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즉문즉설 1138회] 수행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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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즉문즉설(2015)

2015. 11. 20.

 

 

 

우리가 보통 100일 기도를 많이 하는데, 100일 기도를 안 빼먹고 부지런히 해보면 지꼬라지를 좀 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욕심 많은 사람은 네 욕심 많다.” 이러면 내가 왜 욕심이 많아? 나만 욕심 많나? 욕심 없는 사람 누가 있나? 너도 욕심 많잖아.” 이런 수준이 되는데, 100일 해보면 , 내가 참, 욕심이 많구나. 내가 화를 잘 내구나. 내가 짜증이 많구나. 내가 좀 심술궂구나. 내가 질투심이 많구나.” 이렇게 자기 상태를 자기가 알 수 있어요.

 

보통은 자기 상태 자기가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 다 알아요. 모든 사람이 다 그 사람하면 아이고, 그 욕심쟁이” “아이고, 그 술주정뱅이” “아이고, 그거 짜증쟁이이렇게 다 알아요. 온 동네 사람이 다 알아요. 그 사람 하면 어떻다고. 그런데 보인은 몰라요. 특히 고집쟁이이거 온 동네 사람이 다 아는데 본인만 몰라요. 으흠.

 

그런데 정성스럽게 한 100일 기도하면 동네사람이 아는 수준의 나를 알게 되요. “으흠, 내가 이렇구나.” 그래서 100일 기도 하라는 거요. 그런데 안다고 바뀌는 건 아니오. 아는 거는 바뀌는 것에 시작, 출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거지, 안다고 곧 바뀌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건 무지.

 

밤에 길을 갈 때 불이 없는 것과 같은 것. 그러면 불을 밝혔다. 알았다. 이거야. 그렇다고 걸어야 가지는 거지, 서 있다고 가지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바뀌려면, 이 앞에서 말한데로 바뀌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되돌아가기가 쉬워. 그래서 몇 번의 고비를 넘겨줘야 돼. 갔다가 도 뒤바꾸쳤다고, 갔다가 또 되돌아 왔다가, 갔다가 또 물러났다가.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그 고비를 넘어가요. 아직도 갈 길은 많지만, 최소한도 한 고비는 넘겼어요. 두 고비는 넘겼어. 아직도 짜증이 많지만, 옛날에 비하면 좀 적어.

 

아직도 고집을 피우지만, 옛날보다는 좀 적어.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 저게 사람 되어 가네. 저게 웬일이고, 살다보니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네.” 이렇게 사람들이 나쁜 의미로가 아니라, 말은 어떻게 하든 좋은 의미로, 변화를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얼마쯤 해야 된다고? 천일. 아이고. 공짜 먹으려고 그러네. 공짜. 100일은 뭐라고? 지꼬라지 안다. 바뀌려면 한 천일은 해야 돼.

 

100일 해도 좀 바뀌긴 바뀌어. 그런데 그건 언제든지 되돌아가요. 변하나 했더니, 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다 뭐라고 그래요? “그러면 그렇지 네가. 아이고, 천상 개주나.” 이러면서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려요. ‘담배 끊는다. 술 끊는다. 앞으로 화 안낼게.’ 이래서 발심을, 초발심을 내서 굉장히 약속을 해놓고 얼마 못가요. 그러니까 오히려 신뢰를 잃어요. 말을 해도 속으로 아이고, 네가 하겠다.’ 이렇게 말은 안하지만.

 

이거 왜 했나? 우리가 수도 없이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그래서 백일 갖고는 장담을 못해. 담배 끊는 사람도 백일 끊은 거 갖고 끊었다고 할 수가 없어. 무슨 성질날 일이 생기면 피워버려. 그냥. 그런데 한 3년쯤 끊으면 뭐라고 그래요? 그래도 피울 수는 있지만, 그래도 , 담배 끊기는 끊었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인정해줄 수가 있다. 3일 끊어놓고, “, 담배 3일 끊었다.” 이 말은 내일 피우겠다. 이 말 하고 똑같아.

