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반야심경-제12강 무아-일체는 연관되어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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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반야심경

2017. 6. 5.


  

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12번째 강의가 되겠습니다. 지난 번 시간에 무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무아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리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 오늘 우리는 모든 것에

그것은 그것일 수밖에 없는 어떤 실체가 있다 라는

전제 위에 살아가고 있다.

 

여기 컵 뚜껑이 있습니다. 이것은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작다. 작다 하는데 어떤 사람은 또 크다 그래요. 그러니까 작다 크다할 때, 작다 하는 사람은 어떤 솥뚜껑하고 비교를 하든지, 장독대 뚜껑하고 비교하든지, 무언가와 비교해서 이게 작다는 말이 생깁니다. 또 크다하는 사람도 이것보다 작은 어떤 것을 상정해서 이것을 크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것을 놓아버린 이거 자체 이대로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하면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이 컵 뚜껑이 새 겁니까? 헌 겁니까?” 새것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니에요. 사실은. 그러나 우리 일상 속에서는 늘 크다 작다 새거다. 헌거다. 무겁다. 가볍다. 이렇게 사용합니다. 그럼 무거움과 가벼움, 그것도 구별하지 못하나? 이것은 무겁고 이것은 가볍잖아. 그런데 무거운 것도 없고 가벼운 것도 없다니, 그러면 이게 같다는 얘기야?” 이렇게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무게를 달아서 50그램이 나왔다. 그럼 50그램을 가지고는 무겁다 가볍다고 할 수도 없고 가볍다고 할 수도 업습니다. 10그램에 비해서는 무겁고 100그램에 비해서는 가벼운 거요. 여러분들, 늙었다. 젊었다. 이런 말 많이 쓰죠. “, 저분은 늙고 저분은 젊고, 그것을 누가 몰라.” 금방 알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고생들 2학년 3학년 노는데 가서 가만 들어보세요. 3학년짜리가 아이고, 우리 늙은 것들은 쉴 테니까 젊은 것들이 해라.” 그 사이에도 늙고 젊은 게 있어요.

 

우리 절의 보살님들도 70세도 있고 80세도 있는데, 80세 되신 분들 제가 모시고 여행을 가면 그 70세 되신 분 어쩌다가 끼어오면 젊은 것에 속합니다. 여기 참가할 자격도 없는 젊은 것들. 안 그러면 젊은 것이 가서 반찬도 차리고 일을 해야 됩니다.

 

늙었다 젊었다 하는 것도

상대적인 거요.

 

공부 잘하는 아이, 각 학교에서 1등하는 아이들만 모아서 학교를 하나 만들어 놓으면 거기서도 꼴찌 하는 애가 나오겠지. 각 학교에서 꼴찌 하는 애들만 모아 놓으면 거기서도 1등하는 애가 나오겠죠.

 

학교 선생님만 모아놓고 가르쳐도 조는 사람이 있고, 대학 총장님만 모아놔도 조는 사람이 나오고 그래요. 우리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고 할 어떤 요소는 없습니다.

 

옷을 입는 게 좋으냐? 벗는 게 좋으냐? 이것은 정할 필요가 없어요. 목욕탕에서 옷 입고 있으면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오. 목욕탕 밖에서 옷 벗고 있으면 그것은 잘못된 행동이오. 그러니까 누워있는 것도 마찬 가지오. 앉아있는 것도 마찬 가지오. 자는 것도 마찬 가지오. 자야 될 시간에 깨어있으면 잘못된 거고, 깨어있을 시간에 자면 잘못된 거고.

 

자는 것, 깨는 것,

이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인연을 따라서.

 

그러기 때문에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산이 하나 있다면, 이 동네에서는 그것을 동산이라고 부를 수가 있다. 저쪽 동네에서는 서산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사람들은 작은 산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 그 옆에 더 큰 산이 있으니까. 이 사람들은 큰 산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 그 옆에도 작은 산이 있으니까. 그래서

 

아라고 하는 것이 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없다.

