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 상대가 욕을 해도 빙긋이 웃을 수 있는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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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2018. 3. 14.



2,600여 년 전 부처님을 만나 행복해진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잔잔한 생활 속에 불교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진리는 현대인들에게도 행복해에 이르는 길을 선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 어느 날, 걸식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그 걸식 중에 어떤 바라문집에 걸식을 가게 되었어요. 그러자 그 바라문이 부처님을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면서 욕을 했어요.

 

너는 육신이 멀쩡하면서 왜 남의 집에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느냐? 그러지 말고 너의 힘으로 일을 해서 먹어라. 나는 너에게 음식을 줄 수가 없다.” 이것은 경전에 점잖게 기록된 거고, 사실은 자가 들어가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거요.

 

그 사람이 그렇게 욕설을 하는데도 부처님께서는 그 욕설하는 바라문을 보시고 빙~긋이 웃으셨어요. 그러자 그 바라문이 부처님을 보고 다시 욕을 했어요. “왜 내 말이 아니꼽냐? 왜 내가 말을 하는데 웃느냐?” 이렇게 또 시비를 한 거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당신 집에 가끔 손님이 오십니까?” 이렇게 물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갑자기 질문을 받게 되니까 , 오지.”

그럼 손님이 올 때 가끔 선물도 갖고 오십니까?” “, 가지고 오지.”

만약에 그 손님이 가져온 선물을 당신이 받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누구 것이 됩니까?”

그야 가져온 그 사람 거지.”

 

그래서 부처님이 다시 빙긋이 웃으시니까 그 바라문이 그런데 그런 거 나한테 왜 물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당신은 나를 욕을 했는데, 그 욕을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욕이 누구 것이오?” 이랬어. 그때 그 바라문이 뭔가를 탁 깨달았어. 여러분들 깨쳤어요?

 

그러자 무릎을 꿇고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집안에 들어가서 아주 좋은 음식을 차려서 부처님께 극진히 공양을 올렸습니다.

 

이게 부처님의 인격이고, 이게 부처님의 교화방법이에요. 저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하면 나도 똑같이 대응을 했을 거요. “, 안 주면 말지. 욕은 왜해?” 이러면 그 바라문이 , 내가 잘못했네.” 이럴까? 아니지. 네가 아침부터 남의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왔으니까 욕을 하지. 이러겠죠. 그러면 나도 할 말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래, 밥을 얻으러 왔더라도 안 주면 되지, 왜 욕을 하냐?” 그러면 그 분이 네가 내 집 앞에 서 있으니까 욕을 하지.” 그럼 저도 할 말이 있죠. “그래, 집 앞에 서 있는 것도 문제야?” 이런 식으로 말에 말에 꼬리를 물고 다투면 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보고 뭐라고 그러겠어요? “, 저 두 사람은 전생에 무슨 원수가 졌기에, 저렇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얼굴을 보자마자 저렇게 핏대를 올리면서 싸울까? 아마 저 둘은 전생에 원수 사이였을 거야.” 이렇게 말하겠죠.

 

그러니 지금 이렇게 다투게 되면 전생에는 원수 사이고,

이 생에 또 만나서 원수가 되고,

지금 이렇게 다투었으니까 내생에 또 원수로 만날 거 아니겠어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아가는 거요. 이게 중생의 삶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렇게 한번 빙~긋이 웃으심으로 해서 그 바라문이 크게 깨닫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단 말이오. 그 바라문이 부처님께 극진하게 공양 올리는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을 하겠죠.

 

저 바라문은 전생에 얼마나 많이 지었기에 저렇게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 있을까?” 아니면 부처님과 저 바라문은 전생에 어떤 좋은 사이였기에 이 생에 저렇게 처음 보자마자 저렇게 좋은 관계가 될까?”

 

전생에 좋았으니까 이 생에도 좋고,

지금 좋으니 내생에도 좋겠죠.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전생얘기, 내생얘기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전생으로부터 현생에 있고, 현생으로부터 내생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죠.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전생도 내생도

다 어디서부터 시작이 됩니까?

바로 지금에서 시작이 됩니다.

