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법문-본성과 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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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종범스님_법문

2017. 4. 26.


  

본성과 업력,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성이라고 하면 우리 중생의 근본, 그것을 본성이라고 그럽니다. 우리 중생은 뿌리가 뭐냐? 실체가 뭐냐? 그래서 근본이라고도 하고, 실상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이래요. 자기 아주 근본이다. 성이라는 얘기는 본체, 근본 몸 이런 거죠. 우리 인간의 근본, 아주 뿌리와 같은 것, 실상_그 진실한 모습, 본체_아주 본래 몸. 그게 뭐냐 하는 거구요.

 

그 다음에는 업력이라고 그러는 것인데, 소는 소대로 보면 쭉 행동하는 방법이 있고, 새는 새 대로 방법이 있고요, 나비는 나비대로 방법이 있어요. 그것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행동하는 힘. 움직이는 힘. 업은 움직인다는 말이죠. 계속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그쪽으로만 힘이 생겨서 못 벗어납니다. 그것을 업력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사람한테도 업력이 있어서 자기 업의 흐름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이것을 업력이라고 그러거든요.

 

중생은 다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본성, 또 업력에 지배를 받아요. 이게 바로 중생입니다. 예를 들면 물이라고 하는 아주 깨끗한 물이 있는데, 이 물은 아주 깨끗하고 아무데도 걸림이 없는 그런 물인데, 이 물이 한번 얼면 마음대로 안 돼요. 한번 얼면. 그리고 일단 구름이 되면 이게 또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물이 큰 독약을 만나면 이게 금방 독소가 빠지지를 않아요.

 

또 물이 진흙을 만나면 금방 본래 물로 잘 안 돌아가진다. 이 거죠. 그런데 이 물은 얼음이 되었든지, 구름이 되었든지, 진흙탕물이 되었든지, 독약물이 되었든지, 본래 물은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구름인 게 사실이고, 독수가 된 게 사실이고, 흙탕물이 된 것이 사실이거든요. 이것을 본성과 업력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중성이에요. 청정성과 업력성. 본성으로 보면 다 청정한 거예요. 청정하지 않은 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업력의 지배를 또 받습니다. 물은 본래 깨끗한데, 흙을 만나면 흙탕물이 되고, 차가운 공기를 만나면 얼음이 된단 말이에요. 얼음된 것이 사실이고 흙탕물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물은 변하지 않고 그냥 있습니다. 이게 청정과 업력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청정과 업력. 그래서 이런 것을 잘 깨닫는 것이 그것이 본성을 본다라고 그래서 견성이라 그러고, 또 업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성불이라고 그럽니다.

 

성불은 업력의 지배를 안 받는 겁니다. 그런데 견성은 누가 보든지 아주 탁한 흙탕물인데, 이 겉모양만 보는 것은 흙탕물만 보는 것이고, 견성을 하는 것은 그 흙탕물이 바로 깨끗한 물이라는 것을 보는 겁니다. 그게 견성이에요. 그러면 깨끗한 물이니까, 이게 그 견성을 해서, 흙탕물이 깨끗하다는 것을 봐서 이게 흙이 잘 가라앉을 수 있도록 가라앉히면 되는 거죠. 그래서 흙탕물을 사르르 따라내면 그 다음부터는 맑은 물로 마음대로 무엇을 하든지 다 마음대로 쓸 수 있죠.

 

그것을 圓覺大智원각대지가 朗然獨存낭연독존이라 이렇게 표현하는데요,

원각대지_아주 둥글게 깨달은 큰 지혜가

낭연이라 밝은 낭, 아주 밝게밝게 홀로 존재한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그 현상에 빠지지 않고 자제한다는 거죠.

 

내가 왜 내 맘대로 못하느냐하면,

눈으로 뭘 보면 보는데 빠져버려요.

빠지는 것은 뭐냐? 거기에 끌려갑니다.

끌려갈 때는 꼭 형상에 매력을 느껴서 끌려가요.

그게 귀신인데,

형상이라는 것은 금방 있다 없어서 귀신이라 그래요.

