴를 허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파괴를 장려합니다. 민중의 평화는 공유지를 보호하였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목초지와 숲, 도로와 강을 이용하는 것을 보장하고, 과부와 걸인들에게 환경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예외적인 권리를 확보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팍스 에코노미카'는 환경을 하나의 희소 자원으로 규정하고, 상품생산과 전문적 서비스를 위하여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상물로 여깁니다. 역사적으로, 이것이 발전이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공유지가 영주의 양(羊)으로 채워지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거리라는 공유지가 자동차들에 의해 점유되고, 좋은 일자리는 12년 이상의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것 말입니다. 발전은 언제나 상품이나 전문화된 서비스의 소비에 의존함이 없이, 환경의 유용화 가치를 통하여 생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배제시키는 것을 의미해왔습니다. '팍스 에코노미카'는 공유지에 대한 전쟁을 말합니다.

  남녀관계와 평화

  셋째, 새로운 평화는 양성간에 새로운 종류의 전쟁을 조장합니다. 지배력을 위한 전통적인 투쟁으로부터 남녀 사이의 이 새로운 전면적인 전쟁으로의 이행(移行)은 경제성장의 부작용 가운데 아마도 가장 검토가 안된 문제일 것입니다. 이 전쟁 역시 이른바 생산력의 성장이라고 하는, 임금노동이 모든 형태의 일을 완전히 독점해버리는 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폭력적인 공격입니다. 임금에 관계된 일이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됨으로써 모든 자급문화의 공통된 특징이 심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자급사회는 일본, 프랑스, 피지의 자급문화처럼 각기 다를지 모르지만, 한가지 중심적인 공통성이 있습니다.

  자급문화에 관련된 모든 일은 성에 따른 구분, 즉 남자의 일, 여자의 일로 구분이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일의 틀은 사회에 따라 다양합니다. 그러나 각 사회는 다양한 일거리를 남자 또는 여자에 따라 구분해서 분배하고, 그 분배는 저마다의 독특한 패턴에 입각하여 행해집니다. 어떠한 두 문화에서도 사회내에서 일을 분배하는 패턴은 같지 않습니다. 각 사회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오직 그 사회에서만, 남자 또는 여자로서 갖는 특징적인 활동을 떠맡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업화 이전(以前) 사회에서 한 남자 또는 한 여자라고 하는 것은 무성(無性)의 인간에게 부가된 이차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있어서도 가장 근본적인 특징입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교육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 여자 또는 한 남자로서 행동함으로써 삶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녀 사이의 역동적인 평화는 정확히 이러한 구체적인 일의 구분으로 성립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호적 억압에 제한을 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친밀한 영역에 있어서조차 민중의 평화는 전쟁과 지배의 범위를 모두 제한합니다. 임금노동은 이러한 패턴을 파괴합니다.

  산업노동, 생산적 노동은 중성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또 흔히 그러한 것으로 경험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의 구별이 없는 일이라고 규정됩니다. 이것은 그 일이 금전적인 대가를 받든 않든, 그 작업리듬이 생산에 의해 규정되든 소비에 의해 규정되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일 자체가 성의 구별이 없는 것이라고 간주되더라도 이러한 일에 대한 접근은 철저하게 편향되어 있습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일자리로 생각되고 금전적인 대가를 받는 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데 반해 여자들의 몫은 대개 남자들이 차지하고 남은 일거리들입니다. 원래 여성들은 금전적 대가를 받지 못하는 그림자 노동에 종사하도록 강요되었습니다. 지금은 남성들에게도 점점더 많이 그러한 노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의 중성화의 결과로, 발전은 이제 이론적으로 동등한 존재가 된 남녀간에 새로운 전쟁을 필연적으로 촉발시킵니다. 지금 우리는 희소한 것으로 된 임금노동을 위한 경쟁과 대가도 주어지지 않고, 자립적 생활에도 기여하지 않는 그림자 노동을 피하려는 투쟁을 보고 있습니다.

 

  평화와 발전개념을 분리해야

  '팍스 에코노미카'는 제로섬 게임을 보호하고, 그 게임이 방해를 받지 않고 진보해 나가도록 지켜줍니다. 모든 사람들은 '경제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으로서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면서, 그 규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되고 있습니다. 이 지배적인 모델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평화의 적으로서 추방되거나 아니면 순응할 때까지 교육을 받습니다. 제로섬 게임의 규칙에 의하면, 환경과 인간의 일은 모두 희소한 노름 밑천입니다. 따라서, 한편이 따면 다른 편은 잃게 됩니다.

