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반야심경-제04강 관자재보살 Avalokitesvara bodhisatt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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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반야심경

2017. 5. 22.



  

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강의 4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번 시간에는 보살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보살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수행정진을 하는가? 불교에서는 수행자에게는 3종류가 있습니다. 성삼승. 불법승 할 때 승에는 3종류가 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성문승의 수행법은 사성제 팔정도를 닦습니다. 사성제 팔정도를 닦는다.

연각승의 수행법은 12연기를 관합니다.

보살승의 수행법은 육바라밀을 닦습니다.

 

그러니까 소승불교인 성문연각은 사제팔정도 12연기를 닦고, 대승보살승은 육바라밀을 닦는다. 지금 이 금강경, 그리고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이죠.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보살이고, 그 수행법은 바라밀 수행법. 육바라밀 수행법. 그 가운데, 여기에 반야바라밀 수행법을 닦고 있다.

 

, 이 보살 가운데에서 수많은 보살, 여러분 잘 아시죠?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이하 한량없는 보살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보살 가운데 이 반야심경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보살은 누구입니까? 관자재보살이에요.

 

그러니까 그 분이 관자재보살이든, 그분이 문수보살이든, 보살이라고 하는 칭호가 붙었다 그러면 지난번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중생을 구제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삼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중생구제 따로 있고, 깨달음을 얻는 길 따로 있고 이런 게 아니에요. 이것이 하나로 되어 있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과

남을 이롭게 하는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되어있습니다.

 

중생은 내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손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그 인연과보로 내가 다시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친다. 이게 어리석은 중생의 길이오.

 

현명한 사람은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남에게 손해 끼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로울망정 다른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지혜로운 자, 대승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내가 그 이익을 위해서 내가 베푸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가 이롭다. 또한 내가 이롭다. 그를 사랑하면 사실은 내가 더 먼저 기쁘다. 그러니까 자리_내가 이롭고, 이타_남도 이롭다.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구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곧 내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까 한쪽으로는 보리를 구하고, 한쪽으로는 중생을 구제하는데 이게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있다. 이것이

 

선에 오면 뭐가 됩니까? 선농일치.

일을 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다.

선농일치.

 

오늘 저희들을 이것을

일과 수행의 통일,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선농일치의 일관된 흐름 속에 있다.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는 것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정진하는 자, 이런 수행자들을 뭐라고 부른다?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 수많은 보살 중에 보살의 무리 가운데에서 주인공은 관자재보살이다. 그럼 이 관자재보살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분인가? 원래 산스크리트어, 인도 말에서는 Avalokitesvara bodhisattva입니다. 관자재.

 

아바로키테

Avalokite라는 말은 지켜본다. 이런 뜻이에요. 이렇게 딱 지켜보는 거요. 지켜본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본다. 눈을 뜨고 환한 상태에서 확연히 지켜본다. 이게 Avalokite에요.

 

스바라

svara는 그것이 자유자재하다. 그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환하게 지켜볼 수가 있다.

 

이 아바로키테를 한문으로 뭐라고 옮겼습니까? 관이라고 옮겼어요.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다 하면 깨달을 각자를 쓰죠. 또는 지혜 지자를 쓰기도 하죠. 또는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오온개공 할 때는 견자를 쓰죠. 안다. 아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보고 알아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이런 말이 있죠? 그래서 볼 견자를 씁니다. 또 그것을 볼 관자를 써요.

 

그러니까 관 자를 쓸 때는 지켜본다. 이것은 그냥 눈으로 모양과 빛깔과 색깔을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본다. 이럴 때 볼 관자를 씁니다. 그러니 Avalokitesvara bodhisattva. 여러분들이 인도성지순례 박물관에 갔을 때, 밑에 이름을 보면 Avalokitesvara bodhisattva. 이렇게 써 놓으면 , 이분이 누구다?” 관자재보살이구나. 관세음보살이구나. 이렇게 아시면 되요.

