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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궁원 2008. 10. 1. 16:28

사상 초유의 시한폭탄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월가는 예전부터 주목받던 존재였다. 과거에는 너무 많은 돈을 벌고 너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이유로 동경과 질시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면, 사상 초유의 금융 위기가 진행 중인 지금은 세계를 끔찍한 대공황의 나락으로 내몰 시한폭탄이라는 이유로 우려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올 봄 세계 5위의 투자은행(우리나라에서는 증권사라는 용어가 더 많이 쓰인다)이었던 베어스턴스가 무너지자 언론은 사상 최대의 금융 재난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메릴린치가 자금난을 견디다 못해 뱅크오브아메리카에 경영권을 넘기고, 인수자를 끝내 찾지 못한 리먼브라더스는 파산을 신청하는 길을 선택했다. 증권업계 부동의 최강자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마저 전업 증권사의 길을 포기하고 상업은행(예금을 받아 대출을 행하는 일반은행을 지칭하는 용어다) 업무를 병행하겠으니 긴급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은행들의 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하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들이 사실상 정상적인 사업을 벌일 수 없게 된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대형 투자은행 한 곳이 무너졌을 때도 엄청난 금융 사건이라고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의 금융 위기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위기의 파도는 세계 최대의 보험사라는 AIG까지 침몰시켰다. 월가에 설치된 시한폭탄이 마침내 터진다면 미국의 금융 시스템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
  
  규제가 시한폭탄을 만들었다고?
  

▲ 위기의 월스트리트. 미국형 자본주의는 과연 기사회생할 수 있을까? ⓒ로이터=뉴시스

  이 시한폭탄을 설치한 주범은 누구인지, 이 시한폭탄이 터질 경우 얼마나 큰 폭발이 일어날지, 이때 전 세계에 미칠 파장은 어떨지, 이를 예방하기 위해 시한폭탄을 해체하려면 어떤 방법과 절차를 동원해야 할지 등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세상의 수많은 고수들이 나름의 주장을 펼치는데, 금융을 이해하는 안목을 키워주는 내공 있는 글들도 많은 반면, 엉뚱한 주장도 눈에 띈다. 금융위기의 원인을 '지역재투자법(Community Reinvestment Act : CRA)'이라는 '시대 착오적' 규제에서 찾는 주장이 그것이다.
  
  CRA는 해당 은행이 위치한 지역에 자금을 제공하도록 유도한다는 목적으로 제정된 일종의 금융규제법이다. 이 법에 따르면, 은행은 매년 지역의 금융 수요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가를 금융당국에 보고해야 하며, 금융당국은 인수 합병이나 신규 지점의 개설 허가 여부를 판단할 때 이 실적을 반영한다.
  
  보수 진영의 대표 잡지 <내셔널리뷰>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우파 논객은 이번 금융 위기의 일차적 진원지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 담보 대출의 부실화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처럼 무리한 대출이 일어난 이유가 은행들의 팔목을 비트는 규제에 있다고 주장한다. 급진적인 좌파 단체의 활동가들이 민주당을 부추겨 정치 논리에 의해 금융 규제가 행해졌고, 합병을 시도할 때 불이익을 입지 않으려는 은행들이 할부금 낼 형편조차 안 되는 낙후 지역의 저소득층들에게 손해를 감수하고 대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CRA 규제가 없었다면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대단히 허점이 많다. 진보 노선의 잡지인 <아메리칸프로스펙트>나 여러 경제학자들은 CRA의 경우 1977년에 제정이 되었으며 이번에 문제가 된 서브프라임 부실 사태는 2007년에 일어났다는 점부터 지적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마치 최근에 새로 생겨 무분별한 대출을 유도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진실은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2004년에 들어서 부시 행정부가 중소 규모의 은행들에는 CRA 적용을 면제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완화했으며 서브프라임 대출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CRA는 은행을 대상으로 한 법률인 반면 대부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CRA 규제와는 관계가 없는 주택담보대출 전문회사에 의해 제공되었다는 점도 거론된다.
  
  이처럼 CRA 책임론은 사실관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허구적인 담론이다. 하지만 이것이 안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오류는 최근의 금융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저신용 주택담보대출 전문회사, 초대형 투자은행, 헤지펀드, 보험사 등 다양한 금융기관들이 복잡하게 얽힌 현대 금융의 그물망 속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위기의 진짜 주범은?
  
  <이코노미스트>의 진단에 따르면, 금융 위기의 씨앗은 금융의 비중이 커진 1980년대에 뿌려졌으며, 금융 위기의 뇌관은 금융이 실물경제로부터 본격적으로 독립하던 2000년대 초반에 장착되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 전체 기업 수익 중 10%에 불과하던 금융 부문의 수익은 2007년에는 40%로 늘어났으며, 같은 기간 중 금융업의 시가총액 비중도 6%에서 19%로 커졌다. 그럼에도 지난해 금융업이 전체 기업의 총부가가치에서 차지한 비중은 15%, 민간 고용에서 차지한 비중은 5%에 불과하다. 이는 금융업의 이러한 수익 증가 추세가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그간의 눈부신 성장세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단계를 밟으며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단계의 고수익은 자산 가격 상승이라는 견고한 기초 위에서 진행되었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유례없는 강세장이 연출되었다.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길들이는데 성공하면서 금리가 떨어지고 주식과 채권 등 자산 가격이 상승했다. 기업 구조 조정·임금 인하·정보기술 혁명 등으로 기업의 수익이 크게 상승했고, 주식·채권·현금 등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투자 포트폴리오의 연간 수익률도 예전의 4배에 가까운 실적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도 높은 수익을 향유할 수 있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닷컴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미국 금융업의 영업 환경은 크게 변화하게 된다. 소비자 지출, 총투자, 수출의 증가세가 크게 둔화되면서 1950년대 이래 사상 두 번째의 경기 침체를 겪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투자은행은 이처럼 실물경제의 기반이 취약하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사업을 확대하는 길을 선택한다.
  
  투자은행 본연의 임무는 실물경제 활동과 관련해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는 미래의 현금 흐름을 근거로 금융증서, 곧 유가증권을 발행하고 유통시키며 관리하는 것이다. 투자은행업 고유의 사업 모델에 따르면 실물경제 악화는 투자은행의 수수료 수입 감소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투자은행은 유동화증권과 파생상품을 대대적으로 이용하는 한편 차입과 자기계정 거래를 공격적으로 확대하면서 중개인 역할은 물론 그 스스로 투자자가 되는 방향으로 사업 모델을 전환한다. 그 결과 기존의 수수료 수입에 더해 막대한 투자 수입까지 챙김으로써 오히려 수입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실물경제의 제약을 넘어서까지 사업을 확대한 것이야말로 오늘날 5대 대형 투자은행의 연쇄 부실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였던 것이다.
  
