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스님 _ 제47회 득불퇴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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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정현스님_불설아미타경

2012. 12. 23.

출처: 불교TV

 

와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일반적인 삶에 대한 현실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거를 세속적인 영역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그거를 중생심의 세계다. 요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하나의 영역을 가지고 살아요. 참 묘하거든요. 먼저 경전을 진행하는 과정 안에서 보면 오탁악세. 이런 말씀을 드렸죠? 시대가 혼탁스럽고, 현실이 혼탁스럽습니다. 그러고 생활이 온전하지가 않아요. 그리고 불안전한 상태를 계속 연속적으로 가고 있거든요.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나는 잘했는데, 니들이 다 잘못했지. 이런 개념이 성립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세속적 영역에서는 늘 거기에서는 붙임이 있다는 거에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계속 두레박줄 오르고 내리는 것과 같이 육도윤회가 계속 현실 안에서 움직여지고 있고. 인과작용이 주고받고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우리가 느껴질 수 있다는 거에요. 그런 영역에서 오탁악세라고 표현했는데도 불구하고 불설아미타경에서는 그 내용을 한마디로 딱 정의를 해요. 뭐라고 정리를 해놓느냐 하면 오탁악세에 사는 사람이라도 신심을 좀 가지고 기도라고 하는 염불수행을 조금이라도 옮겨갈 수 있는 사람은 곧바로 뭐죠? 숭고한 존귀한 원만하고 완전한 상태에 대한 과정을 같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에요. 같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의 어리석음은 오탁악세에서 전혀 못 벗어나고요. 발 보리심한다. 그러잖아요. 보살님 이러잖아요. 보살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자 대비한 힘을 자기가 현실에서 사용하겠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거거든요. 동시에 오탁악세를 살아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도 거기에는 언제든지 저 불보살님의 가피지묘력이 함께 작동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요렇게 설명을 하고 계신 거에요. 중생은 어리석어가지고 자기가 안 된 것만 늘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조금만 뭘 잘하면 우쭐하는 것에 못 벗어납니다. 내가 했어. 내가 했어. 내가 했어. 이러는데.

 

그거는 평생을 잠을 자다 깬 거와 똑같아서 실체가 없으세요. 정말로 남는 것은 자기 마음 안에 가쁨을 채운 거, 행복하다고 느낀 거, 사랑스럽다라고 말해왔던 거. 이런 것만이 자기를 도와주고 지켜주고 바탕이 되 가지. 평생 악을 쓰고 평생 비난하고 평생 시비로 평생 지난 것은 다 뭐에요? 자기에게 바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라고 하는 그 과정 안에는 세속적인 영역에서 편해지는 거, 또 나아지는 거 좋아지는 것은 아예 이것은 기본이에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불자는 당연한 겁니다. 경전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먹고 자고 그렇죠? 생활하는 것에 먼저 근심하고 걱정하지 않아야 된다. 왜 그러냐? 삼보귀의한 자는 이렇게 옛날 말에 표현이 그렇게 돼 있거든요.

 

삼보귀의한 자는 거기에 떨어질 일이 없다. 요렇게 설명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우리 안의 현실이 이렇게 어려운 상태 속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자기를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뭐죠? 숭고한 영역의 세계가 같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자라나고 나는지, 성장하는지 구분 잘 못 하잖아요. 지금 감사함을 심으세요. 지금 사랑스럽다 라고 심으세요. 그걸 당신을 보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금 주어져 있는 현실이 아무리 오탁악세의 힘든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도 감사한 일이 생기고요. 공덕터가 생겨요.