 

Avalokitesvara를 구마라십대사님은 이것을 관세음이라고 번역을 했어요. 그런데 현장법사님은 이것을 관자재라고 번역을 했어요. 그러니까 관세음과 관자재는 동일 인물입니다. 이것은 번역 상에서 차이가 생긴 거요. 그러니까 어느 게 더 정확하냐? 직역을 하면 관자재가 됩니다. 고대로 번역하면. 자유자재로 지켜본다. 법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다 알아차린다. 그런 분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제법이 공한 도리를 꿰뚫어 알아보는 자다. 이럴 때는 관자재. 이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중생의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아는 자다. 이것도 관자재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럴 때 중생의 고통은 주로 어떻게 표현됩니까? 신음소리로 표현이 됩니다. “아야이렇게 신음소리로 표현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 중생의 신음소리, 고통의 신음소리가 곧 세상의 소리요. 그 세상의 소리를 다 아시는 분이다. 듣는다고 해서는 좀 불확실하죠? 그 중생의 신음소리를 듣고 가서, 그 신음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현장을 방문해서 보고, 그 고통을 환하게 다 아는 자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되었다? 관세음이라고 됐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번역할 때는 관세음이라고 번역했다가 나중에 직역을 하다 보니 뭐가 되었다? 관자재가 되었어요. 그런데 사람 이름은 첫째 한번 불리면, 먼저 불린 것이 자꾸 불리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관자재보다는 관세음이 더 익숙하고,

 

또 하나는 우리가 중생이 관세음보살님에게 도움을 청할 때 그때 부르는 용어로는 우리의 고통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이름이 더 다가와요? 제법이 공함을 훤히 깨달은 분이시다 하는 게 더 다가와요? 우리의 고통을 다 아시는 분이다. 이게 더 다가오니까, 주로 기도할 때는 관자재라고 안 부르고, 관세음이라고 불러요. 그러나 이런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닫는 이런 데서는 대부분 관자재라고 번역이 됩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관세음의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요.

 

그러면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 그런데 이 원어는 Avalokitesvara bodhisattva. 그럼 이분은 어떤 분이라고 보통 정의하느냐?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의 좌부처다. 우부처는 누구입니까? 대세지보살입니다. 극락세계 아미타부처님이 좌부처로 계신다. 그래서 사바세계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해서 저 극락세계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이 말이오. 이분이 관세음보살이다. 그럼 이 분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느냐?

 

첫째, 이마에 반드시 부처님의 상이 있습니다. 불모다. 이렇게도 말하죠.

그다음에 왼손과 오른손에 잠깐 바뀌기도 하는데, 한 손에는 연꽃을 쥐고 있어요. 연꽃을 쥐고 있는 이유는 연꽃은 물들지 않는 성품을 상징합니다. 중생이 이렇게 괴로워하지만, 사실은 중생은 본래 부처다. 내가 부처임을 깨닫는다면 바로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한 손에 연꽃을 쥐고 있다.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한 생각 바로 돌이키면 즉시 해탈한다. 이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럼 이 아우성을 치는 중생들을 어리석다고 내버려 둘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한 손에는 감로수가 든 병을 쥐고 있어요. 그래서 이 감로수로 중생의 고통스러운 심신. 괴로운 마음, 병든 몸을 치유해주신다. 치료해주셨다. 그러니까 이 감로수병을 가지고 우선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숨넘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고, 그리고는 부처님 법의 도리를 깨달아서 다시는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인도하는 자다, 이런 얘기요. 이 분이 관세음보살이다.

 

모든 보살은 다 원이 있습니다. . 원의 본원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원은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겠다는 원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가 되는 길은 곧 중생을 구제하는 마음을 내는데서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거요. 그래서 이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원을 갖고 있느냐?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는 중생이 있다면,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무관세음보살. 이렇게 부르면 중생의 고통을 다 알아볼 거다. 그 소리를 듣고 그 고통을 알아차린다. 두 번째는 그 고통을 구제해 줄 거다. 건져낼 거다.