  한편,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와 프린스턴대의 폴 크루그먼은 '그림자 금융 시스템(shadow banking system)'이라는 용어를 동원해 이번 사태의 뿌리를 20년 전으로까지 소급해 들어간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예금을 보호해주는 대신 예금은행에 대해서는 차입 및 위험과 관련해 규제를 가했다. 그 결과 높은 수익을 추구하던 많은 금융기관은 예금은행의 길 대신 그림자 은행 시스템 속에서 성장하는 길을 선택했다. 투자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 구조화투자기구, 주택담보대출기관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은행의 경우 예금보험이나 최종대부자로서의 중앙은행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유동성 위기의 위험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그림자 은행 시스템의 금융사들에게는 이러한 방화벽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사업을 펼치는 과정에서 은행에 비해 높은 차입 의존도(금융 용어로는 레버리지가 높다고 한다)를 기꺼이 감수한다. 레버리지가 높을수록 자기자본 수익률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의 이면에는 투자한 자산의 가치가 떨어질 경우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정반대의 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앨런 그린스펀 연준리 의장 등 금융 감독자들은 헤지펀드나 투자은행에 대한 규제가 취약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복잡한 유동화증권과 파생상품으로 무장한 그림자 금융 기관들이 전통적인 은행에 비해 위험의 분산과 축소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설령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시장이 과도한 위험 부담에 대해 규율을 행사할 것이며, 나아가 이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되더라도 납세자들의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자 금융 시스템에 속한 금융사들의 위험 선호적 행동은 전혀 규율되지 않았으며 이들의 대출과 투자는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 증권화를 통해 위험을 타인에게 쉽게 전가할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곧 거품의 이익은 내가 얻고 거품이 터질 경우 발생할 손실은 타인이 부담하리라는 기대가 일반적인 시스템 속에서, 투자자들이 위험 신호를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루비니에 따르면,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태가 논리적으로 예정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자산 가격 거품이 터진다. 이때 차입자의 상환 능력에 의심이 확산되면 채무 상환 요구가 본격화된다. 일차적으로는 구조화투자기구나 헤지펀드로 상환 요구가 집중되고 시간이 흐르면 대형 투자은행에까지 상환 요구가 확대된다. 유동화증권이나 구조화증권에 대한 불신이 치솟아 있기 때문에 헤지펀드나 투자은행은 보유 자산을 매각하는데 실패하고 상환 요구에 응하지 못해 결국 부도를 내게 된다. 이는 지난 해 8월부터 오늘날까지 실제로 계속 일어난 현실이기도 하다.
  
  지금 와서 보면 위험은 숨겨졌을 뿐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증권화와 파생상품을 통해 자신의 위험을 타인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으로 변질되었고, 이 오만이 그들을 감당할 수 없는 대출과 투자로까지 내몲으로써 시스템 전체의 위험 자체가 커진 것이다.
  
  위기의 재발,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들의 행동은 더 높은 수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기업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주주나 고객들이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림자 금융 시스템에 속하는 금융사들은 명시적으로는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과도한 위험을 만들어냈고 사회적으로 큰 해악을 끼쳤다.
  
  이는 그동안의 경기 규칙에 무언가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자은행과 헤지펀드의 탐욕과 오만이 시장의 폭주로 이어지는 상황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려면 실효성 있는 규제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가의 시장 참여자나 자유시장 이념의 신봉자들이 이번 사태의 원인을 CRA 규제 등에서 찾으려는 생뚱한 시도를 했던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흐름에 동참하는 상황을 반전시키려 보려는 나름의 대응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미국 현지에서의 논의를 일별해보면 이 규제 강화론 속에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미분화된 상태로 뒤섞여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똑같이 규제 강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더라도 강조점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모든 규제 강화론자들이 공유하는 점부터 확인해 보자. 이들은 금융기관에 모든 것을 일임하는 자유방임논리로는 금융 위기의 재발을 막을 수 없으며, 특히 금융시장의 경우 다른 시장과 달리 외부효과가 대단히 크고 가격의 자기 조절 기능 또한 취약하므로 어느 정도의 규제가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한다. 그리고 금융 규제의 사각지대를 없애 동일하게 행동하는 기관에 대해서는 동일한 규제가 적용되도록 하자는 데에도 의견이 일치된다. 기존의 금융감독 규제가 이번 위기의 핵심에서는 비켜 있었던 예금은행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투자은행·투자은행 자회사·헤지펀드 등 그림자금융으로 규제를 확대해 보다 광범위한 금융기관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금융위기의 핵심 원인 중 하나가 과도한 레버리지이었기에, 규제의 초점을 과도한 차입 억제에 맞추고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의 장부외 거래에 대해서도 강화된 자기자본 규제를 적용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규제 강경파는 금융이란 무한증식을 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금융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동원해 사회적 이익에 반하지 않는 방향으로 금융의 본능을 길들이고 순화시켜야 하며, 필요하다면 자유롭고 독자적인 금융 활동에 일정한 족쇄를 과감하게 채워야 한다고 믿는다.
  
  주식거래에 대해서는 0.25%, 신용부도스왑(CDS)에 대해서는 0.02%의 금융거래세를 새로 부여함으로써 생산적인 용도의 금융거래에는 큰 타격을 주지 않은 채 투기적 활동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자는 주장(경제정책연구센터 딘 베이커), 금융상품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심의위원회를 설치해 위험이 과도하게 높아 인간이 소비하기에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유통을 중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컬럼비아대 조지프 스티글리츠), 금융기관 경영자의 보수를 제한하자는 주장(버클리대 로버트 라이시), 신용평가회사를 공공기관화하자는 주장(<아메리칸프로스펙트> 로버터 커트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금융의 문제는 경제적 차원과 더불어 정치적·사회적 차원에서도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며, 실효성 있는 규제란 정치적·사회적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규제 강경파가 금융시장의 실패 및 금융에 의한 실물의 지배 가능성에 주목한다면, 규제 온건파는 규제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나아가 이들은 발달된 금융이 사회에 주는 이익은 손실에 비해 훨씬 크며, 금융의 역기능 또한 투명성의 제고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투명성만 확보되었다면 시장 규율이 작동해 이토록 큰 위기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자발적 선택을 제약하는 사전적 규제의 경우, 자기자본비율 규제와 같은 건전성 규제와 보유 자산 및 영업 활동에 관한 보다 많은 정보의 제공을 의무화하는 규제 등으로 최소화하고, 대신 사후감독을 엄격하게 행할 것을 제안한다.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는 모든 파생거래 및 이를 위해 맡겨진 담보를 중앙화된 금융결제원에 보고할 것을 의무화하자는 주장, 각 금융사로 하여금 노출된 위험들을 확실히 공시하는 연간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하자는 주장, 위험자산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는 방향으로 회계제도를 개선하자는 주장 등이 여기에 속한다(조지메이슨대 타일러 코웬, 캘리포니아 대학(샌디에이고) 제임스 해밀턴, 오레곤대 마크 토마).
  
