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스님_ 치유하는 불교읽기// 제4회 사성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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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서광스님_치유하는불교읽기

2013. 4. 21.

출처: 불교TV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한 주일간 잘 지내셨어요? . 오늘 이렇게 특별히 날씨도 굉장히 춥고 눈발도 좀 날리고 그러는데 아주 많이 오셨네요. 지난주에는 우리 사성제 가운데서 고성제와 집성제를 했죠. 잠깐만 한번 복습해 볼까요? 지난주에 가장 중요한 게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제가 강조를 드렸었는데 고통은 우리가 흔히 그런 말 하죠. 위기가 찬스라고. 그러니까 고통이 단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행복할 수 있는,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라는 거죠. 굉장히 중요한 기회다. 그래서 고통은 바로 어떤 성장이나 행복이나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또 알려주는 신호고 하나의 방편이다. 이런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고통은 또 언제 일어나는가? 그 말씀도 드렸었는데 기억하세요? . 언제 일어나죠? 자기 식에, 자기 앎에, 자기 경험에 바탕을 한 기대나 예상이 어긋날 때, 자기 생각에 어긋날 때. 그죠? 자기 예상하고 틀렸을 때. 뭔가 예상치 아니한 것이 일어났을 때. 뜻밖의 행운도 있지만 뜻밖의 내가 기대하지 않은 것이 왔을 때, 어떤 하나의 고통의 시작이 되는데. 사실은 굉장한 행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애쓰고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인을 심으면 뭐가 나오죠? 과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내가 인을 심고 과는 신경 쓰거나 걱정할 바가 아니죠. 사실은. 우리가 진정한 인과법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러면 내가 열심히 인을 심으면 그 인에 의한 과가 나오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죠.

 

노력은 최선은 성의는 내 몫이고,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떤 인연과 조건을 만나가지고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언제나 맡겨야 된다. 인연에. 그거는 내가 너무 많이 집착하면 할수록 오히려 온전하게 잘 안되게 되죠. 그래서 사실은 생각보다도 굉장히 어떤 행운이 온다 그래도 그것이 내가 잘 심은 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은 오래 살펴보면 반드시 행복의 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 게 뭐겠어요? 로또죠. 로또당선.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그렇고 다른 나라. 미국TV에서 로또 당선 된 사람들 쭈욱~ 추적을 해봤어요. 굉장히 불행하고 다 빈털터리가 된 경우가 거의 다 그래요. 그래서 나중에는 한꺼번에 돈을 안주고 아예 매달 지급하는 경우도 있죠.

 

그러니까 정말로 내가 그 하나하나 차근차근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결과가 아닌 경우는 그 결과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잘 살려서 그것이 진정한 우리 어떤 행복이나 성장이나 그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반드시 거름이 되고 반드시 인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마 괴로움의 뿌리에는 여기 표 나눠준 거 보시면 괴로움의 뿌리에는 반드시 가 있다. ‘라는 생각, ‘라는 에고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자라면은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기도할 때 괴로움의 순간에 왜 이 고통이 나한테만 왔냐?” “누구 때문이다.” 이런 걸 하기 전에 제가 권해드린 기도는 뭐에요? 그러니까 내가 대체 무엇을 몰라서아니면. “내가 무엇을 알면 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요구적인 거 있잖아요. 우리 기도할 때 이것도 해주세요. 저것도 해주세요.” 뭐 아니면 누구 싸우면 저 인간 벌 좀 주세요.” 아니면 내가 하필 저런 인간을 만나서등등 이런 신세 한탄이나 운명을 한탄하거나 아니면 이런 거 해주시고, 저런 거 해주시고, 그런 거에 대한 요구적 기도보다는 기도를 할 때에 [내가 이런 이런 부분이 있는데 이렇게 이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알아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뭘 몰라서 이렇게 괴롭습니까?] 그러면 [뭘 알면 어떻게 하면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하시게 된다면 그건 굉장히 우리가 성장이나 변화 우리 소위 말하는 뭔가 자기 운명을 바꿔가는 그런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된다.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어요.