얼핏 보면 그런 요소, 실체가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없다.

 

회사 다니는 어떤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집 애도 둘이 있고, 부인이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시니까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그 부인이 작은 바를 하나 열었다. 그래서 그것을 갖고 생계를 유지하는데, 동료로서 도와주는 것은 나도 살기 어려워서 도와주기도 어려운 것도 있지만, 또 도와주면 자존심 상해한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니까, 그래서 퇴근할 때마다 그 집에 가서 한잔하고 오는 것으로 도와준다. 그럼 그 가게에서는 단골이 되겠죠. 그러면 그 여자분, 친구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고마운 사람이오? 나쁜 사람이오? 고마운 사람이지. 참 의리도 있고, 남편이 돌아가셨는데도 잊지 않고 늘 이렇게 보살펴 주신다. 큰 돈 아니라도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 주면 고맙잖아.

 

그런데 이 사실을 집에 있는 부인이 알면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온갖 자기 상상력을 동원해서 험담을 하겠죠. “그 사람 그렇게 생각을 해 주는 데는 흑심이 있지 않느냐?” 라든지, “그 사람 그렇게 도와주느니 나나 도와주지라든지, “그 사람이 당신 부인이오? 그 사람이 당신 동생이오?” , 온갖 이유를 댈 거 아니오. 그러니까 부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돼. 이렇게 한 사람이 이쪽에서 보면 좋은 사람, 저쪽에서 보면 나쁜 사람이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사람이 볼 때는 애국자죠. 길이길이 우리가 존중해야할 애국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본 사람이 볼 때는 테러리스트죠. 이 간격은 좁힐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애국자도 아니고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이게 실상이에요.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애국자라 부르고 저기 있는 사람은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오늘 날 전 세계다 다 마찬 가지오. 달라이라마같이 세상 사람이 존중하는 사람을 중국 사람은 뭐라고 합디까? 아주 나쁜 사람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남편, 또는 시어머니,

또는 아내, 또는 장모, 그렇지 않으면 형제,

그렇지 않으면 정치인 아무개, 여러분들 미워하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거기에는

미워할 아무런 실체가 없다.

이게 무아이며 공입니다.

 

이런 옳고 그름, 맞고 틀림, 깨끗하고 더러움은

다 우리 마음이 짓는 바다.

존재 자체에 그런 게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허상에 사로잡혀서

얼마나 많이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한을 품고 원수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제법이 공한 이치에서 볼 때는

원수라고 할 것이 본래 없다.

그것은 다 자기 마음이 짓는 바요.

 

그래서 천수경에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 죄무사성 종심지. 죄라고 하는 것에 이것이 죄다할 스스로의 성품, 자성이 없다. 이것은 다 어리석은 마음 따라 일어나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 사라져버리면 죄라고 하는 것 또한 사라진다. 이것이 선조 승찬 대사께서 이조 혜가 대사를 찾아가서 이 승천 대사가 문둥병 환자였거든요. 옛날에 문둥병 걸리면 천벌을 받는 죄라고 그랬어요. “이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그랬을 때, 혜가대사께서 그 죄를 이리 내 놓으시오.” 죄를 이리 내놔라. 내가 사해 줄 테니.

 

이럴 때 죄를 찾기 위해서, 책을 보거나 밖을 찾을 수 없다. 자기 속을 들여다봐야 돼. 눈이 밖으로 향한 것을 안으로 봐야 된다.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내놔야 된다. 그때 비추어봤다. 조견. , 비추어 봤다. 확 비추어 보니까 텅 비었다. 내놓을 것이 없다. 죄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승께서 내 이미 네 죄를 다 사했노라.” 이게 바로 죄무자성 종심기다. 이것이 법성게에 나오는 불수자성수연성이다. 스스로의 성품을 가진 게 없다. 다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질 뿐이다.

 

실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세계는

이렇게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다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연기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실체가 있는 단독자들의 모임인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홉스가 얘기한데로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이 된다.

우리의 삶은 그물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없으면 나도 없고,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하다.