  역사적 전환점을 통과 중인가?
  
▲ 리먼브라더스의 몰락은 그림자 금융 시스템이 시효를 다했음을 보여준다. 그림자 금융 시스템의 몰락이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모델의 쇠퇴로 이어질까? ⓒ로이터=뉴시스

  1929년 대공황은 미국의 금융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대공황 이전의 자유롭게 방임된 금융이 위기의 주범 중 하나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1933년 은행업과 증권업을 분리시키고 금융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금융개혁법이 시행되었다. 미국인들은 이로부터 40년 넘게 규제된 금융 시스템 속에서 삶을 영위했다.
  
  이번의 금융위기가 대공황 때처럼 금융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뉴욕대 루비니는 그림자 금융 시스템의 종언을 선언했으며, 투자은행이 과거와 같은 높은 수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일각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 위기로부터 수익률 극대화를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고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몽상으로 치부하는 잘못된 사회가 다시 정상화될 가능성을 읽어내기도 한다. 미국식 주주자본주의 모델이 퇴조하고 유럽식 이해당사자 모델이 부상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있으리라는 기대(그것이 희망사항이건 근심거리이건)는 성급한 전망일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주식시장이 아니라 파생상품과 결합된 신종 채권시장이며, 당장 위협받고 있는 것은 주주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 금융 시스템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위기 이후의 향후 금융 시스템의 운명과 사회경제적 질서의 모습은 위기의 수습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좌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월가에서는 구제금융의 방식을 놓고 힘겨루기가 진행 중인데, 몇 가지의 상황 전개가 예상된다. 우선, 거품의 열매를 향유하느라 위기를 발생시킨 당사자들에게 상응하는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사회가 위기의 비용을 부담하는 방향으로 구제금융이 제공되고, 허울 좋은 미봉책이 위기 재발을 막는 근본적인 대책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번 위기의 주범인 투자은행이나 헤지펀드는 '시장 논리상' 중장기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데도 여기에 규제를 추가로 도입하면 금융 산업의 역량은 크게 훼손될 것이라거나 예전에도 거품은 있었으며 금융이란 원래 어느 정도의 거품은 끼게 마련이며 이를 억지로 막으려고 하면 부작용이 더 크다는 주장이 유포되면서 그동안 미국 사회를 지배해왔던 금권정치의 회로가 작동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양식 있는 학계와 시민사회의 발언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구제금융의 제공과 더불어 온건 규제론이나 강경 규제론이 관철되는 더 바람직한 상황도 기대할 수 있겠다. 온건 규제론이 채택되면 최근 들어 심화된 그림자 금융 방식의 사업 관행에는 적지 않게 제동이 걸릴 것이며, 만약 강경 규제론이 힘을 얻게 된다면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모델의 의미심장한 방향 전환도 가능할 것이다.

 
 
 

읽고 싶은 글모음

수궁원 2008. 10. 1. 15:32

혼자 있을 때는 내가 세살인지 몇살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 나이, 나이테 따위는 애당초 오랜 삶의 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난이 무릇 세상의 엄연한 목숨에 직면한 현실인 것이 놀랍습니다.

오늘 나는 스무살쯤으로 돌아가 스무살쯤의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 시절, 가을은 자주 '아 가을인가'였습니다.
그런 가을이 이번 가을에도 쭈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닿아 있는지 모릅니다.

아 가을인가.
가을은 나의 내면입니다. 아니 나의 내면의 노을빛 아픔입니다.
그동안의 몸이 끝나고 마음이 시작합니다. 가을은 어떤 음험한 거짓조차 진실로 만들어주는지 모릅니다. 온통 참다운 대면이 아니면 안됩니다.   

어쩌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삶에의 애착도 한번쯤 어디론가 슬며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인 양 하늘의 푸른 침묵 아래 울바자 밖으로 내 마음은 나서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밖에서는 가을은 두가지를 한꺼번에 다 보여줍니다. 조락과 결실. 하지만 내 마음의 뒤안에는 지난여름의 눈먼 관능과는 달리 이름지을 수 없는 비애가 이슬 다음의 서릿발 서린 유리창으로 깨어납니다.

지는 잎새의 무심.
숨어 있던 개울물 소리의 빛나는 각성.
한 자락의 낯선 바람의 추위.
저만치 혼자 걸어가는 애인의 뒷모습.
아직 떠나지 못한 한떼의 근심스러운 철새들의 빨랫줄.
갈꽃 흔들리는 냇둑.
개미행렬.
자동차행렬.
비행운.

이런 풍경 단면들의 소소한 감회로부터 눈을 돌려 냉큼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사 지상의 모든 불안과는 좀 남남인 듯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는 하늘을 크다고 말하고 또 누구는 하늘이 많다고 했거니와 정작 하늘은 그런 일원론도 다원론도 아니겠습니다. 천도무심입니다.

가을은 하나의 슬픔입니다. 그 슬픔의 이유를 누가 묻겠습니다. 옛사람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말하지 않고 응당 봄 여름 슬픈 가을 겨울이라고 말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가을은 귀환의 시간인지 모릅니다. 어떤 행복한 둔재가 불행한 천재가 되어 돌아옵니다. 한자 귀(歸)는 시집간 여인이 친정에 가는 것을 상형(象形)한 것이라 합니다. 지금의 기혼여성에게는 들어맞는 글자가 아닙니다. 오랜 농경사회에서의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그것으로 삶의 시말이 결정되어버립니다.

