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경전,혜명경

정원천사 2020. 4. 6. 10:46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二章.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천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판별하는 앎과 경험이 이미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과 사고(思考)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감정과 잡념은 흙탕물과 같은 것으로 인간을 더럽히고 혼란에 빠뜨린다.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또 모두가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을 선하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는 선하지 않다는 상대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선한 것과 선하지 않는 것을 구분짓는 상대적인 앎과 경험과 기억이 괴롬과 고통을 일으키는 흙탕물이 되는 것이다.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사 있음과 없음이 서로 상대적으로 일어나고, 어려움과 쉬움도 또한 서로 상대적으로 이루어지며, 길고 짧음은 서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된 것이며, 높고 낮음은 서로 상대적으로 기울기가 드러나기 때문이며, 나오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는 서로 어울려서 울리는 것이며, 앞과 뒤는 서로 상대적으로 붙어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만물과 인간에게 있어서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는 인간의 기억과 경험에 의한 분별심과 차별심에 의한 판단의 결과로만 일어날 뿐이다. 비교와 판단함으로 인해서 해로운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정신이 흐트러져 혼란에 빠진다.

  도를 알고 행하는 사람은 사람과 만물을 대할 때, 어떠한 비교하는 마음과 생각으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순수한 본성으로 대한다. 때 묻지 않는 본성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어린 아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기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예쁜 사람, 미운 사람 가리지 않고 천진난만한 웃는 얼굴로 대한다. 그 마음속에서 부정적 요인이 되는 못마땅하다거나 거슬리는 악한 생각이 없으니 항상 고요하고 편안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인의 마음이 곧, 어린 아기와 같은 마음인 것이다.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이리하여 성인(도인)은 있는 그대로 본성(양심)에 의해서 자연스럽게(無爲) 일을 하면서도, 억지로 드러내지 않고 오직 실천으로써 말없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부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만물의 온갖 작용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서로 간섭함이 없고, 자연은 온갖 만물을 낳으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자연은 온갖 만물을 자라나게 하면서도 그 자연의 혜택과 공로에 보상을 바라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듯 자연의 무위적인 흐름처럼(夫) 성인(도인)은 어느 사람과도 원만하게 지내고 화통하며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또 어디에든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唯不居), 그래서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맑고 영원한 것이다.*

김주호 기자


 
 
 

각종경전,혜명경

정원천사 2020. 1. 9. 12:28

도덕경 해설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도덕경 14장 해설

   쉼 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을 보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화와 질서를 이루며 운행되어지고 있다. 과연 그 배후의 실재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오늘날 여러 기록에는 그 실재를 기(氣), 생명력, 신(神), 절대자, 도(道) 등 다양하게 명명되어지는데, 노자의 도덕경에선 이것을 기(氣)라고도 하고 도(道)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이 기와 도의 실체란 무엇일까?

  이 기와 도는 생명 있는 모든 것 속에 내재하고 있다. 흙, 돌, 바람, 구름, 공기 등 삼라만상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앎이 부족하고 깨달음이 없어서이다. 우리 인간은 진리의 세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러니 진리와 인간의 순수본성에 따른 삶과는 현격히 거리가 멀다. 지금의 사람은 오로지 육체적 감각에 의한 오감을 통해 보고 느끼는 허상과 거짓에 집착된 삶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괴롬과 고통이 끝없이 이어지고 생사의 윤회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따른 삶과 인간 순수본성에 의한 삶은 시공을 초월하여 자유하고 희락에 찬 영원무궁한 세계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따른 삶을 살려면, 육체적 오감을 통해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혜안(慧眼)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속에서 살되 세속을 초월해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아가는 경계의 관문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보통 사람으로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비 물질의 정신세계(영계)인 기와 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를 이 14장은 나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視之不見 名曰夷(시지불견 명왈이): 보고도 볼 수 없는 것을 이름 하여 클 이(夷)라 하고, 눈으로 바라보이는 세계는 극히 제한적이다. 너무 작아도 안 보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커도 안 보인다. 이것은 인간의 시각을 넘어선 것으로 이 우주 배후의 실재하는 도의 세계의 거대한 힘과 광경을 눈으로 볼 수 없음을 일컫는 것이다.  

      聽之不聞 名曰希(청지불문 명왈희):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드물 희(希)라, 귀로 들을 수 있는 청각의 영역도 제한되어 있다. 더더욱 미묘한 도의 세계에서 전해 오는 작은 소리를 어찌 들을 수 있으랴.

      搏之不得 名曰微(박지불득 명왈미):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이름하여 미세할 미(微)라, 감각에 의하여 잡을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물질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 물질계의 영역에 한한 것이라 너무 미묘하여 잡을 수 없는 것이다.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이 셋은 각각 별도로 이치를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체는 하나이나 바라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여럿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其上不   其下不昧 繩繩不可名(기상불교 기하불매 승승불가명): 그 위가 밝은 것도 아니요 어두운 것도 아니며, 이것은 한데 어우러져서 빙글빙글 뒤섞인 고로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복귀어무물 시이무상지상): 물질의 경계를 뛰어넘는 상태로 돌아가면, 이것이 형상이 없는 실상인 것이다. 삼라만상의 현상세계는 실상이 아니다. 진정한 도의 실상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형상을 넘어서 그 이면을 보아야 보이는 것이다.

