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반야심경-제19강 사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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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반야심경

2017. 6. 15.


  

안녕하세요. , 오늘 반야심경 19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오늘은 사성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한 것은 오온, 12, 18. 그리고 12연기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12연기는 연각승, 그러니까 연기법을 관하는 수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그냥 드러난 현상만 관찰하는 게 아니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 원인을 찾으면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런 방식으로, 마치 과학자가 어떤 법칙을 연구하듯이 하나하나 연구해 들어가는 겁니다. 한번 다시 정리를 해보면,

 

항상 불교는 지금 여기로부터 출발합니다.

지금 여기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은 뭐냐?

갈애, 욕망입니다.

 

이 욕망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그것을 말하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취라 그럽니다.

 

이렇게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 결과가 남게 된다.

결과가 사라지는 게 아니고,

반드시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습니다.

그 열매가 열린다. 그것이 유라고 합니다.

 

그러면 열매가 있으면

그것은 새로운 어떤 시작, 그러니까 씨앗이 된다.

새로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것을 생이라 그래요.

 

그렇게 되면 또 마음이 일어나면 유지되고 사라집니다.

이것을 노사, 늙고 죽는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생-노사는

미래의 한마음이 일어날 때 사라질 때까지의

그 과정을 줄여서 표현하는 거다.

 

그러면 현재 이러한 갈애는 저절로 일어난 거냐? 아니다.

이 갈애가 일어나는 데는 어떤 원인이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연하여 이렇게 갈애가 일어났느냐?

그것은 수로 인하여 이러한 애가 일어났다.

수라는 것은 느낌입니다.

왜 이런 수가 일어나게 되느냐?

그것은 내가 눈이 있고, 바깥 사물을 보고,

그것이 접촉이 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일어나지

눈도 없고, 바깥 대상도 없고, 접촉도 없다면

이런 느낌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똑같은 경치를 똑같이 본다고 느낌이 같으냐? 다르다. 왜 다르냐?

같은 눈에, 같은 경치에, 같은 접촉이 일어났는데 왜 느낌이 다르냐?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업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 업식이 뭐냐? 씨앗이다. 식이 다르다.

그러니까 씨앗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밭에 똑같이 심어서 똑같은 물을 주고

똑같은 봄날에 자랐는데 다른 싹이 튼다.

 

그래서 수는 촉으로 반연하고,

촉은 육입으로 반연하고,

육입은 명색으로 반연하고,

명색은 식으로 반연한다.

이 식이 씨앗이오.

 

그럼 이 식은 무엇으로 인하여 일어난 거냐?

이것은 처음부터 있었느냐? 아니다.

이러한 씨앗은 그 이전의 어떤 열매다.

그 이전, , 과거입니다. 과거.

과거에 어떤 행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행이라는 것은 한마음 일으키고,

그 다음에 하나의 말을 하고,

하나의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행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지고 그것이 식이다.

 

왜 이런 행이 이루어졌느냐?

거기에는 어떤 갈애가 있게 되었기 때문에 행이 이루어졌겠죠.

그럼 갈애는 왜 있게 되었냐?

이렇게 과거도 수도 없이 되풀이 되었을 때 그 근본 원인이 뭐냐?

무명이다. 무지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처음에 일어날 때는 무지로부터 일어난다.

무명으로부터 일어난다.

한 생각 사로잡히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요.

 

그래서 과거의 무수히 반복된 것을 합해서 뭐라고 한다?

무명-행이라고 하는 거요.

과거의 무명-행으로 인하여

,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우리가 받는 현재의 결과가 뭐냐?

-명색-6--수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 맹목적으로 충동해서 를 불러일으키는 거요.

그러니까 를 불러일으키면 이것은 미래의 또 원인을 제공하는 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과거의 원인의 결과로 현재에 과보가 따르죠.

이렇게 겹쳐있어요.

 

그러면 이 과거에 지은 원인의 과보로서 나타난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다시 현재의 갈애를 불러일으키죠. 그러면 이 갈애를 행하므로 해서 이게 원인이 되어서 미래에 또 과보로 받게 된다.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가, 현재와 미래가 이렇게 겹쳐 있어요. 겹쳐 있어. 그래서 삼세가 과거 현재 미래가 양중, 서로 겹쳐서 인연을 짓고 흘러간다.

