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코멘트

수궁원 2008. 8. 30. 17:42

젊은 벗들에게

 

 

내가 컴퓨터를 글 쓰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 과정을 주위에다 얘기하면 의외로 일찍부터 시작했음에 모두들 깜짝 놀란다.
마지막에 손으로 썼던 작품이 열두 권에 이르는 대하장편소설인 『장길산』이었다. 파지까지 따진다면 아마도 오만여 매쯤 되는 방대한 작업량이었다. 당시에 만년필에서 볼펜 그리고 나중에는 사인펜을 사용했는데 검지와 가운뎃손가락에 변형이 올 정도였다.
십 년 집필을 끝내고 다시는 글씨를 쓸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 형이 자기는 진작부터 전동타자기를 사용중인데 너무나 편리하고 능률적이라는 얘기였다. 모던한 문물에 서투르다고 여겼던 그가 사용하고 있다는 말에 나도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기계 사용을 두려워하던 내가 이른바 ‘학다리타법’으로 토닥토닥 치기 시작해서 제법 능숙하게 칠 무렵에 워드프로세서 ‘르모’라는 물건이 나왔다. 그게 벌써 88년 무렵이다.
일종의 수공업자인 작가들은 집필도구에 민감하기 마련인데, 예를 들어 발자크의 경우에도 적당히 닳은 깃털펜 세 개를 책상머리에 늘 준비해놓고 잉크가 적당히 번지는 원고지를 사용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전의 나는 집필도구인 만년필을 종류별로 이것저것 사모아서 스무 개쯤 되기도 했다.
하여튼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해서 89년 베를린 체류 시절에 매킨토시 컴퓨터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미국으로 옮겨가서는 갓 나온 ‘아래 아 한글’을 깔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91년의 일이다.

 