 

이번 주에는 구체적으로 멸성제에 대해서 한번 공부를 해볼 텐데요. ~ 우리가 사성제는 뭐죠? 사성제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진리라고 그랬어요. 4가지 진리다. 그것이 사성제라고 그랬는데 사성제가 첫 번째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이거는 지난주에 했고 이번 주에는 멸성제라고 도성제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지난주에 고성제에서 우리가 정확히 이해해야 될 것은 고통에 대한 삶은 고다. 생로병사가 고요. 또 팔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또 원치 않는 사람하고 怨憎會苦원증회고. 만나야 하는 고통. 해서 주욱~ 求不得苦구부득고. 그러니까 잘 아시네. 求不得苦구부득고. 세 번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네 번째 五蘊盛苦오온성고에요. 오온이 다 색수상행식. 다 고다. 그랬는데.

 

~ 그런데 생이 고라는 것보다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제가? 우리 치유하는 불교읽기에서는 [고를 고통 하는 순간에 고통 하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랬죠? 그래서 고에 대한 자각을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성제에서는 고통에 대한 자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랬고. 집성제에서는 그러면 처음에 전통적으로 고가 있어요. 그 다음에는 고에는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이 그야말로 요게 뭐죠? 집착하는 거. 어디에 대한 집착이냐니까 아집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이다. 그럼 나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멸성제에서 뭐에요? 나에 대한 집착의 원인을 없애 버리면 원인을 제거하면 도에 이른다는 건데.

 

도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팔정도를 얘기하고 있는데 우린 조금 현실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죠. 그럼 아집이 뭐냐? 이거에요. 나에 대한 집착. 다 집착이 원인이다. 집착이 원인이니까 집착 안 하면 된다. 그러데 실제로 현실 속에서 정말 이 사실은 우리가 누구나 다 알아요.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내가 집착을 안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실질적으로 나에 대한 집착이라더라. 그러니까 나에 대한 걸 내려놓으면 되지.” 그런데 진짜 내려놔져요? 집착을 진짜 내려놓으면 까딱하면 어디로 가죠? 우울증으로 가요. 만사가 다 허무하고 만사가 다 귀찮고 이렇게 우울증으로 가기 십상이지. 정말로 내가 내려놔 지느냐? 이거에요. 안 내려 놔 집니다.

 

이미 그러면 엄밀한 의미에서 집착 내려놓을 수 있는 집착은 집착도 아니죠. 애시당초부터. 그러니까 일단 집착이 됐을 때는 내가 집착을 내려 놔야지. 나를 내려야지. 그렇게 해봐야 오히려 더 거세게 오히려 더 거세져서 활활 타는 불길이 어쩌면 기름을 부어 넣는 것처럼 더 집착이 되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해선 안 되니까 우리는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봐야 되겠다. 나에 대한 집착이 뭐냐? 이거부터 한번 생각을 해봐야 되는데. 중간학을 창시한 용수보살께서 나에 대한 집착이 뭐냐? 아집이 뭐냐를 설명했는데, 그 아집이 바로 경험하는 거에 대한 집착이 아집이다. 그랬어요. 내가 경험하는 거, 내가 경험하는 걸 그냥 경험으로 두는 게 아니라 내 경험에 집착하는 것이 아집이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들은 거, 내가 본 거, 아니면 뭐에요? 내가 사랑한 거, 내가 미워한 거, 뭐든지. 내가 경험을 하게 되면 그 경험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경험에 집착한다는 거에요. 그것이 아집이다. 그렇게 정의를 했습니다. 이걸 유식적으로 설명하면 또 굉장히 맞는 얘기에요. 그러면 결국은 이 집착에 멸성제에 가서는 어떻게 이 집착을 내려놓을 거냐 했을 때 내가 경험한 거를 결국은 내려 된다. 이 얘기가 되겠습니다. 뭐 이건 별로 적으실 필요도 없죠.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과연 내가 경험하는 거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가? 제일 먼저 지난 두 번째 시간인가요? 말씀 드렸듯이 유식에 대한 의미를 말씀 드렸죠? 한번 새겨보세요. 유식이 뭐라고 그랬죠? 오직 내가 그렇게 알 뿐이다.

