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들 이야기/삼국지와 영웅 이야기 1

수미니 2007. 12. 5. 20:05

 

 

 

 

조조는 자신의 행위로 인해 고위층의 눈밖에 나게 되었고, 결국 승진이라는 미명 아래 지방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때부터 조조의 정치적 부침이 시작된다. 그래도 현령으로 근무하는 동안 조조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내가 말야, 옛날에 돈구 현령할 때 스물세살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한 일 중에 후회되는 일은 없어...(吾昔爲頓丘令, 年二十三, 思此時所行, 無悔於今)"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조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친척(사촌 매부)의 일 때문에, 연좌제로 파면된다.(어찌 보면 이건 그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이때다 하는 생각으로 조조를 관직에서 몰아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조가 누구던가?  내시 할아버지에다 태위를 지낸 아버지라는 나름의 백그라운드가 있었다.  결국은 의랑議郞(주로 정치적 현안을 논의하는 실권이라곤 하나도 없는 관리)이라는 자리로 관계에 복귀했고 제남상濟南相(현재 중국 산동성 제남 부근 지방 정부의 수령을 보좌하는 관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조조의 행로는 순탄치 않았는데,  두 번을 사직하고 한 번 파면되었다.  그리고 매번 사직이나 파면 당했을 때도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그가 임무를 태만히 했다거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맡은 임무를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조조는 매번 조정에 상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언급했고, 법을 엄정하게 집행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니 물불 가리지 않을 나이의 조조는 꼭지가 돌 수  밖에 없었을 거다.  그러니 매번 파면당하고 사표내고 그러지..... 그래도 이런 사람이 더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천운(다행히 내시 집안의 덕이 컸을 거다.)이다.  이정도면 젊은 시절 조조가 얼마나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그리고 그의 기개가 얼마나 당당했는지, 또 그 포부가 개인적인 영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 상층부에 있던 사람들은 조조를 실무와는 관계가 적은 자리로 몰아냈다.              


국가의 기둥이 될 훌륭한(유능한) 신하가 되기 위해서는 혼자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조조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질 않았다.  상황이 아니었던 거다. 사회의 기강이 이미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져 버려서, 내부적으로는 멍청한 임금에 환관과 외척들이 득세하고, 외부적으로는 유목민족들의 침략에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 공자님께서도  "나라에 기강이 있으면 지혜롭게 행동하고, 나라가 개판이면 멍청한 척 하고 살아라(邦有道則智, 邦無道則愚)"라고 하셨고, 우리의 똘똘이 제갈량도 출사표에서 "난세에 겨우 명줄만 연명하면서 지낼 뿐, 세력자들에게 이름이 알려져 포부를 펼쳐보리라는 생각은 못했었다.(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고 말한 적 있지 않았던가?  조조가 막 관계에 입문하던 시절은 아직까지는 전란의 시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미 그럴 전조가 보일 정도로 사회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때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똑똑한 인재를 선발했다고 하나 글도 모르고, 행실 반듯한 인재를 선발했다고 하나 아비와 따로사네.. (擧秀才, 不識書, 擧孝廉, 父別居.)",  "활줄 같이 곧으면 죽을 길이 곁에 있고, 갈고리 같이 구부정하면 되려 제후로 봉해지네..(直如弦, 死道邊, 曲如鉤, 反封侯)" 라는 식의 세태를 풍자하는 민요가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글쎄 정말로 후한 조정에서 그런 의지가 있었는지, 그게 아님 형식상 그랬는지 조조가 태어나기 훨씬 전, 한나라 순제順帝 원년(서기 142년, 漢安 元年)에는 여덟명의 어사를 파견하여 전국적으로 부정부패를 감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장강張綱이라는 젊은 어사가 있었다. 근데 이 멋진 아저씨는 수도 낙양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커다란 구덩이를 파도록 하고 수레바퀴를 파묻어 버린다. 부하가 그 까닭을 물으니 이사람 냉소적으로 한마디 한다.  "승냥이 늑대 같은 놈들이 득세하고 있는 판에, 무슨 놈의 여우새끼를 잡겠다고 ㅈㄹ...(豺狼當道, 安問狐狸)"               


