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반야심경-제15강 공의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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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반야심경

2017. 6. 9.



 

안녕하세요. , 오늘은 반야심경 15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현재 독송하고 있는 반야심경은 내용적으로 분류해 보면 3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 번째가 대승사상의 요지인 공사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 공의 세계, 제법이 공한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소승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한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는다. 이 내용이 있다.

*세 번째는 모든 보살들 즉, 관자재보살뿐만 아니라 모든 보디사트바, 보살들이 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고해의 바다를 건넜다. 열반에 이르렀다. 모든 보살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위없는 깨달음, 무상정득정각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얻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그러니 이 반야바라밀다가 얼마나 위대한지 아느냐? 이 반야바라밀다는 참으로 진실하여 헛됨이 없고, 우리의 모든 고뇌 번뇌를 말끔히 씻어주는, 말끔히 없애주는 그런 위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다 이 반야바라밀다를 증득하자. 이런 어떤 격려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까 내용적으로는 각각 1/3씩 되지만, 그러나 대승의 공사상을 설명한 첫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전체 강의 시간에 거의 2/3를 여기에 배정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이 기도를 열심히 했어요. 기도를 아무리 해도 부처님을 친견하지를 못했어요. 우리 선배들은 출가수행해서 열심히 정진하면서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한다.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다. 직접 내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가피를 받는 그것이 하나의 득도의 징표였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수행자가 된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부처님을 진신을 친견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가피를 제대로 못 입었으니, 이렇게 공부해서는 안 되겠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지극정성으로 내가 정진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혼자서 산길로 수십리 되는 그런 골짜기에 있는 작은 암자에 찾아가서 기도를 하기로 했어. 그 토굴에는 아무도 없어. 수행자들이 와서 정진하면서, 갈 때는 탁발을 해서 먹을 것을 놔두고 가면, 또 딴사람이 와서 그것을 먹으면서 정진하고, 또 갈 때는 탁발을 해서 모아놓고, 그런 작은 암자인데, 조그마한 법당이 하나 있고 그 다음에 방이 있는 그런 작은 암자였어요.

 

그래서 거기 가서 3년 동안 천일기도에 입제를 한 거요. 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에 4, 2시간씩, 기도를 해야 되겠다. 이렇게 맹세를 하고, 청수물을 떠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정성을 기울여서 정말 지극하게 그렇게 기도를 했다.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영험이 없었어요. 2년이 지났는데도 영험이 없었어요. 3년이 다 되어가는 그해 겨울을 나는데, 아직도 영험이 없었다. 이 말이오.

 

그렇게 해서 어쨌든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그해겨울에 눈이 엄청나게 와 버렸어요. 그래서 외출을 할 수가 없었어요. 산에 나무도 하러 갈 수도 없었어요. 조금 눈이 녹으면 또 폭설이 쏟아지고 또 폭설이 쏟아지고, 녹으면 가지, 녹으면 가지 하다가 어떻게 이렇게 해서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어요. 나무도 다 떨어져버렸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먹을 것도 없고 뗄 것도 없고, 그 추운 한 겨울에. 아무리 견디려 해도 견딜 수가 없다. 이거요. 그래서 내가 오늘 멀지만 눈을 헤집고 마을에 내려가서 식량을 좀 얻어오고 땔감을 가져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침 일찍 나갔다.

 

나가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을 하고 얻어서 오후가 되어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또 폭설이 와 버린 거요. 그러니까 올 때는 어떻게든 어떻게 나왔지만 돌아갈 수가 없어요. 눈이 너무너무 와서 갈 수가 없어. 그래서 사람들도 말리고 해서 못 갔어요. 이틀 삼일 사일. 그러니까 천일기도에 한 번도 안 빠지고 불공을 올리고 사시예불을 하고 사분정근을 했는데, 결국은 천일 기도 막판에 가서 마장이 끼어서 결국 못하게 된 거요. 그러니까 가슴이 타는 거요.