 

거기에 지혜로움을 얻을 수 있고, 거기에 복을 채워낼 수가 있는 현상으로 요게 보는 안목이 요것만 바뀌어 가면은, 다 보살심이 돼버려요. 현상에 있는 그 대로에서. 그래서 화엄경이나 금강경이나 이런데 보면은 보리즉번뇌고 번뇌즉보리라고 그러거든요. 보리는 지혜라는 뜻이잖아요. 번뇌가 곧 부처님의 깨우침이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내가 고심하고 힘들어하고 억울해하는 이 순간, 이 자체가 다 불성의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딱 하나에요. 중생은 어리석게 그거에 대해 매달려 살고,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신 분들은 요걸 보리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보리심으로. 보살심으로. 그러시죠? 그래서 심어놓기만 하면은 그거까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감사하고, 오늘 생활에 참으로 귀하구나. 고맙구나. 오늘 코가 두 개가 튀어가지고 양쪽으로 공기가 왔다 갔다 하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이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5분만 숨을 안 쉬면 어떻게 돼요? 죽어요. 그런데 이제 꼭 알아야 될 필요가 있어요. 숨 쉬는 거 누가 저저 어떻게 숨을 쉬는지 알고 사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지 않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있으면 돼. 그러니까 귀한 것을 느끼고 생활을 바꾸어 가시면, 하나둘씩 하나둘씩 이렇게 심어놓으면, 불성아미타경 안에 보면 제석천께서, 제석천이라는 게 있으시죠? 불교에 보면 제석천이라고 하는 하늘의 신이 있습니다. 이 신은 뭐라고 표현했냐하면 사람의 생명 그 자체는 불생불멸하다라고 이렇게 반야심경에 명기해 놓은 것처럼 제석천께서 그렇게 설명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단순히 육체로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도 같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것들이 다 그 범주 이렇게 표현했는데 세상에 주인은 곧 지금 요걸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부처님법이 아무리 수승하고 나를 깨우쳐주고 나를 극락세계로 인도해주시지만, 그걸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모르잖아요. 그건 흡사 저쪽에 시골에 어디 어디 가면은 맛있는 빈대떡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맛을 가서 먹어보지 않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가서 맛을 보는 거, 먹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아~ 이게 진정한 빈대떡이다.

 

이렇게 알아지는 것처럼, 자기 평생을 요게 이제 진정한 빈대떡 맛을 알려고 좀 노력을 하면 반드시 어떤 방법으로든지 찾아서 진정한 그 좋은 맛을 얻게 되죠. 그런데 찾아보지도 않고, 살펴보지도 않고, 내가 먹은 것 외의 것이 없으니까 전혀 맛있는 거라고 하는 거를 느껴보지 못하잖아요. 쉽게 표현하면은 극락의 영역이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세속의 영역을 살고 있으면서 동시에 쉽게 표현하며 천상, 천상의 영역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불설아미타경은 요걸 분명히 설명하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하나하나씩 옛날에 요런 내용들을 그 비유해서 달아놓은 것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얼굴도 볼 수 없고, 또는 찾을 수도 없고, 얼굴이나 모양이나 형태나 이런 것에 없는데도 분명히 존재해 있다는 거에요. 그걸 우리는 우리들 내면에 불성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잖아요. 우리는 이제 지금까지 공부해왔으니까 요정도 정리가 되면 정리가 좀 되셨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면은 누구든지 자기 발바닥은 잘 보지 못하거든요. 발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씩 살펴보기가 참 어렵거든요. 늘 밟고 다녀도. 제일 밑바닥에 있는데도 제일 뭐죠? 제일 많이 냄새나고 제일 많이 무좀 자라고, 제일 많이 육체 받쳐주고, 특히 저처럼 배 나온 사람은 발이 불쌍한 거야.

 

그런데도 불평이 없어. 그게 아픔이 좀 있으면 쫓아가서 힘드실 거 아니에요. 그죠? 바닥을 뒤져보면 거기에는 숭고한 영역이 있어요. 그걸 천상의 영역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다보지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매일 머리는 가다듬지만, 발바닥은 가다듬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세속의 화려한 것, 세속의 다른 것, 세속의 뭐죠? 입맛에 맞는 것. 입장에 맞는 것은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자기 안에 들어있는 정말로 귀한 생명체인 천상의 세계를 우리는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살지 못한다. 요런 설법이거든요. 그래서 큰스님들 법문에 이렇게 말을 했어요. 지금 이 순간, 이 순간, 이 순간을 통하지 않으면 영원한 세계에 갈 수 없다고 그랬어요.