조조가 막 관계에 입문하던 때는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사실 그땜에 조조 아버지도 이름뿐이지만 삼공의 하나인 태위를 역임할 수 있었다. 돈으로 사면되니까... 믿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설에는 1억 전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능력으로 인재를 선발하고 적소에 배치하는 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돈으로 관직을 산 사람들은 다시 그 돈을 메꾸기 위해 백성들로부터 혹은 다른 이권에 손을 대는 일이 흔하던 때였다. 그럼 돈이 없는 사람은 어떡하지?     


한번 보자 ......... 당시에 사마직司馬直이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나름 인물이 훌륭한데 돈이 없었다고..... 그런데 조정에서 그를 태수로 임명했고, 임명장을 주면서 돈을 달라고 그랬다나... 거기다 이사람 가정형편을 생각해서 태수 가격도 할인해주고.... 그런데 이사람 청렴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나 보다.(세상이 어지러우면 이런 사람은 살아남기 힘들다.)  돈은 없고 그렇다고 백성들 고혈을 짜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사표를 내고 임지에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취임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사표냐구? 옛날에는 그랬다. 형식적으로 임금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는 거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유명인사들 봐도 늙어서 벼슬 제수되면 바로 ‘나 이거 못해!’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일단은 임명장 받고 사표를 내는게 그 당시의 예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사직을 허가하지 않았고, 억지로 임지로 보냈단다. 그래서 결국 이사람 임지로 가는 도중에 자살하고 만다.  그 와중에도 이 아저씨는 '이런 짓거리 하는 거 나라 망할 징조다. 계속 이딴 식으로 정치하면, 나중에 니들이 나라 말아먹는 거다' 라는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져갔다고 하니..... 


이런 사람이 있었던데 반해, 한나라 영제 때 최열崔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기주冀州 지방의 유명인사로 학식과 도덕성을 겸비했다고 불린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자수성가해서 군수를 역임했고, 관직이 구경九卿(三公 바로 아래쯤, 지금의 장관정도 되겠다.)에 이르렀다. 근데 다른 사람들 다 삼공을 사는거 보고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었나보다. 근데 황제 유모를 했던 정程씨 부인이 자기한테 부탁하면 50% 할인도 가능하다고 말해준다. 마음이 동한 최열은 50% 할인된 금액을 그녀에게 지불했고, 황제는 그를 사도司徒에 임명한다. 근데 황제가 생각해보니 이거 너무 손해본거 같다. 그래서 중신들 앞에서 후회스러운 모양을 보인다. 그러니 동네방네 소문 다나고..... 최씨 집안 체면은 둘째치고, 조정의 위신까지 땅에 떨어졌다.  그러다 결국 최열 아들은 관직을 돈으로 산 아버지에게 대들고.... 뭐 그랬단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그런 일들이 많았다. 정치헌금하고 전국구 또는 지역구 의원이 되고... 또 그 돈이 아까우니 이권이 있는 곳에는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몇몇 의원들 빼고, 국회의원은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경향이 지방의원이나 지방자치 단체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제일 큰 문제는 그런 사람들 뽑아주는 거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뽑아주는 우리도 할 말 없는 건 아니다. 누가 뭐 어떤 놈인지 뭘 알아야지.. 선거법은 시민단체가 낙선 운동하는 것까지 막고 있으니, 후보가 어떤 일을 했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다. 하긴 정치무관심도 여기에 일조하긴 한다. 그리고 이건 전세계적인 현상인거 같고....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뭔들 관심 있겠나? 하지만 우리 잘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자연스러워지면 나중에는 먹고살기 더 힘들어진다. 선진국들은 그나마 신경 덜써도 그런 정치 시스템과 문화가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낮다. 근데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 같은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받아들인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직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과정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이 부분에 대한 많은 관심이 필요 한거다.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사람을 뽑는 일은 보통 사람들의 책임이자 의무인 것이다. 결국 미래는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며, 어느 한사람 영웅적인 인물의 책임도 아니며, 그들만의 권리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조조는 영리했지만 무턱대고 달려드는 편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불의를 눈뜨고 보지 못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청년이 부패한 사회에 맨몸으로 맞서려 한 것이다.  그러기에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고, 국가의 폐단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자 노력했던 거다.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매번 그를 파면하거나, 하는 일을 방해했고 열받은 조조는 때려치기를 반복했다. 하긴 조조가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할아버지 후광과 아버지의 뒷치닥거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결국 조조는 정관계의 부패가 이제는 손쓸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후한 왕조의 몰락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그리고는 다시 이런 헛된(?) 노력을 더하지 않았다.(太祖知不可匡正, 遂不復獻言)  마침내는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가 책을 읽고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게 된다.   그렇지만 조조가 아무 생각 없이 놀고만 있었던 건 절대 아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국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동탁에 의해 한나라가 개판이 되기 직전 낙양으로 돌아와 공직에 다시 몸을 담는다. 