 

오직 내가 그렇게 알 뿐이고, 너는 네가 그렇게 알고, 저희들은 저희들끼리 그렇게 알고, 우리각자는 전부 다 다르게 아는데. 그 아는 거에 대해서 집착한다. 내가 본거에 집착하고 내가 맛본 거, 그 집착이라고 하는 거는 반드시 두 가지입니다. 크게는 내가 좋아하는 거. 또 내가 그 경험을 싫어하는 거죠. 그래서 삼조 승찬스님이 지으신 신심명에도 보면은 至道無難지도무난. 들어보셨죠?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다. 그랬어요. 그런데 뭐죠? 단지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뭐죠? 증애라 그랬어요. 혐오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애착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로 그 경험자체 그 감정자체가 잘못됐으니까 아예 무생물처럼 아무 감정도 갖지 말고 살아라. 그런 얘기는 아니라는 거죠.

 

살다가 보면 당연히 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고 그런데 그것이 취향으로 끝나야지. 그죠? 취향으로 끝나야지 그것을 내가 소유권을 투사해서 마치 내 것이다. 내 경험이다. 내 지식이다. 내 생각이다. 내 감정이다. 내 느낌이다. 이렇게 집착을 한다는 거에요. 그럼 거기서 끝납니까? 내 감정이고 내 생각이고 내 느낌인데 거기서 끝나지 않죠. 상대는 뭐에요? 상대방의 느낌이 있고, 상대방의 감정이 있고, 상대방의 생각이 있죠. 다르다 이 말이오. 그 두 개가. 그럼 어떻게 해요? 우리는? 굉장히 갑자기 축생마인드가 돼. 동물적 본능. 왜 동물들이 개나 뭐 처음 만나면 어떻게 해요? 냄새 킁킁 맡고 나하고 같나? 다르나? 살펴보죠? 다르면 으르렁거려요. 마치 적으로 취급된다.

 

우리가 자각하지 않으면 굉장히 동물적 그런 본능을 드러낸다는 거에요. 어떤. 그래서 부딪치죠. 갈등하게 된다. 그래서 이 멸성제에 가면 바로 내가 경험한 거에 대해서 경험하지 말라. 무감각 하라. 아니면 아예 무신경하라가 아니라. 좋아하고 사랑도 하죠. 때로는 중생이 이 득심해서 인간이니까 싫기도 하죠. 미워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것이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이 미워지고 싫어지고 좋아지고 뭐 여러 가지 다양한 감정에 대해서 내가 그거를 집착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이미 그 상황이 아닌데. 그 대상이 떠났는데도 뭐죠? 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기억하고 반복하면서 그것을 붙잡고 놓지를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또 다른 대상이 나타나고 또 다른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또 다른 대상이면 또 다른 대상을 신선하게 독립적으로 새롭게 경험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찌꺼기들 감정의 찌꺼기를 자기고 그 대상을 그렇게 비추어 보기 때문에 더더욱 더 많은 오해와 부정확한 지식과 부정확한 경험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런 것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의 어떤 걸 밝은 의식을 그런 걸 오염시킨다. 이러죠. 그래서 이 멸성제에서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런 집착을 멸해가야 되느냐? 가장 쉬운 방식은 일차적으로는 이거는 유식 30송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마는 제일 먼저는 뭐를 우리가. 그럼 현실 속에서 생활 속에서 우리는 뭐를 감지해야 되겠냐?

 

지난 시간에 마지막에 어떤 분이 질문하셨죠? 명상을 자각을 알아차림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어떻게 알아차려야 되나? 명상을 하고. 우리 잠깐 앉아서 잠깐 실습했었죠? 아주 간단하게. 그랬는데 이번엔 거기에 더해가지고 어떻게 앉을 거고 왜 왔냐 할 때에. ~ 내 안에 굉장히 감당하기 어려운 그냥 평소에 평상적 감정이 아니라 우리는 순간순간이 갑작스럽게 아주 강렬한 감정이 일어날 때가 있죠. 강렬한 어떤 나의 느낌. 그 느낌이 일어날 때 그거를 나에게 나를 건강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신선하게 해주는 그런 느낌도 오지만, 때로는 나를 굉장히 지치게 하고 힘없게 하고 나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그런 감정의 경험도 있죠.