  평화는 지금 두가지 의미로 축소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경제학에서는, 둘 더하기 둘이 언젠가는 다섯이 될 거라는 신화가 되어있거나, 또는 휴전과 교착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발전은 이 게임의 확대, 즉 좀더 많은 출연자와 그들의 자원을 통합하는 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팍스 에코노미카'의 독점적인 지배는 치명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발전개념에 연결되어 있는 평화가 아닌 다른 어떤 평화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팍스 에코노미카'에 긍정적인 가치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는 예전에 후추 무역이 행해지던 것과는 다른 시장에서 발명되고, 그 부품들이 유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경제권력들 간의 평화는 적어도 고대의 전쟁영주들 간의 평화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엘리트들의 평화 독점에 대해서 도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도전을 명확히 하는 것이 내게는 오늘날 평화연구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과제로 생각됩니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 ― 역사가, 문명비평가. 원래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으나 중남미에서의 반체제적 활동으로 교회에서 추방당한 이후 '떠돌이' 학자, 현자로서 세계 여러 대학과 지역사회를 오가며 현대 산업기술사회 체제를 근원적으로 묻는 저술과 강연활동을 계속해왔다.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 1980년 12월 1일에 일본 평화연구학회의 초청으로 요코하마에서 행한 강연기록을 옮긴 것인데, 출전은 In the Mirror of the Past(1992년)이다. 일리치에 관한 좀더 자세한 이야기는《녹색평론》제37호(1997년 11-12월)에 실린 글〈이반 일리치 ― 상투성과 기계에 맞서는 현인〉에서 볼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생각

수궁원 2008. 9. 1. 18:40

일리치  지난 60년대에 나는 교육과 학교문제에 관심을 갖고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 차례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언제부터 사람들은 욕구를 갖고 태어났는가? 예를 들어, 교육에 대한 욕구 말입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서 배워야 했는가? 도대체 세계 전역에 걸쳐 사람들이 최소한 15명 이상(그보다 적으면 한 학급이 될 수 없으니까) 40명 이하로(그보다 많으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처지인데) 집단을 만들어, 연간 800시간 이상(그보다 적으면 충분히 얻을 수 없으니까) 1,100시간 이하로(그보다 많으면 감옥으로 간주되니까) 4년 동안 학교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나는 알고 싶었습니다. 학교교육과 같은 괴이한 과정이 어떻게 하여 필수적인 것으로 되었을까요?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은 사람들을 인공적으로 조작하는 것과 같은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인공적인 물건들만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사람들도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커리큘럼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교교육이라는 과정 자체의 의식(儀式)을 통과함으로써 배움이라는 것은 학교교육의 결과로서 일어난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움은 여러가지의 분리된 일로 나뉘어지고, 측량가능한 것이 되고,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물건 가치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지요. 한 사람의 학교교육비가 많이 들수록 그는 자기 인생에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커리큘럼의 내용과 실제로 사람들이 자기자신이나 사회를 위해서 만족스럽게 행하는 것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입니다. 적어도 서른 내지 마흔 개의 연구사례가 모두 그같은 점을 똑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과내용은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수행해 나가는지에 대해 전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좀더 중요한 것은 학교교육의 잠재적 기능, 다시 말하여 '숨은 교과과정'인 것입니다. 어느 정도 학교를 다녔으니 이제 교육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정말 문제이지요.

  내가 젊었을 적에 사람들은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굶주림을 곧바로 '음식물에 대한 욕구'로 번역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토틸라 옥수수빵에 굶주렸지, 결코 칼로리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에 굶주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고, 욕구는 권리일 수 있으며, 이러한 권리는 무엇인가를 당연히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뜻한다는 생각은 근대적 세계에서 발전된 것입니다. 학교교육은 그것이 평등한 기회를 만들어낸다고 하지만 실은 전체 사회를 여러 계급으로 나누는 일찍이 시도된 바 없는 독특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12년 또는 16년간의 학교교육 기간 중에 자기가 어떤 수준에서 탈락되었는지를 알고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 고등교육을 받았을 때는 거기에 어떤 가격표가 부착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다수 사람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이야기입니다.