 

지금 이 순간 요게 알아지고 이해되고 깨달아져야 돼. 이게 이렇게 설법하면 굉장히 어렵잖아요. 어려우니까 쉽게 가기 위해서 설법 말씀 드리는 것을 바꾸어 가면서 설명 드리는 거에요. 지금을 감사하게 여기자. 그게 궁극에 가면 지극한 극락세계가 열립니다. 지금 나무아미타불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인생에 삶의 주인은 나입니다. 이 말과 같은 말이거든요. 나무아미타불 한마디 부르는 것은 내가 지금 나아지고 좋아져 가고 있습니다. 요런 말과 같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해서 일체 모든 것에 救苦救難구고구난이시거든요. 모든 것을 건져주십니다. 요렇게 정돈이 되셔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둘씩 해 가면은 그 의미 속에서 불설 아미타경에서는 요걸 말씀드리면 지금 이 순간에 이 순간에 길이 아니면 정토에 가지 못한다. 이랬거든요. 그러면 거꾸로 한순간이라도 그러면 요거를 계속 연속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전문 수행인이 돼야 되겠죠. 그런데 생활 속에서는 이게 안 되잖아요. 그러나 제가 어려서부터 스님이 되가지고 끊임없이 이 탐구하고 정리하고 체험한 결과 단 한 순간만이라도 단 찰나의 순간이라도 내 자신의 본성이 원만하고 완전한 불성이다라고 하는 자각이 조금조금씩만 이루어지는 아주 조금 조금이 수없이 이루어진 것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거에요. 공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힘이 될 수 있다는 거에요. 세상 살아가는데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부처님의 염불은 그렇게 위대한 위신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죠? 31쪽을 좀 보십시다. 31쪽에 경전 내용을 좀 보셔야 됩니다. 두 번째 글에 보면 석가모니께서 能爲능위_능위한다. 능위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심히 어렵다. 이것은 구하기도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석가세존께서 이게 어렵고 어려운 일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인데도 이게 설법을 해 놓으셨다. 이런 뜻이거든요. 세상에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설해 놓은 신 거에요. 얼굴 들어 저 좀 보세요. 이게 내가 오탁악세에 맨 먹고사는데 허덕이고 사는데, 나한테 무슨 숭고함이 있고 나한테 천국이 어디 있으며 나한테 극락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물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중생심의 발로로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성을 도저히 넘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벽을 넘어서려면은 무엇부터 해야 된다고요? 기도를 해야 돼요. 지장보살 지장보살 부르든지 나무아미타불 계속해서 업장이 없어지면 이게 저절로 저절로 마음속에서 진리가 보여요. 내가 정말로 믿어야 될 것인지 믿지 말아야 될 것인지 구분이 하나둘씩 지혜로움이 생겨요. 그래서 그게 이치가 이루어져 하나씩 자기가 꼭 믿어야 되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럼 쫓아가게 됩니다. 불퇴전입니다. 물러서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도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위해 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법을 그래도 석가세존은 말씀을 하신 겁니다.

 

당신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난 다음에 너무 심오하고 불가사의해서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바로 자기 법락을 누리시다가 열반에 들어가시려고 하니까 하늘의 제석천께서 아까 말씀하신 제석천께서 내려와서 삼배를 조아리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의 어두운 중생의 그 빛이 되고 힘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발원했습니다. 그래서 설법이 시작된 거에요. 그러나 불설아미타경을 통해서도 또 같은 말씀을 설하시고 계시거든요. 믿을 수 없는 거에요. 세속적인 영역에서는 믿을 수 없는 중이에요. 그런데 현실 속에서 숭고한 영역의 세계가 있다는 거에요. 천상락의 세계가 그의 힘이 내게 닿아 있다는 뜻입니다. 되시죠? 그죠?