나는 컴퓨터가 삽이나 곡괭이처럼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체득했던 셈이다. 작업이 숙련된 뒤에는 바뀐 연장에 의하여 세계가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뀌어가는 과정 역시 겪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를 맞으면서도 우리가 별처럼 나무처럼 변함없는 육신으로 아날로그의 삶을 살아가는 한, 그것을 중심으로 풀어나갈 콘텐츠는 영원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연장이나 도구는 마치 의상처럼 깃이 넓어지고 좁아지고 치마가 짧아지거나 길어지는 것처럼 당대에 따라서 갈아입거나 바꿔 쓰면 될 일이다.
인터넷 매체에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에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프로 작가로서 실험을 해봄직한 일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바리데기』 발간 이후 독자층의 팔십 퍼센트 이상이 이, 삼십대고 십대들도 십오 퍼센트나 된다는 서점측의 귀띔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지금 이 나이에 젊고 새로운 독자들이 내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고 작가로서는 복에 겨운 노릇이기도 하다.
나는 해외에서 작가 시인들이 현대의 젊고 새로운 독자들과 소통의 연줄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을 보았고, 작품 낭독회조차 영상이나 연극 장면 또는 다양한 장르가 만난 퍼포먼스 등으로 새롭게 표현하는 경험의 장에 동참할 수 있었다.
70, 80년대에는 작가로서 작품을 쓰면서도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문화운동을 펼쳤고 지금은 벌써 모두 중견이 되었지만, 각 장르의 문화일꾼들과 현장활동을 수행했다. 인터넷은 출현할 때부터 그것의 사회 정치 문화적 기능에서 부정적 긍정적 영향력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고, 지금은 누구나 대충 수긍하고 있다. 그것이 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중추적 기능을 하지만 개방적인 기본 성격 때문에 탈권위라든가 개인의 자유라든가 정보와 여론의 활성화 등등 시민사회에 기여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만 그냥 내버려두느냐 적극 참여해서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은 달라질 수 있다.
인터넷 등장 이래로 출판시장이 위축된 것이 세계적인 추세였지만 미국은 얼마 안 가서 고전 출판이 두 배로 늘었고 유럽은 여전히 본격문학의 신간이 일 년에 수백 권씩 출간된다. 그것은 인터넷을 사용하면 할수록 기본 콘텐츠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구미 각국은 여전히 강력하게 독후감 리포트로 학업 성과를 판단하는 교육제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금융대란 이후 위축되었던 출판시장이 예전 90년대보다는 못하지만 근년에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젊은이들 티셔츠에나 남아 있는 체 게바라와 복면의 마르코스가 다른 점은 전자는 갈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이지만 후자는 인터넷이 그 무기다.
인터넷 출현 이후 세대에게는 이전 세대와는 다른 어떤 특성이 있다.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런던 베를린 파리 로마에서 익숙하게 마주치게 된 현상이다. 구태여 지난 시대의 이념 경향을 예로 들자면 다분히 ‘아나키’적이다. 우선 개인의 자유와 해방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과거에 ‘조직’이 뭘 해줬는데? 라고 반문한다. 모든 사회제도와 정치 문화는 어른들이 단단하게 철통같이 정해버렸고 자기네가 규정할 가치는 존재하지도 않고 먹어주지도 않는다. 일자리도 다 끝났다. 독립적 성인이 되는 기간은 한정없이 늘어나버렸다. 자본의 벽은 봉건시대 영주들의 성벽보다도 높고 거대하다. 노래나 음악의 경향이 다양하게 나누어진 것처럼 이들의 주장도 다양하고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조직되지 않는 이들은 느슨하고 무정형한 연대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촛불시위나 붉은악마 현상이 인터넷을 매개체로 했던 젊은 문화의 시대적 조짐이었는데도, 개입과 연결에 있어서 우리는 이를 ‘문화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자족해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진보를 표방하는 몇몇 독립 인터넷 매체가 나타나는 것으로 그치고 대중 네티즌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들 놀러 가고 말았다.
뒤이어 나는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블로그야 말로 개인이라는 소우주의 출현이다. 매 블로그가 자기 생긴 대로 사는 대로의 표현의 장인 셈이다. 블로그의 연대 가능성은 앞으로 인터넷이 누구의 것으로 쟁취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현재는 미디어가 변화해가는 이행기에 있다. 그중 중요한 문제가 종이의 폐지냐 아니냐에 또는 영상이냐 문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어디에 어떻게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담아낼 것인가가 문제다. 
일례로 서구사회에서 시는 대중으로부터 사라졌다. 따라서 서점에서 시집을 살 수 있거나 아직도 어느 정도 대중과 접하고 있는 나라는 놀랍게도 우리나라뿐이다. 이를테면 우표수집동호회처럼 시는 마니아의 세계로 가버렸다. 시집은 상업출판이 아니라 무슨 재단이나 무슨 대학 출판부 등지에서 기부를 받거나 후원을 하여 한정부수를 발간한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는 것이 장르 구분을 우리처럼 미숙하고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문예형식을 통하여 시적 형태와 정신이 오롯이 보존된다.
나는 근년에 몇몇 시인이 인터넷으로 독자들에게 여러 시인들의 시를 배급하는 것을 보았고 대중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하는 것에 아쉬워했다. 또는 이를테면 교보빌딩 전면에 한 계절에 시구 몇 줄씩을 간판으로 내거는데 지날 적마다 머리를 치는 듯한 신선함을 느낀다. 들리는 얘기로는 관할구청에서 매번 불법간판류로 벌금을 때린다고 한다. 도심 곳곳의 전광판을 보면서 그 시의 간판과 결부시켜 가령 공익광고쯤을 시와 시적 영상이 만난 화면으로 내보낼 수는 없는가 생각하기도 한다.
혹자는 요즈음의 인터넷소설이 너무도 본격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너무도 상업적이라는 염려를 한다. 사실이라면 이것은 인터넷의 기능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증좌이고 실험정신에 게을렀던 작가들의 책임이다. 나는 문예 블로그가 활성화되면서 젊은 작가들이 단편을 전재한다든가 차례로 중편소설을 시리즈로 연재한다든가 해서 독자들을 확보하고 넓혀나가는 실험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출판과 연결이 되면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상호보완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 시대가 흐르면서 어떤 형태의 매체로 변화해나갈지는 모르지만.