 

일주일이 지나서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그렇게 돌아온 거요. 그래서 눈을 헤집고 헤집고 그렇게 들어왔어요. 돌아와서 가져온 짐인 지게를 바쳐놓고 법당에 가려고 보니까, 자기 방문 앞에 신발이 한 켤레 있는 거요. 짚신이.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그냥 철렁 내려앉는 거요. 올 때 보니까 눈 위에 발자국이 없었단 말이오. 그럼 이 사람은 언제 왔다는 애기요? 내가 나가는 날 그날 들어왔단 얘기요. 그럼 이 절에 쌀 한 톨 없고, 장작하나 없는데 이 사람 결국 굶고 얼어 죽었을 거 아니오. 춥지만 않아도 일주일 살 수 있고, 식량만 있더라도 냉방에서 살 수 있는데, 두 가지가 다 없으니까.

 

그래서 자기가 한탄을 한 거요. “결국은 내가 나 살려고 그 눈길 무서워 기도 중에 안 왔더니 결국은 사람을 죽이게 되었구나.” 그럼 옛날 같으면 천일기도 중에 결국 자기가 기도정진 하는 데에서 사람이 죽게 되면 요즘 말로하면 부정 타서 가피고 영험이고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그래서 문을 열어봤어. 어떻게 되었나. 당연히 얼어 죽어 있겠지. 열었더니 방안에서 훈기가 있는 거요. 그리고 사람이 코를 골고 자고 있어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의문이 꽉 들어찬 거요.

 

우선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3배를 들여야 되지 않습니까? 일주일이나 부처님께 공양도 못 올렸으니까. 그래서 법당 문을 열고 부처님 죄송합니다. 제가 기도 중에 일주일이나 빼먹고 참회합니다.” 엎드려 절을 하고 쳐다보니까 부처님이 안 계시는 거요. 그때 머리가 딱 돌아가는 거요 이놈이이렇게 되는 거요. “장작이 없는 데 불을 어떻게 때었나?” 그게 이해가 안 되었는데 불상이 없어진 거요.

 

그래서 그대로 쫓아내려가서 자는 사람 멱살을 잡고 이 나쁜 놈, 그래도 출가 수행자가 어떻게 부처님을 불에 뗄 수가 있느냐? 이 나쁜 놈아. 어떻게 부처님을 불에 떼느냐? 얼어 죽었으면 얼어 죽었지.” 난리가 난 거요. 또 보통 부처님이오? 자기가 3년을 그렇게 정성들여서 기도한 부처님인데. 난리를 피우니까 그 객승이 조금만 놔보라고. 중요한 일이라고 손을 놓아보라고 사정사정하는 거요. 그래서 손을 놨다.

 

뭐하는 가 싶어서 도망갈 데도 없으니까, 문을 열고 나가더니 부엌에 들어가는 거요. 부엌에 들어가서는 아궁이를 지팡이로 뒤지고 있는 거요. 미친놈이지. 그래서 , 이 미친놈아. 부엌에서 무엇을 하느냐?” 그러니까 쓱 쳐다보면서 사리 찾는다.”고 그러는 거요. 그러니까 딱 이 기도승 입에서 , 이 놈아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냐?” 그러니까 그 객승이 딱 쳐다보면서 그러면 마저 갖다 떼어야 겠네.” 그 순간에 탁 깨쳤다는 거요.

 

이게 바로 우리가 얼마나 모순인가를 봐라. 부처님을 불에 땠다고 난리를 피우고 사람을 죽일 듯이 했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 객승이 부처님을 불에 땠다고 난리를 피우니까 부처님을 화장 했으니까 사리가 나와야 될 거 아니오. 사리 찾는다고 하니까 입에서 뭐라고 나왔어요?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 이 말은 그것이 어떻게 부처냐? 나무토막이지.” 이 말이죠. 이렇게 말할 때도 자기모순을 몰랐다. 그러니까 그 객승이 그럼 마저 갖다 떼어야 되겠네.”

 

삼존불이 있었는데, ? 나무토막이면 절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 나무토막에 데어놓고 뭣 때문에 절을 하고 영험을 바래요. 나무토막일 뿐인데. 그러니까 이게 바로 자기의 모순이죠. 모순을 탁 들여다 본 거란 말이오. 그러니까 나무토막이라면 네가 말한 대로 나무토막이라면 갖다 때자.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 할 때 그때 그럼 마저 갖다 때어야 되겠네.” 이 한마디에 깨쳤다. 바로 이것이 자기모순을 본 거요.