 

그럴 때 우리는 아~ 굉장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리고 뭔가 불건강하게 만드는 그런 감정이 일어날 때에 그때가 찬스에요. 그 감정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되는 겁니다. 자각해야 되고. 왜냐하면 우리 감정이 순간적으로 그 감정에 휩쓸려서 그 감정하고 내가 하나가 되면 그러면 나는 없어지고 내가 그 감정이 되는 거에요. 내가 분노가 되면 내가 분노가 되고, 내가 우울이 되면 내가 우울이 되고, 내가 미운 감정이 일어나면 미움이 되요. 그렇게 되면 그 다음 뭐죠? 신구의 삼업이 따라가잖아요. 내가 화났을 때 내 자체가 화나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자각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죠? 화가 났을 때 내 신구의 삼업이 내 몸은 몸대로, 내 입은 입대로, 내 말은 말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어떻게 되요?

 

그 감정의 노예가 돼서 그대로 신업을 짓고, 구업을 짓고, 의업을 짓게 된다 이 말이죠. 자각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러니까 1단계는 우리가 어떤 불건강한 나를 즐겁게 하거나 행복하게 하지 않는 감정이 일어날 때 그거에 대해 자각을 해라 이거에요. 그 감정을 알아차려라. [감정. 정서에 대한 자각을 해야 된다.]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냐? 했을 때 지금 말씀 드린 거에요. 이걸 알아차리는 것은 앉아도 되고 서도 되고 걸어도 되고 뭘 하다가도 되고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감각을 알아차리고 유식에서 보면 유일하게 우리의 어떤 뿌리라고 라고 하는 에고는요.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이 감정 영역은 알아차려야 되요.

 

정상이면 알아차려야 되는데 순식간에 휩쓸리면 내가 못 알아차립니다. 내가 감정하고 하나가 되면 못 알아차리게 되요. 그런데 계속적으로 수시로 우리 몸으로 돌아와서 나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대해서 계속적인 알아차림 훈련을 하게 되면은 감정 정도는 쉽게 알아차려지죠.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감정을 알아차리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감정을 직면하기 싫으니까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억압해서 못 알아차려요. 말씀 드렸죠? 옛날에 어릴 때 누구 좋아하면, 성인도 마찬가지죠? 좋아하면 자존심 상해서 또 아니면 부끄러워서 좋아한다는 표현을 못하고 뭐죠? 거부하잖아요. 그걸 내가 수용하기보다 어떻게 해요? 안 좋아한다는 식으로.

 

그래서 애들 때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데 오히려 좋아하는 애를 괴롭히는 것도 많이 있고, 어릴 때 왜 짝지들 그렇게 하면서 잘 놀죠. 그런데 그 밑에 뭐가 있어요? 부끄럽다. 아니면 자존심 상한다? 누가 있어요? ‘라고 하는 무의식적인 나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정을 수용을 못하는 거죠. 직면이 안 되는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치유하는 입장에서는 제일 먼저 분노할 때도 마찬가지고, 우울할 때도 마찬가지고, 누구를 질투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런 감정들에 밑바닥에 가면은 다 기본적으로 나라고 하는, 내가 분노하고 이 나의 어떤 위배되는 거, 나를 잘 드러내거나 내가 동의할 수 없을 때, 그럴 때 인정할 수 없을 때, 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걸 먼저 감정을 알아차려서 자각을 해 가다가다 보면은 감정의 밑바탕이 뭐냐 하니까 이 감정을 일으키는 생각이 있다. 견해가 있다. 견해. 그래서 그 견해 까지를 보게 되면 벌써 상당한 수행에서는 꽤나 깊은 경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 아리야데바라고 용수의 제자 중에서 유명한 분인데 그분이 四百論사백론 이라는 책에도 맨 먼저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때 1단계가 십선업을 행하라 그랬어요? 거기서는 버리라고 하는데 뭐냐 하면 10가지 불건강한 악행을 버려라. 천수경에 나오는 10악이에요. 10가지 악행을 버리고 두 번째 단계가 뭐냐 하면 에고를 버려라. 자아를 버려라.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견해를 버려라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감정이나 정서나 이런 거를 내는 밑바탕에 들어가면 나가 있고 그 나에게 견해가 있거든요. 전제가 있다고. 그래서 이걸 순서대로 한 거에요. 사실은. 그래서 이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다음에 밑에 들어가 보면 결국은 뭐에요? 그 화가 나고 있는 나라고 하는, 내가 있다고 하는 나에 대한 아집에 이제 핵심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걸 버려야 된다는 거에요. 거기까지 보게 되면 버리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사실은 그 자체를 자각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엔 저절로 우리가 이렇게 아주 활활 타던, 아니면 아주 100킬로미터로 질주하던 그런 감정들이 갑자기 이렇게 브레이크 밟듯이 점점점점 멈추어진다. 그러면 프린트 물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제 너무 이론적으로 들어가면 조금 그렇고. 이제 한번 우리가 멸성제 단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걸 볼게요. [고통은 행복과 불행, 성장과 퇴보의 두 개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그랬어요. 위에서 이 멸성제에서는 고통을 자각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 고통에 이미 집착해서 일어난 거니까. 이미 뭐에요? 뭔가에 인연으로 얽혀서 일어난 건데 계속적으로 그냥 원인 뭔가? 원인 뭔가 해서 계속 살펴나가는 것은 어떨 때는 골치가 아파요. 심플하게 생각하는 게 좋다. 뭐냐 하니까. ~ 여러분 생각할 때 내가 괴롭다. 그럼 뭐라고 생각하신다고요? ~ 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 그 생각 없어요?

