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starwoods 2006. 5. 17. 00:15

 

<다 빈치 코드>와 한기총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댄 브라운 이 소설은 이야기 전개 방식 등 몇몇 부분이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반가운 작품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4300만부 이상의 책이 팔려나간 당대 최대의 베스트셀러 소설인 이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2006517일 프랑스 칸에서 시작하여 18일 전세계적인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에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의 경우 법원에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내고 기각될 경우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마침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송진현 수석부장판사)516신청을 기각하였으나, 한기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다 빈치 코드> 영화 안보기 운동을 계속하겠으며, 영화 개봉일에 맞춰 대대적인 상영반대 집회를 예정 중에 있다고 발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이단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국가가 사형에 처해 마땅한 중범죄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은 16세기 스위스 제네바와 명백히 다르다. 대한민국은 특정 종교를 국교로 하지 않는 세속 국가인 것이다. 종교,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가 헌법적 권리로 인정받는 이 나라에서 영화 <다 빈치 코드>가 상영되는 것을 기독교계가 법적으로 가로막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언론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한기총이 이 영화의 상영은 "표현의 자유를 악용하여 역사적 사실과 종교의 교리와 신념과 명예를 왜곡"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법원은 신청인들의 명예감정이 침해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소명되나 “원작 소설과 영화는 허구임이 명백하고 실화를 극화한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고 단정할 자료가 없는 이상 신청인들의 사회적 명예에 변경을 가져온다고 볼 수 없다고”밝혀 세속국가의 법원이 과학적으로 검증이 어려운 종교적 신념에 대해 다소 중립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표현의 자유에 무게를 실어 주는 결정을 내렸다. 애시당초 한기총에서도 가처분신청을 내리기에 앞서 이러한 판결이 날 것을 예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한기총의 이 운동의 진정성에 의심을 표한다. 무엇보다 한기총이 지금까지 지향해 온 방향과 또한 현실이 본 운동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연일 고발되는 교계 지도자들의 비리와 추태만으로도 일반인들에게 기독교가 칭찬은 커녕 비난받을만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하는 모습을이기 보다는, 외부에 공공의 적을 설정하여 이를 공격함으로써 내부적인 단결을 이루어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색체 운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앞선다.

한기총이 한국교회의 대표인가?

한기총은 대부분의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및 기독교한국루터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등 국내 62개 교단 18, 기관단체가 가입하고 있는,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교단 지도자들의 협력기관으로, 다소 진보적인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함께 한국의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연합체로 활동하고 또한 대다수 국민들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한기총은 하나의 협의회로서, 이 단체에서 주장하고 발표하는 내용이 가입된 교단과 이 교단에 가입되어 있는 개별교회와 항상 일치하거나 장로교 헌법이 보장하는 교회 자유의 권리에 우선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인식은 과장 또는 왜곡이 없지 않다.

한기총의 설립당시 취지와 한기총 지도부가 표방하는 명목상 내용은 비정치적이라할지 모르겠으나, 최근의 움직임은 이들의 논평과 활동은 다분히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 있으며, 그것도 일부에서 ‘수구’라 평가받는 보수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만 하더라도 한기총이 주최한 ‘한국교회 원로 초청 기도회’에 특강 연사로 대표적인 극보수 인사라 할 수 있는 조갑제 씨를 초청하여 그의 강연을 ‘설교’처럼 경청하고, 시국성명을 통해 보수언론이나 정당과 동일한 내용을 담으며,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는 등, 한기총의 주요 업무로 되어 있는 “기독교의 연합, 복음화, 남북 교회 협력, 홍보, 출판, 전문인 양성”보다는 ()보수 정치적 압력단체로서의 존재감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한기총의 활동은 단순 발언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집회에까지 이어져 200410월에는 반핵반김국민협의회와 손잡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주최하여 10만명이 운집한 사실상의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집회’를 주도했고, 최근 사학법 재개정 운동의 연대 방식에 대해 박종순 한기총 대표회장은 대해 “매번 장외집회를 할 수는 없지만 필요하다면 여러 사회단체와 연대할 것이고 100만명이 모이는 집회도 개최할 수 있다”며 “한기총은 기독교적 가치 아래서 사학법 재개정 운동의 중심에 설 것”이라고 강조했다10고 하는데, 이는 한기총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 인력 동원 정도는 문제 없다는, 상당자신감에 찬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가처분 신청은 말도 안되는 헤프닝

