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1. 복을 짓는 네 가지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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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2018. 5. 22.



안녕하세요. 내일은 부처님 탄생하신 날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면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이 과연 무엇일까? 이런 것을 우리 모두 한 번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오신 뜻을 알려고 하면 부처님의 태어났을 때의 모습도 있겠지마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보여줬느냐? 어떤 말씀을 하셨느냐? 이것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이 무엇이었느냐? 이것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저 쿠시나라가 성 밖의 사라수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실 쯤에

오늘 저녁에 내가 열반에 드리라.’ 라고 선언을 하셨을 때, 부처님을 25년이나 따라다니면서 시봉을 들었던 아난존자에게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는 그 애기를 듣고 부처님 곁을 떠나 숲속을 거닐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출가수행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무엇을 의지해야 하면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이렇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처님 곁으로 돌아가서 부처님께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를 여쭈었습니다.

 

그 가운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그래서 큰 공덕을 쌓습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을 때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은 그런 큰 공덕을 지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을 때, 부처님께서

 

"아난다야, 걱정하지 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서 여래에게 올리는 공덕과 똑같은 공덕이 있는 공양이 4가지가 있느니라.

 

첫째가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줘서 살리는 일이다. ,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에게 먹을 베풀어서 살리면 그것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

 

두 번째는 병들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갖가지 약을 공양 올려서 그를 살려낸다면 이것 또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

 

세 번째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을 돕고 위로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도와야 하고, 외로운 사람은 위로받아야 하겠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이것 또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

 

네 번째는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에 따라 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재가신자로서 잘 외호한다면 그것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공덕과 같다.

 

이것이 4가지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다.”

 

오늘 우리들을 부처님 공양을 올립니다. , 등상불, 부처님의 모습을 닮은 그런 조각이나 그런 그림에다가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니 마치 부처님이 계시는 듯 생각하면서 거기다가 공양을 올립니다. 그리고 공덕의 길을 바란다. 이거야.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 의거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런 등상불과 탱화에 공양을 올리기보다, 그래서 복을 빌기 보다는 법도에 맞게 공양을 올려서 그 공덕을 받음이 옳지 않겠느냐? 그럼 법도에 따라서 공양을 올려서 공덕을 받는 길이 뭔가?

 

그것이 바로 굶주리는 사람을 배불리 먹이는 거다.

,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베푸는 겁니다.

 

오늘 우리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 설령 굶어 죽지는 않지만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 이런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지구 인구 전체가 62억이라고 하는데 그 중 1/412억 정도의 인구가 바깥에 가서 하루 노동을 했을 때, 1달러 미만의 수입자들이다.

 

, 하루 일당이 천원 미만의 수입을 갖고 본인과 가족이 먹고 살아야 하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지구전체 인구의 25% 정도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겨우 먹고 살거나 먹고 산다면 병이 들었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병이 나았더라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극빈층,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속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줘서 굶어죽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방생의 공덕이 되기도 하고, 또 이들이 병이 들었을 때 불치의 병이다. 치료하는데 드는 돈이 수천만 원이 든다. 이런 병이 아니고, 예방주사를 한 대 맞아도 된다. 치료약이 몇 천원 수준이다. 결핵 같은 경우에 한 10만원 이내의 돈이면 그는 살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돈이 없어서 그 병에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거요. 몇 년 전에 북한에서 기아상황이 계속 되었을 때, 굶어죽은 사람이 저희들 조사에 의하면 3백만 가까이 됐다.

 

사람이 자기 눈앞에서 부모가 굶어죽을 때, 자기 눈앞에서 자식이 굶어 죽을 때, 굶어 죽는 사람은 굶어 죽는 사람이지만 그것을 보는 살아있는 사람도 엄청난 고통입니다.

 

파라티푸스라든지, 이런 간단한 질병, 소위 몇 천원치의 약만 있어서 살 수 있는 그런 병으로 사람들이 썩은 나무 가지가 떨어지듯이 그렇게 죽어져나갈 때 이것은 정말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 이것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런 법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와 같은 공덕을 짓는 사람이 되지 않고, , 죽어가는 생명을 아껴서 그것을 살리므로 해서 인연의 과보로 공덕을 받는 이런 불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빌기 위해서 어떤 욕심으로 하는 행위, 어쩌면 억지로 복을 짓는 행위,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아다가 다시 등허리에 뭘 써서, 복 가져 오라고 띄워줄 수 없는 이러한 행위는 또는 우리가 등상불에 음식을 차려놓고 복을 비는 이런 행위는 법에 맞지는 않다.

 

그것이 하나의 우리의 문화, 종교 문화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붓다가 가르친 담마, 그 법도에 맞지는 않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법도에 따라 복을 빌어야 한다.