혼인이란 여자를 성욕의 도구, 생식의 도구 그리고 가사 및 노동의 도구로 여기는 폐습이기도 했습니다. 한번 시집가면 그 여자는 친정부모와 혈친 권속으로부터 철저히 제거되어 이른바 출가외인이 됩니다. 친정아버지의 성씨인 김씨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의 성씨인 장씨의 삶을 살다가 그 장씨귀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가부장제 남성중심의 가족제도 속에서 몽매간에 그리워하는 친정에의 비원이 어쩌다가 실현되는 기회의 친정나들이야말로 얼마나 눈물겨운 노릇이겠습니까. 바로 그 절절한 풍경이 담긴 돌아갈 귀, 돌아올 귀라는 글자를 낳은 것입니다.

이런 지난날의 친정나들이만이 아니라 무릇 삶의 역정 어느 고비에서 그때마다 마디를 이루는 정신 단위의 귀환행위야말로 철이 드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새삼스러운 질문도 그런 자아에의 귀환에 꼭 따라붙어야겠습니다.

그간 살아온 바가 나 없이 내달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런지라 모든 생명체가 다 이 세상에 나와서 꽉 채우고 있는 여름을 지나 무릇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 날아간 듯이 나 자신의 허망을 만나는 것이 이런 가을입니다.

나 자신의 욕망과 의지의 어느 지점을 반환점으로 한 그 체념의 행위도 귀환의 뜻에 들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나 삶의 완성이 아닌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을 쉽사리 중단이나 패배로 여기지 않는 성숙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찌 여름의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행위야말로 그러므로 가을의 행위입니다. '지난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라는 어떤 절창 역시 그 여름은 이미 와 있는 가을의 어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동잎 하나로 천하의 가을을 안다는 그 커다란 깨달음은 거꾸로 천하의 가을을 잎 하나가 응축하고 있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런 가을의 한 겨를에 삶의 행로를 에워싼 삼라만상의 철리(哲理)를 만나게 되는 것도 가을의 은전(恩典)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그저 가을이 아닌 슬픈 가을이고 깊은 가을입니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그 종교만의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따로 없습니다. 가위 세계는 덧없습니다. 나도 너도 덧없습니다. 이 사실은 오직 냉엄한 사실일 따름입니다. 어떤 주관도 개입되지 못하는 사실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철학에서의 '존재'는 이런 제행무상의 교리 앞에서는 그 존재의 덧없는 행위와 변화를 뜻하는 '행(行)'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이 행으로서의 덧없음이 그러나 냉엄한 사실이더라도 인간의 생활정서에서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덧없음은 '아 덧없구나'라는 영탄이 됩니다. 자연현상이나 인생을 살펴볼 때의 이런 무상감(無常感)은 그 이유를 불문하고 비애의 정서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슬픈 가을이야말로 그런 무상에의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의 의미화입니다.

저 쑥부쟁이나 구절초의 언덕은 아무런 까닭없이 슬픕니다. 먼 산맥의 그 아슴프레한 푸르름도 자못 슬픔을 자아냅니다. 몇날 몇밤을 울고 난 듯한 푸른 하늘의 그 액체감 역시 슬픔의 저승으로 느껴진 때가 왜 없겠습니까.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어찌 가슴속 에어드는 서슬이 아닙니까.
바로 이런 비애들과 함께 내 뻣뻣한 자만의 고개는 숙여지고 지난날 턱도 없이 나딩굴었던 그 허세들도 더이상 남아 있을 수 없게 사뭇 겸허와 공허의 시간 안에 잠기게 됩니다. 어쩌면 가을은 나에게도 자아에의 성찰이나 세계에의 통찰이 가능케 되는 어떤 사색의 빌미를 내주기도 할 것입니다.

슬픈 가을은 그저 슬픔으로 마감되는 것을 넘어 그 슬픔이 이윽고 하나의 사상, 하나의 철학을 낳는 힘이 되겠습니다. 저 참담한 시절 나는 우리들의 슬픔이야말로 유일한 힘이다라고 여러번 외쳐댄 적이 있는데 그때와는 또다른 소리 없는 외침이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뜻으로는 모든 철학은 이런 가을의 슬픔이라는 사색의 자궁에서 태어난 마음의 아들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니체의 습관이기도 한 그 강렬한 선언의 힘이 한가닥의 비애도 허용되지 않는 대신 그가 가을을 너무 좋아해서 자신의 탄생일을 가을의 어느날로 옮겼다는 전설로 미루어보면 그의 경이적인 세계인식이 가을의 사색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합니다.

아니, 고대 현자들의 철학은 무미건조한 진리에의 정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 세계의 시작과 끝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진리의 비애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철학은 슬픔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비극 이후의 철학론은 관념적입니다.
이같은 내 단언이 어찌 철학에만 해당되겠습니까. 바로 시야말로 슬픔의 모성에서 태어나는 철학 이전 또는 철학 이후의 원초적인 신생아입니다. 그래서 가장 철학적인 철학은 시의 세계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가 유난스레 자신의 주요 저작을 통해 시의 세계를 자신의 철학으로 재현한 사실이나 자신의 철학이 시 한구절보다 못하다는 고백 역시 얼마나 거짓없습니까. 거기에서 우리는 시와 철학의 만남이라는 궁극의 시세계를 발견합니다.

나는 진작부터 한국 철학자들에게서 시의 결핍을 보았습니다. 그런 나머지 올해 아시아 초유의 세계철학자대회가 열리게 되었을 때 그 조직위원장인 원로철학자에게 왜 철학이 시를 통해서 전개되는 일이 없느냐고 언짢은 말을 던진 적도 있습니다. 나 자신 그 대회의 자문위원 위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생각을 거꾸로 돌려본다면 한국의 시가 얼마나 철학과 멀리 있는가를 묻는 일이 됩니다.

소월의 시가 굳이 철학 사색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바 아니겠으나 아니 고대 중국의 시경 국풍(國風)이라는 민요들이 고대 중국철학의 환경과 아주 동떨어질 까닭이 없겠으나 그것들을 철학으로서의 시 또는 시로서의 철학으로 현현할 수 있는 사색역량이 갖추어진 것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나는 시가 반드시 철학에 맞닿아 있다는 것만을 난데없이 강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호젓이 바라는 것은 이런 가을의 시가 서정의 나심 이상으로 사색과 철학의 침통한 도야(陶冶)를 이루어주기입니다.

가을 하늘은 깊은 마음의 은유입니다. 또한 내 사색의 오지에서 건져올린 언어의 결정(結晶)들은 하염없는 가을 산천을 뜻하고 있겠습니다.

시, 말이되 말놀이만이 아닙니다. 시, 이것이 말일수록 말을 낳고 말을 파묻는 마음의 심연입니다.

