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전통농업 - 저수지 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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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법

2010. 8. 31.

스리랑카의 전통농업 - 저수지 관개

 

 

 

밀림 깊숙이 잠든 공학 기술 유적

 

1848년 어느 아침, 영국의 역사가로서 작가 겸 여행가이기도 한 제임스 에머슨 테넨트James Emerson Tennent 경卿은 횃불을 들고서 스리랑카 북부의 밀림지대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밀림 안에는 고대의 경이적인 공학 구축물이 잠들어 있다고 들었다. 원시림은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여, 가시나무가 무성하고 길은 좁고 가팔라 일행은 16㎞나 되는 길을 거의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제방의 유적이었다.

 

제임스 에머슨 테넨트 경.

 

 

파다위야 저수지(Padawiya Tank)로 알려진 이 경이적인 공학 구축물은 1500년 이상 전의 것이다. 일행은 거대한 저수지와 제방을 말을 타고 가는 데에만 2시간이나 걸렸다.

 

“호수는 20~22㎞ 넓이일 것이다. 좁은 골짜기도 18㎞이다. 거대한 제방이 수복되어 적어도 상류 24㎞까지는 물이 고여 있었을 것이다. 제방 자체가 거대한 사업으로 길이는 약 18㎞. 제방의 높이는 20m 이상이고, 끝에서도 9m, 바닥에서는 60m의 너비이다.”

 

파다위야 저수지는 1~12세기에 걸쳐 구축된 몇 천 개의 저수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가장 큰 인공 호수 파락-라마 호수(Parak-rama Sea)는 24평방킬로미터인데, 그것 말고도 포루투칼어의 ‘tanque’와 연관되어 ‘저수지’라고 불리는 몇 천 개의 인공 호수와 제방의 연결망이 마을마다 물을 보내고자 설계되어 연결되었다. 구조와 설계는 놀라울 만큼 고도의 것이기에, 테넨트 경은 초보적인 도구만을 써서 단단한 화강암을 깎았을 그 일을 절찬했다.

 

스리랑카의 인공 호수.

 

 

온 국토에 묻힌 관개망

 

벼를 기르는 데에는 물이 꼭 필요한데, 스리랑카 국토의 2/3는 대부분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 지대이다. 이런 기후 조건 때문에 고대 신할라Sinhalese 왕조의 왕들은 관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몬순으로 내리는 비를 붙들기 위한 제방과 운하를 건설했다. 어떤 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는 약간의 빗물도 소중해,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서 바다로 흘러가게 하면 안 된다.”

 

각 왕의 업적은 기록으로 남았다. 바사바Vasabha(65~109)는 12개의 저수지와 12개의 운하를 건설했고, 마하세나Mahasena(274~302)는 1890㏊에 이르는 미네리Minneri 호수를 포함해 16개의 저수지를 건설했다. 다투세나Dhatusena의 치세(460~478)에는 너비 12m, 길이 1900㎞의 운하가 왕도王都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급수를 했다. 수리 사업에 가장 열을 올린 사람은 파라크라마 바후Parakrama Bahu 1세(1153~1186)로, 770개의 저수지와 534개의 운하를 건설하고, 2300개의 저수지와 3621개의 운하를 수복했다. 풍족한 작물의 수확과 그것이 가져오는 부富는 사원에 집중되고, 꽃밭에는 분수가, 도시에는 궁전이 건축되었다.

 

미네리 호수의 수문.

 

스리랑카의 옛 왕도 아누라다푸라의 현재 지도.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부조상. 

