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스님 _ 제32회 보향합성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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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정현스님_불설아미타경

2012. 9. 2.

  방송 보기: 불교TV

 

참여해 주셔서 법당 참여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불설아미타경 강좌는 금강산 건봉사에서 진행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건봉사 불자님들하고 더불어 오늘 또 특별히 백중기도 제 4재를 모시게 된 그런 좋은 인연이 되어서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문을 전하게 된 그런 인연도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오늘 32번째 법문을 설하게 됐습니다. 보배로운 향기로 합당히 마땅히 이루어지는 원을 갖습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거든요. 다시 말하면 보배로운 향기로 모든 것을 만들어서 원을 세우시면 그 원에 의해서 부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라고 설명 드리는 것이 오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읽으면은 寶香合成願보향합성원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장비구께서 32번째 발원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요즘 말로 바꾸면 이렇게 의역해 올리면은 초등학교 학생이다 하고 따라 해 보겠습니다. [나는 보배로운 향기로 모든 것을 성취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보배로운 것을 설명하고 있거든요. 얼굴 들어 저 좀 보세요. 이 세상에 보배로운 것이 뭐라고 생각이 돼요? 보배로운 것이 뭐가 보배로운 거죠? 돈이 많은 것도 그게 보배고. 건강해지는 것도 보배고. 또 사랑스러운 사람들끼리 같이 어울려서 가족이 사는 것도 이게 보배일 수 있고. 또 절에 와서 부처님 법문 듣는 것도 요게 보배로운 것이고. 그렇죠. 그죠.

 

거기다 또 중요한 게 부처님께 기도하고 예경드릴 수 있다면 더 바랄 수 없는 보배로움이죠. 이런 보배로움을 갖고 있어야만이. 그런데 이 보배로운 것을 자기 자신이거나, 또는 가족이거나, 사회거나 절집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보배로우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안목의 틀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무엇으로 움직이냐 그러면, 이것이 화합해서 서로 모이면서 이게 (모일 합) 합집합할 때 합이거든요. 모여서 서로 모여서. 그래서 이거를 합이라고 표현하고 그 합에 이르는 것은 반드시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합성. 이렇게 돼 있습니다. 보배로운 것을 먼저 하나씩 찾으셔야 되요.

 

우리가 살면서 보배로운 것을 자꾸 찾아야 되는데, 보배로운 것은 금은보화가 많은 것도 보배라고 말하고. 자기 인생이 아주 귀하고 또한 귀한 것이어서 요것도 보배라고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우리가 살면서 다 이게 보배로운 거고, 또 생활 속에서 잠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 일들이 우리한테 전부 보배로운 것들이 가득 찼다라고 이렇게 아미타경에서는 설명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들어있는 보배로움을 좀 찾으셔야 되잖아요. 이게 우리 자신이 안에 들여다보면 자기가 보배롭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갔어요.

 

이게 2500년 전에 석가세존께서 이것을 누누이 누누이 설명하셨고. 그 설명한 내용들 안에 오늘날 우리들에게 또다시 나는 빈약하고 결핍된 삶에 대한 정신적 생활이나 물질적으로 결핍이 됐다라고 하는 이런 탐욕에 대한 생각들을 이제 놓아버리기만 하면, 마음을 그냥 그쳐버리기만 하면, 그러니까 여기 좀 보세요. 어떤 사람은 끝까지 돈에 탐착을 붙어서 그 돈 하나가 들어가고 없어지고, 벌어들이고 내보내는 것에 엄청나게 싸우는 사람이 있어요. 성질 부리고 화를 부립니다. 그러니까 누가 갖다 주면 아주 좋아해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자기가 쓰는 게 쓰게 되면 성질나요. 기분 나빠요. 그게 우리 일상사거든요. 그건 내가 왜 그러느냐? 봤더니

 

하루에 저~ 아침마다 밤늦게까지 5만 원, 6만 원 받아들이는 일상 속에서 일당을 버는데 돈 몇천 원 가지고 싸웁니다. 천원, 이천 원 가지고 정말로 진짜 싸워요. 왜 그러냐 하면 만원, 2 만 원이 그 사람들한테는 생명이고, 하루를 살아가는 생명 줄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말해볼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조금 나가면은 화가 나죠. 자기가 쓰지 않고 손해를 본다. 이렇게 생각하면은 엄청나게 화가 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죠. 그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둘씩 이것을 찾아보면은 불교공부는 결국 자기 안에 깃들어있는 보배로운 걸 찾는 거에요. 주는 것은 아무 문젯거리가 없어요.

 

우리가 노동하고 밭일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먹는 거, 가지, 오이, 배추 같은 거 나눠 주는 데는 자식이라든가 귀한 곳에 나눠 주는 데는 굉장히 마음에 기쁨이 생기잖아요. 부처님께 공양 올릴 때도 기쁨이 생기고. 그게 사람의 인지상정이고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생활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자기가 보배로운 걸 모르는 거에요. 눈앞에 있는 아주 작은 것만 거기에 인색하고, 거기에 매달려 가지고 탐착심을 가지고, 불안함을 느끼고 또 불쾌감을 드러내고 또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위한 불평과 변명에 대한 준비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자기를 지배하고 산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 안에 들어있는 보배로움을 평생 지나가면서도 보지 못하는 거에요.