 

지금 계속 앉아있는 이 상태에서 한 10시간씩 앉아있으면 어떨까요? 죽겠죠. 일어나고 싶죠. 일어나면 굉장히 시원하고 걸으면 더 좋겠죠. 그런데 역으로 10시간쯤 서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이번엔 어떻게 해요? 얼마나 앉고 싶겠어요. 그래 저 같은 경우는 제가 비행기 타고 자주 1년에 미국에 들어가면 뉴욕까지 14시간 걸려요. 앉아 있다가 서 있으면 약간만 걸으면 굉장히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고통과 불행은 양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거에요. 사실은. 그러니까 괴롭다는 얘기는 사실은 뭐죠? 괴롭다는 얘기는 괴로움이 앞에 불행이 즐거움에 전제 안 되곤 괴롭다는 게 발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양편이 굉장히 상이적이에요.

 

그러니까 이전에 뭐죠? 즐거웠기 때문에 지금 괴로운 거고. 또 지금 괴롭단 얘기는 다음에 더 즐겁고 더 행복하고 더 감사할 수 있는 이 잠재적인 어떤 기회라는 거죠. 그래서 그럼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가 뭐냐? 수행하는 이유가 뭐냐? 그냥 뭐 무작위로 괴로울 때 그냥 괴로워하고 슬플 때 그냥 좋아하면 또 좋아하고 그렇게 그냥 문에 요즘 젊은 사람이 말하는 무 개념으로 살라는 건 아니죠. 우리는 의도적인 노력을 의지를 발휘해서 우리가 계속적으로 건강하고 뭔가 성장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거든요. 그럼 우리는 이거를 굉장히 이해해야 된다는 거에요.

 

뭐냐 하니까 괴로울 때 단지 괴로운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거죠. 괴로울 때 우리는 괴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은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는, 더 성장할 수 있는,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다. 이것은 그것을 위한 거름이 된다. 이렇게 이해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어떻게 이야기 하냐 하면은 대승기신론에 이런 말이 나와요. 경험, 필요 없는 경험은 우리한테 안 온다는 얘기에요. 그것이 괴로움이든 슬픔이든 즐거움이든. 도움이 안 되는 경험은 우리한테 없다. 그런데 때로는 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를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다 불 보살의 화현이다. 그래요. 거기서.

 

그러니까 그 불보살의 화현이 반드시 행복한, 아주 나에게 기쁨만 주고 즐거움으로만 주는 그런 모습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나에게 필요한 도둑으로, 때로는 강도로, 아니면 때로는 아주 좋은 친구로, 때로는 나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애인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온다. 이거죠. 중요한 것은 뭐에요? 우리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즐거움이냐? 괴로움이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거는 뭐에요? 금세 바뀝니다. 연애해 보신 분은 알 거에요. 그죠? 또 자식을 낳아보고 키워본 분은 다 아실 거에요. 순식간에 좋았다 싫었다 내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대상자체가 즐거움의 본질이거나 행복의 본질이거나 고통의 본질은 아니라는 거죠.

