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즉문즉설 1146회] 남편에게 불교공부를 권유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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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즉문즉설(2015)

2015. 12. 24.

 

신혼 때 접했으면 못 알아듣지. 그 말도 맞는데, 신혼 때 접하면 저게 무슨 소리고? 왜 저렇게 힘든 소리를 자꾸 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꾸 하나? 여자를 차별하나?’ 이런 얘기로 들리지, 이제 당해봐야 이게 이렇구나.’이렇게 돼. 그래서 지금 제일 빠를 때야. 당해 본 사람 중에는 제일 빠를 때야.

 

남은 권유해도 괜찮아. 남은 권유해도 괜찮아. 그런데 남편은 좀 더 두는 게 좋아. 내 공부에 좋아. 남편이 변해버리면 자기가 변할 일이 없어져버려. 자기가 제대로 부처의 길로 가려면 남편 그냥 좀 놔둬야 돼. 그래야 내 공부 점검을 좀 하지. 남편이 도인이 되어버리면 나는 공부 안 해도 저절로 인생살이가 행복해지니까, 지 꼬라지 몰라져. 남편이 옆에서 계속 괴롭혀줘야 돼. 저 뒤에 있는 보살님 얘기하는 그런 남자 만나면 공부가 잘 되지.

 

그러면 내 속에 있는 분별심이라는 게 다 일어나거든. 그래서 나를 더 확연히 볼 수가 있어. 그래서 좀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좀 빨리 인연 맺어 주고 싶지만, 조금 참으면 어떨까? 졸업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그런데 왜 남편을 빨리, 그건 좋은데, 이 좋은 거 혼자 갖지 뭣 때문에 그 인간하고 나눠가지려고 그래? 이런 건 좀 숨겨도 돼. 자식은 전적으로 엄마 영향이기 때문에 괜찮아. 엄마만 공부 잘하면, 자식 문제는 남편이 좀 삐딱하게 되도, 큰 영향은 없어. 물론 남편도 잘하면 더 좋지만. 남편이 못할 때 엄마가 더 잘하면 엄마가 점점 성인이 되기 때문에, 남편이 못할 때 엄마가 잘하면 똑같이 엄마가 했는데, 남편이 못할 때 잘하면. 그러니까 똑같은 촛불인데, 날이 더 어두우면 더 밝아 보이잖아.

 

하늘에 똑같은 별인데, 지금 나가 보면 별로 안 보이는데, 시골에 가서 주위에 불이 없을 때 보면 더 많이 보이고 더 잘 보이지. 그거와 똑같아. 그러니까 남편이 더 못되게 구는데도 불구하고 엄마가 더 잘하면 엄마가 더 성인이 돼. 그러니까 애들은 더 성인을 닮지. 그래서 남편이 나쁘게 해도 된다. 이런 얘기를 내가 하는 말이 아니고, 보통은 남편이 잘못하면 아내도 따라서 못하기가 쉽게 때문에 애들이 나빠지는데, 만약에 아내가 수행자라면, 남편이 못한 거는 자식한테 아무 문제가 안 돼.

 

어쩌면 남편이 못할 때 엄마가 더 수행자다우면 애들이 보면 엄마가 더 성스러워 보이나? 안보이나? 그래서 더 좋은 영향을 줘. 애도 잘 되고, 또 누구 편 되고? 내편 되고. 내가 내편 하라고 해서 내편 하는 거 아니고, 내가 막 하소연해서 내편 되는 건 좀 엄마로서 좀 비굴하지만, 내가 가만히 있는데도 남편이 발로차서 애들이 내편으로 보내주잖아. 그거는 내 잘못 아니야. 미국에 우리 신도 중에 그런 분이 있어요. 남편은 성당 다니고, 엄마는 정토회 다녀.