이처럼 한기총은 그간의 활동에 있어 상당한 정치색을 드러내고 있는데, 문제는 한기총의 이러한 활동으로 말미암아 일반 시민들에게는 ‘한기총=한국교회’라는 인식이 상당히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최근의 일련의 행보만을 보아도, 비상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하여 영화 <다 빈치 코드>가 기독교에 대해 일반 시민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하는 한기총 바로 그 자신이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데 크게 역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기총의 <다 빈치 코드> 반대 운동에 대한 일반 시민, 언론 또는 전문가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비록 한기총에서 법적 조치와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에 야당 대표가 이러한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법적으로 금지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보겠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반응은 종교 권력이 표현의 자유를 막으려고 하는 이번 사태는 ‘말도 안되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한국이 기독교 국가냐”…영화 “다 빈치코드” 찬반 격돌’이라는 제하의 세계일보 412일 기사11에 따르면, KNCC 실행위원 박종화 목사는 픽션을 영화화한 것을 가지고 법적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개봉 반대보다는 개인이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맡겨두는 것이 현명한 대응이라 밝혔으며, 천주교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김민수 신부도 11일 평화방송 라디오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독교 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가처분신청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영화 볼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어떤 논객들은 한기총의 <다 빈치 코드> 상영 논란 속에 진짜 기독교를 모독하는 것은 한기총 그들 자신이라고 얘기하기까지 한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은 ‘데일리 서프라이즈’ [문화컬럼]에서 2000년 이란 긴 세월 속에 수많은 역경을 굳건히 견뎌온 기독교회가 단지 영화 한편으로 말살되고 그 존재가치가 사라질 수 있다고 판단하는 한기총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한기총이 제작사의 마케팅 전략에 휘말린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12.

‘경향신문’은 47일자 사설을 통해 종교와 예술적 표현의 조화와 균형을 바라면서도 다원화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영화 상영 자체를 물리적으로 막고자 하는 행위를 비판하고 영화의 가치와 작품성은 관객에게 맡겨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13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본 결과, <다 빈치 코드> 상영 자체가 기독교 존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는 입장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한기총이 과잉반응을 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다 빈치 코드> 상영을 우려하는 다른 국가의 경우에도 대부분 우려와 평가절하로 일관하고 있고, 상영을 반대하는 국가와 단체에 있어서도 물리적 충돌 불사라는 강경대응은 찾아보기 어렵다. 필자는 왜 유독 한기총만이 이런 강경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한기총의 대응 방식을 보면서 필자는 한기총이 내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위기에 처한 한기총식 한국교회

한기총은 한국교회를 아우르는 대표 단체처럼 행동해오면서 이제는 일종의 정치세력으로까지 그 힘을 키워 놓았으나, 내적 부실함이 이 단체의 존립을 자꾸만 위태롭게 하며, 그들에게는 이러한 위기감이 한국교회 전체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위기감으로 증폭되어 다가오는 것 같다. 한국의 대다수 개신 교회가 가르치는 복음의 주요 내용은 대체로 ‘예수믿은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러니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6일간 열심히 살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충성봉사하자’는 정도로, 초기 선교사들의 목회전략으로부터 유래했는지, 한국 개신교회의 목회전략은 대체로 교리와 신학은 가급적 간단 명료하게 가르치고 이런 것들은 교회에 ‘충성’하면 다 체득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충성이라는 것은 주로 종교 윤리적 방식으로 이해되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 주일을 잘 지키는 것, 새벽기도 열심히 하는 것, 십일조나 건축헌금 열심히 하는 것, /담배 하지 않는 것 등으로 구체화 할 수 있다. 기독교가 신학이 부실한채 윤리화되어 버리니, 위의 항목들을 열심히 따르는 자들이 집사, 장로등의 ‘높은’ 자리에 가게 되고, 반대로 ‘높은’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이런 일들을 열심히 해야 하게 된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어른들 즉 목사님들은 이와같은 열심과 절제가 투철한 분으로 많은 존경을 받게 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목사님들의 위치가 예전과 같지 않다.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며 교회의 운영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며, 한편으로는 목사들의 전횡과 비리가 언론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민주화의 영향일까. 이미 수년전부터 교회 안에서도 평신도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목사에 대한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던 평신도들도, 목사의 헌금 전횡과 목사 세습과 같은 비상식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몇년 전부터 교회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여러 단체가 결성되었고, 교회 운영에 있어서는 시민 사회의 합리적 기준이 교회 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대형교회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비리 수준은 서민과 중산층 교인들이 분노하기에 충분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은광순의 ‘데일리 서프라이즈’칼럼14의 내용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2003년 기독교 신자들이 뽑은 10대 뉴스 중에는 불륜에 관한 것이 여섯 항목이나 되며 이중 상당수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형 교회 목사이며 동시에 전/현 한기총 위원들인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해 한 목사는 이들로 인해 한국교회가 문닫게 생겼다며 강한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15. 이 내용 전체가 설령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고은광순의 칼럼에는 이어 강간, 성폭행 등의 혐의로 체포된 수십명의 목사들의 명단이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을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회자 또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기에, 불륜 또는 성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고, 이러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 그러나 윤리화된 기독교회 안에서 술과 담배를 하는 것 만으로도 거룩한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배워온 한국 교회의 교인들에게 자신을 가르친 목회자들의 이러한 범죄는 도무지 용납되기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자신의 목회자로부터 배신에 가까운 정신적 충격을 받은 교인들의 이탈이 불보듯 뻔한 일이라 여겨질 만도 하다.