 

그거는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바뀌는데 뭐죠?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 하냐 하는 건데. 이 방점이 괴로움이냐? 고통이냐에 있는 게 아니고 그 방점은 내가 경험한다는 거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괴로움이든 사실은 행복이든 한발만 띄어놓고 보면 감사한 일이에요. 다 살아있어서 겪는 거지. 떠나고 나면 뭐에요? 다 그런 것도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굉장히 살아있다는 어떤 생생한 어떤 체험인건데. 그것을 체험으로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라고요? 괴로울 때 고통이 왔을 때는 아~ 고통의 그림자가 뭐죠?

 

행복이니까 고통의 그림자를 행복을 보고 우리는 그것을 다시 깨달아 가면서 수행을 하고 행복이 왔을 때 어떻게 해요? ~ 잘났으니까 금방 희희낙락 기고만장하면 뭐에요? 다음엔 반드시 지옥이 오죠. 그러니까 아~ 행복의 그림자는 뭐라고요? 고통이다. 그렇게 하면은 그 행복에 완전히 빠져가지고 그야말로 앞뒤 분간을 안 하지 않죠. 잘난 척도 안하고. 내가 행복한 순간에 괴로운 사람에 대한, ? 행복의 그림자가 고통이니까. 고통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바로 뭐죠? ~ 내 그림자구나.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내 행복을 조금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여유와 그런 마음이 생긴다. ~ 예를 들어서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 얘기 나오는데요.

 

부처님 경전에도 나오죠. 법화경인가요? 외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그럴 때에 자식을 외아들을 잃어버렸을 때에 어떤 사람은 뭐죠? 이거 이상으로 사실 참 고통의 그 크기가 이만한 고통도 살아가면서 만만치 않죠. 이거보다 거 큰 고통이. 그럴 때의 그 고통의 의미를 잘 세기면 어떻게 될까요? 이 고통과 불행의 의미를 잘 세기면 그걸 극복하면서 고통 아예 없애겠다 가 아니에요. 내 안의 그 상처나 그 허물이나 가슴은 늘 품지만, 그러나 그 고통에 내가 매몰되지 않고 그 고통에 내가 휩쓸려서 평생 남은 생을 불행과 원망과 아니면 무슨 술이나 약이나 그러지를 않고 세상에 겪는 거는 나만 겪는 거 같지만 알고 보면 내가 겪는 것들은 이 세상에 무수히 다른 사람도 겪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벗어나는 길은 뭐에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고통 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처럼 이 순간에 이 시간에 이렇게 이런 고통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식을 잃고 또 오히려 그렇게 잃은 자식. 다른 사람의 슬픈 사람을 위해서 굉장히 뭔가, 내 아이가 유괴됐다. 그래서 애가 죽었어요. 그랬을 때 그 고통의 아픔을 딛고 유괴된 아이들을 찾아주고 그런 TV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렇게 캠페인 하면서 잃어버린 다른 사람의 자식을 찾아주는 일로 그런 일을 하는 보살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자식 잃은 것 때문에 평생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슬퍼하다가 자신을 망쳐가면서 인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다 이거죠. 극단적으로 보면.

 