 

이것을 전생과 현생과 내생이다. 이렇게 전통적으로는 설명합니다만, 그렇게 설명하면 주로 불교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그렇게 설명합니다. 전생의 원인을 짓고 현생에 받고, 또 현생에 그것에 따른 원인을 짓고 내생에 받는다. 그러나 불법의 차원, 수행적 차원, 진리의 차원에서 볼 때는 한 생각 일으키기 이전이 과거생이에요. 한 생각 일으킨 지금이 현재생이고, 한 생각 다음이 미래생이에요. 그래서 현재 한 생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나의 행위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이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분석이 되면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일단 현재, 갈애가 일어났다. 그러나 하고 싶지만 그것을 행했을 때 나에게 손실이다. 하는 지혜가 있으면, 그럼 그 지혜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내가 지혜를 얻는 거요. 담배 피우고 싶다고 피우고, 마약하고 싶다고 마약하고,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당신을 불행에 빠뜨린다. 전에는 좋은 줄 알고 했단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또 내가 경험을 해보니 , 이것은 순간은 좋지만, 결국은 나에게 큰 고통을 가지고 오구나. 그렇다면 그 순간에 좋다하더라도 그 순간에 빠져서 나는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내지 않으며, 욕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취하지 않으며, 이렇게 행동을 절제하는 거요. 말과 행위를 절제한다. 이것이 계율이에요. 이렇게

 

말과 행위를 절제하게 되면

인격이 도야가 되죠.

 

남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남에게 이로운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과거에 지어놓은 나의 업식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끊임없이 화를 내고, 욕심을 일으킨단 말이오. 그래서 계율은 지켰다가 또 어기게 되고, 지켰다가 또 어기게 되고, 그러면 어기게 되면 참회를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 되겠지. 그러나 필링이 일어날 때, 요것이 갈애로 연결이 되지 않도록 즉, 부싯돌이 부딪혀서 불은 반짝하지만 옆에 솜을 치워버림으로 해서 솜에 옮겨 붙지 않도록 한다. 이게 를 관찰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라고 하는 것이 쾌, 불쾌, 쾌하고 불쾌한 것이 다 사실은 뭐다? 고다. 고의 원인이다. 이게 관수시고입니다. 느낌을 그대로 관하면 그것은 다 고의 원인이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깊이 여러분들이 체득을 하시면, 그리고 수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그런 깨어있음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그러한 쾌의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하고 싶은 쪽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불쾌한 반응이 일어나더라도 이것은 내 업식으로 일어나는 거니까, 이것을 혐오하는 쪽으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수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 이것이 선정을 닦는 법이다. 이 말이오. 우리가 위파사나라고 하죠. 이게 관법수행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자신의 식, 자신의 업식을 자신이 잘 아는 거요. “, 나의 업식은 이렇구나. 나는 경계에 부닥치면 이렇게 마음이 일어나구나.” 이것을 자기가 미리 알게 되면 거기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업식에 끌려가지 않게 된다. 그러면 자기를 아는 사람이에요. 자기를 아는 사람. 자기가 자기를 알아야 된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업식을 분명히 알고 또 소멸시켰다 하더라도 또 무지로부터 이런 행이 또 일어날 수가 있죠. 그래서 무지를 타파하면, 존재의 본질을 확연히 꿰뚫으면, 연기법을 알면, 무상과 무아를 체득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것이 무명을 타파한다. 그것을 우리가 지혜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12연기에 의해서 나온 수행법이 계--, 3학이다.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바로 무명을 타파하면

아라한을 증득할 수가 있다.

 

기본원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비판하는 내용은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서 쫓길 때, 우리가 강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강도로부터 도피처를 찾는 것이 그것이 하나의 구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꿈속의 얘기다. 눈을 떠버리는 것. 눈을 떠버리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이 되죠. 잠을 깨버리면. 그러면 강도가 본래 없었어요. 이때, 그 강도로부터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이때

 

강도로부터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할 때

두려움이 있다가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은 본래 두려워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려움은 어디서 생겼어요?