귀신이 따로 없어요. 이런 게 전부 귀신입니다. 이게 있다가 금방 없어지거든요.

 

그래서 대낮에 귀신한테 홀려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꽃을 보면 꽃 귀신한테 홀리고, 사람 보면 사람귀신한테 홀리고, 산보면 산 귀신한테 홀리고, 형상이 다 귀신이에요. 그래서 유가에서도 屈伸往來굴신왕래가 굴신_구부리고 펴고 가고 오는 것이 개위귀신이라_다 귀신이다. 중용주에 그런 말이 있어요.

 

크게 보면 귀신이라는 게 다 형상이 있는 게 그게 그냥 귀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형상만 보고 실상을 못 봐서 실상, 얼음만 보고 물을 못 봤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저리 갔다 이리 갔다. 쉴 날이 없고 고요할 날이 없어요. 그것을 윤회라 그러고 그것을 고해라 그럽니다. 윤회를 맨날 하자니 얼마나 괴로워요. 그것이 고해죠. 본성을 까막히 모르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돌아만 다니는 것을 그것을 고해라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 본성을 알고 업력을 잘 닦으면 다 해탈하고, 다 편안함을 얻습니다. 견성 못하고 업력을 못 닦으니까 문제가 되요. 그래서 견성을 해도 자기 업은 받아야 됩니다. 그거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청정수를 알기는 알았는데, 워낙 흙탕물이 많은 것은 당분간 그 흙탕물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흙이 다 빠져나가도록 잘 가라앉혀서 그것을 다 따라내면 그때는 정말로 청정수가 이루어져서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이런 말을 왜하느냐? 이게 말을 만들어서 말 선전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왜하냐? 바로 각자 인생을 말하는 거예요. 인생. 이게 인생입니다. 이게 그냥 책을 쓰기 위한 말이 아니고, 중생의 삶의 혼이에요. 지금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불교가 그렇게 쉬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쉬운 게 불교입니다. 내가 어릴 때 스님들한테 법문 들은 것, 지금 생각하면 전부 중요한 법문이에요.

 

절에 오니까 어떤 참선하는 선객스님인데, 그 스님이 요새 연락이 안 돼요. 돌아가셨나 어디계신지 모르겠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요지일체법이라고 하는 법문인데, 한번 게송으로 읊어놓고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로다.

나무아미타불

여시해법성하면

즉견노사나로다.

나무아미타불

 

게송 읊는 것 듣고 있으니까 답답합니까? 답답할 게 없는 거예요.

답답한 마음이 그게 업력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되요.

막 바쁘다고 뽐내고 그러죠. 어리석어서 그래요.

 

세상에 이게 바쁜 게 전부 업에서 못 벗어나는 중생노름입니다.

구름도 안 바쁘고, 청산도 안 바쁘고, 흐르는 물도 안 바쁘고

세상에 바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사람 마음만 바쁜 거예요.

누가 오라는데 없는데 그냥 두 주먹 쥐고 가고, 이게 무슨 짓이오?

 

누가 생각하라는 사람 없는데 낮이나 밤이나 생각하고.

이것을 업력이라고 그럽니다. 업력.

 

그런데 절에 처음 왔는데 선객스님이 이것을 말씀을 하셔요. 그래서 서당에서 글 읽었다고 그러니까 이거 한번 새겨보라고. 그런데 척 보니까 글 문리도 이상하고 유가 글하고 틀려. 요지일체법인데. 수료할 요, 알 지. 일체법.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자성이 있는바가 없다. 무소유.

 

이 요지를 어디다가 붙여야 되는지 잘 모르겠더란 말이죠.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 자성이 있는바가 없다 이것은 새기겠는데 이 요지를 잘 못대겠다고 그러니까 당신이 설명해주더라고요. 요지일체법 자성무소요. 그런 거예요. 일체법이 이 말이에요. 일체법 그러면, 일체법속에 우주만물입니다. 전우주만물이라. 하늘도 일체법이요, 땅도 일체법이요, 사람도 일체법이요. 그냥 형형색색 우주만물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전부 일체법이거든요.