아 가을의 시는 봄날이나 여름밤의 시가 아닙니다. 삶은 어느새 삶의 뒤인 죽음을 불러내고 가을은 이미 겨울의 그 가혹한 인내의 본체를 내다봅니다.

당신의 지상에 시가 내려오기를. 당신의 지상에서 시가 내년 봄의 노고지리로 오르기를.

 
 
 

읽고 싶은 글모음

수궁원 2008. 9. 30. 19:02

 머리말
  
  2007년도 우리나라 조세수입은 205조원이었고, 그 중 종합부동산세(종부세) 수입은 2조4천억원이었다. 그 비중이 총 조세수입의 1% 남짓밖에 안되는 이 세금이 지금 우리 사회를 온통 들끓게 만들고 있다. 정부는 이 세금을 내는 2%의 납세자가 마치 좌파정책의 순교자라도 되는 양 사회정의가 온통 무너져 내린 것처럼 야단을 쳐대고 있다. 이보다 몇 배나 더 되는 사람들이 그날그날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이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나 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를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동안 '강부자 정부'라는 말만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그런 말을 들어 싸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전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출범한 정부라는 점만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포괄적인 감세조치, 그리고 종부세 무력화 시도를 보면서 이제는 이 말을 마음대로 써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정부가 '부자들의, 부자들을 위한 정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이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임기 안에 종부세를 완전히 폐지하겠다는 말까지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면 정체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 4년 반 동안 우리 사회, 경제가 얼마나 크게 뒷걸음질 치게 될지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선거에 이겼다고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오만한 태도가 또 어떤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게 만들지 모른다. 이 정부가 지금과 같은 태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는 한, 그들의 임기가 끝나는 날 우리는 역사의 시계가 최소한 20년 이상 뒤로 돌려졌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우리 현대사는 끊임없는 발전과 진보의 역사였다. 사람 목숨이 파리만도 못한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선진국 못지않게 인권이 보장된 사회로 바뀌었다. 혹독한 독재정치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남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가 되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안하무인격으로 설쳐댈 수 있던 시절도 모두 지나갔다. 바로 이런 발전이 있었기에 우리 국민은 어려운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10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보수적 정부가 집권해 왔지만, 진보의 도도한 흐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한 진보적 개혁이 거의 모두 보수적 정부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제도 등의 사회복지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전두환 정부 때였으며, 토지공개념이란 급진적 성격의 개혁안이 나온 것은 노태우 정부때였다. 또한 김영삼 정부 때는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등록이라는 굵직한 개혁이 이루어진 바 있다. 지금 이런 개혁안이 나왔다면 보수진영은 좌파의 책동을 막아야 한다고 난리를 쳐댔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장 역설적인 것은 좌파정책의 표상처럼 되어 있는 평준화교육을 도입한 사람이 바로 보수 진영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평준화의 틀은 그 뒤를 이은 보수적 정부하에서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실정중 하나로 들먹여지는 대학입시 '삼불정책'의 기본골격도 실제로는 보수적 정부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진보적 정부가 평준화로 우리 교육을 망쳐 놓았다고 성토하는 것은 보수진영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중요한 점은 진보적 개혁이 우리 현대사의 대세였으며, 보수적 정부들도 이와 같은 대세를 거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이와 같은 진보적 개혁의 도도한 흐름을 거꾸로 돌려놓는 데 열중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에 일어난 민심의 일시적 보수화를 등에 업고 마치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양 밀어붙이고 있다. 그 동안 어떤 정부도 지금처럼 대놓고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 바 없다. 정부는 보수진영의 염원을 실천에 옮기려 한다고 말하겠지만, 힘 있고 부유한 사람만을 위한 정책이 진정한 보수는 아닐 터이다. 만약 이것이 진정한 보수라고 강변한다면 국민의 지지는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종부세 폐지 시도는 이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역사 거꾸로 돌리기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내가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종부세 폐지의 부정적 효과가 엄청나게 클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현재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역사 거꾸로 돌리기 프로그램의 그 어느 것보다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통해 종부세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정부의 논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밝혀보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조세, 그리고 그 부담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오해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세금 그리고 종부세에 대한 오해와 진실
  
  프랑스 루이 14세 때 재상이었던 꼴베르(J-B. Colbert)는 세금에 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조세 징수의 기술은 가장 적은 비명을 지르게 만들면서 가능한 한 많은 깃털을 얻는 방식으로 거위의 깃털을 뜯어내는 것과 같다." 정부가 세금을 걷는 행위를 멀쩡한 거위에서 깃털을 뽑아내는 행위에 비유한 것은 세금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나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내금 내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적의 침입에 대해 의병으로 맞서 싸울 용의가 있는 사람조차 평시에 세금을 내라 하면 그리 기쁜 마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민주국가의 국민이면 누구나 납세의 의무를 기꺼이 져야 마땅한 일이다. 세금을 걷는 정부가 부당하게 국민의 재산을 강탈해 가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에서 세금과 관련한 첫 번째 오해가 발생한다. 세금은 적게 낼수록 더 좋은 것이라는 오해가 바로 그것이다. 국민이 모두 세금을 덜 내게 되면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그만큼 줄이던가 아니면 정부의 빚을 늘려야 한다. 또한 내가 세금을 덜내면 남이 정확하게 그만큼 더 내야만 한다. 세금을 적게 낼수록 더 좋다는 생각은 매우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나온 오해에 불과한 것이다.
  

▲ 종부세 개편안을 둘러싼 여당 내 논란은 "잘못된 세금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수그러들었다. ⓒ청와대

  정부의 감세정책과 종부세 폐지론은 이런 오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세금을 깎아주면서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양 생색을 낸다. 그러나 세금을 깎아주면 깎아준 만큼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사람이 되었든 세금 덜 내게 되는 만큼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이 세금과 관련된 진실이다. 예컨대 종부세를 폐지해 세금을 깎아주는 경우에는 종부세를 내지 않는 98% 국민의 세금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만큼 자명한 진실이다. 정부는 국민이 이런 진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어느 때든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
  