  브라운  그러니까 그것은 빈곤의 근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난한 사람은 이제 물질적 재화를 많이 소유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정신적 자신감을 갖고있지 못하니까요.

  일리치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이제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세계에 살고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속에 들어가 있게 됩니다. 컴퓨터는 내가 처한 지점에서 지금 당장 무엇이 내게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알려줍니다. 사람들이 칼을 어떻게 사용하고, 커피메이커를 어떻게 이용하며, 또는 어떻게 문장을 이어갈지를 일일이 안내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감사하게 되는 그러한 세계를 우리는 만들어낸 것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인공의 세계에서 살고, 스스로 인공물이 되며, 그러면서 만족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지금 우리 두 사람이 우정(友情)의 가능성, 즉 진정으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토록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대개 물건이나 인공물, 테크놀로지를 논하는 사람들은 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 같은 문제에 관심이 큽니다. 현대기술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양극화하였습니다. 현대기술은 환경을 오염시켰습니다. 현대기술은 아주 단순한 토착적 능력들을 못쓰게 만들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물건에 의존하게 만들었습니다.

  브라운  자동차 같은 물건 말이지요.

  일리치  자동차는 우리의 발의 사용가치를 제거해버렸습니다. 자동차는 사람이 세계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원래 라틴어에서 자동차(automobile)는 "자신의 발을 사용하여 어딘가로 간다"는 뜻인데도 말입니다. "스스로의 발로 어디로 간다"는 것은 자동차 때문에 엄두도 못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누군가에게 내가 안데스산맥을 걸어서 내려왔다고 얘기했더니 그가 "당신 거짓말쟁이군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16세기, 17세기에는 스페인 사람 누구나가 그렇게 걸었습니다. 누군가가 단순히 그냥 걸을 수 있다는 것 ― 이것을 지금은 상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조깅은 할 수 있지만 걸어서는 아무데도 못가는 겁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몰고다니는 바람에 세계는 우리에게 접근 불가능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물건과 인공물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좀더 깊이, 우리의 감각이 기능하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전통적으로 응시(凝視)한다는 것은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행위의 일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옛 그리스 사람들은 바라보는 행위를 내가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 둘 사이에 관계를 맺기 위하여 나의 영혼의 팔다리를 밖으로 뻗는 방식의 하나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그들은 비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갈릴레오 이후 눈은 단지 빛이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그속으로 가져다주는 수용기(受容器)라는 생각이 발전하였고,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적에도 당신과 나는 분리되어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눈을 일종의 카메라렌즈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실제로 자기의 눈을 기계의 일부인 것처럼 여기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인터페이스'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나에게 "나는 당신과 인터페이스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죄송하지만 제발 딴 데로 가보십시오. 화장실이든 어디든, 거울한테로 가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또, 누구라도 "나는 당신과 커뮤니케이션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말을 할 수 없습니까? 당신은 얘기를 나눌 수 없습니까? 나와 당신 사이에는 깊은 타자성(他者性)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까?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나도 프로그램화된다는 것은 나로서는 참을 수 없습니다."

  미첨  이반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근원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끼리 얼굴을 맞대고 살기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스크린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젼 스크린이건, 컴퓨터 영상이건, 지금 여기 바로 내 앞에 있는 조그만 디지털 시계의 자판이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갈 때 앞유리창이 일종의 스크린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스크린에 비치는 세계는 납작하게 단순화된 모습이지요.