그러니까 아프지 않다가 아니라 아프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아픔을 어떤 방식으로 아파해야 하는가? 이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내가 외로울 때 내가 괴로울 때 내가 화날 때 화가 안 나는 거다. 이런 거는 아니죠. 식물인간도 아니고. 그러니까 화가 나지만 그 화나는 것을 내가 어떻게 겪느냐? 어떻게 경험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고통에 대해서도 똑같은 어떤 불행이나 경험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그런 기회로 거름으로 삼으면서 나아갈 수가 있다. 밑에 보시면 또 다른 중요한 얘깁니다. [행복도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훈련해야 된다.] 오늘의 핵심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우리는 보통 어때요? 뭐 자식 피아노 하나 치거나, 수영을 하나 하던지, 뭐 스케이트를 하나 타든지, 아니면 바이올린을 켜던지 붓글씨를 하나 쓰든지, 뭘 해도 어때요? 당장에 전문가가 되지는 않죠.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죠. 그렇게 해서 겨우 그런 기술을 하나 익혀요. 그런다고 내가 피아노 잘 친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됩니까? 인생에 성공이 보장되나요? 그렇지도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술하나 익히려면 우리는 상당히 많은 시간과 돈과 그런 걸 에너지를 쓴단 말이에요. 그런데 과연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노력을 들이고 시간을 보내는가는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린 행복이 그냥 얻어지는 거로 생각하죠. 그래서 내가 행복 안 하면 내가 이렇게 뭐 기도를 했는데 어쨌는데 내가 왜 나만 불행하냐? 이러면서 원망을 하거나 아니면 쉽게 좌절하거나 세상을 원망하거나 그럴 수가 있다. 물론 내부적으로 꼭 나만의 몽땅 잘못은 아니지마는, 지금 잘잘못을 따져가지고 내가 행복이 뭐 행복해진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죠? 아무리 복수를 하고 어떻게 해도 결국은 그 삶이 제2 3의 업을 짓게 되고 거기에 따르는 과보를 받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공부를 해야 된다. 이거야. 노력해야 된다. 시간을 보내면서 훈련해야 된다는 거에요. 굉장히 중요한 거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 앉아계시는 분들 다 뭐겠어요? 알고 보면? 맞아요. 더 행복하고 더 요즘 말하는 웰빙 있죠? 더 잘 살기 위하여 지금 이렇게 오늘 같은 이런 공휴일에 춥고 눈 오는 데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오셨어요. 이것도 하나의 훈련하기 위한 한 방식이지. 그지? 훈련하기 위해서. 그래서 아~ 진짜 행복도 기술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냥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왜요? 왜 그럴까? 우리의 인간조건이 행복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은 아니거든요.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 유기체라고 하는 게 그냥 가만히 있어도 행복해지면 괜찮은데 우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냐 하면요.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이 기능은 인간 유기체는 생존을 위해서 잘 만들어진 이런 시스템이지.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거는 매우 본능적입니다. 아주 반응적이고 굉장히 빠르고 누가 안 가르쳐줘도 굉장히 본능적이에요. 그래서 아주 갓난아기도 그냥 시설에 보내진 아기 같으면요 우리 보통 집에서 굉장히 보호받는 아기는 젖병도 못 드는데, 시설로 보내진 아기는 금방 젖병을 끌어안고 쪽쪽 빠는 능력이 생긴다. 생존의 본능은 본능이에요. 그런데 너무 불행하게도 행복을 위해서는 우린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역으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 받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나는 애쓴다고 애쓴 것인 역으로 오히려 불행을 더 초래하고 그리고 인정받기보다는 오히려 더 무시 받는 그런 부작용을 낳는 우리의 행동이나 생각이나 이런 것도 많이 하게 되요. 이거는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가 애시당초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노력이 그냥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실제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끔은 생존을 위해서 형성된 그런 습관이나 그런 태도들이 역으로 내 행복을 장애하고 방해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그 밑에 보시면 우리 잠깐 한번 명상을 한번 해볼까요?

 

멸성제에 대한 어떻게 해서 내 마음의 고통의 원인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가는가? 그걸 위해서 잠깐 명상을 잠깐 한번 해보겠습니다. ~ 허리세우시고요. 허리를 세우시고. 눈을 감으시고. 저 쳐다보지 마시고요. 그냥 편안하게. 그리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 줄을 아시고. 숨을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쉬어봅니다.

들이쉬시고 내쉬고.

들이쉬시고 내쉬고.

몸에서 어떤 긴장이나 탄탄함이 있으면 그거를 그냥 이렇게 알아차리시고 다시 풉니다.

몸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나든지 그걸 그냥 허용합니다.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숨을 들이쉬시고 내쉬고.