 

상대가 나에게 욕을 할 때,

나도 덩달아 욕을 하게 되면

전생도 원수지간이오,

현생도 원수지간이오,

내생도 원수지간이 되는데,

 

상대가 나에게 욕을 할 때도

내가 한번 빙긋이 웃으면

전생도 선현이요,

현생도 선현이오,

내생도 선현이 되는 거요.

이 미묘한 도리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깨달으면 삼생의 업이 녹는다.

깨달으면 지금 좋고,

미래만 좋은 게 아니라,

뭐까지 좋아진다고요? 과거까지 좋아져 버려요.

이것이 법의 미묘함이며, 법의 위대함이에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그 한번 빙긋이 웃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부부지간에도 내가 저분하고 전생에 무슨 원수가 되었기에 이 생에 만나 이 고생일까?” 자식 보고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인간을 낳았느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해결의 길이 없는 거요.

 

이것이 바로

지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해결의 길이 있죠.

그래서 깨달음은

운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바꾸는 거요.

 

이것을 우리 불자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 뭐요? 전생얘기 아니오? 그래서 힘들면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것은 수행적 관점이 아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지금 어떻게 하느냐? 이거요.

지금 어떻게 하느냐.

 

그런데 우리 모두는 자기가 웃어봐라. 내가 화를 내겠냐? 자기가 화를 내니까 나도 화를 내지. 자기가 욕을 하니까 나도 욕을 하지.”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인간관계가 다 전생에 악연을 짓고, 이 생에 악연으로 만나고, 내생까지 과보를 받는 이 윤회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이 불법의 미묘한 도리를 알게 되면, 그가 지금 나에게 욕을 하더라도 그 선물이 내가 별 쓸모가 없으면 안 받으면 돼. 그런데 여러분들을 보면 욕이 듣기 싫다고 하면서 그 선물을 넙죽 받죠. “공짜인데 어찌 안 받을 수가 있느냐.” 이러면서 받고 포장을 열어보고는 집어 던진단 말이오. 이렇게 우리 인생이 반복되고 있어.

 

그러니 우리가 불자 되는 길은 어려운 경전을 독송하고, 얼마나 베껴 쓰고, 얼마나 오래 앉아있고, 얼마나 절을 많이 하느냐?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오.

 

그러니 상대가 욕할 때, 짜증낼 때

한번 빙긋이 웃는데 있다.

여기에 요체가 있어.

이게 팔만대장경을 다 독파하는 것 보다

더 진수가 여기 들어있어.

 

그럼 여러분들이 나한테 묻겠죠. “스님은 그렇게 해요?” 나도 잘 못해. “그럼 스님도 못하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법은 내가 할 수 있고,

할 수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탈의 기쁨을 얻을 수가 있는 거요.

 

설령 스님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불법을 믿은 공덕이 없는 거요. 오신채를 안 먹고도 빙긋이 웃을 수 없고, 화내고 짜증내면 불법의 공덕이 없고, 설령 여러분들이 오신채를 먹었다 하더라도 그때 한마음을 일으켜서 빙긋이 웃을 수 있다면 불법의 공덕이 있다.

 

머리를 깎아도 이 법의 이치대로 마음을 쓰지 못하면 고통의 과보가 따르고, 설령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있다 하더라도 이 가르침대로 마음을 쓰면 부처님의 가피력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니 여기에 누가 그 원리대로 하느냐? 이게 중요하지, 스님이냐. 스님이 아니냐. 남자냐 여자냐, 어느 종파에 다니느냐, 뭘 외우느냐,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이런 게 중심과제가 아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어느 종파가 낫느니, 못하느니 하는 종파주의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고, 대승이 낫니 소승이 낫느니 이런 데서도 벗어날 수가 있어. 더 나아가서는 불교냐 기독교냐 하는 것도 넘어설 수가 있어.

 

시어머니가 매일 절에 다니면서 기도를 하는데, 매일 며느리한테 짜증을 낸다면 그 며느리가 절에 다니고 싶지가 않을 거요. 며느리가 설령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가끔 짜증을 내는데도, 그 시어머니가 빙긋이 웃으면서 오늘 화가 났구나. 쯧쯧쯧.” 이렇게 받아준다면 그 며느리가 언젠가는 불법의 인연을 맺을 거다.