착각에서 생긴 거요.

두려워할 일이 있어서 두려움이 일어난 게 아니고,

본래 두려워할 일이 없었던 거요. ?

강도가 본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할 일도 없는 거요.

 

그런데 그것은 내가 일으킨 한 생각에 내가 사로잡혀서 착각한 거요. 착각해서 깨어난 거지 강도가 있어서 내가 강도에서 벗어난 게 아니란 말이오. 그것처럼 무명을 타파한다 할 때, 무명이란 것이 있어서 무명을 타파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무명이라 할 그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없는 거요. 그러나 어리석은 상태에서는 분명히 두려움이 있었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런 말은 하는 거요. 그러나 괴로움이 있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즉 괴로울 일이 있어서 그 괴로울 일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괴로워할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에 의해서 괴로워한다. 그러면 착각에서 깨어나면 그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래서 /무무명/ 무명이라 할 것도 없다. , 무명이라 하면 무명이라 할 어떤 실체가 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 그래서 무명이라 할 거도 없다. 어떤 차원에서 볼 때? 깨달음의 차원, 공의 차원에서 볼 때. 무명이라 할 것도 없다. 그러니 무명을 없앤다라고 할 것도 없다. 그게 뭐다? /역무무명진/이다. 그러면 행이라 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무명이 없으니까 뭐도 없다? 행도 없죠. 그러니까 행이라 할 것도 없으니 행을 없앤다라 할 것도 없다. 그러면 행이 없으면 식도 없죠. 식이라 할 것도 없고, 그러므로 식을 소멸한다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다 연결이 되어서 다 생략하고 /내지/ 노사라 할 것도 없다. /무노사/ 그러니 노사를 다한다 할 것도 없다. /역무노사진/ 그래서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난번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자세히 말씀을 드렸는데도 오늘 간략하게 정리해서 또 한번 말씀 드리는 이유는 이 12연기는 수행을 하는 데에서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공부를 할 때 막연히 하는 성질이 있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서 공부를 안 하고 그냥 막연히 한다. 예습도 하고, 복습도 하고, 선생님 말씀 듣고 모르면 질문도 하고 이렇게 착실히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멍청하게 가방 들고 학교 갔다가 왔다가 이렇게 한다. 이 선생이 이렇게 말하면 그게 맞나보다. 저 사람이 말하면 저게 맞나보다. 이래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불자는 공부를 할 때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가 과학자가 어떤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자세가 같아야 한다. 그런 데에서 12연기란 매우 과학적으로 짜여진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수행하는 법도 아주 단계적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대승불교는 선불교를 하면서 그 대승불교가 갖는 요지, 그 선불교가 갖는 그 날카로움, 이런 것을 우리가 체득을 못하고, 그냥 막연히 부처님을 믿고 기도하고, 이런 것만 하니까, 자기 수행이 안 되잖아. 그죠.

 

그래서 요즘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나 이런 데로 수행하러 가지 않습니까. 가서 아주 구체적으로 단계적으로 설명을 하니까 감동을 해서 , 이게 진짜 불교구나.”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그건 수준이 낮다.” 이렇게 말해도 안 돼요. 그거 다 불법이에요. 부처님의 가르침 이예요. 그러나 그럼 그것이 진짜 불교고, 대승불교나 선불교는 가짜냐? 그것도 아니에요. 이것은 다 일맥상통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든 우리가 본질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자꾸 종파에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12연기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게 아니에요. 이러한 수행을 할 때 잘못하면 상을 짓게 된다. 수행이라고 하는 상을 짓거나 교리라고 하는 상을 지어서 무명이 있어서 무명을 없앤다.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다. 그러니까 그런 법상을 가진, , 진리라고 하는 어떤 형상을 지은 사람에게 그것은 너의 마음이 지은 거다. 너의 무지로 인해서 내 마음이 지은 거요. 그러니까 네가 한 생각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사실은 무명이라 할 것도 없다. 그러니 무명을 없앤다라 할 것도 없다.” 이것은 바로 직지인심. , 그 마음을 바로 딱 꿰뚫어서 진리로 들어가는 그런 관점에 서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앞에 전제가 붙어있어요. /공중/에서는 이 말이죠. 이것은 깨달음의 차원에서 볼 때, 또는 제법이 공하다는 그런 세계에서 볼 때는 그렇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바로 강도가 있고, 나는 강도로부터 쫒기죠. 그러나 꿈에서 깨면 강도도 없고, 두려워 할 일도 없고, 쫓길 일도 없다.