 

나는 한국문학사에서 어쩐지 빠져 있는 분야인 ‘성장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다. 나는 사춘기 때에 읽었던 해외 거장들의 수많은 성장소설을 기억했고 그 시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어른이 되어서는 다시는 읽지 않았는데도 그 소설들의 내용은 꿈처럼 몽롱하게 뇌리에 남아 있고 소설 내용이 아니라 그 책을 읽고 있던 시절의 내가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고 지금 세대의 아버지나 어머니들이 겪은 일이다. 그러나 젊음의 특성은 외면은 변했지만 내면과 본질은 지금도 그대로다. 우리가 고전을 아직도 읽고 있는 것처럼.
젊음이란 불확실성의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고 선택에 따라서는 무한한 자유와 엄청난 억압에 짓눌려 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독립운동처럼 험난하고 외롭다. 대부분 그 무렵의 연애는 첫사랑이라고 불려지면서 애처롭게 좌절하게 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나는 사춘기 때부터 스물한 살 무렵까지의 길고 긴 방황에 대하여 이야기 할 것이다.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면서 다만 자기가 작정해둔 귀한 가치들을 끝까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삶에는 실망과 환멸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하고픈 일을 신나게 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해서 너를 비난하는 어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은 네가 다른 어떤 일을 더 잘하게 될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대충 이러한 것이 ‘개밥바라기 별’의 내용이 되겠다.
나는 젊은 시절 한반도의 곳곳을 떠돌면서 저녁 무렵에 해가 지자마자 서쪽 하늘에 초승달과 더불어 나타나던 정다운 나의 별을 기억하고 있다.
벌써 경험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땅거미 질 무렵은 세상이 가장 적막하고 고즈넉해지는 순간이다. 새들도 바삐 저녁 숲을 찾아 깃으로 숨어들고 나무들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전 짧은 정적 속에 가지를 벌리고 조용히 서 있다. 동네 아이들도 밥상머리로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다들 들어가버리고 굴뚝에는 잔불 연기가 오르는데 창마다 노란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나는 낯선 마을의 고샅길 모퉁이에서 또는 들판의 두렁길 위에 서서 그맘때 나타난 그 별을 올려다보았다.
근년에는 바쁜 어른이 되어 그 시간에 맞춤한 장소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기회도 없더니 재작년에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오래된 도시 코르도바 다리 위에서 그 별과 달을 보았다. 어찌나 반갑든지!
또 수십 년 전에 어느 선배 시인과 지방 강연을 갔다가 시외버스를 기다리던 길 위에서 그 별을 보고 저 별을 당신은 뭐라고 부르냐고 그랬더니, 거지별이라고 또는 동냥치별이라고 부른댔다. 내가 알기로는 개별, 나그네별, 그리고 정확하게는 ‘개밥바라기’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그것은 60년대에 나와 함께 남도를 떠돌던 삼십대의 부랑노동자가 내게 말해주었던 이름이다. 나중에 사전에 찾아보았더니 금성이 새벽에 동쪽에 나타날 적에는 ‘샛별’이라고 부르지만 저녁에 나타날 때에는 ‘개밥바라기’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었다. 즉 식구들이 저녁밥을 다 먹고 개가 밥을 바랄 때쯤에 서쪽 하늘에 나타나는 별이라고 했다.
나는 이 별의 이미지가 소설을 끝낼 즈음에 여러분의 가슴 위에 물기 어린 채로 달려 있게 되기를 바란다.

 

 

정월 대보름날에,
황석영

 
 
 