숨을 들이쉬시고 내쉴 때 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오고 꺼지고 또 배 안에 공기가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것을 알아차리시면서 잠깐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나와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관념이나 편견을 버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지워가야 한다. 나를 화나게 하고 외롭게 만드는 생각이나 판단은 버려야 한다. 나만 잘났다는 자만도 버리고 자기가 못났다는 패배의식이나 열등감도 버려야 한다. 마음을 가볍고 편안하게 하지 않는 일체의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하나 살펴서 정리해야 한다. 마치 오래된 소지품을 정리해서 쓸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어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정리하듯이 마음 안에 든 것도 그렇게 정리해야 한다. 나를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생각이나 느낌들은 잘 보관하고 나를 화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진실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생각이나 감정의 싹들은 더욱 더 잘 자라도록 키워주고 그렇지 않은 싹들은 버려야 한다.]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한집에 오래 살면 집에 자꾸 쓸데없는 물건도 많이 쌓이죠. 그러다 보면 집안이 복잡해지잖아요. 그러듯이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가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끊임없이 쌓여 있다는 거에요.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아집이 뭐라고요? 경험에 대한 집착이 아집이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이 내가 알게 모르게 필요한 것만 내가 기억하거나 갖고 있게 아니라, 쓸모없는 거 필요 없는 것도 잔뜩 갖고 있어요.

 

우리가 먹었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영양이 되는 것만 우리 몸에 있으면 괜찮은데 내 안에 도움이 안 되는 물질을 잔뜩 갖고 있으면 뭐에요? 숙변이 되고 몸에서 빨리 안 나가면 어때요? 몸이 안 좋아지죠. 정신적인 것도 똑같아요. 내가 생각하고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이런 것들이 어떤 것들은 나에게 살아가는데 굉장히 도움을 주지만 어떤 것들은 도움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버리지 못하고 날마다 되새기고 다시 간직하고 그런 것 많이 있어요. 그래서 한 번씩 집안 일, 단정하고 뭔가 경쾌하고 기분 좋게 하려면 집안에 쌓인 물건도 한번 정리해야 되고 청소하죠. 또 내 몸도 마찬가지죠.

 

그렇듯이 마음도 그러해야 한다. 그래서 내 마음에 내가 경험한 것들 경험해서 도움 안 되는 것을 계속 내 경험이라고 내 생각이라고 강조하고 붙잡고 있으면 어때요? 다 내 생각하고 틀린 사람 있으면 뭔가 친구 아닌 거 같고 원수 같고 우방인데 친구 아닌 거 같다. 이 말이요. 그러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내 마음의 쓰레기통에 버릴 때 뭘 버리냐? 맨 첫 시간에 말씀 드렸죠? 뭔가 내 기분을 찌뿌둥하게 하고, 뭔가 경쾌하지 않는 기분 좋지 않는 즐겁지 않는 그런 느낌이 일어나게 하는 그런 생각이나 감정이나 기억은 버려라. 또 관계를 방해하는 내가 이 생각 계속 가지고 있으면 저 사람이 얄미워. 왠지 싫어. 아니 왠지 이렇게 친절할 수가 없어요.

 

왠지 미운 생각이 일어나. 질투심이 일어나. 화가나. 그런 건 버려라. 지금 요즘 실험들 많이 나오지만은 심장병이나 동맥경화 이런 거 한번 보시면 화가 많은 사람, 분노하는 사람, 가장 많이 걸리잖아요. 그리고 또 한 실험을 보면은 노인이 오늘 같은 빙판에 넘어져서 엉덩이 뼈를 다쳤는데 부러졌는데 그걸 보니까 우울증 있죠. 그런 사람들이 거의 3배나 완치가 안 되더라는 거에요. 확률적으로. 우리가 굳이 내가 즐겁지 않는 생각, 뭔가 우울한 생각, 미운 생각 그런 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상대를 위해서 내가 사랑해야 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해서 상대에게 긍정적이지 않고 좋지 않는 그런 느낌이나 생각이 있으면 버려라.

 

특히 나와 함께 살고 있거나 날마다 만나야 하는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더욱 그렇죠. 그렇다고 애써서 억지로 거짓으로 위선으로 좋아하면 더 이상하죠. 그거는. 그것도 한 부작용이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이 멸성제 단계에서 제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경험한 것을 그걸 계속 필요하지도 않는데 도움도 안 되는데 그걸 계속 붙잡고 살아가면 안 된다. 그러니까 도움이 안 되는 생각이나 느낌이나 기억이나 감정이나 이런 것들은 과감히 쓰레기통에 집 정리하듯이 물건 정리하듯이 버려가면서 그러면서 살아야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내가 경험한 거에 매달리면 안 된다.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날마다 일상에서 뭔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거 있으면 얼른얼른 그런 생각들은 버리면서 가시면 좋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