 

깨끗하고 더러움이

성스럽고 부정함이

바로 마음가운데 있는 것을 본 거요.

 

이것이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 공이라는 용어가 하나도 없지만

공의 도리를 본 거다.

 

이것이 바로 그가

천일기도의 영험을 얻은 거죠.

바로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한 거요.

 

바로 이 객승은

그냥 한 사람의 스님이기도 하지만,

깨닫고 보면

이 객승이 나를 깨닫게 해준 보살의 화현이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를 해도 나는 법을 보지 못했다. 부처님께서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 나를 보는 자 법을 본다.’ 그랬다. 상을 봐서 안 된다. 법을 봐야지.

 

원효대사께서도 마찬가지죠. 진리를 구하러, 진리를 찾으러 구도의 행을 떠났다. 고구려를 거쳐서 중국에 가려고 했을 때, 고구려가 요즘 우리나라 휴전선처럼 신리와 고구려 사이에 남북 간에 휴전선처럼 저렇게 되어 있었다. 나는 구법을 위해서 국경을 넘지만, 고구려 병사들이 볼 때는 간첩인지 모르잖아. 제가 만약에 휴전선을 넘는다면 간첩이라고 잡히지 그냥 보내줄까요? 아니겠죠. 그래서 감옥에 갇혀서 잘못하면 죽게 되었다.

 

그때 그 국경경비대에 대장 중에 불교신자가 있어서 두 분이 진실한 수행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나 보내줄 수는 없어서 탈출시켜서 돌아가도록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죽을 뻔 했다. 그러면 정신을 차려야 될 거 아니오. 그러나 법을 구하는 마음, 진리를 구하는 마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려고 부둣가에 가서 기다렸다. 옛날에 배가 매일 있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오고 그래서 비 피할 곳을 찾다가 어떤 동굴 같은데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여기 얘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목이 말라서 물을 먹으려 하는데 그릇이 없어서 더듬었더니 바가지가 하나 있어서 그것으로 물로 떠먹었다. 너무너무 달콤한 꿀맛이었다. 그렇게 자고 나서 아침에 와서 다시 물을 마시려고 보니까 그 바지가가 해골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구역질을 했다. 그 구역질을 하면서 깨쳤다. 구역질을 하다가. 그냥 그 물 떠먹은 바가지가 더러운 해골바가지였기 때문에 구역질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구역질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어제 저녁하고 같이 비교해보면 이게 모순이죠.

 

어제 저녁에 경험이 없었다면 그냥 구역질하고 갈 수도 있는데 어제 저녁의 경험하고 견주어본다면 물은 같은 물이다. 바가지도 같은 바가지다. 그런데 왜 어제는 먹어도 달콤했는데 오늘은 먹지도 않고 보기만 해도 토하게 되느냐. 그게 바로 더럽고 깨끗함이 다 마음가운데 있구나. 마음이 일으키는 것이구나.

 

다른 얘기, 조금 달리 표현된 건 이래요. 비를 피해서 한 동굴에 들어가서 잤는데, 잘 잤어요. 자고 나서 아침에 보니까 그게 무덤이었어요. 그런데 이튿날 가서 다시 자는데 밤에 계속, 요즘 말로 귀신이 나타나듯이 마음이 산란해서 잠을 못 잤데요. 그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깨쳤다. 어제 저녁에는 잘 잤는데 왜 오늘은 못 잤는가? 여기에 바로 편안함과 두려움이라는 것이 다 일심가운데 있구나.” 이 동일한 거요.