 

나는 담배를 안 피우잖아. 그죠? 그래도 나는 20년 안 피웠다. 이런 말 절대로 안합니다. 그래서 담배 안 피운지 일주일 되었다. 열흘 되었다. 이 얘기는 도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얘기요. 보통은 한 50일 끊고, 100일 끊고, 이러면 나 술 100일 끊었다. 담배 얼마 끊었다.” 이렇게 얘기해요. 3년쯤 지나가버리면 그런 소리 안 해요. “끊었다. 그만뒀다.” 이런 말 안 해. 그러니까 그냥 일상생활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옆에 사람들이 보고 , 변하네.” 이렇게. 그런데 하도 약속해놓고 안 지키다가 이렇게 변하면 사람들이 저게 어예 되나? 저게 진자 변했나.” 할 때, 하는 소리가 뭐다? “저게 죽을 때가 다 되었나?” 이런 소리를 하는 거요. 왜 그러냐하면 천성이라는 게 죽기 전에는 고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 그 성질이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3년은 해야 조금 변화가 생긴다.

 

그래서 이번 100일은 지 꼬라지 아는 기도. 이번 3년은 나를 변화시키는, 어떻게 변화 시킨다? 좋은 쪽으로. 어떻게? 화내던 사람은 화를 덜 내는 쪽으로. 짜증내는 사람은 짜증 덜 내는 쪽으로, 질투가 많은 사람은 질투가 적은 쪽으로. 분별심 많은 사람은 분별심 적은 쪽으로. 고집인 쎈 사람은 고집이 약한 쪽으로. 또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을 좀 내려놓고. 이렇게 좋은 쪽으로 바뀌어서 어느 쪽으로 가야 된다? 부처님 쪽으로 가야 된다. 내가 부처는 아니지만 아직은. 이렇게 가면 나도 부처님처럼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하는 가능성은 최소한도 발견을 해야 된다. 이거야. 가능성은.

 

가능성은 열어줘야 된다. 아직도 내가 부족한 게 많고, 여러 가지 먼지투성이에요. 상처투성이에요. 상처투성이에요. 그러나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 “, 이 약 먹고 이렇게 치료하면 나을 수 있겠다.”하는 희망은 적어도 있어야 된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놓으면 우리 인생은 이 생에 안 되면 다음 생에 가서라도 반드시 성불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생에서 해야 할 일은 부처님 같이 되는 성불하는 경지에 이르면 좋고, 그러나 그건 적어도 못되더라도 그 길에 접어들었다.

 

그 길에 들었다, 이제 계속 가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제 도로 빠꾸할 가능성은 없다. 이런 걸 뭐라고 그래요? 수다원이라고 그래. 수다원. 입류, 성인의 류에 들었다. 성인이 되는 그 흐르는 물결에 합류했다. 그래서 예류. 또는 입류. 이렇게 말해. 죽기 전에 거기까지는 해놓고 죽어야 돼. 알았어요? 그런데 피던 담배도 하나 못 끊고, 먹던 술도 하나 컨트롤 못하고, 지 성질도 하나 컨트롤 못하고, 내지마라가 아니라, 성인이 당장 되라는 게 아니라, 지나가서라도 알아차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갈수록, 조금 나아진다. 변화가 있다. 이런 일이 벌어져야 된다.