황석영의 코멘트

수궁원 2008. 8. 30. 17:40

누구든지 내 나이쯤 되고 보면 각자 겪은 인생 사정으로 많은 추억이 있기 마련인데, 몇 달이나 몇 년에 걸친 체험과 기억이 있는가 하면 그야말로 몇 분 또는 몇 시간에 불과한 ‘만남’ 또는 ‘스쳐감’의 기억들이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불교의 상식적인 말들 중에 인연, 업보, 카르마 등등의 말이 제법 맞아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전쟁과 관련된 기억과 인연만 돌아보아도 줄줄이 이어져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게 될 것만 같다. 우리 식구는 해방이 되자마자 만주에서부터 피난을 시작하여 외가인 평양을 거쳐서 서울로 월남을 했다. 그래서는 영등포에 정착을 했었는데 육이오 전쟁 중에는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이 그랬듯이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1989년에 방북했을 때에 북의 시인이며 작가동맹의 부위원장이던 최영화 선생과 술자리에서 우연히 서로의 기억을 맞추어 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바로 전쟁 중에 보도요원겸 선무 공작원으로 영등포에 머물러 있었다. 한 달쯤 뒤에 그는 청주까지 내려갔다가 전시의 학교 복귀령에 따라 복학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해 7월 우리 동네 아이들과 역전에 들어왔다는 탱크를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다. 내가 그때를 기억하는 것은 아이들이 처음으로 탱크에 올라가 포탑 안의 조종석에도 앉아 보고 어린 병사들에게서 건빵도 얻어 먹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바로 때맞추어 미군기의 공습경보 때문에 뚜껑을 닫고 전투태세에 들어간 탱크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이들은 오줌을 지릴 정도로 혼찌검이 났다. 경보가 해제된 뒤에 우리는 이미 겁이 없어진 채로 탱크에 올라앉아 사진을 박았다. 그 사진을 박은 사람이 최영화 시인이었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평양백화점을 방문했다가 부지배인 노인을 만난 일이 있었다. 옛날 투의 사투리 비슷한 서울 말을 쓰길래 내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는 문밖 영등포에서 대대로 살았다고 대답했다. 전에는 경성 시내는 ‘문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로 살던 곳을 짚어 보니 한길 하나 사이였다. 우리 동네는 아니었지만 이웃 동네인 셈이었다. 서로가 떠난 지 오래된 곳에 대하여 얘기하는 중에 우리는 나이 차가 있었지만 공유하고 있는 추억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을 지나 만주 안동선까지 닿는 증기기관차의 기관사였고 그도 부기사를 거쳐서 기관사가 되었다. 우리 동네서 멀지 않은 곳에 경성철도의 영등포 공작창이 있었다. 그래서 새벽녘에 수리나 점검을 하러 들어오던 기관차가 내뿜는 증기와 기적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만두를 팔러 다니던 고학생협회 소년들의 얼어붙은 ‘만쥬나 호야호오’하던 목청 소리도 생각이 났고 여의도 비행장에서 연습기들이 아침 시동을 거는 프로펠러 소리도 우리는 생각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서로 고함을 치듯 반가워했던 것은 길 건너 초등학교에 불이 나서 변소까지 홀랑 타버렸을 때의 기억이었다. 변소의 오물이 끓어서 온 동네에 고약한 냄새가 며칠 동안 가시지 않았고 밥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십대이던 아들과 함께 전쟁 중에 북으로 갔고 그의 아들은 기관사 조수로 보급 열차를 몰다가 낙동강 전선의 어느 철길에서 미군기의 공습으로 폭사했다. 내가 언젠가 이들 삼대의 얘기를 써보겠노라 하는 것은 내 ‘추억’ 때문이기도 하다.
베트남의 작가로 ‘전쟁의 슬픔’을 쓴 바오닌이라는 친구가 있다. 벌써 다섯 해 전의 일이 되었지만 그와 나는 어느 시사주간지의 기획으로 대담을 했다. 나는 베트남 참전 병사 출신으로 당연히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고 그는 겸양하며 받아들였다. 당시에 나는 늦게 군에 갔던 탓으로 스물네 살의 병사였고 바오닌은 십칠세의 베트콩 소년병이었다. 그리고 말을 맞추어 보다가 그가 플레이쿠에서 후에 호이안에 이르는 전선까지 종군했다는 것과, 그와 내가 1968년 구정 공세 때에 어쩌면 서로 총부리를 맞대었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내가 하노이를 답방하면서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나의 부끄러움과 회한은 ‘무기의 그늘’에서 전쟁의 주체가 결국은 베트남 민중이었음을 밝히고 있지만, 그는 전쟁에서 자신들이 상실한 것들을 아프게 추억하고 있다. 그와 나의 책들은 지금 서구 나라의 책방에 나란히 꽂혀있다.
비슷한 또래인 프랑스 작가 르 끌레지오는 같은 해인 1968년에 태국의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서구 제국주의를 증오했다. 마침 알제리의 독립 투쟁으로 프랑스 청년들은 징집되어 식민지 전장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징병에 응하지 않고 이른바 공익 근무를 자원하게 되었단다. 그는 알제리는 피할 수 있었지만 또 하나의 식민지 전쟁이었던 베트남을 바로 이웃에 두고 보면서 부채감으로 괴로워했다.
내 또 다른 친구들인 독일 작가 한스 크리스토프 부흐와 조각가 요헨 힐트만은 그 해에 베트남전 반대운동으로 학교를 그만두거나 해직되었다. 특히 한스는 그로부터 평생을 라틴 아메리카, 르완다, 남아프리카,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찾아다니며 유럽과 미국이 저지른 참극의 원죄를 목격하게 된다. 
일본의 작가 오타 마코토는 그 해에 미군 탈영병을 제3국으로 피난시키는 일에 분주해 있었다.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그 병사는 한국 전쟁 고아로 미국에 입양되었던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방북하고 나서 베를린을 거쳐서 뉴욕에 망명하고 있던 시절, 서쪽 끝인 로스앤젤레스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서투른 외국어 투의 한국말로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한국 전쟁은 즉 베트남 전쟁입니다’. 나중에 몇 번 통화가 오가고 나서 그는 자기를 밝혔다. 자기 어머니가 해방 공간의 저 유명한 이강국의 애인이며 여간첩으로 처형된 김수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바로 김수임과 문제의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 고등학생 때까지 외할머니가 기르다가 미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나는 그의 쓸쓸한 목소리와 마음만을 전해 들었고 끝내 만나지는 못했다.               
    