  일리치  나는 펜실베이니아 주립 도서관에서 자동차 앞유리창에 관계된 기술자들이 텍사스에서 가진 모임에 관한 보고서를 보았습니다. 작년에 나온 이 책은 세권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들어있는 약 870개의 보고내용은 자동차의 앞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광경을 어떻게 하면 운전자가 아직 다다르지 않은 장소에 이미 와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기술적으로 고안하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운전자는 저너머, 아직 그가 가닿지 않은 곳을 바라봅니다. 마치 그것은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지금 있는 대신에 우리가 다음 주에는 어디에 있을지, 다음 시간에는 어디에 있을지를 자꾸만 알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얼굴을 맞댄다는 것은 갈수록 점점더 어려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되고 프로그램화된 것입니다.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우리가 아는 모든 문화는 위계질서 ―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 에 의해 규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속에서 살아야 하고, 고통을 이겨나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테두리였습니다. 사람의 생존을 규정짓는 (위계적) 조건은 열대의 조건일 수도 있고, 차가운 기후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은 노예제도나 혹은 끔찍한 어떤 것을 수반한 고도로 복잡한 그리스의 도시국가일 수도 있고 12세기의 수도원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화'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딴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의' 고통을 이겨내는 기술에 관해서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딴 곳'의 사람들은 또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조건을 감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이제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일년 동안이나 서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랫만에 만날 때, 우리는 서로에게 고개를 숙여 절을 하였습니다. 고개숙여 절을 한다는 바로 이러한 아이디어 ― 사람은 스크린 앞에서 고개숙여 절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스크린 위에서 비인격체를 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고개숙여 절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굉장히 어렵게 되었지요. 어떤 소년이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네, 그렇지만 오늘 저녁 저는 케네디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그리고 또 ET를 보았답니다." 정말이지 나는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싶은 사람, 당신을 올려다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뿌리깊이 훼손되고 있습니다.

  세계는 균형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즉, 우리의 우정이 '제리 브라운 더하기 이반 일리치 및 그 둘 사이의 어떤 상호작용'이 아니라는 감각 말입니다. 우리 둘은 두개의 스크린도, 두개의 프로그램도, 두개의 기계도 아닙니다. 우리 둘 사이의 우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감각이야말로 내가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것을 지키는 일을 정치속에서, 공적생활에서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과의 친분을 두텁게 함으로써, 즉 우리가 스파게티와 포도주를 함께 들면서 우정을 나눌 때 뿐입니다.

  여기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젊은이들은 아마도 내가 미국 사람들이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하고 있던 무렵에 태어난 사람들일 것입니다. 나는 그 우울증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무기력속에 빠져 있었지요. 그런데 그러한 무기력감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게 어렵다는 생각에서 생겨났던 것이지요. 나는 한동안 캄캄한 어둠, 나태의 시간을 보냈고, 내 책《공생공락을 위한 도구》를 계속해서 쓰고 싶은 의욕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까 우리가 말한 기술문명의 껍데기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바로 그 무렵에 태어났지요. 내가 이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60년대의 사람들에게 내가 말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1968년에 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현대적 의료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보다는 더 많은 병든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것, 따라서 그것이 필연적으로 초래할 끔찍한 사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금 우리가 말한 교육문제 ― 학교교육이 사람들을 어떻게 마비시키는가를 알리고자 하였고, 시간을 가속적으로 소모시키는 현대적 교통체계로 인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더욱더 많은 시간을 교통체증속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얘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내 주된 관심사는 테크놀로지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인간관계를 황폐화시켰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리로 뛰쳐나가 우리들보다 혜택을 덜 받고 사는 사람들을 직접 돕는 것이 우리의 과업은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가 이런 일을 마땅히 해야 하고, 나는 거기에 협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과업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스크린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브라운  당신은 전에 좀더 큰 사회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최근에 와서는 좀더 직접적인 우정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컴퓨터는 커뮤니케이션을 행하지만 사람은 얘기한다라고 하는 당신의 말이 몹시 인상적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관계'라는 말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도구와 도구 사이에, 또는 여러 도구들 사이에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우정이란 것은 두 사람 사이 또는 여러 인간들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비근한 삶에 대하여 갖는 이해는 현대의 기술공학적 용어에 의해 크게 침해되었습니다.

  당신이 최근에 쓴 책《텍스트의 포도밭》각주 53에 보면 12세기의 수도사였던 성(聖) 빅토르의 휴(Hugh of St. Victor)의 편지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사랑은 끝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로놀프에게, 죄인 휴로부터. 사랑은 끝이 없다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금방 그게 진실임을 알았었네. 그런데, 친애하는 형제여, 사랑에는 끝이 없다는 걸 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잘 알게 되었다네. 나는 이방인이었고, 나는 그대를 낯선 땅에서 만났었지. 그러나 내가 거기서 친구들을 발견한 이상 그 땅은 정말 낯선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네. 내가 먼저 친구를 만들었는지, 혹은 내가 친구가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네만, 나는 거기서 사랑을 발견하였고 나는 그걸 사랑했으며 나는 그 사랑에 싫증난 적이 없었다네. 왜냐하면 그것은 내게 너무나 감미로왔고, 내 가슴을 가득 채웠으며, 나는 내 가슴이 그토록 조금밖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슬펐다네. 나는 거기 있는 것 전부를 취하지 못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취했었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공간을 가득 채웠지만 내가 발견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었다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 소중한 선물의 무게에 짓눌릴 정도가 되었지만, 그러나 결코 짐스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네. 왜냐하면 내 온 가슴이 나를 지탱해준 까닭에. 그리고 이제 긴 여행끝에 나는 내 가슴이 여전히 따뜻해짐을 느끼고, 그 선물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았음을 느낀다네. 사랑에는 끝이 없는 탓이라네.