 

그러니 교화가 불교를 주장한다고 교화가 되는 게 아니에요. 어떤 형식을 취해서 한다고만 되는 것은 아니에요. 또 제 얘기를 잘못 들어서 그러면 절 안 해도 되겠네요.” 절이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오. 절을 하지마라는 얘기가 아니고, 경전을 읽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 명상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 참선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 보시 하지 말란 얘기가 아니라, 그 형식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그 형식 속에

그 법의 이치를 담아야 된다.

 

그렇게 공부를 해 나아가야 바로 불교인들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해탈, 열반의 맛을 볼 수 있어.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성도했다. 이 성도라는 말을 하죠? 또 수행의 목표를 뭐라고 해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을 쓰죠. 부처님께서는 해탈하셨다. 열반을 증득하셨다 그러잖아.

 

그럼 우리도 부처님처럼 닮아 간다.

나도 부처님처럼 되고 싶다.

그 말은 나도 해탈을 증득하고 열반을 증득하고 싶다.

나도 성불하고 싶다. 이런 얘기 아닙니까.

그럼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경험이 되어져야 된다. 내 삶에서.

 

그런데 우리가 불법을 만나서 그런 것이 정말 경험되어지느냐 이거야. 그런 것이 경험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법을 만난 기쁨이 없죠. 이 법을 만난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전법의 정열이 또 굉장히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슴속에 전법의 정열이 없는 것도 바로 법을 만나서 열반을 경험한, 자기의 고뇌가 사라지는,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데서 우리들이 부처님에 대한 또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어떤 만남,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

 

실제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남이 나에게 욕할 때, 편안하게 웃기는 어렵습니다. 저도 이번에 경험했는데 남이 나를 욕하니까 마음이 안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해결되어지고 싶습니까. 그들이 나를 욕하지 않아서 해결되어지기를 바란단 말이오. 이게 세속적이라는 거죠.

 

그들이 나를 욕하지 않아서 해결되어지고 싶은데, 그들은 나를 욕을 하니까, 내가 어떻게 알 수 없으니까, 자연적 마음속에 부처님께 비는 마음이 일어날 거 아니오. “아이고, 좀 욕 안하게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된단 말이오. 이게 우리가 경계에 끄달리고, 경계를 탓하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빌 수밖에 없는 거요.

 

그런데 부처님은 욕하는 사람을 보면서 빙긋이 웃으시니까, 그게 마음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아무런 필요성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해탈과 열반이라는 것은 특별히 자기 밖에 어떤 다른 존재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요. 이게 붓다란 말이에요. 온전한 존재라는 거요.

 

자기 운명의 주인이

자기가 되어버린 사람이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왕을 만나거나 하더라도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밥을 달라든지, 집을 달라든지, 옷을 달라든지, 뭘 해결해 달라든지 이런 얘기를 안했단 말이오. ?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왕이 부처님한테 가서 괴롭습니다. 이러저러 합니다.” 하니까 부처님께서 여러 좋은 법문을 해줘서 왕에게 도움을 줬다는 거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비는 마음이 생기는 거요. 이게 중생심에서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바로 해탈로 나아가려고 할 때는 바로 이 비는 마음이 없어져야 돼.

 

그럼 비는 마음이 없어지려면

바라는 게 없어져야 돼.

바라는 게 없다는 것은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해결 못할 일이 없어져야 돼.

 

그런데 현실 속에서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부처님의 법을 따라 정진을 해보면, , 그 욕하는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빙긋이 웃을 수가 있습니다. 저도 이게 계속 실험을 해보면

 

비난하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마음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고

마음이 긴장이 되요.

 

그런데 비난하는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어때요?

아이고, 나라도 저 정도는 욕을 하겠다.

저 정도라서 다행이지 나 같았으면 더 했을 거야.”

이렇게 생각이 들면 그것이 거슬리지 않죠.