 

그래서 그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 데가 없다.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법 하나하나의 근본 본질이 없다.

 

이 소리에요. 이게 불교에요. 돌에는 돌의 본질이 없고, 나무에는 나무의 본질이 없고, 이게 자성이 있는 데가 없다. 이 소리입니다. 이것을 요달에 알면 이 소리에요.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바가 없음을 요달에 알면, 깨달아 알면. 알아라. 알아야 하나니라.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바가 없음을 깨달아 알아야 하나니라. 깨달아 알아라.

 

여시해법성하면 이와 같이 법의 본성을 알면, 즉견노사나니라. 곧 노사나불을 보나니라. 노사나불은 대광명불이에요. 대광명불, 부처님 전체를 노사나불이라고 그래요. 대광명불. 큰절에 가면 대광면전 이런데 있지 않습니까? 노사나불을 본다. 그런 법문이에요.

 

그 법문을 듣고 나중에 보니까 이게 중요한 뜻이 있어요. 최초로 이 법문을 듣고 깨달은 분은 통도사를 창건하신 자장스님인데, 이 자장스님이 636년에 중국에 가셔서 7년 동안 계시다 왔는데, 그 중국 오대산 그쪽 문수보살 있는 도량에서 기도하시다가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받은 게송이요. 이게. 자장스님이. 그런데 이 게송의 출처는 화엄경 수미정산게찬품에 있는 게송이에요. 이것을 바로 알면 견성하는 거예요.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바가 없음을 알아라.

여시해법성하면 이와 같이 법에 본성을 알면

즉견노사나니라. 곧 노사나불을 보나니라.

 

절에 처음 와서 그 손객 스님한테 들은 법문인데 거기에 다 있더라구요. 지금 보니까. 거기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일체법은 다 업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고, 자성무소유는 본성이 본래 원만하고 청정한 거예요. 이게 청정성과 업력성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기는 모기대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 가지고 있고, 나무는 나무대로. 이런 있는바 없는 자성. 있는바 없는 자성이 뭐냐? 이 자성이라는 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바가 없어요. 없는 데 가서 찾아도 자성은 못 찾고, 있는데 가서 찾아도 자성은 못 찾고, 뭐라고 이름을 때려 붙여도 그것은 때려 붙이는 사람의 업력이지 본성은 아니에요. 이것이 참 중요한 거예요.

 

이게 좋다고 해도 좋다는 사람의 업력이에요. 이게 나쁘다고 해도 나쁘다고 하는 사람의 업력이고, 크다고 해도 업력이고, 작다고 해도 업력이고. 여기에는 큰 자성도 없고, 작은 자성도 없고, 나쁜 자성, 좋은 자성 없어요. 또 없는 건 있느냐? 없는 자성은 없어요. 그래서 견성을 하려면 이 좋다 나쁘다. 온다 간다. 이런 업력이 녹아져야 견성을 합니다. 이것을 분별심이라고 그러는데, 이 분별심이 살아있으면 견성 못해요. 왜 견성을 못하느냐?

 

이 분별심에 매달려서 제 생각에서 못 벗어나니까 견성을 못하는 거예요. 제 생각을 확 태워버려야 되는데, 제 생각을 못 태우는 거예요. 그것 참 묘한 거예요. 그래서

 

왜 견성 못 하느냐?

제 생각을 가지고 항상 여기도 붙이고 저기도 붙이고 붙여요.

그래서 천만년이 지나도 자기 업력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미륵이 화생해도 안 되고, 백천만불이 세상에 출연해도

자기 방식으로 생각하고

자기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못 벗어나요.

이게 업력입니다.

 

그래서 아, 불교라는 게 그게 그렇게 쉬운데,

자기 업력에 의해서 눈 감고, 귀 막아서

이렇게 헛세월 보내는 구나.