           

 
 
 

황석영의 코멘트

수궁원 2008. 8. 30. 17:39

1. ‘무기의 그늘’

 

나는 베를린과 뉴욕을 떠돌며 망명 5년, 그리고 귀국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서 5년을 보냈다. 나의 40대 후반과 50대 전반을 다 바친 10년의 방랑과 투옥이라는 극적 경험은 나를 변화시켰고 내가 바라보던 세계도 변했다. 나는 그 기간 동안에 여러 차례에 걸친 방북을 통하여 달의 저편처럼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분단 체제의 다른 한쪽을 목격했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적 세계 질서의 재편이라는 세계사적 변동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과 미국에 있었으며, 그러한 체험들을 곰삭이고 내면에서 정리하는 동안 5년의 수감 생활을 통해서 나는 ‘다른 작가’로 태어났다.
바로 그 전단계인 80년대, 이 변화의 와중에서 나는 내 전반기 작가 생활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무기의 그늘’을 출간했다.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어느 소설이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극한적인 삶과 죽음이라거나, 잘못된 전쟁에 대한 항변이라거나, 이런 저런 휴머니즘적 갈등 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옥의 묵시록’ 같은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뒤섞인 감상적 염전(厭戰)주의를 내세운 것도 아니다. ‘무기의 그늘’은 자본주의적인 전쟁의 사업적 측면을 다룬 ‘전투 장면이 나오지 않는 전쟁 소설’이다. 전쟁이란 민족간, 국가간, 계급간의 모순 갈등이 급격하게 해결 또는 지양되는 격렬한 폭력의 매개과정이다. 그 표면적 양상은 파괴와 살육으로 가득찬 하나의 지옥도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는 극도로 냉정하고 치밀하게 정치 경제적 논리와 매커니즘이 작동한다. ‘무기의 그늘’은 이러한 이면구조와 표면구조를 동시에 드러내려 했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필리핀에 이어 그보다 훨신 더 큰 시장인 동남아 내륙 전체를 경영하고자 한 미제국주의의 팽창운동이고, 전쟁은 그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인 수단이며, 하나의 거대한 비즈니스인 셈이다. ‘무기의 그늘’은 따라서 베트남 전장의 뒷골목인 암시장을 그 무대로 하고 있으며 시장은 밀림 속보다도 더 긴박한 전쟁의 핵심이 되어간다. 미군 군수물자의 유통 매커니즘을 알게 되면 될 수록 우리는 이 전쟁의 본질을 더 잘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시각은 전체적이고 다면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설에는 미국 정부와 미군의 시각, 베트남 민족해방투쟁 주체의 시각, 미국 지배 하의 남베트남인들의 시각, 그리고 전쟁의 한 축으로 개입하기를 거부하고 그로부터 끝없이 탈주하고자 하는 일종의 ‘정신적 난민’의 시각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추악한 전쟁에 어정쩡하게 개입한 한국군의 시각이 작가의 시각과 겹쳐진다.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상처 받은 개인의 내면 따위는 그리지 않겠다’고 썼던 나의 출간 서문은 베트남인에 대한 한국인의 죄책감이 통제하는 완강한 자의식이었으며 무책임한 방외인의 시각으로는 넘어서기 힘들었던 실질적인 한계였다. 정작 해방투쟁에 승리한 베트남인 자신들에게 전쟁의 승패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다름아닌 그 승리를 위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스런 기억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10년의 망명, 투옥 생활을 겪으면서 변화된 세계를 바라보며 느꼈던 나의 연민과 회한이었다.