 

애들이 둘인데, 애들이 엄마아빠가 종교가 다르니까, 미국은 종교를 강요하고 이런 거 없잖아요. 성당도 갔다가 어디로 갈까? 이렇게 망설이는데, 아빠가 늘 성질을 내고, 엄마가 늘 그걸 수용을 하고 이러니까, 처음에는 엄마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다가 시간이 점점 흐르니까, 애들이 아빠는 교회 다니는데도 전혀 성질대로 살고, 엄마는 정토회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바뀌어있고, 그래서 애들이 다 절에 나와. 절에 오라고 엄마가 한마디도 안했는데도.

 

그리고 또 여기, 대학졸업하고 백일출가 와서 백일출가해서 가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거 뭐, 얘기 한다고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밖에 있는 사람은 얘기를 해줘야 알지만, 집에 있는 사람은 얘기 안 해줘도 느끼기 때문에, 자기 공부에도 우선 지 혼자 공부하는 게 유리하고, 애들한테도 별로 나쁜 영향, 자기만 공부하면 나쁜 영향 안주고 있고, 자기가 변하면 남편도 좋아하고, 남편도 자기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오면 똑같이 공부를 해도 효과가 커. 아내 때문에 억지로 끌려오면, 늘 약간 속에서 반발이 있어. 의문이.

 

그래서 너무 직계가족은 즉, 제일 함부로 끌고 오면 안 되는 게 첫째 남편이나 아내고, 두 번째가 부모고, 세 번째가 자식인데, 자식까지는 괜찮아. 자식은 부모가 안내해서 오면 되니까. 그런데 그것도 억지로 끌고 오면 안 돼. 아까 저기처럼 억지로 데려와서 질문시키고 이러면. 안내는 해줄 수 있어. 그런데 부부는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히는 관계이기 때문에. 자식도 갈등이 있다고 자식을 데려오면 안 돼. 그러면 자식이 오해를 해. 엄마가 자기를 데려와서 자기를 굴복시키려고 한다. 이런 오해가 있어.

 

그래서 조금 참는 게 좋아. 그런데 더 무의식세계로 넘어가보면 이럴 수도 있어. 자기는 보니 안 그런 거 같기는 한데, 좋은 법문을 듣고 좋아서 남편도 들었으면 할 때, 그게 남편이 바뀌어서 내 덕 좀 볼까?’ 이런 무의식세계의 이해관계가 좀 걸려있을 수가 있어. ‘내가 혼자 공부해서 좋아지는 거 보다 남편까지 해주면 더 좋지 않겠냐.’ 이거는 덕도 좀 보겠다는 거거든. 그건 수행이 아니야.

 

수행에 가장 위험한 게 이거야. 남의 덕을 보려고 하면 안 돼. 그러니까 남편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상관없이 내가 좋아져야 그게 해탈이야. 남들이 절에 오든 안 오든, 술을 먹든 안 먹든,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살든 죽든, 상관없이 내가 좋아질 정도가 되어야 해탈이지, 남편이 이래주면 좋고, 저렇게 해주면 나쁜 거는 다 위험해. 왜냐하면 상황이 바뀌어버리면 내가 또 고통에 빠지잖아. 그러니까 그런 얄팍한 생각은 안하면 좋겠는데.

 

그리고 아까 자기가 하나 더 하면, 남편에게 자기가 잘못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잘못했다를 오해하면 안 돼. 잘못에 대한 수행적 관점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거야. 즉 잘하고 잘못하는 게 있는데, 나는 잘하고 남편이 잘못했다. 이게 지금 여러분들의 대부분 생각이야. 그래서 고쳐야 된다. 이 인간이 안 고쳐지니 미워지는 거야. 그런데 이걸 남편이 이번에는 생각해보니 내가 잘못하고, 남편은 아무 잘못 없는데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죽일 년이구나.’ 그럼 이것도 잘못된 거야. 이것도 잘하고 잘못한 게 있다는데 전제요? 없다는데 전제요. 있다는데 전제요.