이렇게 되는 건데, 우리는 잘못알고 있다.

 

내가 살려면 네가 죽어야 하고,

내가 행복하려면 넌 불행해야 한다.

너를 딛고 내가 일어서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경쟁하고 투쟁하고 그래서 승리하고,

이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도

자연을 정복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우리는 다 서로 연관 된,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자기의 일부다.

 

여기 있는 5개의 손가락이 이렇게 가려져있는 상태로 보면 가리고 보면 5개가 별개로 보인다. 움직이기도 따로 움직이고 모양도 다르고. 그러나 가려진 것이 벗겨지면 한 손에 연관되어 있다. 똑같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한손에 연관되어 있다. 별개가 아니다. 이 말이오. 단독자가 아니다.

 

한 손에 연관되어 있고,

손의 관점에서 보면 한 손이고,

손가락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손가락이오.

 

그러나 그 다른 손가락이 별개는 아니다.

단독자는 아니다. 연관되어 있지.

 

우리는 다 한 손가락처럼 다 달라요.

그러나 그것이 별개로 독립되어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서로가 서로가 살려야,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있는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본다 하더라도 아주 좁은 범위만을 보고,

그 자신의 경험으로 한정해서 진리를 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지금 범하고 있다.

 

우리 부처님께서

중생은 어떤 죄가 있는 게 아니에요.

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계속 스스로 만든다. 자업자득.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무한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 그래서 첫째 다 하는 것이 라고 할 것이 없다. ‘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가 더 풍부해지죠. 나는 인연을 따라 나투는 거요.

 

만약에 스님이 부엌에서 밥을 하면

스님이 밥을 하는 거예요?

그때는 밥하는 존재에요? 밥하는 존재에요.

밥을 할 때는 밥하는 사람이 있지, 고 순간,

 

여러분들이 승객이라고 정해진 사람은 없죠?

차를 타면 승객이라고 불리는 거요.

밥을 하면 공양주라고 불리는 거요.

애기하고 만나면 엄마라고 불리는 거요.

학교에 갔을 때만 학부형이라고 불리는 거요.

절에 오면 신도라고 불리는 거요.

 

그런데 회사에 가서 사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절에 와서도 사장 흉내를 낸단 말이오. 그러면 이게 갈등이 생기는 거요. 스님이 절 안에서가 아니고, 밖에 가서 내가 국회의원을 만났거나 장관을 만났거나 대통령을 만나서 거기 가서 관계가 다른 규정을 받아야 될 관계에서 상대를 신도로 취급하면 예의에 어긋난다.

 

반대로 그 사람이 절에 왔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장관으로 사장으로 취급해주면 비굴해진다. 제가 고향 집에 돌아갔다면 아버지는 신도가 아니고 누구다? 아버지에요. 거기서는 내가 아들이 되. 그런데 만약에 아버님이 절에 온다면, 그 분이 여기 와서 스님의 아버지라고 다니면서 온갖 간섭을 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요? 안되겠죠. 여기 오면 거사님이 되어야 된다. 그래서 자기 직분을 지켜야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들이 갈등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인연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인연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뭔가를 움켜쥐고 고집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린아이들은 보살펴야 합니다. 아이가 크면 자립을 해야 되고 독립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살필 때 보살피지 못하면 아이가 자라지 못하고, 독립을 시켜야 될 때 시켜주지 않으면 이제 애완용 동물이 되어버리는 거요.

 

여러분들이 아이를 키우는데 애정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오. 그런데 그 습관에 익숙해서 애가 사춘기가 넘어가는데도 계속 어린애 돌보듯이 돌봐버리면 그 아이는 자립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이게 지금 큰 병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혼자 살 때, 처녀라고 불립니다.

그때는 누구를 만나든 일정한 범위에서 행동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과 만나서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자기의 존재가 변하는 거요.

그러면 그에 맞춰서 새로운 자기 존재를 인식해야 되는데,

처녀 때처럼 행동한다. 총각 때처럼 행동한다. 그러면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런 것을 가지고 여러분이 뭐라고 하냐?