 

절에는 철저하게 뭘 가르쳐요? 자비롭게 대하라. 먼저 베풀어라. 보시해라. 자비로워져라. 애정을 가져라. 또 믿음을 가져라. 또 그렇죠. 그죠. 그다음에 육체를 가지고 계시니까 건강하게 살아라. 부처님이 계셨다면 지금 요렇게 설명했을 거에요. 육체를 건강하게 사는 것도 불은혜를 갚는 거에요.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거에요. 힘든 육체가 따로 있는 법은 없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둘씩, 하나둘씩 자기 안에 보배로움을 불교를 통해서 기도를 하면서 저 나무아미타불을 기도염송을 하면서 자기 자신 안에 감사 송을 해가는 과정 안에서 자기 스스로 발견하게 돼요. 그러면 육체도 귀하기도 하지만 그 육체 안에 깃들어있는 저 아미타경에 설명하고 있는 불성 부처님께서 우리한테서 같이 작용하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하시게 되시는 과정을 되게 돼요.

 

그래서 32번째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보배로운 향기라는 뜻입니다. 오늘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내가 저 어디서 피곤한 언어와 피곤한 표정과 피곤한 불편함을 내보내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있는 본질적으로 들어있는 내용은 곧 뭐죠? 향기로울 뿐만 아니라 보배로운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르침 안에 보면 아주 단순한 불교적인 견해로 보면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출가 된 세계를 기도가 깊은 사람을 다 출가했다라고 말하고, 수행이 깊어진 것을 다 수행이라 그러고요. 일반적으로 머리를 깎지 않고 스님이 안 돼도, 또 수행이 깊어지고 마음이 넉넉해지고 편안함이 보다 많이 자기가 가질 수 있으면, 이건 세속에서 좀 떠나가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구분하기가 많이 어렵습니다. 아주 많이 구분하기가 어려울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보편적으로 세속적인 마음은 우리가 사는 이 세속적인 삶이라도.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 지금 살아가잖아요.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도 석가세존께서는 이걸 뭐라고 설명했냐하면 우리들의 본질은 광명 그 자체라는 겁니다. 우리들 본질 그 자체는 광명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들 자체는 다 평온 그 자체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본질 자체는 본래 자비롭다는 뜻입니다. 오늘 세 개 지금 얘기했거든요. 우리들의 본질은 빛으로 가득한 존재에요. 그리고 우리들의 본질은 다 광명으로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자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리고 우리 자체는 전부 평안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에요.

 

요 세 가지만 외웁니다. 오늘 세 가지만 외우셔야지 더 하면은 돌아서다가 금방 또 잊어버리시기 때문에, 여기 좀 보십시다. 우리 자신이 그냥 세상에 적당히 와서 적당히 가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 안에는 전부 뭐가 들어있어요? 광명스런, 부처님의 광명이 깃들어있다는 말이에요. 그러시죠? 두 번째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가득 차 있다. 세 번째 뭐죠? 저 부처님의 평화로움이. 평온하다. 이러잖아요. 평화로움이 나한테 꽉 들어차 있다는 거에요. 그렇죠. 그죠. 그런데 묘한 걸 볼 수가 있어요. 그 본성은 반야심경에도 금강경에도 이것을 철저하게 말씀을 드리고 계시는데. 이 본성은 절대 어떤 것도 더럽게 할 수 없고, 소멸할 수 없고, 무너지게 할 수 없고, 괴롭게 할 수 없다는 거에요.

 

누가 나를 들여다볼 때 누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봐서 거울을 들여다보든지, 자기가 머리를 흩트려 보든지, 자기에 대해서 파악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에요. 수행이 깊어지거나 기도가 깊어지지 아니한 사람한테는 언제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안에 이런 광명이 빛으로 가득한 존재인 줄을 자기가 한 번도 생각을 안 해 봐요. 그런데 성질 부리는 게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시비분별하는게 그게 자꾸 자기라고 생각해요. 남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용서를 못 해. 눈감고 지나가는 법이 없어. 그거 꼭 지적하고 얘기해야 되고, 그거 꼭 지적하고 말을 하고 시비를 걸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본질 안으로 그렇게 들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쳐다보지 않는 거에요. 그걸 오늘 32번째 보배로운, 보배로운 향기로 가득한 존재라고 설명을 하고 계신 거에요. 쉽죠. 그죠. 그런데 그게 우리들한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걸 통해서 합성해준다는 거에요. 모여서 이루게 해주는데, 그 끄트머리에 뭐라고요? 원을 일으키는 사람한테는 반드시 일으켜진다는 거에요. 왜 그러냐? 본질적으로 우리한테는 뭐라고요? 저 불성 부처님의 가치가 깃들어져 계시다는 뜻입니다. 너무 쉽죠. 그 다음에 뭐죠? 내가 자비로운 존재라는 거에요. 자기가 자비로운 존재라고 깨우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하니까 끊임없이 자기 안에 불편함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저 불평, 불만 심이 끊임없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동안 자기가 인생이 망해져가요. 거꾸로 가요.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가호지묘력은 끊임없이 우리를 보살펴주고 지켜주시는 그런 원동력에 속에 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이 너무 많이 자기가 이걸 지배를 하기 시작을 하면은 존재성이 없어져 버려요. 그러시죠? 그죠? 그래서 사람의 본질은 다 부처님의 본질이거든요. 그래서 거기에는 광명이 깃들어있고 자비로움이 깃들어있고 거기에 평화로움이 평온이 거기 가득하게 깃들어있다는 뜻입니다. 본질적으로. 아주 놀라운 것이죠. 이것은요. 어떤 회사의 일이나 사회나 가족이나 어떤 것으로도, 어떤 사람으로도 이걸 본질적으로 더럽힐 수가 없다는 거에요. 이것은요. 어떤 사람이 수행을 잘했어요. 기도를 잘하고 삽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무리 밖에서 비난을 하고 아무리 욕을 하고 아무리 뭐라고 하고 아무리 위해를 가해도 그건 할 수가 없어요.