<다 빈치 코드>는 반전을 위한 정치적 카드?

한기총 지도부는 작금의 분열 위기의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안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분열의 위기를 외부의 적을 대항함으로써 다시금 단결을 이루고자 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적용된 것이 바로 <다 빈치 코드>였던 것 같다. 명백한 신성모독을 담고 있는 영화가 등장함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연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한기총과 KNCC가 공동 주최한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부활절 메시지를 담당한 조용기 목사는 양측이 공동 작성한 초고에 없는 애드립으로, ‘<다 빈치 코드>나 유다 복음은 지옥에서 나온 날조된 이야기이며 절대로 상영을 반대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16. 한기총이 다른 교회나 단체, 그리고 바티칸 보다 더한 열심을 보이는 데에는 이런 복잡한 사정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된다. 무너지는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다시 연합하여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영화 속에서, 한기총 지도부는 영화를 보지도 않고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기총 반대 논리의 허구

그러나 정치권에서도 자주 보듯이 반전 카드는 조심스럽게 꺼내야 한다. 잘못하다간 언제나 역풍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한기총이 꺼내든 카드는 제대로 된 것인가. 한기총이 <다 빈치 코드> 반대 운동을 하면서 불신자와 ‘어린’ 신자들이 영화를 통해 잘못된 지식을 전달받지 않기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현재 추세로만 봐서도 이 목적은 대단한 실패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여러사람이 지적했듯이 한기총이 반대하면 할 수록 이 운동은 단지 영화를 알리는 홍보 수단으로 이용되고 만다. 많은 영화들이 제작 초기부터 상당한 비용을 들여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노력하며, 가급적 영화 본편 보다 더 그럴듯하고 더 자극적인 영상으로 관객을 매혹시키며, 사회적 금기를 다루는 영화라면 금기에 대한 억압된 욕망을 영상과 문구로 더욱 자극하기도 한다. <다 빈치 코드>의 경우 한기총이 나서서 크게 반발함으로 인해 이것이 하나의 사회적 이슈가 되어버렸고, 영화 배급사에서 광고지면을 돈으로 사지 않더라도 신문 기사에 <다 빈치 코드> 포스터나 사진이 한번이라도 더 등장하게 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과 궁금증을 북돋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떠하길래 이 난리인가 싶어 그냥 지나칠 사람도 영화를 보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믿음이 연약한 어린 신자의 경우, 교회가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가 혹시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혹시 내가 봐서는 안되는 비밀이 있기 때문에 이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보고 싶어지는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또한 영화 개봉이 한기총이 원하는대로 실패하더라도 합법적으로나 그렇지 않은 방법으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길이 다양하게 열려 있는 마당에 상영 금지 운동을 통해 영화 시청 인구를 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한기총의 목적의 전부라면, 한기총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오푸스 데이(Opus Dei)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그려진 오푸스 데이는 ‘성배’와 관련된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고자 하고, 한기총은 성배의 비밀을 그린 영화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고자 한다. 마치 거기에 신비한 힘이 존재하여 드러나는 순간 자신들의 모든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같이 말이다. 양측 모두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들은 필패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비밀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간에 망하기 마련이다. 비밀이란 그 성격상 어떤 그룹에 의해 형성되어 있더라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이상 비밀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관심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어떤 비밀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진 이후에는 누구에 의해서든 그 비밀이 밝히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다 빈치 코드>의 경우 소설을 통해 그 내용이 모두 드러나 있는 상황에서 영화로 상영되는 것을 막는 행위는 무언가 불리한 사정이 있는 그룹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 자신의 약점을 방어하고 있다고 비쳐질 수밖에 없고, 필자는 오히려 한기총의 이러한 행동이 스스로 기독교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인상을 충분히 주고 있다고 생각. 몇 번의 대규모 집회를 통해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자신감이 붙어서인지 한기총은 물리적인 실력 행사도 불사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작품 속 오푸스 데이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한국 교회, <다 빈치 코드> 정도에 무너진단 말인가?

