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스님 _ 제33회 촉광유연원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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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정현스님_불설아미타경

2012. 9. 9.

  방송 보기: 불교TV

 

으음. 잘 지내셨습니까? 으음. 오늘은 33번째, 페이지는 46쪽에 보면 33번 촉광유연원이라고 하는 비구, 법장비구의 48대원 중 33번째를 같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발음이 막센다. 찾아 놓으셨어요? 얼굴 들어 저 좀 보세요. ~ 불설아미타경이라고 하는 경전을 저희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불설아미타경이라고 하는 말 그 자체 안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 중에 아미타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다. 그러니까 아미타불에 대해서 소상하게 설명했고, 그것이 왜 필요했는지. 왜 배워야 됐는지, 왜 실천해야 됐는지에 대한 요런 내용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 옮겨놓은 것이 불설아미타경이다. 라고 돼 있거든요. 으음.

 

그래서 그것은 어~ 아미타경에 대한 이야기는 곧 아미타불에 대한 설명이시거든요. 그 얘기는 처음 시작하면서 여러 번 말씀을 드렸거든요. 오늘 공부하러 오면서 느낀 게 뭐냐 그러면요. 안개가 이렇게 꾹~ 차있어요. 안개가 있을 땐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요. 그런데 령을 넘어서면은 반짝거리고 길이 훤하게 보인단 말이에요. [스님께서는 강원도 건봉사에서 진부령고개를 넘어서 서울 지장사까지 오십니다.] 그건 참 어려운 일 중에 하난데,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혼돈 속에 살아요. 인생에 안개가 꽉~ 들어차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 안개가 거치고 나면, 그러니까 이게 사라지든지 바람이 불어오든지 햇빛이 나든지.

 

이런 방식을 통해서 이렇게 앞뒤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둡고 캄캄한 것을 벗어나게 되면은 그다음부턴 길이 좋은 길이 보기거든요. 그러긴 자기 자신 안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안갯속을 가듯, 어둠을 통과해가듯, 인생이 이렇게 뚜렷하게 뜨이지 못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제 딱~ 광명으로, 그게 길로 설명이 됐고, 빛으로 설명이 됐고, 자비로 설명이 됐고, 사랑으로 설명이 됐거든요. 그게 설명 해 놓은 것이 우리가 잘 아시는 것처럼 아미타경이라는 경전입니다. 그 경전에 의하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느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관계 속에 살거든요.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지나가도 풀어지지가 않습니다. 거기에 빛처럼 광명처럼 자비로운 것처럼 사랑스러운 그런 길을 인도해놓은 것처럼 행복의 길을 인도해놓은 것처럼 그게 부처님설명으로 말해진 것이 오늘 33째 길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촉이거든요. 촉이라고 하는 것은 느낌이라는 뜻이거든요. 느끼는 곳에 자세히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 안에 우리들 자신 안에 놀라운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으음. 이해가 안 되는 것 중에서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거, 그게 불경을 잘 공부하는 거고, 기도를 잘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먹고 사는 것이 어지럽다가 그것이 이제 평이로운 것에서 광명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을 일러서 기도하는 것이고 경전을 잘 배우는 것이죠. 너무 쉬운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면은 부처님의 법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고걸 설명하고 계세요. 여기 보면은 뭐라고 돼 있냐 하면은 촉광이라고 설명돼 있거든요. 빛은 반드시 있는데 이것은 느껴야 만이 된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온갖 것을 경험하고, 온갖 고초를 겪고 나고, 온갖 굴욕을 체험하고 나서야 만이 비로소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이것도 괜찮은 거구나. 이것도 감사한 거구나 하고 느껴질 때, 비로소 촉광의 세계를 느끼게 됩니다. 으음. 너무 쉽죠. 그죠. 이 피부로 느끼는 거에요. 뭐를요? 광명의 느낌을 피부로 느끼시는 거에요.