 

그런 일이 어렵지만 능어 저 娑婆國土사바국토에 사바국토는 이 우리가 사는 현실을 사바국토라고 말하거든요. 어디든지. 五濁惡世오탁악세가 가득하다는 거에요. 그건 뭐냐 그러면 劫濁겁탁이라고 그랬죠? 시대가 혼란스럽습니다. 세월이 지금 혼란스럽다. 이런 얘깁니다. 절 좀 보세요. 매일매일 일하고 돌아서고 일하고 돌아서고 집에 가서 가면 맹하니 해가지고 생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거의 다가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시내에 길로 지나가는 사람들 보면은 몽유를 앓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 같아요. 제가 한 번씩 지나가서 앉아서 보거든요. 뭘 위해서 저래 왔다갔다 왔다갔다하는지 몰라. 기껏 해 봤자 늙고 병들고 죽어가거든요. 즐거운 것이 얼마나 있고, 재물을 얼마나 축적하면 얼마나 충족이 될까요?

 

사랑을 고하면 얼마나 사랑이 자기를 만족시켜 줄까요? 그렇죠. 그죠? 되돌아봐요. 자식이 다 만족돼요? 남편이 다 만족돼요? 아내가 다 흡족 돼요? 그 영역에서는 안 이루어집니다. 그건 언제든지 부침을 하기 때문에 들어놨다 내려놨다 들어놨다 내려놨다 하거든요. 그 사실을 여실하게 들여다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 우리는 수행이라고 말하거든요. 통찰의 세계를 보는 거에요. 이걸 오탁악세라고 그래요. 보는 것이 다 흐려져 있고 번뇌가 삶에 대한 번민이 너무 탁해져 있는 상태죠. 그걸 중생, 자기 입장, 자기 이기심, 자기 욕망에서만 존재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표현해요. 그걸 衆生濁중생탁이라고 말하고. 命濁명탁이라고 하는 건 생활이거든요. 생활이 곤란해요.

 

그런데 이 오탁악세를 한순간으로 바꿔주는 얻을 수 있게 하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아까 말했죠? 그죠? 극락영역이 있다는 거에요. 그걸 보고 뭐라고 그래요? 천상의 영역이 이 현실에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여튼 그렇다 그러고요. 제가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석가세존의 말씀을 제가 대신해서 말씀드리는 거거든요. 이것은 글자 그대로 올라옵니다. , 얻었어요. 뭘 얻었어요?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거에요. 석가세존께서는 당신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거거든요. 열반의 세계. 대각을 이루신 거죠. 완결 무결한 상태의 깨우침을 얻으신 거죠. 그런 상태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그러거든요.

 

더 이상이 비교할 수 없고 더 이상 설명할 수 없고 더 이상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최상의 최고의 상태를 우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그러거든요. 그 삼먁삼보리를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석가세존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爲諸衆生위제중생, 모든 중생을 위해서 설했어요. 언제 했어요? 지금 설하고 있어요. 지금 설하는 것을 누가 들어요? 지금 우리가 들어요. 그럼 지금 곧 석가세존의 말씀과 전혀 다르지 않은 거에요. 2,500전에 설하고 있어도 듣는 사람이 이게 공동력이 되고 마음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수행이 좀 이루어지시잖아요. 그러면 여실하게 듣게 돼 있습니다. 그렇죠. 그죠?