  세금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소득에만 부과되어야 하고 재산에 대해서는 부과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재산에 대해 부과되는 조세가 현금흐름(cash flow)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재산은 많지만 현금이 없어 세금을 내기가 어려운 딱한 처지의 사람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재산과세를 부당한 것으로 몰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보기에 따라서는 현금흐름에 문제가 있다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재산과세가 소득과세보다 더 바람직한 세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뿐만 아니라 현금흐름의 문제도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창의적으로 대응한다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조세부담의 공평성이란 관점에서 볼 때 재산과세는 소득과세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공평한 과세의 원칙은 각자의 경제적 능력에 걸맞은 납세의무를 지우는 것을 요구한다. 모두들 잘 알고 있듯, 어떤 사람의 경제적 능력은 소득뿐 아니라 재산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따라서 소득과세를 재산과세로 보완해야 비로소 진정한 경제적 능력에 따른 조세부담의 분배가 가능해진다. 현재 징수되고 있는 지방세로서의 재산세는 경제적 능력에 따른 과세의 원칙을 충실하게 구현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현행 재산세제하에서 전국 각지에 여러 채의 주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중과세를 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해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공평한 과세라는 측면에서 종부세 같은 재산과세가 갖는 장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최근 다시 문제가 된 바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고소득층의 탈세가 유달리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소득의 정확한 파악이 힘들다는 사실을 악용하기 때문인데, 종부세는 이와 같은 소득세의 문제점을 훌륭하게 보완해줄 수 있다. 소득을 감추기는 쉬워도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을 감추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각종 편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소득의 경우보다는 감추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또한 재산과 관련된 세금은 지방세여야 하기 때문에 국세인 종부세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어불성설이다. 많은 나라들이 재산세를 지방세로 운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어야 할 이론적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 단지 편의상 그런 체제를 취하고 있을 뿐이지 그래야 할 당위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지역간의 경제력 격차가 극심한 경우에는 재산과세 중 일부를 국세의 형태로 돌리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종부세 도입 후 지역간 경제력 격차로 인한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이 그 좋은 예다. 재산과세를 국세의 형태로 징수하면 큰일이나 날듯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종부세가 재산에 대한 이중과세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또한 조세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정부는 필요에 따라 이미 걷고 있는 세금에 가산세(surtax)를 부과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가산세를 이중과세의 성격을 갖는다고 위법으로 규정할 수 없듯, 일정한 범위 안에서 똑같은 과세대상에 두 번 세금이 부과된다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세이론 어디를 뒤져 봐도 하나의 과세대상에 단 한 번만 과세해야 된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종부세가 부자들에 대한 약탈적 성격을 갖고 있는 주장 역시 명확한 근거를 결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정의조차 어려운 '약탈적'이란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선동적인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보수진영과 정부는 늘 집 한 채만 있는 은퇴자의 딱한 처지를 들먹거리지만, 그 범주에 속하는 사람의 비율이 과연 얼마나 될까? 종부세 부과 대상자의 60%가 다주택보유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비율이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만약 정말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 구제하면 된다. 예를 들어 주택 역모기지와 비슷한 방법으로 종부세를 부채로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주택을 팔 때 청산하면 현금흐름의 문제는 없어지게 된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아예 종부세를 대폭 깎아주는 방법도 있다. 지금 정부가 제안하고 있는 고령자에 대한 종부세 감면조치가 그런 성격을 갖는 구제책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종부세의 문제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탈적 세금이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주장에는 부자들의 세금을 한 푼이라도 깎아주려는 의도 이외의 다른 합당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소득세조차도 도입 초기에는 약탈적 세금이니 사회주의적 세금이니 하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소득세가 완전하게 정착된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종전에는 내지 않던 세금을 갑자기 내게 되었을 때의 부담감이 매우 크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조세제도를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새 조세의 도입으로 인한 일시적 혼란은 참고 견뎌낼 수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사고해야 할 지식인까지 가세해 '약탈적 세금', '세금폭탄' 같은 선동적인 표현으로 종부세를 깎아내리는 데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종부세를 주택관련 규제의 일종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규제(regulation)라는 것은 정부가 시장기구를 통하지 않고 민간부문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종부세는 주택담보대출 규제라든가 전매금지 규제와 달리 시장기구 혹은 가격유인을 통해 민간부문의 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정책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규제가 갖는 일반적 문제점, 즉 시장의 왜곡 같은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주택관련 규제 완화 얘기가 나올 때 종부세도 함께 엮어 완화 혹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주택관련 규제가 완화될수록 종부세가 수행해야 될 역할은 오히려 더욱 커져야만 한다.
  
  종부세는 기본적으로 교정과세(corrective taxation)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정과세란 민간부문의 행위를 정부가 보기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되는 조세를 말한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석유류 제품에 세금을 부과하던가 환경보호를 위해 오염물질 배출행위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교정과세 역시 민간부문의 자유로운 선택행위를 교란한다는 문제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선택행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교정하는 데서 나오는 이득이 교란에서 나오는 손실을 상쇄하고 남는다는 점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종부세가 갖는 문제점만 지적하고 교정과세로서 갖는 순기능을 무시하는 것은 균형 있는 평가가 될 수 없다.
  
  종부세 폐지는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
  
  지금 종부세가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시점에서 뿌리부터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심정은 서글프기 짝이 없다. 선거에 이겼으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좀더 신중하게 접근할 수는 없을까? 종부세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나 역시 이의가 없다. 이 세상에 문제점 없는 완벽한 세금은 없을 테고, 그렇다면 종부세에도 당연히 문제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정부가 거론하는 종부세 개정안은 단순히 문제점을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 거의 무력화시키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임기 중에 종부세를 완전 폐지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을 보면 무력화의 수순이 진행되고 있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종부세가 폐지된다고 할 때 이로 인해 발생할 문제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으로 예상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주택가격 폭등을 막는 안전핀이 제거됨으로 인한 주택시장 불안정성 증대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등장할 것이다. 종부세 반대진영에서는 굳이 부정하고 있지만, 종부세의 주택가격 안정효과는 분명하게 발휘되고 있다. 최근의 주택 가격 하락추세가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각종 규제 때문에 빚어졌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부세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만약 종부세 효과가 전혀 없었다면 중대형 아파트의 가격이 소형 아파트의 가격과 거의 같은 비율로 떨어져야 한다. 종부세 과세대상인 중대형 아파트의 가격이 더 큰 폭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종부세의 가격안정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종부세의 가격안정 효과가 제대로 발휘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현 정부가 기회 있을 때마다 종부세를 흔들어왔기 때문에 과세대상자들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자세로 유인에 반응하기를 거부해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종부세가 원래의 계획대로 확실하게 자리 잡을 것이 분명했다면 중대형 아파트의 가격하락은 훨씬 더 빨리, 그리고 큰 폭으로 이루어졌으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투기적 목적으로 주택을 여러 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처분에 나섰을 것도 분명하다. 현행 종부세제도하에서 최고세율이 3%인데, 여러 채의 주택을 소유해 이 세율의 적용을 받는 사람은 10억짜리 주택 하나에 매년 3천만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 아무리 집값 오르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이 정도의 세금을 내고 버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한다.
  