 

테넨트 경에게 감명을 준 저수지의 대부분은 현재 완전히 진흙으로 차 있다. 하지만 수많은 소규모 저수지는 지금도 건재하고, 일부는 침니가 차 있지만 건조 지대 관개농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 쌀의 약 40%는 지금도 3개월 동안만 비가 집중되는 건조 지대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기원전 300년부터 서기 1200년에 걸쳐서 건설된 고대의 관개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저수지의 32%는 쿠루네갈라Kurunegala, 23%는 아누라다푸라 지역에 있는데, 그 밀도는 놀라울 정도로 건조 지대의 약 4만㎞ 이내에 약 3만 개의 저수지가 구축되어 있다. 대략 1정방킬로미터마다 저수지가 있다는 계산으로, 약 33만 호의 농가가 이러한 저수지의 혜택을 받으며 마을을 이루어 살며 약 14,8000㏊의 농사땅을 관개하고 있다.

 

 

현지 주민이 자발적으로 유지 관리

 

그럼 대부분의 저수지는 왜 흙에 묻혀 방기되어 버렸을까? 비트포겔Wittfogel은 대규모이건 소규모이건, 저수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관료제도에 의해 구축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수지가 방기된 까닭도 왕조의 붕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의 인류학 교수이자 스리랑카 관개농업의 일인자이기도 한 에드문드 리치Edmund Leach 경은 거대한 저수지는 관료 제도의 업적일지도 모르지만, 마을에 있는 소규모 저수지는 그렇지 않다고 반론했다. 경이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거대 저수지가 소농이 관개를 할 목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연 거대 저수지는 거대한 두 옛 도시 아누라다푸라와 그 뒤에 천도한 폴로나루와Pollonaruwa에서 소비되는 작물을 생산하는 근교농업의 관개에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직접적인 수익은 농민이 아니라 주로 분수 등 장식용의 급수에 쓰이고 있었다. 폴로나루와를 1164~1197년에 걸쳐 통치한 파라크라마 바후 1세는 101곳의 사원과 불상을 건설하고, 수많은 저수지도 건설했다. 그런데 리치 경은 말한다.

 

“그것들은 실용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기념비였다.”

 

경에 따르면, 이러한 저수지는 왕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구축된 것이지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이와도 겹치는 것이지만, 거대 저수지의 목적이 체질적으로 장식용이며 스리랑카의 농촌은 이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앙 정권이 혼란스러워지고 거대 저수지가 황폐해진 시기에도 농촌의 삶은 아무 문제없이 적절하게 지속되었다. 각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 스스로 유지·관리하는 소규모 관개 체계가 있었다.”

 

그리고 경은 또한 관개 사업을 행하려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고대 스리랑카의 사회 체계는 중세 유럽과 다른 세계의 봉건시대와는 꽤 달랐다. 역사학의 연구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에 의해서 공사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저수지를 유지·관리하는 작업의 대부분은 라자카리야Rajakariya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자카리야란 모든 마을 사람이 농한기의 40일을 왕을 위하여 무료로 일하던 풍습이다. 나중에 영국은 유쾌하지 않은 봉건체제의 유물이라며 이 제도를 폐지했는데, 이 제도는 나라가 강제한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나라에 고용된 것도 아닌, 그 노동은 어디까지나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캔디 왕조의 궁전 밖에 인공 호수를 구축하려던 계획을 마을 사람들이 거부한 일도 있다. 그것은 장식용 전시품은 라자카리야의 노무에 의해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은 이렇게 썼다.

 

“그러기는커녕 왕의 연대기를 보면, 선선히 마을의 저수지를 잘 수리해주는 군주가 칭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작업이 국가 규모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고대부터 마을 저수지의 수리는 일반 서민의 일이었다.”

 

마을의 저수지의 유지·관리는 마을 사람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대규모 수복과 새로운 저수지를 건설하는 데에는 타밀족 카스트제도의 육체노동자 쿨란카티Kulankatti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도 국가의 고용인이 아닌 마을 사람들과 직접 계약을 맺어 일하고, 관개 체계는 지역사회의 손으로 운영되어 왔다.