 

이거는 지금은 효과는 똑같이 나타나는데, 얼마정도 지나면 또 반발이 일어나. ? 만 가지를 다 내가 잘못할 수는 없잖아. 만 가지 중에 두 가지 쯤은 저 인간도 잘못하는 게 있다. 이 생각이 나기 때문에 또 이게 분별심이 일어나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잘못했다 하는 건 뭐냐? 본래 잘과 못은 없다. 잘잘못은 없다. 이 말이야. 잘하고 잘못하는 건 없고, 둘이가 견해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취미가 다를 뿐인데, 내가 착각을 해서 이거를 다른 것을 뭐로 착각했다? 옳고 그름으로, 잘하고 잘못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누구 기준으로, 내 기준해서 나는 잘하고 너는 잘못했다. 이렇게 착각을 한 거야.

 

내가 여기서 탁 깨친 거는 내가 잘못했다하는 잘못이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게 아니라 착각을 한 잘못이 있다 이 말이야. ‘, 내가 착각했구나.’ 이게 핵심이어야 돼. 이게 무지. ‘내가 어리석었구나.’ 하는 건 착각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 잘잘못이라는 건 본래 없고 서로 다르구나. 그런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고 잘못 생각했구나.’ 이 잘못했구나 하는 걸 탁 버려버리면 끝나는 거야. 그거로. 그러니까 참회는 잘못생각 했구나. 내가 잘못 알았구나를 참회하는 거지, 내가 무슨 상대한테 죄지었다. 여자는 남자한테 잘못했다. 이런 의미의 참회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착각을 해서, 내가 남편을 미워했으니 미안하나? 안 미안하나? 멀쩡한 사람을 내가 나쁜 놈으로 정해놓고, 나쁘다, 나쁘다고 했으니 미안하다 이 말이야. 그래서 미안하다는 거지,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착각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착각에서 깨어나면 그러니까 너도 나쁜 것도 아니고, 나도 나쁜 것도 아니고, 니가 잘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잘한 것도 아니고, 우리 둘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다르니까 첫째는 그 다른 거를 인정해야 되고, 두 번째는 그 사람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자기기준에서는. 그쪽 편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옳고, 나는 틀렸다가 아니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겠구나. 이걸 이해라 그래. 인정과 이해. 이게 기본이야. 인정과 이해를 하면 내가 화날 일이 없어.

 

화가 날 때는 네가 틀렸다하고 나를 기준으로 확 잡아버리니까, 이게 화가 나는 거지. 인정과 이해를 하면 내 기준을 놔야 서로 다르다는 거를 알게 되잖아. 그러면 그걸 저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인정과 이해를 하게 되면 화날 일이 없어져. 빙긋이 웃게 돼. ‘, 화나겠다. 저 사람 입장에선 이런 꼬라지보면 화가 나겠구나.’ 이러면, 화를 내는 거 보다 웃을 수가 있게 돼. 우리 그게 잘 안 돼. ‘말하는 너는 되나?’ 나보고 그러면 나도 잘 안 될 때가 있어.

 

그러나 이거를 움켜쥐고 있지는 않아.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금방, 아이고 내가 또 생각에 사로잡혔구나. 이렇게 탁 놓는 맛이 있어야 돼. 수행자는. 그러면 웃을 때도 있고, 남이 화낼 때 웃을 때도 있고, 또 화를 같이 내지만 금방 또 놔 버릴 때도 있고. 꽁해서 이걸 맨날 며칠을 간다든지, 이런 거는 벗어날 수가 있는 거요. 그래서 자꾸 잘못했다. 잘못했다 할 때, 그 표현이 혹시나 오류가 생길까 싶어서 그래. 자기가 나쁜 여자 아니야. 그냥 좀 어리석었지.

 

자기도 나름대로 착하게 살기는 살았는데 뭘 몰라서, 몰라서 이렇게 잘한다고 잘한 게 결과가 나쁜 결과를 가져왔어. 그래서 그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게 뭐다? 참회고, 해탈의 길을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