 

2. ‘오래된 정원’

 

사실 ‘오래된 정원’이란 제목은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유토피아에 대한 일종의 패러독스인 셈이다. 나는 이 제목을 동양의 오랜 전설인 어느 골짜기의 아름다운 화원이 있는 숨겨진 나라나, 꿈 같은 섬나라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나는 망명지 베를린에서 변화되는 세계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제 혁명은 끝났다” 라고. 

내가 감옥에서 나오던 98년부터 이 소설을 쓰던 세기말을 지나서 지금 세계는 쓰디쓴 환멸에 직면해 있다.
생태계는 더욱 무참하게 파괴 되어가고, 종교와 인종에 따른 국지전과 내란이 시작되었으며 테러와 반테러를 명분으로한 패권적 전쟁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른바 주변부 세계는 아직도 독재와 저항과 좌절을 차례로 겪으면서 다시 전쟁과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독주하게 되면서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불안한 종말의 징후를 보이며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남한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한 7,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일단 정권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 싸움의 주체들은 90년대로 들어서면서 지난 날의 열정과 변화된 현실 속의 일상 사이에서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분열을 어떤 형태로든 겪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주체의 위기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찾아온 이념의 소멸과 더불어 잃어버린 것들을 되씹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오래된 정원’이 위기의 시대를 살아갔던 두 남녀의 분리된 삶을 다룬 ‘연애소설’의 형태를 띄었던 것은 위와 같은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틀이었다.
나는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을 바꾸고자 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각기 스스로의 내면을 진술하는 ‘혼잣말’로 세월을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유기적 통합을 간섭하고 끊어버리는 각자의 내면 세계가 현실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넘나든다. 우선 연대기적 시간대로 본다면 앞뒤로 연결되어야 할 서술의 두 축이 제각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남자와 여자의 일인칭 시점 안에 머물면서 끝까지 평행선을 이룬다. 그것은 물론 여자(유니)의 기록으로 재현되는 18년의 세월 동안 남자(오)가 감옥 안에 있었고, 발신자의 사후에야 접수된 편지와 일기들을 통해서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시공간적 격리와 단절의 다른 표현이다. 이것은 1인칭에서 출발하여 2인칭과 다시 3인칭으로 넘어가는 형식을 갖고 있다. 스스로 쓰는 행위나 생각하는 행위는 1인칭이며 그들 각자가 겪는 현실 속에서 상대는 2인칭이 되지만 독자가 이들을 텍스트로 읽으면서 3인칭적 시각이 완성되고 이들의 사랑을 독자가 읽는 행위를 통해 완성시켜준다. 그러므로 엇갈린 시간들을 ‘지금 여기’에서 연결하는 것은 독자의 읽는 행위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서술형식의 서로 만날 수 없는 내적 제약은, 감옥에서의 오현우의 체험과 바깥 세상에서 겪었던 윤희의 씁쓸한 삶의 과정이 서로 따로 읽히면서 갈등을 일으킨다. 이 분열의 갈등은 변혁운동의 주체가 이제는 냉정히 승인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인간을 살아있게 해주는 역사적 진실의 진전은 언제나 지상의 시간 제약 때문에 의미 부여된 기호와 따로 떨어져서 뒤늦게 체험된다. 그러한 시차에 둔감한 모든 진보의 기획은, 기획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모든 개체의 삶으로 육화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 정지된 시간의 다른 이름인 역사의 종착점을 향해 눈먼 질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깨달음은 뒤늦게 오지 않는가.
그러나 지상의 무상한 시간을 견디고서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는’ 것들을 알아보는 그 기억의 힘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3. ‘손님’