 

 

마을의 생활과 일체였던 관개

 

전통적인 스리랑카의 농촌을 특징지어 왔던 것은 사원, 불사리탑(다고바dagoba), 저수지(웨와wewa), 논(케타ketha)이었다. 고대 스리랑카에서 벼농사는 직업이 아닌 여타의 사회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생존 방식이었다. 김매기, 쟁기질, 모내기, 수확의 각 단계에는 노래, 음악, 춤의 특별한 의식이 따르고, 지금도 남아 있는 전통 춤은 이러한 의식에 기원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수확, 쟁기질 등을 상징하는 율동 같은 노동에 바탕을 둔다. 캔디언 댄싱Kandyan dancing은 수확한 뒤 마을에서 실행한 코호마 칸카리야Kohomha Kankariya라는 의식이 기원이다. 중요한 것은 고비야goviya, 곧 마을의 스님이었다. 중요한 농사일은 스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쟁기질하기 좋은 날을 골라 사원의 종이 울리면 마을 사람 모두가 들에 나갔다. 스님은 논에 들어가 쟁기질하는 물소에 맞추어 노래했다. 오Ohoooo~ 암마amma, 오~ 아뽀appo 오~, ‘오’는 바다의 소리이고, 암마는 어머니, 아뽀는 아버지이다. 성가는 모든 고비야가 불렀다. 그리고 수도 근교에서 이루어진 쟁기질 의식에는 왕이 참가했다.

 

스리랑카의 쟁기질(위)과 캔디언 댄싱(아래) 

 

 

 

어느 소농 사회에서라도 마찬가지이듯 농업은 가족의 일이며, 아이들을 포함해 가족의 각 구성원에게는 특정한 일이 있었다. 논에서 원숭이를 쫓고 소와 물소를 돌보며 논에서 아버지를 거드는 것은 남자아이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땔감을 모으는 일과 식사 준비를 돕고, 소와 물소의 젖을 짜는 일을 돕는 것은 여자아이들이었다. 여자아이는 어머니나 이모와 함께 이불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아궁이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난로가 집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스리랑카에서는 어머니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마을에서는 서로 돕는 ‘아타마attama’와 ‘카이야kaiya’란 전통이 있어, 언제라도 이웃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농촌 지역사회는 친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어른들이 논밭에서 일하거나 관개시설의 유지로 바쁠 때에는 한 사람의 여성이 모든 아이를 돌보았다.

 

더하여 스리랑카의 전통 사회는 다른 어느 소농 사회에서도 그러했듯이, 수확량을 최대로 하기보다도 위험을 최소로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가뭄, 홍수, 병해충 등의 위험을 벗어나고자 농민들은 다양한 품종을 심었다.

 

 

자연과 조화된 평등한 농경사회

 

상류의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하류의 저수지에 모여 논으로 흘러가고, 서로 이어져 있던 물의 흐름이 거대한 저수지와 운하로 연결되어 나아갔다. 저수지와 농업용수와 논은 하나로 어우러지고, 또 대부분이 천 년 이상 존재해 온 것부터 인간의 구축물로 특정된 것들은 복잡할 만큼 지역의 환경과 자연 생태계와 일체가 되었다. 논, 거주지 등의 거시적인 토지이용에만 주의를 기울인 것이 아니고, 상류의 침전지(고다 왈라goda wala), 보호 제방(이스웨티야iswetiya), 상류의 바람막이(가스곰마나gasgommana), 하류의 바람막이(카타카두와(kattakaduwa) 등의 미시적인 토지이용도 생태계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하류의 바람막이숲, 카타카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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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의 물은 농사 기간을 늘리고, 건기에 벼를 재배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저수지가 가져온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농작물에 영향을 미치는 쾌적하고 시원한 기후를 유지하고, 농업 생물다양성도 보전해 왔다. 사실 저수지는 습지 생물다양성의 가장 풍족한 원천의 하나이다. 저수지 둘레의 동식물은 다양하고, 건기에는 저수지의 물이 소나 야생 동물의 유일한 수원이 되었다. 주요 저수지로 들어가기 전에 진흙을 퇴적하려고 설계된 모래막이 저수지(포타 웨티예pota wetiye)와 한쪽에 물을 대는 기간에 사용하는 ‘쌍둥이 저수지’ 등 다양한 형태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모두가 관개에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마을 위쪽의 산에 저수지를 만드는 전통도 있었는데, 그 저수지는 야생 동물이 물을 구하러 논에 내려와 벼를 망치는 것을 막고자 그들에게 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지금은 비판되고 있는 부대밭 방식의 농업 체나chena를 위하여 급수하는 산의 저수지조차 있었다.