<다 빈치 코드>를 읽거나 본 이후에 이를 그대로 믿는다면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분명히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러한 오해를 명쾌하게 풀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와 같은 문제는 굳이 <다 빈치 코드>가 아니더라도 기독교인이라면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교리라 할 수 있다. 한기총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었을 뿐이며, 성경은 당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취사선택되어진 문서라는 주장에 대해 충분히 반박할 만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이와 같은 종교적 주장에 대해 충분한 근거와 이론적 뒷받침이 없이 무턱대고 예수가 신이다 아니다 인간이다라고만 주장한다면, 어떠한 주장도 하나의 맹목적 신앙에 불과할 따름이다. 한기총의 반응을 보면, 한국 교회가 그동안 교인들에게 맹목적인 신앙교육 이상을 해오지 않아, 댄 브라운이 이야기 하는 주장과 그가 제시하는 몇가지 증거자료에 의해, 그들의 믿음 전체가 쉽게 무너질 만한 수준에까지 이른 게 아닌지 걱정이 된다. 교회는 이러한 ‘이단’사상과 끊임없이 싸우며 그 허구를 드러내고 더욱 순수하고 정확한 교리를 정립하고자 전투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다 빈치 코드>가 주장하는 내용과 영지주의 이단은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복잡한 교리를 경시하는 한국교회의 풍토가 <다 빈치 코드> 앞에서 그 약점을 드러내며,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정당한 대처 방법도 찾지 못하는 현실은 한기총 및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는 실제로 <다 빈치 코드>가 대중화되면 상당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예상을 해본다. 필자가 만나본 기독교인들의 경우 자기가 속한 교회의 신학적 성격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해서도, 또한 교회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새롭고 매력적인 이야기 앞에서 그들은 무엇을 붙잡고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한단 말인가.