 

'손님’은 한국전쟁 50주년이던 2000년에 쓰기 시작했다. 작품을 출간한 직후에 세계를 강타한 9.11 테러의 역풍으로 북한이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목되고 전쟁의 위협마저 가해진 것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완성되었던 냉전체제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의 취약한 고리로 묶여 있음을 섬뜩하게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손님’은 내가 베를린에 망명하고 있던 시절에 사실상 세계적인 냉전 체제 해체의 시작이었던 장벽 붕괴를 목격하면서 진작부터 구상했던 작품이었다. 당시의 내 창작 노트에는 이렇게 메모되어 있다.

 

과거의 리얼리즘 형식은 보다 과감하게 보다 풍부한 형식으로 분해시켜서 재구성해야 한다. 삶은 놓친 시간과 그 흔적들의 축적이며 그것이 역사에 끼어 들기도 하고 꿈처럼 일상 속에 흘러가 버리기도 한다. 역사와 개인의 꿈 같은 일상이 함께 현실 속에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서도 안되고, 화자는 어느 누군가의 관점이나 인칭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 각자의 시각에 따라 서로를 교차하여 그려서 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한 인물과 사건을 두고도 모든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생각과 시각의 다양성으로 자수를 놓듯이 그릴 수는 없을까. 객관적인 서술방법도 삶을 그럴싸하게 그린다고 할 뿐이지 삶을 현실의 상태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삶이 산문에 의하여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삶의 흐름에 가깝게 산문을 회복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나의 형식에 관한 고민이다.

 

북한의 황해도 신천에는 미군의 양민학살을 고발하는 ‘미제학살기념박물관’이 있었고, 방북했을 때 나는 당연히 그곳으로 안내되었다.
나중에 뉴욕에 체류하면서 어느 목사를 만나 그의 소년 시절의 목격담을 듣고서야 여러 가지 의문이 풀렸다.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의 모친에게서 우연히 전쟁 당시의 황해도 사정에 대하여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다. 즉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며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겠다’는 생각이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저질러졌다는 것이며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이다. 이것은 냉전을 구축해 나갈 국제전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내전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쓴 뒤에 남과 북의 국가주의자들로부터 맹공격을 받았다.
나는 자료와 목격담을 모아 나가다가 귀국해서 투옥되면서 작업을 중단했다. 옥방에서 나의 구상이 더 무르익을 때까지 이러저러한 형식을 적용시켜 볼 수 있었던 점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은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에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된 모더니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계급적 유산이 남한 지방에 비해서 희박했던 북한 지방은 이 두 가지 관념을 ‘개화’로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셈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두 개의 가지였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막아내고자 했던 근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 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무속의 한 형식을 만들어냈던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을 주인의 반댓말인 ‘손님’으로 규정했다. ‘손님’은 저러한 악몽의 50여일을 드러내는 한판의 해원(解寃)굿이다. 이 작품은 ‘황해도 진오기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와 형식으로 하여 썼다. 여기서는 굿판에서처럼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며 그들의 회상과 이야기도 제각각이다. 나는 과거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하나의 씨줄과, 등장인물 각자의 서로 다른 삶의 입장과 체험을 통하여 사건을 프레스코화처럼 총체화하는 ‘구전담화’라는 날줄을 서로 엮어서 한폭의 베를 짜듯 구성했다.