 

그러니까 해골바가지고 보고 토했다는 것은 진리의 눈을 떴다는 거요? 못 떴다는 거요? 못 떴다는 거지. 마치 부처님을 불에 땠다고 광분하듯이, 상에 집착해서 광분하듯이, 해골이라는 상에 집착했다. 무덤이라는 상에 집착했다. 그런데 집착해서 마음의 번뇌가 일어났는데, 그 일어나는 순간에 번뇌의 뿌리를 봤다. 왜 일어났는지를. 이게 중요한 거요. 일체가 다 마음 가운데 있다. 일체가 유심소조다. 일체가 유심조다. 하는 것은 이미 알아요? 몰라? 알아. 화엄경공부를 했기 때문에 다 나오는 얘기에요.

 

이게 바로 아는 것과 증득하는 것이 다르다. 토하면서 그것을 온 몸으로 체험을 했다. 그 우리는 토하기만 하지, 그것을 돌이켜 번뇌의 뿌리를 우리는 보지 못한다. 그것을 밖으로 살펴서 해골에다가 무덤에다가 너에다가 보기 때문에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그것을 바로 돌이켜서 그것이 나로부터 일어남을 안다면 우리는 누구나 다 번뇌 가운데서 바로 깨칠 수가 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했죠.

 

한 생각이 일어나니 만법이 일어나네

한 생각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지네.

 

만법이 다 일심으로부터 일어난 줄을 깨쳤다. 그러니 진리를 중국이나 인도 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꿰뚫어 봤다. 이것도 제법이 뭐 하다? 공하다 이 얘기에요. 공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나오지만.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이것이 생활 속에 그대로 적용이 되어야 된다.

 

제가 옛날에 미국에 잠시 있을 때, 그때 한 보살님, 매일매일 절에 와서 우리는 108배도 하기 어려운데 1080배씩 매일매일 하고 가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진짜 신심이 깊은 사람이다.”라고 할 정도요. 그렇게 간절하게 법당에서 혼자 기도를 하시고 그렇게 가시는 분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 저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하소연을 했어요. 그렇게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는데 마음속에는 한이 있었어요. 번뇌가 가득차 있었다. 그게 뭐냐 하면

 

시집을 가서 결혼을 해서, 그러니까 애 하나 낳고, 남자 애를 하나 낳고 하나를 가졌을 때 남편이 6.25전쟁 때 군대를 가서 전사를 해버렸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20대 초반 아닙니까? 그죠. 청상과부가 된 거죠. 거기다 홀몸도 아니고, 애기 하나에 또 뱃속에 유복자 하나 가지고. 그 전쟁의 혼란기 속에. 그 두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피눈물 나는 그런 고생을 한 거요. 보따리 장사하고 파출부고 안 해본 것 없이. 정말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냐? 죽고 싶을 때도 많았다는 거요. 그런데 지금까지 버틴 것은 관세음보살, 관음신앙 하나가지고 기도하면 버텼다는 거요.

 

이렇게 이렇게 어떻게 어떻게 해서, 요즘 장사하면 그래도 수입 있는 축에 들어가지만, 옛날에 장사라는 것은 천대받지 않습니까?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걸어서 그 장사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거요. 두 아이 키우면서. 또 온갖 사람에게 멸시당하면서. 그래서 절에 가서 보면 그 절에 있는 공양주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는 거지. 나는 언제 저 애들 키워놓고 절에 와서 스님들 공양해 올리면서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러나 애기가 둘이 있으니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해서 애들 둘을 키웠는데, 마침 애들이 공부를 잘해서 하나는 의대를 가게 되고 하나는 공대를 가게 되고.

 

다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을 갔어요.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왔다는 거요. 하나는 미국에서 교수가 되고 하나는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애들이 다 미국에 가서 안 들어오고 있고, 결혼도 한 사람은 한국 사람하고 했지만 미국에 사는 교포자녀하고, 한 사람은 외국여자하고 결혼을 한 거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혼자 있으니까, 그저 미국에 오셔서 살자고 하는 거요. 사람들이 다 두 아들 잘 키웠겠다, 이제 보살님은 걱정 없다. 그렇게 부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더니 관세음보살이 다 돌봐줬다. 자기도 그렇게 믿었다는 거요.

