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문즉설_법륜스님***제50편 놓아버리는 것, 그냥 지켜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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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201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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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버린다는 것 하고, 화나는 자신을 가만히 지켜본다는 것 하고,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 이런 얘기에요. 화나는 자기를 가만히 지켜본다. 이것을 조금 분석해서 말을 한다면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나 이런 것들을 봤을 때, 즉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 맡거나, 혀로 맛보거나, 그것을 좋아하거나, 그것을 싫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감정이 일어난다. 그런 감정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그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좋으면 그것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즉 잡고 싶어 한다. 집착이라 그러죠? 싫으면 그것을 버리려고 한다.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으면 거기에는 망설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위를 하게 되죠.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좋은데 가져지지 않으면 괴롭고, 즉 가지려고 하는데 가져지지 않으면 괴롭고. 버리려고 하는데 버려지지 않으면 괴롭죠. 그러니 싫은 감정이 감정만 괴로운 게 아니고, 좋은 감정도 괴로움을 유발한다. 이런 얘기요. 좋은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가지려고 하고, 가지려고 할 때 가져지면 만족하지만은 가져지지 않으면 괴로워진다.

 

싫은 감정이 일어났을 때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떠나려고 한다. 버리려고 한다. 그런데 버려지지 않으면 괴롭죠. 이럴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 하고싶어 하거나 하기 싫어하는 것, 이것을 감정이라 하기도 하고 또 욕구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 욕구에 휘둘리게 된다. 이 감정에 휩싸이게 되죠.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냉정해 지면, 그것이 비록 갖고 싶지만은 하고싶지만은 행하게 되면 세인의 비난이 따른다.

 

즉 어떤 여인이나 남자를 좋다고 내가 껴안게 되면 성추행의 비난을 받게 된다. 그것이 먹고 싶지만은 먹었다고 하면 건강을 해치게 된다. 말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버리면 인격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비록 그것이 하고 싶지만은 안한다. 반대로 또 하기 싫지만은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나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손실을 막고 이익을 가져온다. 그럴 때는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죠. 그 욕구를 저하할 수가 있어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화가 나더라도 화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화를 내지마라 이거야. 욕구가 일어날 때 그 욕구에 끌려가지 말고,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이 말과 행위로 옮겨지지 않도록 해라. 그런데 보통 이 감정이 일어나거나 욕구가 일어나면 거기에 우리가 쉬 휘말려 들어가 버려요. 즉 감정과 욕구를 자기가 읽을 여가가 없다 이거야. 그것이 그냥 말과 행동으로 나와 버린다. 그래서 감정적인 사람은 금방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금방 말로 튀어나와 버리죠.

 

그러니까 그것을 마음을 평정을 유지해서 마음을 그런 욕정이, 그런 욕구가, 그런 욕망이, 그런 감정이 일어나는 거를 자기가 알아차리고, 그런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면, 즉 감정이 막 일어나는데 거기 휘둘려서 있으면서 행위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막 억누르고 있는 거는 이미 격정에 휘둘렸다는 얘기요. 그러니까 그것이 일어날 때 그 격정에 휘둘리지 말고, 그 상태를 가만히 지켜보면, 사라지게 된다. 즉 그 격정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이게 지켜보는 거요.

 

그런데 이것은 다 이미 일어났을 때의 얘기요. 그런데 여기서 볼 때 우리가 공부를 조금만 더하면 좋다 싫다하는 감정과 좋다 싫다하는 것이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감정이 바로 일어나는게 아니고, 그 경계에 부딪칠 때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거기에 따라 반응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감정 이전에 뭐가 있느냐? 필링이 있다. 느낌이 먼저 있다, 이거야. 그 느낌은 쾌, 불쾌에요. 그 느낌에 쾌, 기분 좋음이 일어나면 그 기분 좋음을 우리는 좋아하게 된다. 불쾌에 대해서는 싫어하게 된다.

 

그러니까 바로 좋고 싫고가 먼저 일어나는게 아니고, 쾌 불쾌가 먼저 일어나고 그 쾌 불쾌 거의 자동으로 좋다 싫다가 감정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감정개입이 안되도록 한다. 그것이 좋으니 싫으니 하는 감정자체가 안 일어나도록 거기서 제어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참거나 제어하거나 억누르는게 아니고, 그 쾌 불쾌라고 하는 필링은 원래부터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감정개입을 일으키지, 좋다 싫다라는 걸 일으키지 않게 한다. 그게 위빠사나에요. 그게 관법이다.

 

크게 말하면 그 필링을 알아차리고, 좋다 싫다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즉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해서 그 좋다 싫다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근본도리고. 또 이미 마음의 개입이. 즉 일어나서 좋다 싫다라고 하는 감정이 일어날 때는 그 감정을 또한 알아차려서 그것이 격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거고. 또 격정에 휘둘렸을 때는 휘둘린 상태를 알아차려서 그것이 언행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 언행으로 나타났을 때는 언행으로 나타난 줄을 알아서, 바로 참회를 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것을 지켜본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상태, 그것이 잘했든 잘못했든, 옳든 그르든, 앞이든 뒤든, 이런 것들을 가지고 논하는게 아니라, 어떤 상태든 일어나버렸을 때는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에 알아차린다 이거야. 그런데 필링이 이러나는 순간에 알아차리면 그냥 사라지고, 거기에 좋다 싫다라는 감정이 개입됐을 때, 갈애가 일어났을 때는 알아차렸을 때는 그것을 제어하는데 조금 힘이 들고. 그것이 격정에 휘둘려가지고 욕구가 충만했을 때는 그것은 억누르기가 알아차려도 이미 억눌려야지 그냥은 도저히 감당을 못할 정도다.

 

그래서 그것은 제어하기가 아주 힘이 드는 거요. 그래서 이미 일어나버렸을 때는 일어난 상태를 알아차려서. 즉시 뉘우친다. ‘~ 내가 화가 났구나하는 거를 알아차려서 뉘우치게 된다. 그러니까 그 순간순간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즉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태에 따라서 행위까지 이미 일어나버린 거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거기에 따라서 맞대응이 되는 거요. 알아차림이라는 거는.

 

그런데 놔버린다는 것은 어떤 문제냐? 왜 이렇게 화가 일어나느냐 이 문제요. 이것은 이미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 아니오, 그죠? 이 화가 왜 일어나느냐 이 말이오. 이것은 원인에 대한 얘기요. 이것은 이미 지켜보기는 화가 일어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고, 이 놔버린다는 것은 화가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문제요. 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있다 이거야. 그것은 내가 옳다라는 것 때문에 일어나요. 상대를 보고 틀렸다 하는 것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미 화가 일어날 때는, 화 그 자체를 지켜보니까, 화가 일어나는 것이 어느 순간에든 감지가 되면 바로 ~ 내가 옳다는 데 사로잡혔구나. 내가 옳다는 데 지금 사로잡혔구나.’ 이것의 뿌리가 내가 옳다하는 것에 사로잡혔다. 옳다는 그것을 내려놓는다. 내려놓는다는 의미가 화를 내려놓는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켜보기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상태를 지켜봐서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거고, 내려놓는다는 뜻은 그것의 원인을 알아차려서 놔 버린다. 그러니 결과가 같기도 하지만은 약간의 차이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