왜 자유를 막느냐? 뺏느냐?”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

 

여러분들이 같이 살기 때문에

아내나 남편이 됩니다.

그런데 상대편이 돌아가셨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더 이상 아내가 아니에요. 남편도 아니에요.

그런데 남편이 없는 데 자기를 계속 아내라고 생각하면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오.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보면

그렇게 습관이 들어서

아직도 아내인양 착각하기 때문에

외로움이 생기는 거요.

 

택시를 탔을 때 승객인데, 택시를 내린 뒤에도 계속 승객이라고 고집하면 안 된다. 이 말이오. 탔을 때만 승객이오, 가게 갔을 때만 손님이오.

그런데 내가 물건 사러 가게 갔더니 그 주인이 물건을 팔기 위해서 나를 손님으로 손님은 왕이다.’ 해서 극진히 대접해 줬어.

그런데 그 분이 절에 왔어. 거기서 내가 왕처럼 행동해. 여기서는 평등한 같은 신도지, 손님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는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거요.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나툰다.

이것을 한문으로 불수자성 수연성이다.

 

이 법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들은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지금까지 한을 품었던 것도 놓을 수가 있고,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의 행위도 이해하게 되고, 움켜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을 수가 있어요.

 

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

라고 고집할 것이 없는데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도 또한 없겠죠. 당연히.

그래서 무소유가 되는 거요.

 

내 의견이 옳다고 고집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서로 다를 뿐이지 옳고 그런 게 아니다.

무아집이오.

 

그러니까 중생은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이게 중생의 3대 무지에요.

모든 병은 여기서 나옵니다.

여기로부터 탐욕도 성냄도 나오는 거요.

 

라 할 것이 없다_무아.

내 것이라 할 것도 없다_무소유.

내가 옳다.’ 라고 할 것도 없다_무아집.

이것은 다 한마디로 무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여러분들 공기를 숨 쉬고 있죠. 내 것이라서 내가 이용합니까? 내 것 아니라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어요? 이용할 수 있죠. 그럼 내 코에 들어온 것은 내꺼다. 그러면 나가면 금방 내게 저 사람 코에 들어갔으면 내거 내놔.”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천하 만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지금 이렇게 쓰고 있으므로. 그러나 우리는 늘 이것은 내거다.” 이렇게 고집합니다. 움켜쥡니다.

 

또 우리는 사람은 자기 태어난 환경에 따라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옳고 그름이 일어난다.

 

이 동네 사람은 동산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듯이

이게 옳고 그르고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다를 뿐이다.

옳고 그를 뿐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견해가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피부빛깔이 다르고, 남녀가 다르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우등하다 열등하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우월의식, 때로는 열등의식이 우리를 괴롭힌다. 그것이 온갖 갈등의 원인이다.

 

이러한 무상, 무아, 이 존재의 참모습,

이것을 제법실상이라고 그래.

존재의 참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우리가 확연히 알면,

괴로울 일이 없고, 괴로워 할 일도 없어요.

그런데 이것을 모르면

하는 일 마다 온갖 일이 다 결국은 괴로움이 된다.

그래서 중생은 일체개고요,

깨달은이는 열반적정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했는데, 오온은 색----식이란 말이오. 그러면 그 색이 먼저 공하다. 색이 공하다. 색이 공하다는 것을 소승수행자에게 확실히 공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색이 무상하고 무아하다는 것을 밝혀줘야 색이 공하다라고 하는 것을 확연히 이해할 수가 있다. 나머지도 마찬 가지로.

 

그래서 먼저 색이 공하다는 것을 증명을 하는데, 첫째, 색이 공하다 하는 한 가지 방법은 색이 무상한 것이다는 것을 보여주고, 색이 무아이다 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해서 합해서 색이 공하다. 이렇게 보인다.