 

, 이렇게 한번 복습을 하시고, 이제 다음 단계인 /무고집멸도/ 여기서 고---도는 근본교설에서 이것을 사성제라 그래요. 4가지 성스러운 진리다. 이런 얘기요. 이 소승불교에서 또는 근본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겁니다. 이 사성제를 증득하면 바로 아라한이 된다. 이런 얘기요. 깨달음을 얻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럼 첫 번째 //가 뭐냐? . 이것이 고다. 이것이 고다. 이것이 고다하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성스러운 진리를 아는 거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살이가 괴로울 때도 있죠. 또 인생은 즐거울 때도 있어요. 인생은 다 괴로운 거 아니에요.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그런 거지.

 

그런데 인생은 괴로움이다하면 너무 한 면만 얘기한 거 아니냐. 이렇게 보는데, 여기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할 때에 이 고는, 고락의 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즐겁다하는 락과

괴롭다하는 고는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동전의 양면처럼 딱 결합이 되어 있어요.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 되고,

괴로움이 곧 즐거움이 된다.

 

여러분들이 결혼을 못해서 괴롭죠.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뭐한다? 즐거워지죠. 결혼을 해놓고 보니 도로 그게 괴로움이 되요. 또 애를 못 낳아서 괴롭다가, 애를 낳으면 즐거운데 그 아이 때문에 도로 괴로워진다. 이렇게 늘 그 락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 단계에서 보면 다시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있어요. 또 그 괴로움 가운데 또 즐거움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물건을 잃어버려서 괴롭죠. 찾으면 또 기쁘지.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찾는 기쁨도 없잖아. 그런 것처럼

 

괴롭기 때문에

또 즐거워지는 거요.

 

그래서 이것은 아주 긴밀하게 같이 붙어 있는 거요. 뗄 수가 없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개를 자꾸 떼려고 그래.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이 없기를 바래. 그런데 즐거움을 취하면 괴로움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의 세계에서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취하려고 할 때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다. 그래서 즐거웠다 괴로웠다, 즐거웠다 괴로웠다가 이것에 윤회하는 거다. 그러니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즐거움마저도 사실은 본질을 꿰뚫어보면 괴로움이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에 빠지지 마라.

그것이 곧 괴로움이 된다.

괴롭다고 너무 한탄하지 마라.

그것이 다시 즐거움이 된다.

 

그러니까 이 바뀌고 있는 고락의 윤회, 이것 전체가 사실은 괴로움이다. 그러니까 고락이 다 고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인생은 고다할 때는

인생은 고락이다.’ ‘인생은 고락의 윤회다.’

 

그러면 이 고락의 원인이 뭐냐?

이 고의 원인이 뭐냐?

이것은 우리의 갈애에 있습니다.

 

12연기에서도 나왔지만,

하고 싶다.’ 하는

내 원하는 데로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이 원인이죠.

 

원하는 대로 되면 즐겁고,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괴롭죠. 그런데 이 원한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내 마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게 어디로부터 생겨난 거요? 이것이 내 업식으로 부터 일어난 거요. 그러기 때문에

 

하고 싶고

하기 싫고가

내가 주인인 것 같은데,

사실은 내가 주인이 아니에요.

업식이 사실은 주인이에요.