이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기회가 있었는데 또 놓쳤는데 통도사 가원에서 선요 배울 때, 선요에 보면 安身立命안신입명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안신이라는 것은 어느 환경에 가든지 불편한 것을 못 느껴요. 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이 편안해요. 이것을 입명이라고 그럽니다. 안신 몸신. 편안할 안. 몸을 편안히 한다. 어느 곳에 있든지 억울한 생각도 없고, 손해 본다는 생각 없고, 답답하지 않고, 이게 안신이에요.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두려움이 없어요. 그냥 하는 거예요. 이것을 설 립. 목숨 명. 입명이라고 그러거든요. 이게 맹자에 있는 말인데, 이런 말이. 이게 좀 이상해서. 그 극람암에 경봉노스님한테 가서 여쭈어봤어요. 내가 가서 여쭈어 볼 것은 맹자에 있는 안신입명 뜻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안신입면 뜻이 어떻게 다른가? 어떤 차이점이 있고 어떤 특징이 있는가? 내 딴에는 이런 가르침을 기대하고 올라간 겁니다.

 

덥기는하고 점심 먹고 나서 12시쯤 되면 오후 2시까지 자유시간인데 그때 다녀와야 되거든요. 그래서 땀을 흘리고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딴판이에요. 딴판. 완전 딴판이에요. “선요에 안신입명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안신인명이 뭡니까?” 좀 가르쳐주세요. 여쭈어 봤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쳐다보고 하시는 말씀이 지금 나한테 안신입명이 뭡니까? 묻는 고놈이 뭐냐?” 이렇게 질문을 하셔요.

 

이렇게 질문을 받았으면 전생에서부터 많이 닦고, 선근종자가 아주 깊은 그런 업을 가졌으면 당장 깨닫습니다. 이게 선지식법문이에요. 당장 깨달아요. 그리고 거기서 못 깨달으면 조금 더 전생에 많이 더 닦았으면 여기서 꽉 막히는 거예요. 이것을 은산철벽이라고 그럽니다. 은으로 된 산, 쇠로된 벽처럼 나갈래야 나갈 수 없고, 물러갈래야 물러갈 수 없이 꽉 막히는 안신입명이 뭡니까? 하고 물은 이놈이 과연 뭔가?”

 

입이 물었나? 입을 쳐다봐도 없거든요. 눈이 물었나? 눈을 쳐다봐도 없고, 손이 물었나? 쳐다봐도 물은 놈이 없어. 그런데 묻기는 물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런 법문은 정말 백천만겁 난조우입니다. 들을 때가 없는 거예요. 이런 법문은. 이것은 도저히 철학도 아니고, 이건 문학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고, “지금 나한테 뭐가 뭡니까? 하고 질문한 그놈이 뭐냐?” 이 법문 듣고 깨달은 사람이 직하에 언하에 곧을 직. 아래 하. 바로 이 소리요. 언하라는 것은 말 떨어지자마자 깨친 사람이에요.

 

그런데 나는 어땠는가? 아이 난 그것을 물은 게 아닌데. 맹자에서는 어떻게 해석을 했고, 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을 했고, 이렇게 문장을 자세히 설명해주도록 그것을 물었는데, 이 스님이 영 딴소리를 하신다. 이래서 아주 기분이 나빠서 그냥 내려왔지요. 이런 거예요. 이게. 업력이라는 게 이런 거예요. 이거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을 업력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선지식이 그냥 널려있어요. 선지식이. 그런데 업력이 두꺼워서 선지식을 모르는 거예요. 가르침이 그냥 널려있습니다. 가르침이 그냥 널려있고, 선지식이 그냥 널려있어요. 그런데 본인의 업력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30년 후에 보니까, “, 내가 그때 어긋나서 30년 고생을 했구나.” 그때 탁 걸려들었으면 일주일이면 해결합니다. 일주일이면 해결해요.

 

안신입명_몸을 편안히 하고 무엇을 하든지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해나가는 그게 과연 뭔가? 라고 물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해석을 해주시지 않고, “안신입명이라고 나한테 물은 고놈이 뭐냐?” 꽉 막혀서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줄도 모르고, 잠을 자도 잠자는 줄도 모르고. 가도 가는 줄도 모르고, 와도 오는 줄도 모르고. 꽉 이렇게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서 사흘만이면 해결되는 방법이 있구요. 늦어도 일주일, 아무리 늦어도 열흘이내에 바닥이 납니다. 그런 거예요.