  미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너무 급격한 주택가격 폭락 역시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거품 붕괴가 우리 경제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그리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주택가격 폭등을 막는 안전장치들을 너무나 빨리, 그리고 너무나 과격하게 제거해 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부양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데 초조해진 정부가 더욱 과격한 부양정책을 쓸 가능성이 크다. 모든 정책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그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은 경제학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지금 쓰고 있는 부양정책의 효과가 어느 시점에서 화산이 분출하듯 한꺼번에 터져 나올 때 우리 주택시장은 또 한 번의 큰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지금 당장 거품을 꺼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거품을 더 키우지는 말아야 한다. 자신의 임기 동안의 일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긴 미래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주택가격 폭등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까지 뽑아놓으면 우리 경제는 주택시장발 폭풍에 주기적으로 시달리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전혀 걱정하는 기색 없이 이런저런 부양정책을 쏟아놓는 정부를 보면 폭약을 갖고 노는 어린애를 보는 것 같은 불안한 심정이 된다.
  
▲ 종부세에 반발하는 내용이 담긴 플래카드가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내걸렸다. 현 정부가 내놓은 종부세 개편안은 주로 이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이 주로 나온다. ⓒ연합뉴스

  종부세 폐지가 가져올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부자들에게서 덜어낸 조세부담을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떠넘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점이 지적되자 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부세 폐지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부담 증가를 가져온다는 것은 내일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일이다. 정부가 내놓은 종부세 대폭 감면안과 관련되어 이 부담 전가의 문제점이 지적되자 정부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사람 말이 다르고 저 사람 말이 달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그 누구의 말도 이 문제에 대한 만족스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층은 종부세 감면으로 인해 줄어든 조세수입을 재산세를 더 걷어 메우겠다고 말했다. 재산세는 주택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내는 세금이니, 그렇다면 2%가 내던 세금을 나머지 98%의 사람에게 나누어서 지게 만드는 셈이다. 재산세로 부족한 조세수입을 메울 경우 중산층과 저소득층으로 부담이 전가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정부의 다른 사람은 종부세 납부자의 재산세를 올리는 방식으로 메우겠다는 말로 진화를 시도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뿐더러, 그럴 것이라면 왜 종부세를 감면해 주는지 모를 일이다. 종부세 내던 것을 재산세로 이름만 바꿔서 내면 기분이 더 좋아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또 다른 정부의 고위층은 재산세를 더 걷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더 웃기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말에서 국민을 속이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뻔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재산세를 더 걷지 않는다고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세금 부담이 더 커지지 않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종부세 감면으로 인해 줄어든 조세수입은 어떤 방법으로든 메워져야 한다. 재산세를 더 걷지 않는다면 소득세든, 부가가치세든 어떤 세금의 형태로든 다 걷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도 98%의 사람에게 부담이 전가되는 것은 전혀 다를 바 없다. 한 가지 남은 가능성은 조세수입이 줄어든 만큼 정부지출을 줄이는 방법인데, 나머지 98%의 사람이 정부지출 감소로 인한 손해를 보게 되니 앞서의 경우와 아무 차이가 없다.
  
  종부세 감면 혹은 폐지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부담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다. 정부가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이 명백한 사실을 뒤엎을 수는 없다. 정부로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부유층이 과도한 조세부담을 지고 있다는 점을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것이다. 아니면 부담이 중산층과 저소득층으로 전가된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만약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자신이 없다면 종부세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서슴없이 포기해야 한다.
  
  현 종부세 감면안의 문제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종부세가 약탈적 성격을 가진 세금이라는 데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부세를 납부하기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부담을 경감시켜 주는 방향으로 종부세를 보완해야 한다는 데 100% 동의하고 있다. 정부가 이런 명확한 목표의식을 갖고 종부세를 보완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아니라, 종부세를 무력화함으로써 부자들에게 유리한 구도를 만들고 나아가 주택시장의 안정성을 해치려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종부세를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구제해 준다는 점에서 볼 때, 과세대상 기준을 공시지가 '6억원 이상'에서 '9억원 이상'으로 상향조정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과세대상자 중 58.8%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들어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또한 여당 내부에서도 현재의 정부안과 관련해 이 부분에 대한 우려가 특히 많은 것으로 보도되고 같다.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현재의 정부안 중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과세대상자 수가 대폭 줄어든다는 사실 하나만 보고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종부세를 내는 사람의 비율이 비록 2%에 지나지 않지만, 그 중에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소수라도 섞여 있으면 종부세를 반대할 좋은 명분이 생긴다. 정부와 보수진영은 바로 그 전략으로 종부세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대의 명분을 제거하고 종부세의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서는 과세대상자의 범위를 대폭 줄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현재의 정부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세율을 대폭 인하한 부분이다. 집 부자에게 집중적인 혜택을 몰아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세율의 대폭 인하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율은 과세표준이 3억원까지 1%, 14억원까지 1.5%, 94억원까지 2%, 그리고 94억원 초과시 3%로 되어 있다. 현 감면안에 따르면 6억원까지 0.5%, 27억원까지 0.75%, 그리고 29억원 이상은 1%로 대폭 낮춰지게 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바로 이 대폭적 세율 인하가 종부세 무력화 작업의 핵심 중 핵심인 것이다. 주택을 몇 채씩 갖고 있는 부자의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 말한 과세대상 기준 상향조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알토란같은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세율 인하 부분 때문이다.
  
  세율 인하는 주택투기 억제와 이를 통한 주택가격 안정이라는 종부세의 중요한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다주택 보유자에게 무거운 세금 부담을 지우는 것이 주택투기 억제의 핵심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솔직히 말해 주택을 다섯 채, 열 채씩 보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세금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많은 주택을 계속 끌어안고 가격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최고 세율 3%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테지만, 1%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일 것이 분명하다.
  