 

이렇게 하나하나 그 원인을 규명해 들어간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내 마음이 결국은 탐진치 3독에 물 들어서 그렇다. 여래십대발원문에 보면 첫번째 願我永離三惡道원아영리삼악도, 나는 이 삼악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러면 이 삼악도에 고통의 원인이 뭐냐? 그것은 탐진치다. 그래서 원아속단참진치_나는 탐진치 삼독을 결단코 끊겠다. 그러면 이

 

탐진치 3독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그 다음에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된다.

 

아주 이렇게 정리가 잘 되어있습니다. 願我常聞佛法僧원아상문불법승 願我勤修戒定慧원아근수계정혜.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오. 그런 것처럼 이러한

 

고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쉽게는 애라고 할 수 있고,

더 들어가면 집착이라 할 수 있고,

더 깊이 들어가면 무지라고 할 수 있다.

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무지를 타파하면 어떻게 되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괴로움이 소멸된다. , 그 무지라는 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한 생각에 딱 사로잡힐 때 일어나는 거요. 여러분이 한 생각을 일으켜 딱 사로잡히면 그게 바로 전도몽상, 결국은 무지인데, 그로부터 괴로움이 발생한다.

 

원효대사께서 깜깜한 저녁에 목말랐을 때는 바가지를 갖고 물을 떠먹었는데 맛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게 해골이다. ‘해골이다하는 그 한 생각을 딱 일으키니까 구역질이 나왔다. 그러니까 한 생각에 딱 사로잡히는 거요. 그런데 다시 탁 돌이켰다. 같은 물이고 같은 바가지인데, 어제는 달콤했는데, 오늘은 왜 토할까?

 

, 더럽다는 것이

바가지에 있거나 물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에 있구나.

그 내 마음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오?

내가 더럽다는 한 생각을 불러일으켜

거기에 사로잡혔다.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서 지어놓고는 즉, 내가 꿈속에서 강도를 만들어놓고는 그 강도가 바깥에 객관적으로 강도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도망을 가야 된단 말이오. 그것처럼 더럽다하는 한 생각을 일으켜서 사로잡히게 되니까, 딱 뒤집어져서 해골이 더럽다.’ ‘물이 더럽다.’ 이렇게 밖을 탓하게 된다.

 

오늘 우리 인생이 다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괴롭다. 괴롭다.” 하고 질문을 하는데, 문의를 하는데, 왜 괴롭습니까? 하면 남편이 술을 먹고 와서 괴롭습니다.”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괴롭습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해서 괴롭습니다.”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해서 괴롭습니다.” 이 괴로울 때 다 원인이 밖에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괴롭다. 뭣 때문에 괴롭다.” 이게 전도된 상태. 자기 마음에서 일으킨 것을 뒤집어져서 바깥에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서 전가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착각을 해버린 거요.

 

길을 가다가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다가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그래서 쉭 돌아보는데 뭔가 허연 게 있다. “, 귀신이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도망을 간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와서 보니까 나뭇가지에 허연 옷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귀신은 없었단 말이오.

 

그것을 보는 순간

내가 두려움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난 거란 말이오.

착각을 한 거란 말이오.

착각을 한다는 것은 객관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도망을 가야지.

 

그런데 이게 내 마음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도망을 갈 필요가 없죠?

머리를 한번 흔들고 다시 보니까 , 옷이네.” 이러면 된단 말이오.

오늘 우리가 다 이래요.

 

그래서 책임을 바깥에다 전가시켜 놓고, 해결을 하려니까 이제는 원인이 밖에 있으니까, 남편이 술을 안 마셔야 되고, 애가 공부를 잘해야 되고, 시어머니가 잔소리를 안해야 되고, 이런 식으로 밖을 고쳐야 된다.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고쳐져. 잘 안 고쳐지죠. ? 나도 나를 못 고치는데 남이 어떻게 내 맘대로 고쳐지겠어요. 그래서 안 고쳐지니까 이제는 힘을 빌려야 된단 말이오. 그럼 부처님한테 빌거나 하나님한테 빌거나 해서 제발 저 인간 어떻게 좀 고쳐주십시오. 내가 돈을 내라면 얼마든지 내고, 절을 하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어쩌다가 고쳐졌다 하면 가피를 입었다.” 이렇게 된단 말이오. “, 내 소원이 들어졌다.” 이렇게 되는 거요.