 

  일리치  참으로 아름다운 대목이지요. 오늘날에는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그와 같은 편지를 쓴다면 곧바로 호모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 그런 편지를 쓴다면 사람들은 이건 굉장한 성관계라고 말하겠지요. 위대한 랍비의 전통이나 기독교의 수도원의 전통에서는,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사람들이나 키케로는 이미 우정에 관하여 알고 있습니다. 즉,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대의 눈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퓨필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대의 눈속의 검은 눈동자, 그것은 내가 그대의 눈속에서 보는 나의 '꼭두각시'라는 것이지요. (영어의 pupil〔눈동자〕은 puppet〔꼭두각시 인형〕와 함께 같은 어원 pupilla에서 파생하였다 ― 역자)

  눈동자, 인형, 사람, 눈 ― 그것은 단순히 나의 거울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가 당신에게 선물이 되게 하는 것은 당신인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개체성, 나의 에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여기서 상대방에게 응답하는 사람, 그 응답을 받아 다시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세인트 휴가 설명하는 것이고, 랍비의 전통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면 나는 온전한 인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나 로마, 그리고 또다른 오래된 전통에서 우정은 언제나 덕성(德性)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점으로 간주되었지요. 여기서 덕성이란 "좋은 일을 행하는 습관적인 성향"이란 뜻인데, 이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폴리타에아(politaea), 즉 공동체의 삶이라고 일컬은 것에 의해 함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문제가 많은 공동체 생활, 정치적 삶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노예제도의 뒷받침이 있었고, 여성들은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톤이나 키케로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훌륭한 공동체의 정치적 삶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가장 찬란한 꽃핌(開花)이 우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오늘날의 정치적 생활로부터 우정이 꽃피어나거나 출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기술공학의 세계에 그리스적인 의미의 정치적 삶이 존재하려면 그것은 먼저 우정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절제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조심스러우며, 아취(雅趣)있는 우정을 가꾸는 것입니다.

  나와 그대 사이의 우정, 그리고 제3의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지요. 간단히 말하여 한때 우리의 서구전통에서 우정이 정치의 최고단계의 꽃이었던 한, 오늘날 공동체적 삶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벗을 사귀기를 원하는 사람 각자가 가꾸는 우정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통 우리 각자가 우리의 우정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말할 때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이렇게 맺어지는 우정들의 정치적 결과만큼만 좋아질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정이 꽃피어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맥락으로서 민주주의의 의의를 부각시키는 것이지요.

  브라운  좋은 사회는 덕성을 창조하고, 덕성은 우정의 기초라고 하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이제 순서가 뒤바뀌었군요. 이제 우리는 우정을 창조해야 하고, 우정이라는 맥락에서 덕행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그 공동체로부터 사회로, 또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정치로 나아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미첨  어떤 점에서 그것이 바로 제리 브라운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은 오클랜드에 있는 당신의 그룹〈우리들, We the People〉을 가지고 하나의 맥락을 창조하였습니다. 거기서 처음에 다른 사람들과 당신 사이의 우정이 시작되었고, 그리고는 그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인간관계가 생겨났지요. 그리고 그로부터 어떤 형태의 정치가 커나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우리들〉을 방문하였을 때 경험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과 또 거기 함께있는 사람들이 베풀어준 환대였습니다.