  현 종부세 감면안에 대한 비판이 과세대상 기준의 상향조정에만 그 초점이 맞춰져 있고 세율의 대폭 인하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간단한 계산만 해 봐도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름 아닌 세율 인하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여당이 여론에 부응한답시고 과세대상 기준은 올리지 않고 세율만 인하하는 방식으로 감면안의 틀을 다시 짠다면 그것은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 된다. 세금을 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문제는 그대로 둔 채 집 부자들에게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헌재의 위헌판결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안이지만, 세대별 합산방식을 개인별 과세 방식으로 바꾸는 것 역시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누진세율 구조하에서 과세대상 부동산을 반으로 나누어 부과대상으로 삼는 것은 집 부자들에게 생각 밖으로 큰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조치 하나로 집 부자의 세금 부담이 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여당 일부에서 개인별 부과방식으로의 전환을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세력이 있는데, 그들의 저의가 어디 있는지 짐작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법률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위헌판결이 어떤 쪽으로 내려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위헌판결 결과가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학자로서 내가 보는 상식은 이렇다. 종부세의 과세대상이 세대여야 하느냐 아니면 개인이어야 하느냐의 여부는 부동산을 취득하고 처분할 때의 의사결정이 누구에 의해서 내려지느냐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예컨대 부부가 함께 의논해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세대별 합산과세가 타당성을 갖는다. 이와 반대로 각 개인이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라면 개인별 과세방식이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 종부세 개편안은 다수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을 샀다. ⓒ뉴시스

  세대별 합산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양성평등이란 관점에서 볼 때 개인별 과세방식이 옳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주장이 양성평등의 근본정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본다. 양성평등이라는 것을 단지 세금 깎는 도구정도로나 사용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양성평등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 부동산 취득과 처분에 관련된 결정을 배우자와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느 쪽이 적절한 과세대상이냐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우리 사회가 상식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말한다면, 현재 제시된 정부의 종부세 개편안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세율을 대폭 인하하겠다는 부분이다. 최고세율을 현행의 1/3수준으로 대폭 낮추겠다는 것은 종부세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조치는 정부가 늘 부르짖어 오던 딱한 처지의 종부세 납부자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직 집 부자에게 막대한 혜택을 가져다주는 효과만 낼 뿐이다.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세대별 합산방식을 개인별 과세방식으로 바꾸는 것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실질적인 개선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과세대상 기준의 상향조정뿐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맺음말
  
  종부세 폐지를 부르짖는 사람은 그것이 정치논리의 소산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또한 이 세금에는 부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녹아 있다는 과격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종부세를 도입한 사람의 속마음에 어떤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아가 그것의 도입이 경제논리는 배제된 채 정치논리에 의해서만 결정된 것인지의 여부도 잘 모른다. 이런 것들을 잘 모르기도 하려니와 알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종부세가 바람직한지의 여부를 평가할 때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조세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평가는 오직 그것이 공평하며 효율적인 조세인지의 여부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종부세는 부모를 잘못 만난 탓에 태어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안락사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내가 보기에 종부세 그 자체에는 바람직한 측면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단지 참여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종부세의 본질, 즉 이것이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의는 실종되고 어떤 동기에서 도입되었는지 같은 애매하고 지엽말단적인 논의만 판치고 있다. 특히 종부세가 부자들을 괴롭히려는 동기에서 도입된 세금이라는 이념적인 색칠로 본질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생산적인 논의가 더욱 어려운 형편이다.
  
  경제적 효과 그 자체만 놓고 볼 때 종부세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우선 주택가격 안정이란 측면에서 볼 때 그 어떤 주택관련 규제보다 더 효과적인 대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시장기구에 의해 투기억제 효과를 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줄곧 폐지 논쟁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종부세의 효과가 아직까지는 본격적으로 발휘되지 못한 상황이다. 만약 현재의 기본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착된다면 괄목할 만한 주택가격 안정효과를 가져올 것을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있다.
  
  또한 조세부담의 공평한 분배라는 측면에서도 다른 어떤 조세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조세제도는 간접세의 비중이 높아 납세자의 경제적 능력에 따른 과세가 기본적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고작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누진적 소득세 정도인데, 이것 역시 고소득자의 탈세 때문에 기대만큼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봉급생활자의 유리 지갑'이라는 말이 있듯,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무거운 조세부담을 지는 불공평한 기본구도가 계속 유지되어온 것이다. 최근 들어 고소득자의 탈세가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도 공평한 조세부담의 분배와는 거리가 먼 형편이다.
  
  이와 같은 불공평성을 획기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 바로 종부세다. 종부세는 최상위 2%에 집중적인 과세를 함으로써 소득세의 허점을 훌륭하게 메워줄 수 있다.
  
  만약 총 조세수입의 상당 부분을 이런 방식으로 부과한다면 '부자 괴롭히기'라는 불평이 당연히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중이 고작 1%에 지나지 않는 세금을 최상위 2%가 낸다고 해서 특별히 불공평하다고 말해야 할 이유는 없다. 최상위 계층이 고작 이 정도의 조세부담을 지는 것을 두고 약탈적 세금이니 세금폭탄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평과세라는 관점에서 종부세가 갖는 최대의 강점은 아무리 세무사를 동원해 보았자 납세액을 한 푼도 줄일 수 없다는 데 있다. 고소득층이 주로 내는 종합소득세나 상속세는 세무사가 얼마나 재주를 피우느냐에 따라 납세액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할 수 있다. 반면에 종부세는 보유 부동산을 처분하기 전에는 납세액을 줄일 수 없다. 역설적인 점은 종부세가 갖는 바로 이 장점이 이를 한사코 반대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종부세 부담을 쉽게 회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면 집 부자들이 그렇게 열렬한 반대투쟁에 나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종부세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은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의 재정능력 격차를 메워주는 장치로 활용될 수 있다는 데 있다. 현행 재산세제도하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종부세 수입 전체를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하는 현 체제는 이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해 주는 긍정적 효과를 내고 있다. 정부는 종부세 폐지후 발생할 문제에 적절히 대처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말하는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돈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기득권을 선뜻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부세를 궁극적으로 재산세와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떤 근거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경제이론 그 어디를 찾아보아도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평가할 하등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목적이 부자들의 조세부담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면 모를까, 그 이외의 합리적 이유를 하나라도 생각해 보려 해도 도대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부유층의 조세부담을 중산층과 저소득층으로 전가시키지 않는 한, 재산세로 통합한다 해도 그들이 지적하고 있는 종부세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세로 통합하는 것 그 자체는 결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장점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왜곡된 여론 때문에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는 종부세의 슬픈 운명이 가엽기만 하다. 나는 지금 당장 정부가 종부세 무력화의 시도를 접어야 한다고 부르짖고 싶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종부세를 폐지하고 나면 우리 조세제도의 효율성과 공평성에 심각한 후퇴가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나 역시 종부세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데는 흔쾌히 동의한다. 그러나 보완한다는 핑계로 이것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는 저의가 엿보이기 때문에 걱정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비록 종부세 폐지라는 발판을 딛고 정권을 잡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좀더 냉정하고 사려 깊은 자세로 종부세의 앞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정치가의 자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