 

예를 들어서 내가 사람이 자는 방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이 잠꼬대를 해. “법륜스님, 그 나쁜 놈이야.” 하고 막 욕을 해. 그럴 때 제가 화가 나서 너 뭐라고 그랬어?” 하고 멱살 잡고, 자는 사람 일으켜 세워서 뺨때리고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죠.

 

빙긋이 웃으면서 뭐에요? “아따, 잠꼬대가 심하다.” 그러지 않습니까. ? 그가 지금 잠꼬대를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부처님이 이 세상의 중생을 볼 때는 중생들이 다 각자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순간에 그렇게 반응을 하는 거란 말이오. 이것은 잠꼬대에 속하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빙긋이 웃을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입장에서 그럴 수 있다.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에 화와 짜증이 일어나는 거요.

 

내 마음에 화와 짜증이 일어날 때 공부하는 방법은

, 내가 내 생각에 사로잡혔구나.

내가 내 입장을 고집하구나.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구나.

내가 경계에 끄달렸구나.

 

이렇게 돌이키게 되면 이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지게 되죠. 그래서 빙긋이 웃을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편에서 그의 말에 동의를 할 수도 있어지죠. “, 그러셨어요? 나라도 그랬겠다.” 이렇게 갈 때,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런 장애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제가 이번에 경험한 건데, 동네 할아버지가 계속 축대 쌓는 게 위험하다는 거요. 내가 몇 번을 설명했는데도 내 말을 안 듣고 계속 고집을 하는 거요. 그러니 내 마음속에 좀 짜증이 났어. 이렇게 34번 설명했는데도 못 알아들으시느냐. 젊은이는 그림을 그려서 이게 어떻게 어떻게 되어있다고 설명하니까 알았습니다하는데, 이 노인은 막무가내요.

 

그러는 중에 제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탁 들었어요. “, 이 분은 논리나 이해가 아니고 70년 이상 살은 경험에 의해서, 마치 작은 미물들이 태풍이 일어나거나 그러면 도망을 가듯이 어떤 그런 예감에 의해서, 미래에 닥칠 어떤 위험을, 나한테 지금 내가 안 듣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 몇 번이나 이렇게 알려주고 있구나.

 

나는 여기 살은 지가 얼마 안 되고, 저 분은 여기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으니 그분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어떤 예감을 가지고 나한테 지금 얘기하는데, 저 분이 귀가 먹은 게 아니고, 내가 지금 내 어떤 목표, 생각, 논리에 빠져서 내가 지금 저 분의 말을 안 받아 들이구나.” 이렇게 딱 생각이 드니까 그분에 대해서 고마운 생각이 들잖아요.

 

그래서 제가 , . 알겠습니다. 아이고, . 알겠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속에서 이 생각이 탁 바뀌면서 상대에게 할아버지 알겠습니다. . 제가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이 할아버지가 금방 아이고, 스님 잘 계세요.” 이러고는 금방 가버려. 기적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버린 거요. 그래서 우리가 이 마음이라는 게 참 이렇게 묘한 거구나.

 

저 사람이 고집이 센 게 아니고

내가 고집이 세구나.

저 사람이 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고

내가 그분의 말을 안 듣고 있구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 좋은 부처님의 법문 속에서 듣고만 말고 집에 가셔서 이제 과제를 하나씩 해 나가봅니다. 어떻게 한다고요?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나 부모, 친구, 누가 성질을 팍 낼 때, 어떻게 연습해 본다? 빙긋이 한번 웃어본다. 아마 열에 아홉은 안 될 거요. 그죠? 입모양은 빙긋이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안 웃어질 거요.

 

그럴 때는 한꺼번에 욕심내지 말고, 억지로라도 입모양이라도 한번 오늘은 웃어보고, 내일 다시 도전해 보고, 또 도전해 보고, 또 도전해 보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정말 상대가 짜증을 확 내는데 마음에서 씩~ 웃어질 때, 이 헤아릴 수 없는 이 미묘한 도리, 이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적 같은 일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뭐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피력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시겠어요? 이럴 때 무상심심 미묘법이라는 거요. 기적이 이런데서 일어나는 거요. 이 좋은 불법을 잘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