한기총의 모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사조에 어느정도 충실하다 할 <다 빈치 코드>에 이렇게도 적대적인 한기총의 태도는 서툰 대처 방식이 아쉬움을 준다 하더라도,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을 고수하고자 하는 그 의도에 대해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과연 한기총은 이와 같은 신앙노선을 언제나 확고하게 유지해 왔는가? <다 빈치 코드> 상영에 목숨이라도 걸고 전투에 임하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한기총은 과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평소 어떠한 자세를 취해왔는가? 필자가 알기로는 한기총 산하의 여러 교단의 신학교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교수들이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경우 자유주의 신학사조의 세계 유수 교회와 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이미 가입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이러한 일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KNCC와 적극적인 연합활동을 통해 부활절연합예배를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최근에는 두 단체의 통합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껏 신학적 자유주의를 부분적으로 관용하면서 이들 단체와 활발히 연합해온 한기총이 <다 빈치 코드>를 유독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진다. 한기총이 <다 빈치 코드> 사건으로 자신들의 신학 노선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 비로서 있게 된 것이라면 앞으로의 행보 역시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 빈치 코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앞서 영적이고 정신적 문제를 물리력으로 해결하려는 한기총의 오류와 한기총 운동의 내적 모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다 빈치 코드>와 같은 반기독교적 문화에 대해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분명히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이 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은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0)로 구속의 대상을 제한하는 제한 속죄를 믿으며, 영원한 선택과 유기라는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명시적인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참된 믿음'이 없는 거짓 신자의 존재 또한 현실의 교회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교회의 밖,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이란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보일 수밖에 도리가 없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상, 성경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이전에 오기 힘들 것이다. 또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청하면서도 성경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참된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억지스럽게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스스로를 세뇌시키지 말고 참된 믿을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해야 할 것이다.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으로부터 오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시기 위한 은혜의 방도로서, 사람의 언어로 쓰여있어 이 언어를 통해 이성적 존재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신비로운 책으로, 아무리 지식가 지혜가 풍부한 사람이라고 해도 성신의 역사하심이 없이 스스로 성경의 메시지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으나 학식이 뛰어난 대학의 교수라고 해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선택하신 백성을 위해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데, 이 지혜는 주로 한 사람 개개인에게 개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목회자를 통해 강설되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또한 강설자 역시 자기 스스로의 지식만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대가 깨닫고 밝혀낸 지식을 학습함으로써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며 자신의 연구를 통해 전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의 폭과 넓이를 확장시키게 된다. 이러한 교회적이고 역사적인 이해가 없이 어느 한 개인이 성경책을 앞에다 놓고 자신의 지성을 의지해 성경의 모든 의미를 밝혀 보겠노라고 시도한다면, 그 결과는 대체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런 경우 비록 그 자신은, 자신의 결론이 독창적이며 탁월하다 할지 모르지만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편협한 이해를 바탕으로 억지 주장을 편 사사로운 의견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성신의 조명하심이 없이 성경을 혼자서 하루 아침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일차적 관심은 성경이 담고 하나님께서 계시한 메시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지만,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서 그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이차적 관심이 발생하게 된다. 즉 성경이 어떻게 쓰여졌으며, 누가 어떠한 의도로 여러 문서를 하나의 책으로 편집했는가 등 성경이라는 책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문서와 문서 간에 모순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성경이 모순적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타나게 되는 당연한 결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성경의 오류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들의 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이러한 시도를 신학적 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서 기적과 같은 비이성적인 내용을 역사적 실제로 인정하지 않고, 비유적,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물을 포도주로 만든 가나안 혼인잔치의 기적, 물위를 걸으신 예수의 기적 등을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들은 정경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자, 그동안 정통 기독교가 이단으로 분류한 문서를 통해 기독교를 새롭게 읽어내고, 새롭게 발견된 사본들을 통해 기존 정경을 해석하는 방식의 작업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사진 1: 그가 '심천대학' 기호학교수로 그려졌다면 한기총이 어떻게 반응했을까?