 

그래서 구고구난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을 구하고 환난에서 중생을 구제한다. 구고구난을 본래의 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의심이 들죠. 이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아느냐 이거야. 알 수 있다. 어떻게 아느냐? 그분은 눈이 천개라서 우리처럼 눈이 두 개를 가지고 여기 보면 저기 못보고, 저기 보면 여기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뭐라고 한다? 천개의 눈을 가진 자다. 어떻게 이 세상 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다 구해주느냐? 다 구할 수 있다. 그 분은 천개의 눈을 다가진 분이다. 그래서 천수천안.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럼 천개 갖고 62억이나 되는 사람을 어떻게 구합니까? 또 이렇게 의문을 일으킬 수가 있는데, 옛날에는 천이라는 굉장히 큰 수에요. 이 천은 아라비아숫자 천이 아니고 한없는 눈, 한 없는 손이런 뜻입니다. 한없는 눈을 가지고 계셔서 뭐든지 다 알아보시고, 한없는 손을 갖고 계셔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하면 뭐라고 한다? 전지전능이다.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죠? 그러니까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은 다른 말로 바꾸면 전지전능하신 관자재보살, 이런 뜻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정말 이 관세음보살의 원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이 어떤 곳에서도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여러분들의 고통이 다 들어진다.

 

이런 얘기요. 그분은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면 이제 또 질문을 이상하게 하는 분들이 계세요. 어떻게 질문을 하느냐? “남의 물건을 훔쳐서 도망을 가는데 경찰이 뒤 쫓아요. 그런데 앞에 도망가는 도둑놈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 살려 주세요.” 뒤에 쫓아가는 경찰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저 도둑놈 잡게 해주세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럴 때도 관세음보살은 이 중생의 고통도 들어주고, 저 중생의 고통도 들어줍니다. 어떻게 들어줄 수 있을까? 관세음보살님은 천백억 가지로 화현을 하시죠. 그래서 누구의 모습으로 나툰다? 도둑의 몸을 나투어서 경찰에게 잡힙니다. 그러면 경찰의 소원이 들어졌어요? 안 들어졌어요? 들어졌지. 그럼 도둑의 소원도 들어줬지. 그러면 관세음보살은 감옥에 가야 되겠지. 그래서

 

자신을 그 중생의 고통을 대신함으로 해서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거요.

 

그럴듯하죠? 그러기 때문에 몸을 천 가지 만 가지로 나투셔서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한다. 이런 얘기요.

 

그러면 여기 또, 궁금한 게 있어요. 관세음보살님은 어떻게 해서 그런 큰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런 문제에요. 어떤 곳에서는 그런 전지전능하신 분은 본래 있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불교는 그렇게 앞뒤가 없는 얘기는 안합니다. 항상 뭐가 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이렇기 때문에. 이 관세음보살님이 어떤 분인가? 이게 관음의 연기입니다. 어떻게 해서 관세음보살님이 되셨는가? 이런 얘기에요. 여기 연기에는 여러 종류의 다른 얘기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렇습니다.

 

인도의 저 남쪽, 바닷가, 한 마음이 있었는데, 거기에 장자, 장자라는 것은 인도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기업가. 비즈니스맨. 이것을 장자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아주 부유한 사람이에요. 장자가 살았는데, 아내가 있고 두 아들이 있었어요. 어린 두 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갑자기 아내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아내도 그립지만, 너무나 두 아들을 사랑하니까 이 두 아들을 키우려면 두 아들에게는 누가 있어야 합니까? 아이들에겐 엄마가 있어야 되요. 키워줄 엄마가 있어야 돼.

 

그래서 부인이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지만 아이를 위해서 새로 결혼을 하게 된 거요. 요즘 말로 하면 새장가를 들었다. 이 말이오. 그럴 때 자기가 부인이 필요해서 결혼을 하겠다. 이런 거 보다, 아이의 엄마가 필요해서 결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광고를 냈어요. “누구든지 이 아이를 자기 아이처럼 친엄마 이상으로 사랑하고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 신분,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받아들이겠다.” 이렇게 말했어요. 당시에 인도에 결혼 풍속은 신분이 높으면 신분이 낮은 사람하고는 결혼을 잘 안하죠. 그런데 신분이 낮더라도 괜찮다. 이거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했는데 그 가운에서 신분이 낮고 즉, 훨씬 더 낮은 우리로 말하면 평민이거나 천민이거나 이런 신분에 있는 여자 중에서 아주 착실한 여자 분을 선발을 했어요. 이렇게 해서 두 아이를 돌보게 했는데, 이 부인은 두 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봄으로 해서 부귀영화가 주어진 거요. 가난한 집에 태어났는데 부잣집에 왔지, 신분이 낮아서 천대를 받았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하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귀한대접을 받지, 밑에 하인이 많이 있지. 이것은 남편 때문이 아니라 두 아이 때문에 그렇다. 두 아이를 돌보는 것 때문에 이런 자리가 주어진 거요.