 

그래서 석가세존은 불설아미타경을 빌어 말씀하실 때 뭐라고 설명하고 계시냐 그러면, 우리한테 광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광명을 우리 식으로 바꿔 얘기하면 불성 세계가 있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촉광, 느낌으로 해서 광명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잖아요. 이게 체험을 하셔야 돼요. 자기 안에 광명이 깃들어 있는 줄을 알면 돼요. 그걸 불교식으로 바꿔 얘기하면 뭐라고 표현 하냐 하면은 불성이 깃들어있는 존재다라고 이렇게 아시면 돼요. 너무 쉽죠. 그죠? 사람한테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성장하게 하고 또는 뭐죠? 진보하게 하고, 또 이렇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기운력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걸 일러서 우리는 뭐라고 그러냐 하면 힘이다. 이렇게 말하죠. 힘내자.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힘이 요게 어디 있냐 그러면, 본래부터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거 본래부터. 누구한테? 자기한테. 이거 본래부터있다라고 가르쳐주고 계세요. 그거를 불교식 개념으로는 너무 쉽게 설명 드리고 있는 것이 뭐냐 그러면, 불성의 세계다라고 표현합니다. 불성의 세계가 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자기에 대해서 잘 이해 못 합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자기가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생활을 이해하느냐 그러면 다 이해 못 합니다. 으음. 부자 되는 방법을 알고는 있어도 실천 안 하는 사람이 훨씬 많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어떻게 존재해있는지도 사실은 구분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잘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그거를 설명하기를 뭐라고 설명했냐하면 이거를 촉광이라고 말합니다. 촉광. 느낌으로 느낌으로 빛을 안다. 요런 뜻이거든요. 그걸 촉광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거를 여기서 말하는 33번째 얘기는 불성이 나한테 깃들어있는데, 이 빛은 스스로 뭐죠? 피부로 느끼지 않기 때문에 불성이 내게 있는지 없는지 구분조차도 못한다. 이런 뜻이거든요. 물어보십시다. 혹시 저 불성이 우리에게 있어요?

 

지금 아직 다 이게 확인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셔도 그냥 있다라고 시작하는 게 좋아요. 으음. 무조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이제 이거를 차츰차츰 하다 보면은, 자기 존재성이 육체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의 내가 아니라, 영원불멸한 자기 생명체계를 자기 스스로 깨우치게 돼요. 그거 하기 위해서 저~ 기도하고 염불하고 저~ 수행하고 다 그래 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이거는 누가 안다고요? 그죠? 느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거를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 그렇죠. 느낌이 있는 사람은 불성을 느낀다. 이런 뜻입니다. 느낌이 있는 사람이어야 돼.

 

그래서 그걸 보고 옛날식으로 이걸 보고 뭐라고 그러죠? 감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 얘기 들어 보셨죠? 감이 있다. 이렇게 말씀드렸죠. 그런데 이게 이 느낌을 불성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부터 있는데, 느낌이 있는데, 느낌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 하면 요건 뭐죠? 밝음으로, 광 그러면 좀 이상하잖아요. 이게 밝음이거든요. 밝으므로 느끼기 시작하면은 반드시 불성이 있고. 그 불성은 본래부터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온 게 말이 무슨 얘기냐 하면, 지금 요걸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본래 자기 힘이니까. 본래 지금부터 자기 거라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 자신의 것이랍니다. 자신의 것이에요. 부처님 법은 요렇게 설명하고 계시거든요. 그렇게 볼 때 이 불성 그 자체가 가지는 것은 아무도 요것을 느끼지 못하면 없는 거에요. 그렇죠. 그죠. 놀라운 것을 하나씩 하나씩 좀 볼 수가 있는데. 이런 느낌을 갖는 그 순간부터 누가 느껴요? 이걸 느끼는 게 누가 느껴요? 자기 자신이. 그렇죠. 그죠. 자기 자신이 우리가 이거를 이렇게 말하죠. 이게 자신이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스스로 믿는 자가 그걸 느끼는 거에요. 어떻게요? ~ 보세요. 저 좀 보세요. 지나간 것에 헤아리지 않다고 그러죠. 불교에서는 분별하지 않기, 집착하지 않기, 탐착하지 않기. 이런 거 끊임없이 절집 안에 계속 이야기되잖아요. 그죠?