 

그래서 하도 아들이 어머니 혼자 있지 말고, 같이 갑시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재산 정리를 하고 미국에 오게 되었는데, 미국에 갈 때는 이제 고생 끝이에요. 바로 이 고통이 없는 이 세계에서 고통이 없는 저 세계, 피안으로 가는 그런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왔다는 거요. 그런데 하루 살고, 이틀 살고, 3일 살고, 한 달 살고, 1년 살고, 2년 살면서 이거야 말로 생지옥이라는 거요. 말도 할 줄 모르지. 길도 모르지, 운전도 못하지,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 나무토막이라는 거요. 쌀자루 보리자루라는 거요. 여기 갖다 놓으면 여기 가서 가만 앉아있고, 저기 갖다 놓으면 저기 가서 가만히 있고, 답답해서 살 수가 없다는 거요.

 

그런데 아들은 밖에 나가서 일보고 들어와도 부부외출하고, 손자라고 있는데 말이 안 통하는 거요. 귀여워 할 수가 없어. 말이 안 통하니까. 그러니까 활동하고 장사하고 그래도 애를 쓰고 살던 사람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까, 답답하다고 자꾸 얘기를 하면 구경시켜 준다고 여기저기 데려가고 영화도 보여주고 그러는데. 영화 보여주니 미국영화를 보니까 맨날 남녀가 벌거벗고 있는 영화고, 평생 혼자 살은 할머니가 그런 게 마음에 안 들잖아. 그러니 음식 먹으러 가자해서 고기 피나오는 그런 거 먹고, 음식도 못 먹겠고, 외출가자 외출가자해도 몇 번 가보고는 안가겠다고, 너희나 가라고.

 

이렇게 하다 보니 아들들도 아이고 우리 어머니는 안 가신다 그런다.” “외식 안 좋아하신다.” “구경도 안 좋아하신다.” 나중에 가자 소리도 안하는 거요. 자기들끼리 가고. 완전히 감옥이 되었어. 답답해서 못 사니까, 한국 가겠다. 한국 좀 보내줘. “어머니 왜 그러시냐?” “못살겠다.”고 하니까, “어머니 그 동안 우리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그런데 이제야 다 해주는 밥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 주무시는데, 왜 그 고생하시는데 가시려느냐?” 자기가 아무리 얘기해도 아들인데도 말이 안 통하는 거요.

 

이렇게 해서 큰아들 집에 좀 있다가 못 견디면 작은 아들 집에 가고, 또 작은 아들 집에 있다가 불만이 쌓여 못 견디면 큰 아들 집에 오고. 늘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신세타령을 하게 되고, 내가 너희 키울 때 이렇게 될 줄 알고 너희들 키운 게 아니다. 애들 키우면 좋은 일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완전 지옥이에요. 이렇게 자꾸 불평을 하니까, 아들들도 엄마가 변했다. 엄마가 왜 이렇게 변하셨냐.”는 거요. 늘 불평밖에 안 한다. 이렇게 해서 마침 어떻게 어떻게 해서 미국에 한국 절이 하나 생기게 되니까, 거기 보내 달라 그래서 아침에 출근할 때 태워다 주면 절에 와서 기도하고. 갈 때 또 태워서 가고, 자기 혼자 못가니까.

 

이렇게 기도 안하면 화병이 나서 죽을 거 같다는 거요. 그러니까 어릴 때 그 젊을 때 고생하던 그 것보다 더 괴롭다는 거요. 그러면서 저한테 하는 얘기가 어떻게든 한국 좀 데려다 달라는 거요. 한국만 데려다주면 된다. 그래서 제가 보살님 얘기를 다 듣고, “보살님, 자업자득이라는 말 압니까?” “절에 다녔으니까 알죠.” “자업자득이오.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찔렀다는 말이 있듯이, 보살님 스스로 자초한 거요.” 그러니 이 보살이 난리요.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해서 이런 과보를 받느냐?” 이거요. “무슨 그런 모진 소리를 하느냐.” 이거야. “위로는 못해줄망정, 그 두 아이가 나쁜 아이들이지, 내가 왜 애들한테 뭘 잘못했냐.” 이거야.