      無物之象 是謂惚恍(무물지상 시위홀황): 형상이 없는 실상, 이것을 황홀이라 한다. 현상세계를 넘어 상이 없는 도의 세계(실상)를 알고 깨달으면 황홀한 경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영지불견기수 수지불견기후): 이것을 맞이해서는 그 시작이 어딘지 알 수 없고, 그 뒤가 어디인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도의 세계, 즉 물질계를 초월한 의식의 세계에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집고지도 이어금지유 능지고시): 본시의 도를 붙잡고 작금의 만유의 실존을 알면 능히 그 옛날의 시작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是謂道紀(시위도기): 이것이 도의 관문으로 들어가는 실마리인 것이다. 도가 없는 세상은 보이는 현상과 감각에 집착되어진 미몽의 세계를 말한다. 미몽의 세계는 생로병사가 상존하며 괴롬과 고통으로 점철된 고해(苦海)의 사바세계다.

      반대로 도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마음과 의식으로 연결되어진 염담허무(鹽膽虛無)와 물아쌍망(物我雙亡)의 경지에서 영생불사(永生不死)하는 이상향(理想鄕)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주호 기자

 
 
 

각종경전,혜명경

정원천사 2017. 2. 6. 13:18
도덕경 해설
故有德司介
고유덕사개
고로 덕이 있는 사람은 큰 것을 지키고
주호.jpg

도덕경 79장 해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기후와 토질과 환경에 의존하고 또 그것에 지배받는다.
수중 생물은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육상 생물은 육지에서 살아야 한다.
물론 예외적으로 수중 생물이 육상에서, 육상 생물이 수중에서 사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바로 인간과 더불어 사회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사람 간에도 또 사는 부류가 나누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가재는 내편이다”라는 속담처럼 사람도 생각이나 가치가 비슷한 사람끼리 무리지어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인이 세속에서 세인과 더불어 몸을 담고 살기는 하지만, 그 정신과 마음의 중심만은 늘 하늘과 더불어 살지 땅의 범주에 속하는 일반 속인과는 친밀하고도 내밀하게 같이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겉모습은 다 같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속사람만은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간격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인과 세인이 함께 살지 못하고 도인이 도인과 더불어 사는 이유이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 듯, 새가 하늘에서 살 듯 도인은 도(道)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 도란 누가 보나 안 보나 항상 옳고 바르고 하나 된 화평의 길만을 고집하고 사는 덕(德)스런 사람들이 사는 삶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세인은 사사로운 이익과 감정에 휘둘리며 일희일비하면서 그것을 흡족해하며 당연시하고 살아간다.
이것이 땅에 속하는 속인들의 삶이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도인의 삶을 이상하다 비웃으며 조롱하는 듯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도인은 항상 하늘(神, 하나님)이 자신을 눈동자처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 천명(天命)을 따른다.
그래서 그 마음에 순수본성(양심)이 이끄는 데 따라 올바른 마음, 생각, 행동, 일만을 고수하며 살 수밖에 없는 덕(德)스런 존재이다.
이해타산이 많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세인은 어떤 때는 올바른 마음과 생각, 행동을 하다가도 자기의 이익과 자존심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그 마음과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꾼다.
이를 이름하여 변덕의 대명사인 무도인(無道人), 부덕(不德)한 사람으로 구분되어지는 삶의 경계인 것이다.
이것이 도인과 무도인의 다른 점이다.
얼핏 보기에는 같아보여도 도인과 무도인의 삶의 경계는 이처럼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인의 정신은 늘 하늘의 고고함과 푸른 청정함을 유지하며 천명(天命)을 따르며 살기에 무병장수하는 것이고, 무도인은 땅의 분주함과 들끓는 불 속과 같은 혼란함 가운데서 살므로 그 천명(天命)을 재촉하여 단명(短命)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여! 하늘의 천도(天道)는, 비록 몸은 세속(죄와 고통이 함께하는 세상)에 몸담고 살지만, 그 정신만은 하늘의 도(無爲自然, 無我地境, 武陵桃源)에서 유유자적하며 한량없는 세월을 행복하게 보내는 참 해탈(解脫)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이다.
세인들이여! 천도를 따라 사는 도인을 이상하다 나쁘다 말하지 말지며, 이런 삶의 오묘하고 무궁(無窮)한 진리를 터득하는 혜안과 지혜를 키우는 진짜 공부(工夫)를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지?
和大怨(화대원): 큰 원망은 풀어도
必有餘怨(필유여원): 반드시 남은 원망이 있을 것이니
焉可以爲善(안가이위선): 어찌 그와 같은 것을 선한 것이라 하겠는가.
是以聖人右介(시이성인우개): 그래서 성인은 크게 되도록 돕기는 하지만
而不以責於人(이부책어인):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억지로 꾸짖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오
故有德司介(고유덕사개): 고로 덕이 있는 사람은 큰 것을 지키고
无德司;(徹)(무덕사철): 덕이 없으면 부서져 버릴 것을 지킨다
夫天道无親(부천도무친): 대저 하늘의 도는 이들(덕이 없는 사람)과 친하지 않으니
恒與善人(상여선인): 늘 선인(순수본성을 지닌 사람)과 함께 한다.*
김주호 기자

 

출처 : 무지개이슬
글쓴이 : ★천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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