 

오늘 처음 들으신 분처럼 표정이 전혀 모르시는 분처럼 그렇게 생각하게. 매일 듣잖아요. 그죠? 전 놀라운 걸 들었어요. 뭘 들었냐 하면 고타마싯달태자가 사문유관, 네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있죠. 병든 사람, 늙어가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 그렇죠. 그죠. 이렇게 물으면서 물어요. 우리는 수없이 그걸 배웠어요. 수없이 배우면서 뭘 느겼냐 그러면, 그래서 고타마 싯달 태자가 어떤 수행자를 만나서 그 수행자가 나도 저 사람처럼 병드느냐? 그랬더니 그렇다는 거에요. 나처럼 저렇게 추한 모습으로 내가 늙어가는 사람이냐 그랬더니 나도 그러냐니까 왕자도 그렇다는 거에요. 죽은 사람보고한테는 뭐라고요? 나도 이렇게 죽느냐? 그래서 깨우쳐 안 거에요.

 

그런데 이거는요. 태어날 때부터 이건 정한 사실이거든요. 나도 병들고요. 나도 늙고, 나도 죽거든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병 안 든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병들면 그때부터는 거기에 탐착이 붙어가지고 못 벗어나고요. 늙음에 탐착이 여기 붙으면은요, 못 벗어나요. 일단 죽어가기 시작하면 못 벗어나잖아요. 그죠? 그런데 그거를 그러니까 진리라는 게 그런 거 같아요. 우리 어렸을 때는 그런 게 전혀 느낌으로 오지 않았었어요. 죽어가는 사람을 무수히 무수히 보고 삶에도 저거 불쌍하다든가 마음으로 살짝 좀 측은지심이 좀 생기다가 지나가면은 즐거운 일이 있으면 거기 춤추고, 노래 부르고, 놀고 하는데 거기 가서 신경 쓰지. 그런 느낌을 전혀 갖고 있지 않고 살게 되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아픈 것처럼 나도 아프다는 거에요. 저 무수히 많은 병자가 나도 병자일 수 있다는 거에요. 나도 중환자실에 링거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못 면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탐착에서 못 벗어나요. 시비분별해서 전혀 놓을 생각이 없어요. 십 원만 손해가 나면은 난리가 납니다. 으음. 형제끼리라도 저~ 재판을 불사하고, 2만 원 3만 원을 뺏기 위해서 사람을 죽입니다. 그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요. 우리 너무 잘 알다시피 저쪽 아프리카나 저~ ~ 이게 극빈 나라가 더러 있잖아요. 그죠? 거의 매 4초 만에 한 명씩 아이들이 죽어요. 지금도.

 

왜 죽느냐 그러니까 굶어 죽어요. 그러니까 느끼지 않는 거에요. 그런 것을 느끼면 지금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 건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얼마나 이게 다행한 것인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거든요. 불자는요. 세상사는 거 끊임없이 말씀을 드리지만,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께 삼배하고, 부처님께 불명을 받고 귀의한 사람은 삶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아야지 되요. 무서워하지 말아야 되요. 욕으로 대하지 말아야 되요. 악으로 갚으려고 애쓰지 말아요. 할 수만 있으면 자비로 우리가 세상을 대해서 이겨가야지. 사랑스러운 것으로 세상을 대해서 이겨가야지. 억울한 거 헤아리지 말라고 보왕삼매론에 무수히 많이 설명하고 있거든요. 법구경에도 설명하고요.

 

그냥 웬만하면 용서하고, 웬만하면 그냥 물에 떠나보내고 그만 나 둬야 돼.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다단하고 이렇게 아픔을 겪고 있고, 이렇게 이 슬픔을 겪고 있고 끊임없이 심음 고통 하는 인생 삶 그 자체에 빛처럼 갖다 준 것이 불성의 세계가 당신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 불성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있다는 거에요. 언제부터? 태어나기 이전부터. 살아있을 때도 지금도 존재해 있고. 내가 저~ 늙고 병들고 죽은 다음에도 나는 그냥 그대로 존재해 있다는 거에요. 그렇죠. 그죠. 누누이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그게 이게 자신이라는 거에요. 이게 믿어야 돼. 그러니까 이런 불성의 광명이 그렇죠. 그죠. 빛이죠. 밝음이 반드시 본질적으로 있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감동이 없는 사람. 그렇죠. 그죠. 행복하지 않은 사람. 보통 보면은 이게 감이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이 있구요. 이 사람한텐 기쁨이 있어요. 그렇죠. 그죠. 그러고 이 사람한테 뭐가 있어요? 깊은 감동이 자기에게 있는 사람은 그 느낌이 충분히 살아서 껍데기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들어있는 본질적인 믿음을 갖게 돼요. 그럼 같은 거거든요. 이 느낌은 어떻게 불러 들이냐 하면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먼저 갖는 거에요. 자기 자신의 믿음을 먼저 가지면 이런 느낌을 밝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거에요.