 

뭐라고 말해요? 그죠? 세간은 믿기 어렵지만 난신이라 그러거든요. 믿기 어려운 법이다. 그렇죠. 舍利弗사리불이여. 當知당지_마땅히 알아. 그러면 이 이야기를 바꾸어서 설명 드리면 뭐냐 하면 이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된다는 뜻이거든요. 마땅히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내가 살고 먹고 생활하는 이런 과정 안에도 뭐죠? 숭고한 영역의 세계가 같이 포함돼있다는 사실을 이걸 마땅히 알으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생활은 어떻게 해요? 모든 오탁악세가 세상에 생기는데 중생심은 그걸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걱정하고 그렇죠. 그죠. 거기에 대해서 신음고통 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불심을 가지게 되면 부처님 법을 이게 신행하시게 되잖아요.

 

믿는 마음으로 옮기시게 되면은 보리심으로 이게 딱 정리가 돼서 오탁악세가 다 정리가 돼요. 그러면 어떻게 보게 돼요? 똑같은 현상을 똑같은 두려움과 무서움과 걱정과 근심으로 피해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중생심이라고 말한다면, 똑같은 현상 똑같은 얼굴 똑같은 언어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것을 바꾸어서 나의 공덕터가 되는구나. 내가 업장을 소멸하고 복을 지어갈 수 있는 최상의 기회구나라고 느껴지는 마음의 전변, 이게 변화가 좀 이루어지시는 것이 불교의 마땅히 이걸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當知당지라 그러는 거에요. 마땅히. 마땅히 알아야 되요. 마땅히 아는 것은 뭐예에요?

 

나빠지는 것을 마땅히 아는 게 아니라 마땅히 내가 좋아지고 나아져 가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되는 것이 불설아미타경에서 제시하고 얘기하는 핵심이죠. 으음. 정리 좀 되시죠? 그죠? 내가 오탁악세에 있다 하더라도. 행하는 일마다 어렵거나 그런 상태에 있어서도 얻을 수 있다는 거에요. 그냥 行此難事행차난사 거든요. 어려운 일이잖아요. 지금 부딪히는 일을 행해가는 데 어려워요. 그런데도 뭐라고 말해요?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얻을 수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망할 이유가 없어시죠? 불안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걱정근심으로부터 마음이 놓여 집니다. 그러면 점점점점 그런 의식에서 좀 깨어나면은 점점점점 편안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글자 그대로 행차 난사입니다. 그렇죠.

 

행하는 이것이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가 지금 오탁악세에 있어요. 그죠? 절 좀 보세요. 지금 현재에 있는 것은 오탁악세인데, 그리고 행하는 일마다 일이 어려워요. 이 일들이. 그렇게 보는 거에요. 그런데 그래도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요? 석가세존께서는 당신이 얻을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런 얘기죠. 얻을 수 있다. 뭘 얻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누구를 위해서? 일체세간의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설하고 이것이 어려운 믿는 법이지만, 이 법을 믿기가 어렵다. 이런 뜻이거든요. 어렵지만 是爲甚難시위심난, 이를 위하여 어려운 일을 설한다.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믿기 어려운 법이기도 하지만 석가세존은 그래도 듣는 생명을 위해서 설법을 하시는 거에요.

 

이때 석가세존의 설법은 사람의 오감을 가진 사람이 가장 수승하기도 하지만 일체 동물, 유정무정이 다 산천초목이 다 계유성불 돼 있다. 이랬거든요. 다 같은 인식의 맹락은 같이 붙어있다. 이렇게 봐요. 어려운 것인데도 심히 어려운데도 이것을 설했다는 거에요. 누구를 위해서 일체 세간 모든 세간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다. 이런 뜻이죠. 佛說此經已불설차경이_부처님의 설함이 이 경으로 舍利弗사리불이여, _급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 어디까지죠. 諸比丘제비구_모든 비구와 一切世間일체세간_이라는 건 모든 생명체죠. 세간 모든 유정무정이 전부 다 포함되는 거죠. 사람까지. 뭐라고 말해요?