 

그래서 이 두 아이를 정말 정성스럽게 돌보는 거요. 그러니까 이 남편이 볼 때, 비록 새엄마지만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진짜 친엄마보다 더 잘 보살피구나. 이런 생각이든 거요. 그래서 안심이 된 거요. 안심이 되니까, 일종의 결혼은 했지만, 애들 보는 보모나 유모처럼 취급을 하다가 이제는 마음이 놓이니까 부인으로 맞아들인 거요. 그래서 거기에 애기가 태어났어요. 그럼 보통 이럴 때 애기가 태어나면 또 자기 애기에게 더 관심이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부인은 전처의 두 아이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그때 이 남편이 안심을 한 거요. 늘 불안해하고 의심을 하다가 자기 아이를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전처의 두 아이를 더 사랑하니까 정말 이분은 착하구나. 이렇게 해서 집안을 다 이 부인에게 맡겨놓고 몇 년 만에 장사의 길을 떠나는 거요.

 

남편이 이제 멀리 갔어요. 남편이 떠나고 집에 앉아있는데, 이 집 주인이 누구에요? 자기죠. 남편이 있을 때는 자기 아닙니다. 특히 이런 신분에서 시집을 갔을 때는 남편은 남편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누굽니까? 주인입니다.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되요. 알게 모르게. 요즘은 안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옛날에 시집살이는 늘 긴장되고, 친정에 오면 탁 마음을 놓고 퍼져서 자는 이유가 아마 이것도 비슷할 거요. 그러니까 남편이 없으니까 진짜 자기가 주인이에요. 하인들도 부리고 눕든지 일어나든지 자든지 자기 마음대로에요.

 

자기가 생각해 보니까, 그 어릴 때 고생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보니까, 내가 도대체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느냐? , 생각지도 못할 일이란 말이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 모든 복은 저 두 아이 때문에 생긴 거요. 그러니까 두 아이가 너무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운 거요. 그런데 동시에 저 두 아이가 점점점점 커서 이제는 엄마가 필요 없을 시점에 가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많은 혜택을 주고 사랑을 베푸는 것도 저 아이들을 잘 키우라고 그러는데, 저 아이들 다 커버리면 나는 소용없어지지 않겠냐? 그러면 나는 결국은 버려지지 않겠느냐?

 

그때 내가 낳은 아들도 같이 버려지지 않겠느냐? 모든 재물, 모든 것은 다 저 두 아들에게 상속이 되지 않겠냐? 지금은 행복한데, 102030년 먼 미래를 생각하니까 나는 결국은 옛날 그 고통스러운 상태로, 가난한 상태로 돌아갈 거 같단 말이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다시는 살기 싫어.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그러니까 갑자기 막 불안해 지는 거요. 마치 미래에 일어날 일이 지금 당장 일어날 것같이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거요. 그 근심걱정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부인이 다시 생각해보니까, 결국은 내가 미래에 올 이런 재앙은 누구 때문에 오는 거다? 저 두 아이 때문에 오는 거다.

 

저 두 아이가 없다면 이 모든 재산과 남편의 사랑, 이거 다 내 아이하고 다 독차지 할 수가 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이 딱 미치니까 저 두 아이가 모든 재앙의 근원 철천지원수요. 그러니까 하루빨리 저 두 아이를 없애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이 미친 거요. 그래서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아무도 몰래 저 두 아이가 없어져야 되는 거요. 바닷가니까. 그래서 한 꾀를 내서 애들보고 얘들아, 엄마하고 소풍가자.” 애들이 좋다고 그래서, 작은 배를 타고 멀리 바닷가 멀리 떨어져있는 무인도로 놀러 갔어요. 그래서 애들을 섬에 내려놓고, 애들이 좋다고 바닷가 구경하는 동안에 조용히 배를 타고 돌아와 버린 거요.