 

기도 잘하는 스님한테는 아무리 밖에서 무슨 짓을 해도, 무슨 어떤 곤란이 다가와도 다 이겨갈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 스님한테. 그것은 기도 잘하는 스님이 그렇게 돼요. 우리 건봉사 여기 스님들은 그렇게 다 기도하고 살아요. 불자님들 위해서 우리 스님들 열심히 잘 기도해주시고 고맙게 생각을 해요. 우리 고맙고 감사한 일이 하나둘 일이 아니에요. 감사하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점이 뭐냐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광명스러움, 자비로움, 평화로움에 대해서 이건 어떤 것도 더럽게 할 수도 없고, 훼손할 수도 없고, 물러나게 할 수도 없고, 괴롭게 할 수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걸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고, 그게 자꾸 깨우쳐지지 않고, 그게 자기한테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모여서 재도 모시고 기도도 하고 염불도 하고 수행도 하고 철야도 합니다. 너무 쉽죠.

 

그 쉬운 거를 그렇게 안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경전을 살펴보면 본질적으로나 어떻게라도 이것은 없앨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 깃들어있는 것은. 요거를 오늘 받아들이시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믿으셔야 되요. 그러시죠? 하여튼 그렇다 그러고. 지금 돌아서서 잊어버려도, 지금 깨우친 공덕은 안 없어집니다. 오늘 돌아서서 공양 드시면서 다 잊어버려도 절대로 안 없어집니다. 여기 좀 보세요. 만일에 사람한테 우리가 아까 좀 전에 말씀드렸죠? 증오하고, 분노하고, 또 번뇌가 쌓이고, 불평불만 심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우러나는 것이, 만일에 이게 사람한테 생기는 자연적인 본질이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처음부터 내 마음이 본래 사람은 화도 내고 이게 사람의 본질이다. 이러잖아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사람의 본질은 절대 분노하거나, 불안하거나 불평하거나 또 마음의 괴로움이 일어나거나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없는 거에요. 저는 경전을 통해서 여실하게 여실하게 하나둘씩 찾아보니까 어떤 사람이라도 처음부터 그 마음이 항상 화를 내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더불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 물질적 결핍으로 인해서 가난하다는 그런 굴레가 과거 전세에 업 외에는 다른 것에는 전부 그 외에 어떤 것도 이 사람을 가난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힘들게 하거나 억울하게 할 이유도 전해 생기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인과 관계 속에서, 인연관계 속에 생기거든요. 사람이 만일 화내는 게 본질이고, 사람이 화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한테는 때때로 그럴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화내는 사람은 없어요. 본질적으로 우울 속에 들어있어서 태어나는 사람, 과거 전세 업, 태어날 때 그런 사람 있어요. 그건 과거 전세에 반드시 업입니다. 그것도 부모가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감당하셔야 되요. 더럽고 천한 것도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는 원동력을 우리 스스로에게 가질 필요가 있으시죠? 그러시죠? 그죠? 그래서 만일에 증오나 분노나 불평불만심이나 화내는 게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이게 본질이 아니에요.

 

왜 이렇게 되느냐 그러면,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이건 과학적으로 점검된 것이 뭐냐 그러면, 특정한 상황에 처할 때만 우리는 화를 내요. 이득이 덜 생겼다는 생각에서 화를 내고, 피해가 생겼다. 그러면 화를 냅니다. 자존심이 상했다 라고 생각하면 화를 냅니다. 그렇죠. 그죠? 그리고 부부간에 자꾸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도 싸우고 화내고 하는 것들이 우리 사회 속에 전체적으로 이렇게 많은 그런 경우를 볼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뭐라고 표현했냐하면 화를 낼 상황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증오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증오의 본질은 마음의 본질과 서로 다르다는 증거라고. 이건 과학적 데이터에서 정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