 

그거를 자기가 알아야 돼. 그래야 우리가 적어도 성인의 길에 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요. 그런데 스님들을 보면, 자세히 가서 보면, 세속사람보다 더 못한 거 같아. 그런데 실제로 못하냐? 못한 거는 아니에요. 그런데 가서 느끼는 건 또 못하게 느껴져. 이유가 뭘까? 우리가 그 껍데기만 보고 너무 높게 상정을 해 놓으니, “스님이 와 저러노? 스님이 와 저러노?”자꾸 이렇게 생각하니, 세속사람은 아예 저 인간 저렇다.”이렇게 생각하니, 별로 눈에 안 띄는데, 저거 뭔가 틀릴 거다하고 생각 하는데 보니 똑같으니까, “똑같네.” 이게 아니라 더 못하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특별히 더 못하다고는 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상을 너무 높게 선정해서 우리가 실망을 하고 이러는 거요. 그래서 그게 큰 수행에 장애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머리 기르고 있는 여러분들은 또 수행에 어떤 장애가 있느냐? 여러분들은 또 속인이라고 하는 재가라고 하는 또 상이 있어요. 스님은 술 먹으면 안 돼.’ 하는 여러분들의 상이 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어떤 상이 있다? “우린 먹어 돼하는 상이 있다.

 

성질 좀 내도, “내가 스님도 아닌데.” 합리화하고, 욕심을 내고도 합리화하고, 여러분들은 자기가 한 거를 합리화한다. 그러니까 변하려고 하는, 여러분도 부처의 길로 가는 수행자다 이런 자기입장, 가치관이 뚜렷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면 머리털 붙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난 안가도 되는 거로, 그리고 조금만 하면 재가자가 이만하면 되었지.” 이런 착각을 해요. 그래서 이게 제일 큰 문제요.

 

여러분들은 안 된 거를 합리화하는, “안 해도 되지.” 이런 합리화 한단 말이오. 스님들은 안 된 게 된 거 같은 착각에 빠지는 거요. 그래서 이 둘 다 상에 집착한다. 그래서 이게 부처의 길로 가는 데는 계율을 지킬 때 머리 기르고 깎고의 관계가 없는 거요. 지키면 같이 지켜야 되고, 그래요. 여러분들이 술 먹고 성불 할 수 있으면 스님이 술 먹어도 성불할 수 있다? 없다? 있다 이 말이오.

 

그러면 스님들은 그렇게 하면 스님이라 할 게 뭐 있겠어요? 그죠? 그래서 스님이라고 하면, 조금은 더 나아져야 된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먹을 때 안 먹든지, 여러분들이 열잔 먹을 때 한잔 먹든지, 여러분들 먹고 취하는데 안취하든지 변화가 있어야 된다. 여러분들도 불교인 아닌 사람과 여러분들이 차이가 있어야 돼.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술 마실 때 안 먹든지, 먹더라도 적게 먹든지. 같이 먹었는데도 안취하든지. 취하면 어디 가서 조용히 자든지.

 

뭔가 다른 사람이 볼 때 , 스님이니까.” “, 불자들은 좀 다르구나.” 확 다르지는 못하더라도 손톱 끝만큼이라도 다른 게 있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만큼도 다른 게 없이 똑같으면서 불자라고 스님이라고 이러니까, 이게 변화가 없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올 3년은 딱 각오를 해서 3년 기도를 부지런히 해서 지금 우리 아들이 대학가고, 우리남편이 승진하고, 이게 현실적으로는 중요해요.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그런 거 별로 안 중요해요.

 

여러분들 지금 이 나이되어서 한번 초등학교로 돌아봤을 때, 초등학교 때 내가 1등 했으면 뭐하고, 2등 했으면 뭐하겠어요. 그때는 그게 중요해요. 죽고 사는 문제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거 별로 중요 안 해요. 지금 우리는 아직도 나이가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지난 산거를 한번 돌아보고, “, 그때는 그게 중요했는데, 지나놓고 보니 별로 중요 안하구나.” 이렇게 탁 놓고, 정말 중요한 거는 내가 좀 변하는 거요.

 

그런데 내가 변하는 이 중요한 일은 하등 신경을 안 쓰고, 아직도 그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나가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그걸 가지고 전전긍긍하니까, 세월이 흘러도 삶의 변화가 없다. 이런 얘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