 

이 두 아이가 바닷가에 한참 놀다가 이제는 해도 져가고, 배도 고프고 그래서 집에 가려고 엄마하고 찾으니까 엄마가 안 보이는 거요. 그래서 엄마 엄마하면서 밤새도록 부르고 이튿날 불러도 엄마의 응답이 없는 거요. 아무리 간절하게 부르고, 목 놓아 부르고, 피를 토하고 불러도 엄마가 응답이 없는 거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어리지만,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을 갔구나.” 이 생각이 미칠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엄마가 미운 거요. 결국은 우리를 버리고 간 엄마는 새엄마이기 때문에 우리를 버리고 간 거다.

 

그러니까 그 새엄마의 미움이 어디로 옮겨갑니까? 아버지에게 옮겨갑니다. , 엄마는 우리를 버렸지만, 아버지를 불렀는데 아버지가 대답이 없는 거요. 결국은 아버지가 장가를 안 갔으면 새장가를 안 갔으면 새엄마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이런 고통은 없을 거 아니냐. 결국은 아버지가 새장가를 감으로 해서 결국 이런 고통이 우리에게 떨어진 거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미워진 거요. 아버지가 미워지니까 더 이상 아버지를 부르지 않게 되죠. 그러니까 생모를 부르게 된 거요. 다시. “엄마, 엄마하고 아무리 불러도 엄마가 대답이 없는 거요.

 

그러니까 다시 엄마가 미워지는 거요. 엄마가 죽지만 않았으면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지 않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처음에는 새엄마를 부르다가 다음에는 아버지를 부르다가 그 다음에는 생모를 부르다가. 이렇게 해서 하루가고 이틀이 가고 삼일이가고 일주일이 가면서 지쳐 쓰러진 거요. 그러니까 가슴이 한이 차진 거죠. “만약에 내가 살아만 나간다면, 아니면 죽는다면 다음 생이라도 꼭 원수를 갚겠다.” 이것은 철천지원수 아닙니까? 그러니까 첫 번째 새엄마에게 우리를 버리고 갔으니까, 나를 죽였으니까, 이렇게 가슴에 한이 맺혀 들어간 거요.

 

이러는 중에 결국은 동생이 큰애는 7살 되고, 적은 애는 4살 되는데, 힘이 약하니까 동생이 먼저 쓰러져서 형의 무릎을 베고는 먼저 죽었어요. 동생이 죽으니까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히겠어요. 그래서 기진맥진해서 한이 극에 다다랐을 때, 만약에 이대로 죽었으면 다음 생에 원한이 돌고 돌 텐데, 그 때 엄마를 부르다 부르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새엄마도 이 고통을 모르고 응답이 없고, 내 아버지도 아무리 불러도 내 이 고통을 모르고 응답이 없고, 생모도 아무리 불러도 이 고통을 모르고 응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이 세상에는 나처럼 이렇게 극한 적인 고통에 처해서 아무리 부르고 부르고 신음을 해도 이웃집에 있는 이웃 방에 있는 사람도 모를 수가 있죠. 그러니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겠냐 이거야. 내가 이렇게 고통에 빠져 있는데도 아무도 모르잖아요.

 

내가 이 극한적 고통에 처해 있으면서

남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 거요.

 

그것을 이해하니까, 그 고통이 내 고통에 서러워했는데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보이고 알게 되니까 너무너무 불쌍한 거요. 그때 이런 원이 들었어요. “나는 내 엄마를 부르고 아버지를 불러도 응답이 없다. 그런데 나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이렇게 서로 죽이고 죽는 이런 사바세계에 어떤 복락을 구하지 않겠다. 나는 중생인 지금 나처럼 이렇게 간절하게 고통 속에서 살아나려고 부르는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누구든지 내 이름을 한번만 불러도 나는 그 고통에 응답하리라. 누구든지 그 고통에서 헤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기꺼이 구제하리라.” 이렇게 원을 세우고 숨이 끊어져버렸어.

 

만약에 자기의 고통에만 빠져서 죽었다면

세세생생이 원수를 갚고 받고 맺고 하는

이 중생계에 윤회했을 텐데,

 

자기의 고통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고통을 통해서 남의 고통을 보고,

그 고통에 내가 뭔가 도움을 주겠다고 하고,

한 생각 돌이키고 숨이 끊어졌다.