       이 인간이 동탁이란다.    물론 인터넷에 떠도는 게임 인물 이미지이긴 하다.    

 

 

         


조조가 다시 세상에 나섰을 때는 난세라는 말이 적당할 정도의 대혼란기 였다. 중평 6년 (서기 189)년 영제가 죽고 열네살 먹은 새 황제 유변劉辯과 아홉살난 유협劉協만이 남겨지게 되었으니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정치를 이끌어가기에는 시세가 너무 험악했다. 결국 권력투쟁은 하何 태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何進을 대표로 하는 관료 집단과 십상시十常侍로 대표되는 내시들간의 충돌로 귀결되었는데, 하진은 십상시들과 반대파를 제어하기 위해 서북 군벌 동탁董卓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동탁이 도착하기 직전에 십상시들은 하진을 죽이고(사실 하진이 십상시를 죽이려고 했지만 누나 하태후는 예전 영제가 재위할 때 폐출 될 뻔한 자신을 구해준 십상시들을 용서해주자고 그랬고, 이 때문에 하진이 도리어 십상시들 손에 암살당한 거다.), 동탁은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십상시들을 몰살하고 권력을 잡는다.            


이걸로 교통정리가 되었으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을 걸 동탁이라는 인간은 교양 있고 도덕성이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 인간은 사람 죽이는거 좋아하고 음란한 짓거리하기를 즐겼다. 식자층에서 보기에는 인간도 아녔던 거다. 어린 황제를 폐위하고 그 동생을 황제 자리에 앉힌 건 물론, 일설에 의하면 중신들이 참가하는 연회를 개최하고 여러 신하들 앞에서 전임 황제의 후궁들을 강간하는 변태 짓거리를 하기도 했고, 눈에 잘못 보인 놈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긴 황제까지 맘대로 바꾼 놈이니 세상에 무서울게 하나도 없었나 보다. 동탁은 물론 그 휘하에 있던 여포呂布나 다른 부하들도 무식하고 개 같은 짓거리 하는 건 마찬가지 였다고 한다. 곳곳에서 살인 약탈을 서슴치 않았던 거다.  이러니 전국적으로 동탁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이걸 기회로 지방 군벌세력들은 중앙의 간섭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세력화 하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하진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 지방의 군사 통수권을 가진 행정관으로 임명 되었던 자들이다.             


젊은 조조... 어찌 보면 현실을 너무 등한시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을 위해 노력했었다. 그런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몸 바쳐 보려했던 조조의 꿈은 결국에 가서는 물거품이 되었고, 이제는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무력과 정치적 수단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나라를 자신의 마음에 맞게 재배치하려는 꿈이고 지금부터 조금씩 실천에 옮겨간다.

 

 

간웅의 결심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