 

이 정도만 되어도 상근기가 아니고 중화근기에 속하는 거예요. 상근기는 그 법문 듣자마자 거기서 확철대우를 하죠. 거기서 그냥 깨닫는 거예요. 바로 가르쳐준 거니까. 그런 하나하나 광경이 본성과 업력입니다. 바로 본성을 바로 가르쳐주신 거예요. 본성을. 그런데 묻는 사람의 업력으로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업력이 아주 청정하고 수승한 그런 옛날 분들은

현장에 직하에서 바로 깨달아요.

수두룩합니다. 그런 선지식법문을 한번 듣고 바로 깨치신 분이. 그런 겁니다.

 

그 다음에 또 보니까 달마스님얘기를 또 하셔요. 절에서 많이 하셔요. 달마스님이 소림굴에서 9년 동안 계시는데, 혜가라고 하는 분이 찾아갔다. 혜가가 본래 신광이에요. 신 신, 빛 광. 찾아갔는데 거들 떠 보지를 않는다고 그랬죠? 수백 번 들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아직까지 견성이 아직 멀은 거예요. 전생에 많이 닦은 분들은 그 한번 듣고 다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본성에 대한 바로 가르친 이런 법문을 자꾸 들어야 되요.

 

그러면 나중에 깨칠 때는 이게 다 살아나요. 살아나서 그 들었던 것이 그대로 돌려봐지고 다 점검이 되요. “, 이게 하나도 옛날 선지식들이 속인일이 없구나.” 알아져요. 지금 모르는 거예요. 불교라는 게 이런 겁니다. 거들떠 안봅니다. 그래도 혜가스님이 물러가지 않고, 계속 그 문밖에서 기다리는데, 눈이 허리까지 차도록 그냥 기다렸다.

 

달마스님이 나와서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느냐?” “불교를 구하러 왔다.” “이 불교라는 것은 쉽게 되는 게 아니니까 믿음이 있어야 된다. 믿음을 나한테 보여라.” 그러니까 팔을 끊어서 바쳤다는 거 아니에요. , 그러면 위법망*이라. 법을 위해서 몸을 잊었다. 법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혜가라고 이름을 고쳐준 거예요. 이게 또 법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법이 들어가요. 그러니까 그 믿음 하나 보고 이름을 지어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믿음이

자기가 성불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하나 보고 그 자리에서 혜가라고 이름을 고쳐줬거든요. 신광에서 혜가로. 그런 거예요. 이게. 그거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그러냐하면 제불법인을 가득문호아이게 전등록에 고대로 있는 말인데, “모든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실한 뜻, 진실한 뜻을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물었어요. ‘제불법인은 비종인득이라.’ “부처님의 진실한뜻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게 아니다.” 본인이 깨달아야 된다 이거에요.

 

, 이게 아주 한마디 한마디가 아주 중요한 법문입니다 이것을 심지법문이라고 그래요. 마음을 바로 가르친다고. 마음 심. 땅 지. 그러니까

 

도대체 이 법을 왜 구하는가?

뭣 때문에 이 법을 배우는가?

자기 인생을 배우는 겁니다.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 인생을 배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아심지미령. 내 마음이 지금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거에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것, 이게 업력입니다.

 

도를 알면 어찌되느냐? 마음이 편안해지구요,

도를 모르면 어떻게 되느냐? 마음이 불안한 거예요.

 

미령이라고 썼어요. 아닐 미. 편한 령. 제 마음이 편안치 않습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뭐니 뭐니 해도 그 업력에 자꾸 끌려 다니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치 않아요. 마음이 안 편해요. 그게 업력입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이 요즘 심리상담하는 식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바로 선지식 바로 가르친 거죠. 그러면 장심래하라.’ “마음을 가져와라.” 마음을 가져와라. 그러니까 혜가스님이 찾아요. 그리고 하는 말이 覓心了不可得멱심요불가득이라.’ “마음을 찾아도 마침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여안심경이라.’ “너에게 마음을 편안히 해주고 마쳤다.” 이게 문답이 다 입니다. 이게.