이게 바로 발심이오. 초발심이오.

 

이게 씨앗이 된 거요. 이게 심어지고 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고, 또 심어지고 나고 꽃피고 열매 맺고 다생겁래로 돌고 돌면서 그 영향이 점점 커졌다. 한명을 구제하는 데에서, 백 명을 구제하는 데에서, 천명을 구제하는 데에서, 만 명을 구제하는 데에서 점점점점 능력이 커져서, 지금은 아무리 많은 중생이 고통에서 아우성을 쳐도 그것을 다 알며, 마치 엄마가 애기가 울면 그 울음소리만 딱 듣고도 배고 고픈지, 어디가 아픈지 알잖아요. 부모가 자기 자식 울음소리 딱 듣고 금방 알아차리고 가서 금방 젖을 먹이든지 어떻게 해서 그 아픔을 해소해 주듯이, 그렇게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한다. 이분이 관세음보살이에요.

 

어떤 중생에도 차별이 없다. 이게 보문이에요. 넓은 문. 어떤 차별이 없다. 어디든지 다 그 몸을 나투신다. 그 원력이 깊고 넓다. 중생의 그 고통과 환난을 다 구제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부모처럼 자비롭고, 중생의 아픔에 큰 연민을 가지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가 뭐라고 그럽니까? 나무 보문 시현 원력 홍심 구고구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바로 그런 분이기에 나는 그분께 귀의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분의 명호를 간절하게 부르는 거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관세음보살은 일체중생의 아픔을 다 감싸 안고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었는데, 내가 그래도 관음행자라면 관세음보살을 믿는 사람이라면 관세음보살님, 저는 아직 힘이 약해서 일체중생은 우선 좀 놔두고, 내 남편, 이것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내 자식, 이것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내 부모, 이것은 제가 해결하셨습니다.

 

그들의 고통, 그들의 아픔을 내가 다 감싸 안고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작은 관세음보살이 되겠죠? 다른 말로 좀 어른 관세음보살이 아니고 새끼 관세음보살이 될 거 아니요. 그럼 새끼관세음보살이 크면 어른 관세음보살이 되는 거요. 쉽게 얘기한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은 우리가 관세음보살이 되자. 관세음보살처럼 나도 그렇게 살자.

 

여러분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 어린아이가 버려져서 죽는 고통보다는 덜하잖아요.

 

그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는데,

왜 여러분들이 위대한 인물이 못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불자들은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고통 속에 있지만, 첫째는 이 모든 고통을 관세음보살님께서 보살펴주실 거다 하는 믿음, 또 나도 관세음보살처럼 도리어 남을 돕는 마음을 일으켜서 나도 해탈하고 남도 해탈하는, 그런 보디사트바, 보살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낸다면 여러분들 자신이 먼저 기뻐지고 해탈할 것이고, 여러분들의 가정이 좋아질 것이고, 이런 수행자들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가 더 아름다워집니다.

 

지금 욕심으로 살아가는 이런 불자, 이런 기독교 천주교 이런 사람은 다 불자가 된다한들 우리사회가 얼마나 바뀌겠으며, 다 기독교인들이 된다한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바뀌겠어요? 그것이 그거에요. 이것은 세력다툼에 불과한 거요. 그러니 우리가 이런 불자가 늘어난다면 그 한명이 늘어나고 두 명이 늘어나면, 개인뿐만 아니라 세상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운동을 우리가 일으켜야 됩니다. 이런 힘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이런 원을 갖고 여기저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지장보살을 불러야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러한 관세음보살이 그냥 중생의 구제뿐만이 아니고 일체중생의 고통을 꿰뚫어 아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는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치신 분이다. 그래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신 분이다. 자유자재하신 분이다. 거기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 중생을 위해서, 그들을 깨닫게 하고, 그들을 구제하시는 무한한 힘을 가지신 원력 보살이시다. 그 분이 지금 이 경의 주인공입니다. 이분이 지금 법을 설하신다, 이거요. 이것을 분명히 알고, 여러분들이 정진을 해나가야 한다. ,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