 

그래서 제가 얘기를 했습니다. 보살님, 착하다. 이 말이야. 착한 것은 좋다. 이거야. 그런데 어리석다. 보살님은 두 아들을 키우면서 보상을 바랬다. 이 두 아이만 잘 키우면 내가 나중에 편안하게 살 거다. 마치 주식을 사면 나중에 오를 거다. 땅을 사면 오를 거다. 장사를 하면 돈 벌 거다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투자를 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데, 무슨 투자 식으로 했으니, 그게 첫째 부모의 도리가 아니다. 자기는 그렇게 안 키웠다는 거요. 안 키웠는데 왜 자식에게 바라느냐 이거야.

 

바란다는 것은 바로 투자와 같은 거다. 불법에도 어긋난다. 금강경을 그렇게 많이 읽으시는데, 거기에 무주상보시라는 게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바로 베풀 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마라는 겁니다. 댓가를 바라게 되면 이렇게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런데 아들에게 이렇게 뭔가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뜻대로 안되어서 지금 괴로운 거요. 주식 투자를 했는데 오르기는커녕 떨어져서 망한 거와 같고, 돈 벌려고 장사를 했는데 장사가 망해서 잃어버린 거와 같다.

 

그러면 내 잘못이지 왜 자식을 원망 하느냐? 그러니 절에 그렇게 열심히 다녔는데, 헛 다녔다. 법을 알아야 되는데, 금강경을 읽으면서도 제법이 공한 도리도 모르고 무주상보시도 모르고, 그저 세상 욕심으로 절에 다닌 거 아니오. 그러니 이것은 스스로 어리석어서 물고기가 낚싯밥을 물 듯이, 쥐가 쥐약을 먹듯이 당신 스스로 자초한 겁니다. 그랬더니 그래, 내가 자식에게 기대를 한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럼 기대를 안했다고 치고, 내 자식이라고 치고, 아무리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안한다하더라도 자식은 자식의 도리가 있을 거 아니냐? 그럼 저건 잘 하느냐?” 이거야.

 

그것을 자꾸 따지면 한이 없다. 보살님 말씀하신대로 내가 봐도 나쁜 놈이오. 당신 자식 아니오. 당신 자식이 어떻게 당신한테 그럴 수 있겠어. 그러니 오늘부터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저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다. 남이다.” 이렇게. 항상 절을 하면서, “저 놈은 남이다. 남이다. 남이다.” 이렇게 기도를 하십시오. 그게 어떻게 내 자식이오? 남이지.” 그렇게 하고 나서 그 다음부터 안 오는 거요. 내가 너무 독한 소리를 해서 저렇게 실망을 했나? 그러고는 한 달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오셨어요.

 

, 웬일이오?” “웬일은” “보살님, 매일 기도하시는 분인데 하루라도 빠지면 됩니까? 매일 와서 하셔야죠.” “아니. 부처님이 절에만 있어요?” “아니, 보살님이 완전히 도튼 소리하네.” “, 내가 깨쳤어요.” 그래서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는데, 자업자득이라는 소리를 듣고, 불교 잘못 배웠다는 소리까지 듣고 그렇게 불교 하려면 절에 나오지 마라는 소리까지 듣고, 너무너무 분해서, 이런 소리 듣는 것도 다 누구 때문에 그렇다? 저 자식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식을 보기만 하면 눈에 불이 일어나는 거요.

 

그래서 절에 와서 기도하면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가 집에 가서 자식만 보면 다시 불이 일어나고, 또 아침에 와서 기도하면 좀 가라 낮았다가 또 보면 불이 일어나고, 안 보면 괜찮은데, 그런데 안 볼 수가 없잖아요. 이런 상태인데 이제 절에도 못 온단 말이오. 전에는 절에 와서라도 이걸 식혀서 불붙고, 식혀서 불붙고 이랬는데 이제는 절에도 못 온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게 터질 거 같은 거요. 그래서 하도 이게 터질 거 같으니까 자기도 모르게 제가 얘기해준 로저놈의 자식 남이다. 저놈의 자식 남이다. 저 놈의 자식 남이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나왔다는 거요.