 

이게 바로 선지식의 바로 가르쳐주는 법문입니다. 부처님의 진실한 뜻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게 아니다. 배우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깨달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음식이 좋아도 구경만 해서는 배가 안 불러요. 내가 먹어야 되요. 설명만 들어서는 배가 안 불러요. 내가 먹어야 되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비종인득이라. 사람으로부터 얻는 게 아니다.

 

그러면 왜 깨달아야 되는가?

마음이 불안해.

 

이게 본성을 보지 못하면 이게 죽어도 불안하고 살아도 불안하고, 가져도 불안하고 안 가져도 불안하고, 노인은 노인대로 불안하고,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불안하고, 애들은 애들대로 불안하고, 불안하다는 거예요. 어떤 분이 얘기하는데 재미있데요. 교수하다가 하는 분인데, 지금도 학회활동 많이 하고 그러는데, 여자 분인데 뭐라고 그러냐하면,

 

30대는 30대 대로 떨리고

40대는 40대 대로 떨리고

60대는 60대 대로 떨리고

지금 80이 되었는 대도 떨린데요. 떨려.

 

그래서 그 말 가만히 듣고 80된 노인이 뭘 잘 보일일이 있어서 떨리나. 그 생각을 해요. 80된 노인이 뭘 잘 보일 일이 있어서 떨리나. 그런데 떨리거든요. 왜 떨리나? 이 중생에게 업력이 있어서 나는 잘되어야 한다.” 라는 그 업력을 뿌리치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100살이 되어도 다른 사람에게 잘못보이면 안 된다는 그런 절박감과 불안심이 있는 거예요. 이것을 못 버려요.

 

그 불안한 마음은 105살이 되어도 못 버리고, 110살이 되어도 못 버릴 거예요. 이 불안한 마음을.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고치냐? 달마스님은 가져오라 그랬거든요. 찾아보면 없어요. 그 불안한 마음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는 거, 그게 견성입니다. 없어요 찾아보면. 그런데 없는 게 뭘 하느냐? 온갖 일 다 해요. 보면 볼 수 없는데, 온갖 일 다 하는 거, 그게 본성이거든요. 그게 온갖 일을 다 해요. 그런데 찾으면 없어요.

 

그런데 그 대화 앞서서 소개해 놓은 게 있는데 양무제를 만났을 때 대화가 잘 안 통하니까 양무제임금이 달마스님한테 물었다는 거 아니에요. ‘대심자수요’ “나를 대하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 뭐라고 대답했다고 그랬죠? “모르겠다.” 불시. 그게 바로 대답한 거예요. 양무제를 대하고 있는 달마스님의 실체가 뭐냐? 말로 못해요.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은 사람도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해도 마음도 아니구요. 이게 사람이다. 마음이다. 이것은 전부가 개념이에요. 생각이에요.

 

전부 중생놀음이라는 게 생각에서 생각으로 이름만 들어내고, 개념만 드러내고, 논리 만들어 내고, 이 짓 하고 사는 거거든요. 전부 허구에요. 이것은. 진실이 아니라구요. 이 개념과 명칭이 이게 전부 쓸데없는 겁니다. 바로 양무제만나서 대화하고 얼굴 맞대고 있는 그것은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거고, 사람 아니라고 해도 틀린 거고, 성현이라고 해도 틀린 거고, 성현 아니라고 해도 틀린 거고. 거긴 어떤 명칭과 어떤 개념도 붙을 수가 없어요.

 

그냥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뭐든지 갖다 대면 다 타버릴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뭐라고 그래요? “모르겠다. 모르겠습니다.” 그게 대답이 아닌 대답이에요. 그게 본성을 이야기한 겁니다. 본성을. 그러니까 중생은 억 천만 년을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해도, 본성은 그냥 가지고 있는데, 그 본성은 꿈에도 모르고, 업력에서 업력으로 업력에서 업력으로 그 업의 굴레어서 돌고 돌고 돌아서, 맨날 걱정하고, 만날 근심하고, 맨날 슬퍼하고 그 짓하고 살 거든요.