 

그래서 이 첫째 문장에 /색불이공 공불이색/ 이렇게 되어 있죠? 不異불이, 不異불이라는 것은 다르지가 않다. ‘둘이 아니다.’ 란 뜻이 아니에요. 다르지 않다. 이게 핵심이오. 그러니까 색이 공하다. 색은 요소라고 이해하면 오온설은 결국 오요소설과 같이 되어버려요. 요소설은 진리가 아니에요. 부처님이 요소서설을 이미 비판을 했잖아요. 그런데 불교를 요소설처럼 이해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그래도 따르지만 사실은 이미 어긋나 버렸다.

 

동산이다 서산이라고 싸우는 것이 이 세상이라면 부처님께서 그것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랬더니 동산과 서산은 거짓이고, 진실은 비동비서산이다. 이런 거와 같다. 이 말이오. 그래서 동산과 서산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오직 비동비서산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다시 부처님께서 그것은 법집이다.” 진리라는 또 하나의 상이다. “나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다.” 인연을 따라서 동산이라고 하니까 동산이 아니오 서산이라 하니 서산이 아니오 그 상을 깨뜨린 거다.

 

그 상을 깨뜨렸다면 이 산은

남산도 아니고 북산도 아니고 큰 산도 아니고 작은 산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냐?

아니다. 이곳에 가면 동산이요, 저곳에 가면 서산이요,

또 다른 곳에 가면 남산이오,

큰 산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작은 산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인연을 따라서 불린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유정법이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이요,

이것이 소승교설에서 말하는 무상과 무아다.

 

이것은 교설이 서로 다른 게 아니에요. 그런데도 마치 소승교설은 틀렸고, 대승교설은 맞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표현되든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 거다.

 

인천 사람이 물으면 동쪽이라고 말하고, 춘천사람이 물으면 서쪽이라고 말한다, 왜 동쪽이냐? 서쪽이냐? 그것은 오직 서울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울 가는 길을. ,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을 얘기하는 거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얘기 하는 거다.

 

그래서 여기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 오온을 구성하는 색은 공하다. 그런데 수도 수라는 것은 느낌이라고 그랬죠? 느낌도 실체가 없다. 우리의 생각에도 실체가 없다. 우리의 의지에도 실체가 없다. 우리들의 식, 업식 입니다. 식도 실체가 없다. 이것도 이런 논리로 다 공하다. 이것이 뭐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 말은 전부 합하면 뭐가 된다? 오온이 다 공하다. 오온개공이다.

 

여러분들은 내 아이, 내 아이라는 게 있다. 이렇게 생각하죠? 이게 왜 내 아이에요? 내가 낳았으니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잖아.

 

사실은 내가 낳아서 내 아이가 아니에요.

내 아이라고 내가 생각해서 내 아이에요.

 

부모가 나를 낳아줬기 때문에 내 부모다. 아니에요.

내가 내 부모라고 생각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어린 아이를 입양해서 아주 한 살 미만 때 입양해서 엄마가 키우면, 엄마는 이 아이가 입양한 아이라고 알지만, 아이는 죽을 때 까지 말 안하면 모르죠? 자기를 낳은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부모라고 하는 사람은 낳아준 사람이라고 반드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게 믿음이 철저해요. 마치 여러분들이 돌이라도 뭐라도 그렇게 믿어버리면 그것은 진실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부모는 그러면 이해가 되죠. 그럼 자식은 이것은 아니지 않느냐? 자식도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그런 얘기 있었죠? 애가 고등학교 다니는데, 혈액검사를 해 왔는데, 엄마 아빠 피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이오. 이러면 누가 의심을 받습니까? 남자가 의심 받아요? 아내가 의심 받아요? 아내가 의심 받지. 그런데 아내는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너무너무 억울한 거요. 그러나 남편은 추궁은 안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는 식으로 그냥 말을 잘 안하는 거요. 너무너무 억울한 거요.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몇 개월을 수소문을 해 봤더니, 병원에서 낳을 때 병원에서 바뀐 거요. 그러니까

 

애기를 낳자마자 부모가 못보고 바구니에 담아놨는데

바뀌는 경우는 가끔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내 아이에요. 낳은 게 아니잖아요.