 

기억의 잔여물은 그것이 만들어진 과정을 망각하려 할수록 더 견고해지기 마련이라면, 산 자든 죽은 자든 과거의 망령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망령은 그냥 헛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극이 오늘의 우리에게 풀어야할 카르마로 물려준 역사의 짐이라는 점에서 지금도 생생한 현실이기도 하다.
죽은 자의 넋이 신격(神格)의 저승사자를 따돌리고 산 사람과 해후하는 굿의 형식은, 그 신격의 절대적 권위를 참칭하며 숱한 인간을 희생시킨 역사의 맹목적 필연을 해체하여 인간의 시간으로 되돌려주려는 소설의 본령과 맞닿아 있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 세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작자의 본뜻이기도 했다. 만약, 오늘의 ‘손님’인 미국이 허락한다면.       
이 세 작품들로 나는 20세기 3부작을 끝낸 셈이지만 아직도 세계는 같은 조건과 상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환절기의 들판에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갈 철새들의 무리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새들은 한 무리씩 날아와 비슷한 크기로 자라난 숲의 나뭇가지에 앉거나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전봇대 사이의 긴 전깃줄에 내려와 앉곤 한다. 그러다가 적당한 간격의 자리들이 가득차게 되었을 때, 보다 큰 무리의 철새들이 날아들면 동요가 일어난다. 새들은 간격을 좁혀서 옆으로 빈 공간을 내주거나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일단 일제히 하늘로 떠오른다. 그들은 새로운 무리와 더불어 허공을 빙빙 돌면서 날다가 어느 맞춤한 순간에 다시 편성을 하여 적당한 간격으로 내려앉기 시작한다. 앉는 자리가 옆의 다른 나무나 전깃줄로 퍼져나가 더욱 넓어지거나 더욱 촘촘해지기도 하고, 아니면 일부는 그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린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허공을 맴돌고 있는 때에 있다’ 고 대답하겠다. 그러고는 나의 작업이 ‘새들이 다시 내려앉는 것’에 관여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서구의 청중들과 얘기할 때 가끔씩 ‘나는 세계시민이 되고싶다’라고 얘기하지만, 청중 틈에 한국인이 있어 되물어오면 ‘나와 한반도의 문제를 세계 사람들과 공유하겠다’는 소리라고 얼버무린다. 이 말에는 공유하는 것과 공유하지 못하는, 동시성과 비동시성이 있음을 은연중에 숨긴 듯한 대답이다.
지난 번 냉전체제 붕괴 이후 나와 내 벗들은 ‘동아시아와 세계의 주변부’에 대해서 다시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 재편성 이후 현재의 이행기가 고통스럽게 오래 지속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한다. 나는 미국식 시장주의의 문턱에 불안정하게 한걸음씩 발을 내딛고 있는 유럽에 머물며 중국과 일본 그 사이 한반도를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구의 중심부로 몰려 들어와버린 과거의 잡다한 식민지 백성들을 본다. 평화로운 세계와 문화적 다원주의를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낼 수 있을까. 지난 세기의 불타버린 재 속에서 발견했던 몇몇 가지의 소중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되살려서 생존의 마술 부적으로 재창조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공항의 트랜지트 구역의 여객처럼 어정쩡하게 외국에 체류 중이다. 아직은 다음 행선지를 분명히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은 런던에 있었고 지금은 파리에서 짐을 잠깐 풀었다. 그러나 예전 베를린과 뉴욕에서의 망명과는 매우 다르다. 나는 지금 국가라든가 그 어느 조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개인이다. 나는 현재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원하고 있다. 나는 이 거리감과 낯선 타자의 도시가 나에게 주는 창조적 긴장을 강렬하게 느낀다.
지난번 작품 ‘심청, 연꽃의 길’ 이후 나는 이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지금 준비하는 ‘바리공주’는 또다시 이주에 관한 이야기가 될것이다. 앞의 것은 19세기의 줄거리요 다음 것은 바로 21세기 오늘의 일이다. 

 

 

- 2005년 독일의 문학행사에서 발표했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