  일리치  바로 그 말입니다. 환대(歡待)라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의미에서의 공동체 삶, 즉 좋은 사회에 수반하는 조건인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것은 공동체적 삶, 즉 올바른 의미의 정치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환대가 있기 위해서는 내가 당신을 맞아들일 수 있는 문지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젼과 인터넷과 신문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아이디어가 안과 밖 사이의 벽을 붕괴시켜버렸고, 그와 더불어 누군가를 문지방 너머로 안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물어뜨리고 만 것입니다. 환대가 존재하려면 사람들이 그 둘레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피곤해지면 거기서 잠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유명인사라든지 학력이 높은 고상한 사람이라든지 그러한 관념이 개입되는 곳에서는 환대는 깊이 훼손당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희망이 달려있는 한가지 단어를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환대라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지방과 테이블과 참을성, 그리고 귀기울여 듣는 습관을 회복하면서 환대의 관습을 부활하여, 거기로부터 덕성과 우정의 묘판을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재생(再生)을 향하여 빛을 발산하게 될 희망 말입니다.

  브라운  나는 당신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 관해 쓴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욕구니 권리니 그리고 그러한 것을 돌보아야 할 제도의 필요성에 관해 논의가 무성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제도화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리고 방금 우리가 얘기해온 우정과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조금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의 기초는 제도가 아니라 좀더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함께있음'에 있는 게 아닐까요?

  일리치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 ― 다시 말하여, 우리 오두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그 누군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우리집 문지방의 이쪽으로, 여기 이 침상으로 안내하는 것은 인류학자들이 확인한 여러 특성들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것 중의 하나로 보입니다. 아마 가장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환대의 관습은 어디에서든 헬레네인들과 야만인들을 구분짓습니다. 그러니까 환대는 일차적으로 바깥쪽과 안쪽이 있다고 믿었던 그리스 . 로마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전체에 대하여 통용된 게 아니지요. 그러다가 가장 혁명적인 사람, 나자렛의 예수가 온 겁니다. 그는 비범하게 큰 것에 관해 얘기하고, 또 그것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기본적인 무엇인가를 깨트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강도를 만나 흠씬 두들겨 맞은 유태인과 팔레스타인 사람(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합니다만, 실제로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입니다)에 관한 얘기를 들려줍니다. 처음에 두 사람의 유태인이 옆을 지나가면서도 쓰러진 그 유태인을 본척 만척 합니다. 그러다가 팔레스타인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유태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유태인을 품에 안고, 자신의 형제로 대합니다. 작은 내부집단 사이에만 한정되어 있던 환대를 가능한 한 넓은 범위의 인간 집단으로 확대하여 우리의 손님이 누구인지 우리 각자가 스스로 결정하라고 하는 이러한 '관습의 파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300년 무렵에 마침내 기독교회가 공인되었습니다. 주교들은 마치 행정장관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 새로운 주교들이 맨처음 한 일이 '환대의 집'을 세운 것이었지요. 다시 말하여, 예수가 우리들에게 개인적 소명으로서 주었던 것을 제도화한 것입니다. 그들은 피난민을 위해, 이방인들을 위해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600년 전 그 당시의 많은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즉각 이렇게 소리쳤다는 사실입니다. "당신네들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네들이 자선(慈善)을 제도화한다면, 당신네들이 자선이나 환대의 관습을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적인 사업으로 전환한다면,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누렸던 명성을 더이상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대문을 두드릴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언제나 여분의 이불과 묵은 빵조각과 양초를 준비해두고 살아온 것으로 유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서기 400년 내지 500년 이후 교회는 국가의 주요 수단이 되었고, 국가는 교회를 먹여 살림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궁핍속에 있는 사람들의 작은 일부를 제도적으로 돌보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평범한 기독교 가정은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기다려, 그에게 문을 열어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임무를 면제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선의 제도화이고 서비스라는 관념, 서비스 경제라는 관념의 역사적 근원입니다. 이제 나는 그러한 시스템이 개혁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개혁을 위한 노력은 당신이나 내가 존경하는 용기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서비스 시스템이 수반하고 있는 악(惡)을 가능한 한 작은 것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팔레스타인 사람이 보여준 예가 무엇을 뜻하는지 느끼도록 우리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만 합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내 가슴속에 품을 것인지, 누구를 위해 나를 버릴 것인지, 누구와 얼굴을 맞대고 들여다 볼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듯한 눈길로 내가 사랑스럽게 더듬는 그 얼굴, 그로 말미암아 나 자신의 존재는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