 

거기까지 넘어서서 하늘 사람이 阿修羅等아수라등 저 귀신의 세계와 또는 영혼의 세계까지 하늘의 사람까지 이런 천상에 사람들까지 등 _들었어요. 뭘 들었어요? 聞佛所說문불소설_부처님이 설하는 바를 어떻게 한다고요? 歡喜信受환희신수 그리고 _짓는다. 뭘 지어요? 예로서. 법을 받아들인다. 이런 뜻이죠, 그죠? 글자로 보면 요렇게 돼 있습니다. 이제 보세요. 그러면 이 어려운 과정 안에서 환희라고 하는 것은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게 요 책의 경전 안에 만을 기뻐해야 될 문제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죠. 그죠. 절 좀 보세요. 지금 이것이 내 삶 속에 이 찡그러진 몸뚱아리 생활하는 과정 안에 속에라도 반드시 거기에는 뭐가 있다고요? 기뻐할 일이 있다는 거에요.

 

감사할 일이 거기 생긴다는 뜻입니다. 자비로운 잉태로움이 거기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저버리지 않는 겁니다. 이거를 기쁘게 받아들여서 믿어서 받는 사람은 기쁨으로 수행해 받으면 그렇죠. 그죠. 받아들이면 짓게 돼요. 뭐가 짓게 돼요? 법을 따라서 예로서 이것을 지어가게 되면 부처님의 차원으로 한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동시에 지나간 뭐죠? 업장은 하나하나씩 반대로 없어지죠. 누누이 누누이 여러 번 설명 말씀 드렸거든요? 뭐 설명해 드렸어요? 그래프 그려 놓고 0에서 이쪽으로 나아가면 반대적으로 업은 없어져 가는 걸 알죠? 여러 번 내가 제가 설명을 말씀을 드렸거든요. 움직이는 이게. 똑같아요. 이게 세상은요, 뭐로 출발해요? 그죠?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있다. 없다. 이런 구분하기 전에, 나로부터 출발이 되요.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뭐라고 그러냐 하면 보살심을 가지셔야 되죠. 보살심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환희하고 우리가 말하는 환희라고 그러잖아요. 환희하고 기쁨으로서 뭐라고 말해요? 마땅히 이걸 받아들이라는 거거든요. 우리가 표현하는 것은 이걸 신수라고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이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러면 예로서 짓게 돼요. 내가 진리롭게 살게 돼요. 진리는 나를 자유롭게 하고 나를 평안하게 하고 나를 뭐죠?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불교의 지법이라고 그러잖아요.

 

불교의 법은 우리말로 얘기하면 법이라고 그러고 쉽게 표현하면 진리라고 표현하잖아요. 이 진리는요, 사람을 첫째 평안하게 해줍니다. 두 번째 뭐죠? 풍요롭게 해줍니다. 세 번째는 살아가는 것에 원동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동력을 얻는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같은 뜻이겠죠? . 이런 뜻이겠죠? 근본 원이죠.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법은 진리는 요런 과정을 겪어서 이 보살심을 공부하고 수행하고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내 삶 속에서 나무 뭐죠? 아미타불. 이 말 한마디를 우리는 영원토록 지나가도 이 말 한마디를 듣고 얻고 들어보지 못하는 무연중생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실제로 그래요. 이게 뭔 얘긴지 알 수 없어요.

 