 

이것은 다 꿈속의 얘기다. 꿈속의 얘기다. 바로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이게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다. 이것을 깨달아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나를 향해서 관점을 바꾸어야 이 본질을 볼 수가 있지, 자꾸 바깥을 탓하면 이 문제의 근본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원인의 원인, 원인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라는 거요.

 

이렇게 해서 그 근본 원인을 뭐라고 한다? //이라고 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 현실의 괴로움으로부터 근본원인, 괴로움의 원인을 집이라고 한다면 요 고에서 집까지 가는데 여기에 원인의 원인, 원인의 원인을 규명해가는 것이 뭐와 똑같다? 12연기와 똑같은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원인을 규명해야 된다.

 

그런데 이 원인을 규명해보니까 이것은 나의 무지로 일어났다. 한 생각에 사로잡힘으로 일어났다. 착가에서 빚어진 거다. 그러면 착각에서 깨면 어때요? 이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어떤 괴로움이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며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깨달으면, 꿈에서 깨면, 이렇게 표현을 하죠. 그러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검사를 하는데, 의사가 아이고, 보살님. 검사 결과가 안 좋으네요.” “어떻게요?” “유방암이에요.” “?” 하면서 괴롭기 시작한단 말이오. 그때 수행자는 빙긋이 웃으면서 , 그래요. 다행이에요.” 이렇게 되는 거요. 뭐가 다행이다? 일찍 발견 된 게 다행이다. 오늘 발견이 되기 전에도 어제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 그럼 이것을 몰랐으면 병은 점점 커지죠. 오늘 알았다. 이거야. 내가 몰랐다고 병이 없는 게 아니란 말이오. 있는 병을 오늘 알은 것 밖에 없단 말이오. 그러면 사실을 사실대로 알은 것은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좋은 일이에요. 오늘 좋은 일이 일어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괴로워하잖아. “내가 암 걸린 게 잘됐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오늘 그것을 알았다. 내가 아픈 원인을 알았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이것은 치료를 하면 된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어떻게 치료 할 거냐를 생각해야 되는데, “왜 내가 암에 걸렸을까? 아이고 나는 이제 큰일 났다. 나는 죽었다.” 이런 식으로 그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듯이 자기 생각 속에 빠져서 허우적댄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괴로움을 만드는 거요. 그러면 착각에서 깨어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게 //이란 말이오.

 

그러면 다시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킬 수가 있느냐? 착각에서 깨어날 수가 있느냐? 이 방법론이 나온단 말이오. 그러니까 목표는 나왔어요. 깨닫는 거다. 이 목표가 나왔단 말이오.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게 방법론이요. 이게 도다. 그래서 고---도는

 

//는 이것이 괴로움이다. 즉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거요. 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거요. 이게 병이다. 이것을 진단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그 병의 원인이 뭔가?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되요.

세 번째는 병이란 것은 사람이 처음에 태어날 때는 건강했죠. 건강했는데 중간에 병들었다면 뭔가 잘못이 있어서 병들은 거 아니겠어요. 그죠? 그러니까 이것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가 있다. 이거죠. 치유하면 원래대로 돌아가죠. 그러니까 이것은 나을 수 있다. 이게 //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낫느냐? 그 치료법이 뭐다? // 도란 말이오.

 

이렇게 굉장히 합리적이고 법칙적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절에 다니면서도 이렇게 불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거요. 그러니까 이 교리, 고집멸도다. 사성제가 뭐냐? 고집멸도다 하는 단답식으로 외우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사물을 볼 때

늘 이런 식으로 사고해야 된다.

사물을 이런 식으로 탐구해야 된다.

 

항상 어떤 상황에서든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현실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다음에 그 원인의 소멸 가능성을 보고

그 소멸을 향해서 방법을 구체적으로 찾아야 된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야 된다.