 

그러니까 본성이 부처님본성이나 어떤 본성이나 다를 바 없이 청정하다. 청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도 붙을 수 없는 그거라는 거죠. 청정하다는 것을 믿고 업을 자꾸 잘 닦아나가면 그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수행이라고 그러고, 그것을 공부라고 그래요. 그게 뭐와 같으냐 그러면 고향을 등지고, 부모를 등지고, 멀리 멀리 타향살이하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점점 고향으로 고향으로, 부모 곁으로 부모 곁으로 오는 것을 수행이라고 그럽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그러면 금방 깨닫는 사람은 어떠냐?

이 고향과 부모를 떠난 거리가 얼마 안 된 사람이에요.

겨우 문밖에 갔던 사람은 아무개야하면 금방와요.

그런데 조금 더 떨어지면 굉장히 세게 불러야 와요.

아주 수천리 수만리 떨어진 사람은 불러도 불러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법문을 해줘도 못 알아듣지. 그런 사람은.

 

못 알아 들어도 자기 본성을 딱 믿고,

그 믿는 게 아주 중요해요.

나에게 고향이 있다. 나에게 부모가 있다.

그것을 믿고 닦고, 또 닦고, 닦으면 반드시 된다는 거죠. 이게 수행입니다.

 

그런 거지, 되느니 안 되느니 걱정할 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 믿으면 소용없어요. 안 믿으면. 그전에 암자에 있을 때인데, 젊은 남학생이 한번 와서 “3일전에 애인하고 헤어졌는데, 못 견디게 괴롭다고.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그것을 아나? 뭐라고 말을 해줄 수가 있어야지. 그것 참 곤란하데. 나는 절에 와서 경을 물을 줄 알았더니 애인을 물으니 내가 어떻게 해요? 그것참 곤란해.

 

그래서 달마스님 생각이 나서 , 그 애인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 그걸 한번 찾아봐라.” 내가 그랬더니. 그러니 기가 막힌 거지. 나를 쳐다보면서 애인 생각도 괴로운데 그것을 왜 찾습니까? 이러더라고. 그때 내가 달마스님 방법대로 하다가 아주 된통 당했습니다. 아무데나 그게 통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데나 아무개야, 라고 불렀을 때 대답한 그놈이 뭐냐?” 라고 해서 아무나 턱턱 깨닫는 게 아니에요.

 

고향을 수만리 지금 떠나서 갔는데, 자기 집에서 이리와라부른다고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는다구요. 이게 업력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업력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업력이라는 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를 낳아서 잘 가르다가 아이가 잘못되었어요. 그러면 실지 그 아이는 죽어서 극락을 갔는지, 어느 귀공자 집에 태어났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잘되었는지 못 됐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그런데 그 부모는 한없이 괴롭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실제 몰라요. 지금 이 세상에서 사는 거 보다 더 잘 되었는지, 정말 성불해서 갔는지, 불보살이 되어서 다시 화현을 해서 세상에 왔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부모가 걱정하는 것은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기울였던 자기 업력을 하루아침에 청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업력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푹 배면 이게 좀처럼 가셔질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담배하나를 끊는데도 죽을 고생한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이 보면 웃겨요. 그러지 않습니까? 담배를 아예 배우지 않은 사람이 볼 때는 담배 끊는 거, 도대체가 심각하게 느낄 수가 없죠? 그런데 거기에 푹 밴 사람은 죽을 고생한단 말이죠. 그게 업력이에요. 업력이라는 것이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업을 절대로 소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본성만 믿고 큰소리치다가 자기도 모르게 저 물구덩이에 빠지고, 불구덩이에 빠지고, 진흙탕 속에 빠지는 중생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런 본성에 대한 법문을 듣고 그

 

본성을 잘 깨달아서 어디에 가도

구애가 없이 되는 게 성불인데,

그 성불할 때까지 자꾸 청정한 업을 닦아서

수행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

그것이 불교고, 그것이 닦는 길입니다. 오늘 말씀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