 

그래서 집에서 절을 하면서 내~ “저놈의 자식 남이다. 저 놈 자식 남이다.” “남이 아니고선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어제 자식이 문을 열고, ~ 들어왔다는 거요. 탁 들어왔는데 보자마자 이게 눈에 휘떡 뒤비져질 정도로 확 열이 올라와 자기도 모르게 너무 답답하니까 저 놈의 자식 남이다. 저 놈의 자식 남이다.” 하다 떡 보니까, 자기 자식이 아니더라는 거요. 딴 사람이라는 거요. 딴 사람으로 딱 보이니까, 확 다 내려오더라는 거요. 딴 사람으로 보면 화가 날 일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

 

그래서 다시 보니까 또 자기 자식이더라는 거요. 그래서 이게 남으로 딱 보였다. 이 말이오. 핵심은. 남으로 탁~ 보이는 순간, 그 불이 올라오던 게 탁 내려갔다는 거요. 남이라고 생각하니까 남은 미국까지 초청해줘요? 안 해주지. 밥 해줘요? 안 해주지. 재워줘요? 안 재워주지. 용돈 줘요? 안 주지. 전에는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얘기하면 엄마 놔놓고 저희끼리 얘기한다 해서 그것도 보기 싫었는데, 그런데 남의 집에 가서 있을 때, 자기 부부 얘기하면 그거 들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 만 가지가 다 고마운 일이오. 만 가지가.

 

전에는 큰아들 집에 있다가 못 살아서 작은 아들집 가고, 작은 아들집에 있다가 못살아 큰 아들집에 가고 자기가 왔다 갔다 했는데, 이제는 하도 불평을 하니까, 큰 아들이 싫다고 눈치 보여서 작은 아들한테 쫓겨 갔다, 작은 아들한테 있다가 밀려왔다. 이랬는데, 그래서 이제 한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딱 한 생각이 바뀌니까, 이 집에 있으면서 자, 저희 두 부부 얘기할 때는 남이니까 내 방에 들어가서 안 들으면 되고, 밥 얻어먹었으니까 설거지는 해줘야 되요? 안 해줘야 되요? 설거지 해줘야 되지. 노니 뭐해요? 남의 집 방청소라도 해줘야 되지. 용돈 주면 아이고, 고맙데이이렇게 인사하고, 그러면 사실은 부모를 떠나서 집에 이런 사람 한 사람 있으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지.

 

그러니까 큰아들도 이제는 어머니 여기 더 계시라고. 작은 아들도 자기 집에 모셔가겠다고. 거기 가서 있으면 또 큰아들이 데리러 오고. 전에는 쫓겨 다녔는데. 절에 오면 법당에 가서 금강경 읽고 절만 하고 이랬는데, 절을 해도 별 쓸모가 없었어요. 그런데 절에 오면 이제는 부엌에 가서 일하고 청소하고 이러니까 절에도 필요해요? 안 해요? 필요하니까 나도 절에 있으면 가지마라고 잡고. 이래서 완전히 해탈해 버렸어요.

 

만약에 제가 그 분 요청대로 한국에 데려다 줬으면 내가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한편 고맙지만, “남도 이렇게 해주는데 내 자식은이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그 한을 풀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 이렇게 자유로워져 버렸다. 이집과 저집이, 절과 집이, 한국과 미국이, 이것이 바로 도리로 말하면 제법이 공한 도리다. 이렇게 우리가 깨쳐야 한다. 제법이 공하다. 조견오온 개공이다. 이렇게 만 번 읽는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도리를 우리가 확연이 증득하게 될 때, 이거보다 더 한 기적은 없다. 이거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어요? 태산을 옮겨 놓은 것 보다 더 큰 기적이오.

 

이것을 물위로 걷는 거와 비교하겠어요? 공중에 뜨는 거와 비교하겠어요? 이것이 기적이라면 정말 기적이오. 이런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바로 부처님 당시에 수많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부처님을 만나서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 고통에 몇 십 년 빠져 있다가 붓다의 법을 듣고 깨쳐서 마음이 나는 새처럼 훨훨 날아다녔다. 이것이 니르바나고, 이것이 해탈이다. 그러니 우리 불자님들 법에 귀의하고, 법을 깨쳐서 다 해탈, 열반을 증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