 

하지만 부대밭 농업을 행한다고 그들이 숲을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고대 스리랑카의 문명은 숲 보호에 열심이었다. 16세기 해적 로버트 녹스Robert Knox는 배가 난파되어 캔디 왕의 포로로 15년을 지냈는데, 녹스에 따르면 숲의 파괴를 막은 것은 법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었다고 한다. 신할라족은 선조가 스리랑카에 침입했을 때 선주민의 정령이 고지대의 열대 밀림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고 믿어 숲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진실이 무엇이든, 고지대의 숲이 보호된 것은 건조 지대의 농업이 확실히 지속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천 년 전에도 섬 가운데에 치솟은 산들이 몬순을 가로막아, 숲은 그 비를 머금고 하천의 흐름을 지속하여 왔다.

 

이처럼 전통 지역사회는 흙, 물, 자연 생태계를 보전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식량 안전 보장은 그 문화의 틀 안에 짜여 들어가 있었다. 벼농사는 10~3월까지의 마하maha와 4~9월까지의 얄라yala라고 2번 이루어졌는데, 수자원을 보전하고자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쓰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마을의 집들은 근접하여 세워져 최소한의 땅만 낭비되도록 했다. 또 주요한 농사땅에 항구적인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금하는 풍습도 있었다. 벽돌을 만들 권리가 있었던 것은 왕과 성직자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흙으로 지은 작은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벽돌과 흙집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 그 결과 유기물을 농사땅에 제공했다. 그 관습은 건전한 생태학의 원칙에 따라 성립되어 있었다.

 

건조 지대의 많은 마을에는 마을의 저수지와 똑같은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처럼 저수지에 따른 관개 체계가 건조 지대의 사회조직과 전통문화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저수지를 통해 이룬 각 마을의 자립은 독특한 분산 사회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자원을 평등하게 나누고, 공평한 소유권, 이것이 바로 고대 스리랑카 문화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고, 그것이 평화가 이어지는 농촌 사회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왕조는 번영하든지 아니면 쇠퇴하지만, 마을과 그 저수지는 몇 천 년이나 쭉 이어졌다. 리치 경은 마을과 그 관개 체계의 우수한 지속성을 지적한다.

 

“마을과 관개 저수지가 한 번 건설되면, 건조 지대에서도 관개 지역을 일정한 규모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마을의 인구 변동은 매우 적었다.”

 

그리고 다른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신할라족도 ‘태양과 달이 거기에 있는 한’이란 비문을 남기고 그들의 기관을 영구적이라고 보아 왔다.

 

 

근대화에 따른 지역사회 파괴

 

하지만 영국인이 건너온 뒤, 그들은 처음에는 커피, 나중에는 홍차 플랜테이션 농장을 개간하려고 숲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독립할 때 스리랑카 국토의 40%는 아직 숲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목재를 팔아 외화를 벌고자 숲 전체가 파괴되어, 지금은 국토의 겨우 4~5%밖에 안 된다. 숲을 파괴한 결과는 비참했다. 토양침식의 영향이 모든 유역에서 일어났다.

 

식민지 정부가 벌인 대규모 관개 프로젝트도 건조 지대에서 대폭적인 숲의 파괴로 이어졌다. 식물도, 비옥한 들도 사라지고, 마을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가뭄의 위험성이 증가했다.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마을의 지역사회였는데, 지역사회가 파괴된 결과도 결정적이었다. 리치 경은 이렇게 지적한다.