 

웬만하면은 좋은 일로 받아들이세요. 웬만하면 감사한 일로 좀 받아들이세요. 웬만하면은 행복한 일로 받아들이세요. 영원히 그 끝에서 안 벗어납니다. 시비분별은 평생 해도요, 죽는 순간까지 거기서 못 벗어나요. 그러다가 살다가 가실 거면은 뭣 때문에 세상에 왔는지를 모를 정도예요. 즐겁게 사셔야 돼. 기쁘게 사셔야 돼. 으음. 이게 감에 기쁨과 감동을 우리에게 가져야 돼.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꼭 정리할 것이 뭐냐 하면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어떻게 느낄 것인가? 이게 중요하잖아요. 제일 첫 번째 하는 일마다 1_잘 되고 있다. 아주 쉽다. 잘 되고 있다. 쉽죠. 그죠. 으음. 하는 일마다 잘 된다고 생각하셔야 돼. 하는 일마다. 뭐죠? 2_좋아지고 있다. 같은 이야기거든요.

 

세 번째 뭐라고 그래요? 잘된다. 좋아지고 있다. 잘 이루어지고 있다. 3_잘 성취하고 있다. 이게 똑같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현재 진행형이죠. 현재 진행형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렇게 잘 되고 있고, 지금 좋아지고 있고, 지금 성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딱~ 공통적으로 뭐죠? 우리가 불교식 개념은 이미 밝으므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이미 뭐죠? 잘 되고 있고, 이미 좋아지고 있고, 이미 성취하고 있다. 이렇게 배우십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본질적인 본래 느낌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觸光촉광이라는 뜻입니다. 觸光촉광은 어떻게 된다고요? 柔軟願유연원이라 그랬어요. 부드럽게 하라고 그랬어요. 그렇죠. 그죠. 악으로 맞서지 말고, 차가움으로 대하지 말고, 악한 말로 보태서 생각하지 말고, 뭐라고요? 그죠? 부드럽게. ~ 웃으면서 이잉.

 

웃음은요. 돈 생깁니다. 앞날은 내가 만들고 있어요. 역사는 지금 아직 만들어지지 않고 있거든요. 만들어지는 세계가 있을 뿐이지 정한 미래는 없는 거에요. 자기 가족이나 삶이나 앞날에 대해서 지금 내가 만들어간다니까요. 창조해 가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살아요. 자기 가정이나 자기 가족이나 자기 삶을 앞날을 자기가 만들지 어느 놈이 세상에 만들어주는 법이 없어요. 행복한 가족도 자기가 만들고, 그렇죠. 그죠. 불교는 어려운 듯하면서도 놀라운 것을 가르쳐줘요. 잘 보십시다. 우리 마음 안에 놀라운 힘이 있어요. 그 놀라운 힘이 뭐냐 하면 불성이 있다는 거에요. 다만 촉광이에요. 밝으므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있는 한 요걸 받아들이거든요.

 

그런데 밝은 행복을 느끼기 시작하면은 그 사람한테는 불성이 자각해요. 작용한단 말이에요. 놀라운 것을 몇 가지를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뭐죠? 자신의 안에 깃든 힘, 이게 본래 불성이라는 거에요. 너무 정리되죠. 그죠. 본래 자기 안에 있다는 거에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다는 거에요. 이거는 사주팔자를 넘어서고 관상을 넘어서고 사회를 넘어서고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있을만한 그런 모든 것에 대한 답이 거기 딱 들어와 앉아있어요. 힘을 내셔야 돼. 이때 이 힘은 뭐죠? 이 힘은 누누이 누누이 여러 번 말씀 드리는데 무한한 힘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자기 자신 안에 깃들어있는 무한한 힘이라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