나무아미타불 부르는 것은 나는 이 세상에 딱 하나인 주인이다. 이런 표현이라고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주인이 있다면 곧 나 자신이에요. 그렇죠. 그죠. 이런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것은 그런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랬죠? 이런 원동력을 가진 나는 좋아지겠어요? 나빠지겠어요? 생활 속에서. 그러면 그것을 뭐로 받아들인다고요? 감사함으로 신수한다. 이런 뜻이죠?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현상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현상이잖아요. 현실. 요걸 우리가 가지는 우리가 말해요. 현실이라고 그렇게 표현하는데 이 현실에 고통스러운 것이 지금 현재에 와 있다면은 이거는 뭐라고요? 지나간 일이잖아요. 지나간 것에 뭐가 쫓아다녀요? 고통스러운 것이. 그래서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이 업력이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한 걸음만 나아가면 지나간 고가 있거나 말거나 업이 있거나 말거나 그냥 제쳐놔요. 그냥. 신경 쓰지 말아야 되요. 이걸 고치는 방법은 이거를 업력을 애쓰지 말고 앞으로 공덕을 지으면 되거든요. 초 하나 올리는 거, 쌀 한 되 올리는 거, 천도재 올리는 거, 부처님께 공양하고 이러는 것들이 다 뭐죠? 선심에서 보살심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건 이게 쌀 한 되 딱 갖다놓고. “아이고 부처님, 돌아오실 때는 가마니로 열 가마니로 돌려주세요.” 이러면 심각한 거에요. 기쁨이 아니라 마음이 뭐죠? 흑심이 더 많이 들어있어. 부처님하고 거래하고 앉았잖아. 지금.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단지 내가 오늘 쌀 한 되라도 내가 현실이 그게 지금 허락이 안 되잖아요.

 

쌀 한 되는 할 수 있고 천 원은 할 수 있고 만 원은 할 수 있거든요. 자기가 좀 노동을 해서서 살아도. 공양하고 베푸는 연습을 자꾸 해서 어제 먼저도 말씀드렸잖아. 가난할수록 더 보시해야 돼. 인색해가지고는 부자 안 됩니다. 그렇다고 허비하라는 얘기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둘씩 해나가다 보면은 지나간 것은 걱정할 것이 없어요. 분명히 정돈하셔야 돼. 지나간 것에는 시비분별에서 마음을 딱 놓으셔야 돼. 놓으면 앞으로 하나하나씩, 매일매일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나무아미타불 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집니다. 불설아미타경을 공부하잖아. 지장보살 공부하신 분은 지장보살 하시면 똑같은 거에요. 그 가피지묘력은 똑같이 이루어져 갑니다. 요거를 그렇게 해나가면서 이 세상에 주인이에요. 누가 주인일 수 없어요.

 

이게 껍데기 됐든, 몸이 됐든, 가슴이 됐든, 느낌이 됐든, 감정이 됐든,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지금 감사하세요. 지금 고맙다고 말해요. 지금 생활을 기쁘게 환희, 환희신수거든요. 기쁜 마음으로 환희한 마음으로 단 쌀 한 되라도 정말로 정성을 다해서 내가 당신께 예경하고 공양 올리게 되어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불법승삼보에 귀의합니다. 이걸 정성으로 하는 사람한테는 묘하게 진법계 허공계의 기운력이 파동의 세계에서 자기를 지켜줘요. 반드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일들이 챙겨집니다. 좀 넘어갑니다. 오늘은 47번째 뭐라고 말했어요? 得不退轉願득불퇴전원. 이라고 그랬거든요. 이거는 물러나지 않는다. 이런 뜻이죠. 이게 계속 굴러다닌다는 뜻이거든요.

 

같은 것에서 원인데. 불퇴전이거든요. 불퇴전이라는 말은 같은 것에서 계속 이게 그냥 도는 것을 불퇴전이라는 뜻이에요. 물러나지 않는다. 이런 뜻입니다. 거꾸로 잘 이해해보면요, 불퇴전. 거기에 다시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거기에서 넘어가지 않는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런 얘기는 얻은 것은 내가 지금 얻은 것은 물러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얻어지느냐? 원하는 자만이 이게 얻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죠. 그죠? 발원하는 사람만 얻어지고 인식하는 사람에게 얻어지고. 여기 좀 보세요. 제가 부처가 될 적에 다른 세계의 보살들이 제 이름을 아미타불을 듣고 나서 일체 공덕에서 물러나지 않은 불퇴전의 자리에 이를 수 없다면 저는 차라리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다. 요런 표현이죠. 그러면 뭐에요? 얼굴 들어 저 좀 보십시다.