기호학자이자 하버드 대학의 교수로 그려진 로버트 랭던 박사를 통해 설명되는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이해에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신학 방법론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랭던은 이러한 생각을 이것이 더 수준높은 이해인양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자유주의적 이해를 바탕에 두고 소설은 ‘본래’의 기독교가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현저히 왜곡된 방향으로 전개되어 진실이 은폐되고 탄압받게 되었다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그럴듯한 이야기이며, 이 것이 정말 우리가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기독교의 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랭던의 주장에 대해 비중있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소설을 떠나 사실관계의 확인이 우선적으로 필요한데, 이것은 이미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작가가 역사적 사실과 사료에 대해 부정하게 인용하고 이해하고 있음이 지적되었다. 크게 양보하여 그의 주장이 옳고, 그가 인용한 문서들이 사실이라 가정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사도를 중심으로 한 남성 위주의 초기 기독교 세력이 실제로 성경을 조작하였다고 한다면, 먼저 막달라 마리아(마리아 막달레나)의 존재가 사도와 이들이 세운 초기 기독교회에 엄청난 위협을 주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존재를 성경에 방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번거롭게 이 여인을 예수의 연인에서 천한 창녀로만 조작할 것이 아니라 그 대목 자체를 빼버리는 것이 더 간단하고, 또한 후세대의 불필요한 관심에서도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이 엄청난 거짓을 조작해 낸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교활한’머리가 이정도 변수를 생각치 못했다고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 빈치 코드>의 또 하나의 자기 모순은, 예수가 신이 아니라 위대한 선지자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시온수도회는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썼단 말인가? 단지 멸망한 유다 왕조의 혈통이기 때문에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한 설명이 될 것이고, 예수의 후손이기 때문이라 하기엔 이미 그에게서 신성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이 또한 무의미 하다. 소니에르를 비롯하여 모든 그랜드 마스터와 집사들 및 시온수도회의 회원들에게 이것이 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감춰와야 했던 비밀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작품에서 그 복잡한 암호가 풀리고, 성배의 ‘진실’과 소피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소피나 소피의 친형제로 등장하는 사내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신비한 능력이나 비범함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들에게 신비스러운 능력이 주어지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평범한 사람들으로 남겨놓았는지 모르겠으나, 이 평범함으로 말미암아 작품의 결말이 상당히 허무하게 맺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교회가 문화 예술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판단이 필요한 때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본다. 비록 <다 빈치 코드>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킨 소설임에 분명하고 그 관심이 영화에 까지 이어지겠으나, 이것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완성도에서 오기보다는 작품이 다루고 있는 소재, 즉 기독교와 르네상스의 대표적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그의 작품과 같은 이야기의 소재가 워낙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고, 이 둘의 관계에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존재한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를 밝혀나가는 과정이 치밀한 수수께끼로 엮여 있어, 독자들이 읽어나가는 과정에 상당한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스스로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과 사료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기독교계의 날카로운 반응이 불가피했고, 소설로서의 본 작품이 인물의 성격과 심리 묘사, 문체, 서술자의 시점 등 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술사적으로 특별한 점을 지적할 만한 수준의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추리형식으로 쓰여진 통속적 매너리즘 소설이라 할 만하다. 원작자 댄 브라운이나 영화 제작자들이 불분명한 이야기를 사실이라 주장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혼동을 주는 것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허구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가와 영화 제작자에게 저명한 학자수준의 고도한 진실을 다루기를 바라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한 태도이다. 호기심을 유발하나 독자나 관객에게 해악을 주는 것으로 판단되는 작품의 작가는 점차 외면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작품을 읽고 보고 나서 판단할 수 있는 일이므로 영화의 상영 자체를 사전에 가로 막는 것은 한국의 상황에서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 한국교회와 한기총은 어디까지나 소설인 이 작품에 대해, 작가가 작품 앞에서 사실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라고 밝혔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 것처럼 순진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와 장로들이 영화를 먼저 보고 난 후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목회적 입장에서 교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교인들에게 이 점을 설명하여 영화 관람을 삼가는 방식의 교회적 운동은 존중할 만하. 그러나 이왕에 쏟아진 관심을 교회가 잘 활용하여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고, 작품이 다루는 내용과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로 돌리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문화적 현상과 예술 작품 등의 현대 사회의 구체적 문제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해가 더욱 요청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음을 이번 논란을 통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연합뉴스’ 기사, ‘다빈치코드’ 상영금지 가처분 기각http://news.media.daum.net/entertain/movie/200605/16/yonhap/v12719318.html

2) 마이데일리’ 기사, ‘법원 "'다빈치코드' 본다고 예수 오인하진 않을 것" ;상영금지신청 기각’http://news.media.daum.net/entertain/movie/200605/16/mydaily/v12721983.html

3) 한기총 특별대책위, ‘우리는 왜 '다 빈치 코드'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가?’,   http://www.cck.or.kr/newcck/davincicode01.htm

4) 위 ‘연합뉴스’ 기사에서 재인용.

 

5) 여기서 복음주의란 근/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성경이 오류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보수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6) ‘뉴스앤조이’ 기사, ‘조갑제, "좌파와 싸우는 기독교 되라"’,   http://www.newsnjoy.co.kr/news/read.php?idxno=16646

 

7) 연합뉴스’ 기사, ‘한기총 교회원로회 시국성명’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1293789

 

8) 연합뉴스’ 기사, 한기총 "사학법 즉각 재개정" 성명,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1281045

 

9) 이날 행사의 1부 기도회는 한기총이 주최하였으며, 2부 ‘국가보안법 수호 국민대회’는 반핵반김국민협의회가 주최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한기총 산하로 6만명, 보수단체에서 4만명 가량이 참석했으나 언론에서는 사실상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으며, 시위의 성격도 국보법 반대 또는 현정권 반대시위로 규정되었다.

 

10) ‘국민일보’ 기사, ‘한기총 사학법 재개정 운동 ‘선택적 연대’ 추구할듯’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5&article_id=0000237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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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위치가 잘못되어 제가 옮겨왔습니다.)
두 아들 아빠 2006.05.23 12:51:12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일에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그런 사이라면 왜 복음서와 신약 성경에 넘버 투(?)인 마리아에 관하여 언급이 없냐는 것이죠. 모두 삭제 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기총은 자신들의 문제를 영화 다빈치 코드를 주적으로 삼아서 공격을 하는 것으로 내부 결속을 다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실제 영화는 소설에 없는 내용을 붙여가면서 좀 더 고민한 흔적이 보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