내가 길렀기 때문에 내 아이라고 말 할 수는 없어요.

내 아이라고 믿어서 내 아이에요.

 

여러분 중에도 부모 아닌 사람을 부모다, 자식 아닌 사람을 자식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상관없어요. ? 본래 그렇기 때문에.

 

자식 아닌 사람이 자식이다.

이런 말 자체가 성립 안 됩니다. ?

낳는 것은 생물학적인 문제이지,

우리 인간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일체가 유심조라는 것이 확실해 집니까? 이런 것도 다 내 부모도 일체 유심조고 내 자식도 일체유심조요. 이 원리를 더 깊이 여러분들이 안다면 여러분들이 입양을 하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입양을 했을 때 다만 내가 내 자식이 아니라는 정보가 있기 때문에 입양이란 그 생각 때문에 입양이지 그 생각만 버려버리면 입양이 아니에요.

 

죽음이라는 것도 마찬 가지오. , 제가 여러분께 저 히말라야에 가서 수행 좀 하고 오겠습니다. 수행도 부족하고 10년 수행정진하고 올 테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갔어. 가다가 히말라야에서 사고 나서 죽어버렸어. 그런데 인도에서 누군지 몰라서 그냥 처리해 버렸어. 법륜스님에 대해서 1년 지났어. 그러면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합니까? “수행 잘 하고 있을까? 2년 지났다. 3년 지났다. 4년 지났다. 5년 지났다. “, 우리 스님 진짜 대단하시다.” 이러고 있겠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는 법륜스님 살았어요? 죽었어요? 살았지. 이럴 때 법륜스님의 살았다 죽었다가 어떤 의미에요?

 

또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이 맨날 상담하고 법문요청하고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 있는 동안은 도저히 방법이 없겠다. 그래서 제가 인도 히말라야 산속에 가서 한 10년간 수행하려고, 그럼 또 거기 가서 있다 하면 거기까지 따라올 거 같아서, 그냥 교통사고 났다. 해서 딴 사람 시신을 하나 화장을 해서 뼈를 관에 담아서 한국으로 보내고, 신문에도 크게 났어. 법륜스님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화장해서 유골이 왔다. 여기 분양소 차려놓고 다 했어. 그러면 여러분들 49재 지내고 다 지내고 하겠죠? 1주기 2주기 3주기도 할 테고. 그렇게까지 해주려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러면 법륜스님은 살아 있는데도, 히말라야에서 내가 수행하고 있는데도 여러분들에게는 죽었어요? 살았어요? 죽었지. 그럼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게 뭘 의미할까?

 

이것을 여러분들이 딱 깨치면 생사여탈한다. 생사여탈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돼. 육신이 안 죽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상에 어긋나요. 그래서 일체유심조요. 나고 죽는 것도, 내 아들 내 어머니도, 옳고 그름도, 다 마음이 짓는 바입니다.

 

원효대사께서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토하면서 깨쳤죠.

그 바가지 그 물이던데 어제는 달콤하더니 오늘은 왜 토할까?

 

, 더럽고 깨끗함이 마음 가운데 있구나.

진리는 인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중국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짓는 바구나. 이것을 깨쳤단 말이오.

 

이것을 깨치면 여기 무슨 세간이 있고 출세간이 있어요.

여기 무슨 진리가 있고 진리 아닌 세계가 있겠느냐.

여기 무슨 원수와 친한 이가 있겠는가. 다 마음이 짓는 바인데.

 

결국은 우리는

어리석은 한 생각을 일으켜서,

온갖 시비분별을 일으켜서

거기에 사로잡혀서 지금 이렇게 괴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으면 즉시 여러분들은 자유로워진다. 마치 깜깜한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건을 찾는다고 더듬고 있다가 불을 탁 켜니 방안 전체가 한눈에 보이듯이 우리의 온갖 번뇌는 즉시 사라진다. 공부를 더 하셔서 다 해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