 

이게 뭔 뜻이었죠? 내가 지금 있는 그 대로에서 나아지고 있고 싶으시면 지나간 것에 대해서 그만 마음을 놓으셔야 돼. 불평을 그만 그치셔야 돼. 지금부터 단 한마디라도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때마다 마음속 깊이 풍요로운 것을 받으세요. 안 믿어지시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나무아미타불 한마디를 부르는 그 언어 속에, 지장보살 한마디를 부른 그 생각 속에,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을 조금만이라도 피부적으로 옮겨오신 모든 생명체 안에는 어떻게라도 뭐죠? 얻는 일이 생겨요. 어떻게라도 뭐죠? 충족이라고 하는 것이 나한테 생깁니다.

 

만족이라는 것이 스스로 자라나오게 돼 있고요. 그러면 스스로 평온해지고 그게 삶이 곧바로 뭐죠? 천상락을 누릴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자기에게 채워집니다. 그러면 오탁악세에 사는 것과 동시에 천상락의 영역을 끄집어내다가 드러내게 해서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그 내용의 골자가 지금이 아니면 지금을 통해야 만이 영원을 볼 수가 있어요. 영원한 세계에 영역의 발을 집어넣는 거에요. 그것이 염불수행입니다. 정토회 나는 것. 석가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첫 번째는 2500년 전에 500년 동안 정법시대라 그랬거든요. 계를 지킴으로 법을 지켰고, 거의 1,000년을 선을, 선이라는 것은 참선하는 명상하는 그런 힘으로 불교가 지켜졌어요. 지금 말법시대 거든요. 끄트머리 상법, 말법 시대인데. 말법시대 되면은 맑은 것으로 깨끗한 것으로 세상을 이긴다. 그랬거든요. 그걸 정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정토가 어디에서 깨끗한 어떤 것은 더럽고 이런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시원찮은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깨끗한 거 것이 있다는 거에요. 탁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밝고 투명한 자기에게 힘이 될 만한 원류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얼마나 안타까워요.

 

누누이 말씀드리는 것처럼 헛된 거 구하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거 녹이지 못하면 다 자기를 다쳐요. 헛된 재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아들이 망하는 률이 거의 60% 이상이 다 망합니다. 자기 스스로 일어난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자식에게까지 재물을 남겨주지. 물려받은 사람은 그렇게 유지 못 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통계에서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은 한순간이라도 깨우침에 의해서 그 깨우침에 대한 것을 얻는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마음에 충족함이 생겨가시는 거에요. 그 충족함이 하나하나씩 계속 여여하게 유지해서 조금조금씩 자기 삶을 이렇게 적응시켜가고 지배해 가는 과정을 겪을 필요가 있죠.

 

그러면 일반적으로 할 때 어떻게 해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많이 하셔야 돼. 지장도량에 다니시는 불자님들은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이렇게 하셔야 돼.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뭐라고 해야 돼요? 감사함을 자기 스스로에게 지배를 자꾸 시키세요. 감사한 존재로 바꾸셔야 돼. 그러면 지금 어려운 일들은 점점점점 없어지는 것을 자기가 피부로 느낄 수가 있어요. 자기 눈으로 안 좋은 것만 자꾸 보고 있는 동안은 영원히 자기가 거기서 못 벗어나는 거거든요. 좋아져 가는 과정을 좀 보셔야 돼. 여기 좀 보세요.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다음에 지옥에 가지 못하리라는, 지옥에 가지 말라는 그런 보장책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건 스스로가 공부할 따름이에요. 밥은 누가 대신 먹어줄 수 없고, 그렇죠? 그죠? 화장실은 대신 가 줄 수 없고요. 공부도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영혼은 자기 안에 깃든 생명체는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스스로 깨우쳐서 그것을 밖으로 현상으로 사용해 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노력성을 좀 가지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여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