 

이 길, 방법, 이게 뭐요? 도요. . 이 도에는 뭐가 있다? 팔정도가 있다. 8가지 바른 길이 있다. 8가지 바른 길, 첫 번째가 /정견/ 바르게 봐라. 바르게 본다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라. 이 말이오. 착각해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그리고 두 번째 /정사/ 바르게 사유해라.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도 바로 해라. 이 정견, 정사를 우리가 합해서 뭐라고 할 수 있다. 지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말을 바르게 해라. /정어/ 그 다음에 행동을 바르게 해라. /정업/

 

생활을 바르게 해라. 요즘은 세상사람 같으면 직업을 바른 직업을 가져야 되요. 자기가 생존하는 이 생활 방식, 그것을 정당하게 가져야 됩니다. 사람을 죽이고 남의 돈을 뺏고, 이런 것으로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 그 다음에 매매춘을 하고, 노름을 하고, 작물을 팔고, 사주를 봐주고, 남의 운명을 점쳐주고, 이런 것도 바른 직업에 안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출가한 승려가 고행을 해서 사람에게 신비감을 줘서 보시를 받거나, 운명을 점쳐주거나 하면서 보시를 받거나, 이런 것도 계율에는 /정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른 생활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바른 행동이라는 것은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싸움하지 않는 것, 오히려 방생하고 보시하고 청정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하겠죠. 그 다음에 바른 말이라는 것은 뭐요? 거짓말 하지 않고, 이간질하지 않고, 아양 떨지 않고, 욕설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이 바른 말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정어, 정업, 정명은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다?

지계, 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거에 속한다.

 

그 다음에 /정정진/ 바른 노력, 그 다음에 /정념/ 바르게 깨어있음입니다. /정정/ 바른 안정, 그러니까 마음이 고요하게 평정되어있는 상태를 정정이라고 그러고, 그 마음이 또렷하게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 깨어있는 상태를 정념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수를 관찰할 때, 깨어있어야 되고, 고요해야 됩니다. 고요함이 있는데 멍청해도 안 되고, 깨어 있는데 아주 초 긴장상태에서 깨어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아주 미세한 수를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요한 가운데, , 편안함 가운데에서 예리함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를 해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면 졸음이 옵니다. 혼침에 떨어져요. 마음이 편안해지면 번뇌 망상이 치솟습니다. 그래서 망상에 찌들려서 깨어있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신경을 바짝 서서 보초가 초소를 지키듯이 이렇게 긴장을 하게 되죠. 그럼 마음이 편안하지가 못해요. 그래서 이 둘이 늘 우리는 안 맞습니다.

 

편안한 가운데에서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지만 긴장하지 말아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편안한 마음으로 아무런 긴장 없이 바다를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파도가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가고, 파도가 일어나고 파도가 사라지는 것을 아주 관찰하듯이 팍 신경 써서 눈 부리가 아프도록 관찰하는 게 아니라, 편안한 가운데 그 일어나는 현상이 다 이렇게 환하게 알아지듯이 그렇게 관찰하는 게 정념과 정정입니다. 이게 관법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관찰을 할 때 사람은 놓치게 됩니까? 안 놓치게 됩니까? 놓치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해도 놓치게 되고, 그 다음에 깨어있지 못해도 놓치게 되요. 혼침에 떨어지거나 놓치게 된다. 이 말이오.

 

놓치게 되면 금방 놓친 줄 알고 빨리 제자리로 탁 돌아와야 된다. 10번 놓치면 11번 돌아오고, 100번 놓치면 101번 일어나고. 그래서 이것이 지속되도록, 깨어있음이 지속 되도록 해야 되는 거요. 그게 뭐다? /정진/이오. 그러니까 그것을 꾸준히 해야 돼. 한두 번 해보고 안 된다고 말면 안 돼요. 이것이 정진이다. 그래서 이게 선정을 닦는 다는 거요. 그러니까

 

정어, 정업, 정명은 계, 계에 속하고,

정정진, 정념, 정정은 정에 속합니다. 선정을 닦는 거에 속하고,

정견, 정사는 혜에 속합니다. 지혜를 닦는 것에 속한다.

 

그러니까 팔정도는 다른 쪽으로 옮기면 계정혜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계정혜를 닦는다, 8정도를 닦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수행법이다. 이번시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