 

“중앙집권화된 관개 기관이 마을 저수지의 유지와 사용에 간섭할 권한을 가진 것은 1860년 이후이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가장 먼저 행한 것은 1860년대에 관개 기관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저수지를 유지하는 책무를 빼앗아 중앙의 관개 기관에 위임한 일이다.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서로 돕는 전통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많은 주요 농사일, 특히 김매기는 이제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리랑카에서 전통적인 관개를 연구한 거의 모든 연구자가 지역사회의 연관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전문적인 일이 돈에 좌우되지 않고 이루어졌던 것은 상호 권리와 의무에 따라 엮인 지역사회의 유대(cohesive community)가 있었기 때문이다. 테넨트 경은 말한다.

 

“저수지의 파괴와 최종적인 방기는 사회 부패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해 온 지역사회가 해체된 데 원인이 있다. 그 결과 붕괴의 과정이 타국에서는 완만히 진행된 것과는 달리 실론에서는 갑자기 일어났다.”

 

이 때문에 현재 건조 지대의 거의 모든 관개 체계는 일찍이 고대에 존재하던 것보다 훨씬 조잡해졌다. 1874년의 C. 라이트Wright의 “실론 견문(Glimpses of Ceylon)”에 따르면, 300~400품종의 벼가 재배되고 있었고, 에드워드 골드스미스가 1882년 현지의 농민을 만났을 때에도 그 농민이 젊었을 무렵에는 보통 280종 이상의 벼를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15품종밖에 남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변화에 맞춰 행정당국도 치밀한 유지·관리를 행하지 않았다. 관개 기관에게 소규모 저수지는 과거의 쓸모없는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경제 비용·편익 분석에 기초하면 야생 동물의 이익을 위하여 여분의 저수지를 유지하고, 하물며 수리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전통적인 관개는 경제 편익을 위하여 희생되었다.

 

고대의 체계는 근대 제방과는 달리 지역의 수리학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용수로는 등고선을 따르고, 물의 흐름을 늦추며, 물의 손실도 적었다. 하지만 20세기의 대규모 관개 개발 프로젝트는 고대의 저수지 체계가 달성한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대의 저수지 체계를 무시하거나 파괴했다.

 

 

 

전통문화의 재평가

 

스리랑카의 1인당 쌀 소비량은 현재 약 150㎏/년이고, 수입 쌀은 10% 미만일 뿐이다. 쌀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일은 나라의 발전과 빈곤·기아를 줄이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일이다. 건조 지역의 농촌에 만연한 빈곤을 줄이는 데에도 안정된 용수의 확보가 특히 중요하며, 건조 지대에 팽개쳐진 고대의 저수지는 말라리아 기생충의 발생원이 되고 있다. 마을의 저수지를 회복하는 일은 말라리아의 소멸을 위해서도 빠뜨릴 수 없다. 이를 위해 스리랑카 정부는 2004년 마을에 있는 1000개의 저수지를 수복하는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관개 계획의 전통은 지금도 스리랑카에 존속하고 있다. 19세기의 탐험가 테넨트 경이 다시 발견한 저수지의 대부분이 회복되고, 마하웰리 계획(Mahaweli Diversion Scheme) 등 새로운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건조 지대의 몇 십만㏊의 땅을 관개하고, 나라의 발전력을 배로 늘리고 있다. 불도저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고대의 왕들이 착수한 스리랑카의 포괄적인 관개 체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Wewe Irrigation System (Sri Lanka) GIAHS, FAO. 

 (2) Edward Goldsmith and Nicholas Hildyard,Traditional irrigation in the dry zone of Sri Lanka, The Social and Environmental Effects of Large Dams, 1984.

 (3) Mr Ghaz, A Scheme That Holds Water: An Irrigation System That Goes Back to Ancient Times, March 4, 2010.

 (4) Manik Sandrasagra, Life in the Village: on the Origins of Lanka, Serendib magazine Vol. 10 No. 1 Jan-Feb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