 

복을 빈다는 것은

달라는 것이 아니라

복이 올 수밖에 없는

복을 짓는 행위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취약계층들을 돌보는 그런 사회사업을 잘하는데 불교는 그런 일을 잘 하지 않는다. 불교는 깨달음은 강조하지만 나눔에 대해서는 특별한 얘기가 없다. 오직 깨쳐라 깨쳐라. 깨쳐라 라는 얘기만 있지, 고통 받는 이웃,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어라. 이런 얘기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불교, 우리가 접하고 있는 불교,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전달받은 어쩌면 약간의 변형된 모습의 불교일 뿐입니다. 원형의 불교, 인격자 부처님께서 가르친 불교는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마지막 유언에, 우리말로 하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과 같은 공덕이 그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베풀어 먹이는 거고,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어 살리는 거고, 가난한 자를 돕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는 거고, 청정하게 수행하는 자를 잘 외호하는 거다.

 

이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가 그대로 행한다면 이 이상 불교의 사회에서 불교의 복지 사업에 지침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 이런 붓다의 가르침은, 그런 경전은 우리는 들어본 적도 없고 접해본 적도 없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붓다라고 하면서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그래서 그 가르침에 따라 기쁨을 증득하는 이런 실천적 행위가 없기 때문에 거룩한 부처님 법에 귀의합니다.” 이렇게 입으로는 늘 말하지마는

 

정말 마음속에 법에 귀의하는가,

그분의 가르침을 내 인생의 어떤 지표로 삼고 우리들이 살아가는가, 거기서 교훈을 얻는가.

절망에 빠졌을 때 그 가르침을 듣고 희망을 찾았는가.

무지 속에 헤매다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치 어두운 밤에 불 빚을 만나듯이 그런 새로운 길을 찾았는가, 그럴 때 사실은 법에 귀의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저희 JTS활동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불교에서도 이런 일을 하는가?”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가?” 신기해합니다. “불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거꾸로 되물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남기신 그 마지막 유훈에

배고픈 자를 먹여라. 병든 이를 치료해라. 가난한 자를 도와라. 외로운 자를 위로해라.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섬기는 일이다. 이렇게 딱 못이 박혀 있단 말이오.

 

그래서 저희들이 이 JTS의 목표를

배고픈 자는 먹어야 합니다.

병든 이는 치료받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제때에 배워야 합니다.

 

3가지가 어디서 나왔겠어요? 경전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긴 거요. 다만 요즘에 맞게 변형했죠. 가난한 자의 기준이 애매모호하잖아. 그래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야 굶어죽는 사람이고, 병들어 죽는 사람이겠죠.

 

그러나 굶어죽는 사람, 병들어 죽는 사람, 그게 아니어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그 다음에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어요? 자기 자식을 초등학교에도 보내지 못한다. 이것은 얼마나 가난하면 사랑하는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겠는가.

 

제가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 갔을 때, 그렇게 물었어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냅니까?” “보내지 않습니다.”

왜 보내지 않습니까?” “학교가 없습니다.”

학교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학교를 누가 만듭니까. 지금 우리는 식량도 부족하고, 병이 나도 치료받지 못한다.”

무엇이 필요한가?” 했을 때, 식량, , .

 

학교 얘기가 안 나와. 그래서 학교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당장 배고프니까 먹을 게 필요하고, 목마르니까 물이 필요하고, 아프니까 약이 필요하다. 그런 우리에게 학교? 이건 아직 사치에 속한다.

 

그럼 학교가 필요 없습니까? 아니라는 거요. 누가 자식 둔 부모가 제 자식 공부시키고 싶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자식이 지금 나처럼 이렇게 살아가기를 누가 원하겠느냐.

그러나 현재 우리의 형편에 그거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의 눈에 눈물을 봤고, 또 내 눈에 또한 눈물이 흘렀습니다. 자식을 낳아서 외면하는 게 아니고, 자신은 낳아서 최선을 다하지마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돌볼 수가 없다는 거요. 그럴 때 이것이 그 사람만의 책임인가, 아니다. 우리 모든 인류의 책임이다. 적어도 우리 불자들에게 있어서는 불자의 책임이다.

 

죄지은 인연의 과보로 지옥에 떨어졌는데도 그 지옥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것이 지장보살의 원이라면 이 아이는 아무런 자기가 저지른 죄가 아니다. 그냥 거기에 태어난 죄밖에 없다. 북한에 태어난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에요. 그 어린아이들이 미사일을 만든 것도 아니고, 핵무기를 만든 것도 아니고, 그 어린아이들이 김정일 체제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 어린아이들이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거기에 태어났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태어났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들이 굶어죽어도, 그들이 병들어 죽어도, 그들이 꽃제비가 되어 돌아다녀도 나하고 상관이 없는 일이오. 내 자식이 아니니까, 내 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나하고 상관이 없으니까. 그렇지가 않다. 바로 이것은 우리 모든 인류의 책임이다.

 

그런데서 우리가 여기다가 텐트학교를 우선 만들고, 정부에 가서 건의해주고. ? 학교에 가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요구라는 것은 음식 달라, 약 달라 텐트 달라, 옷 달라, 이런 요구는 하지마는 학교 지어 달라. 이런 요구는 엄두도 못내는 거요. 할 줄도 모르고. 학교 다닌 경험도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그 아이들, 그 부형을 대신해서 정부에 가서 우리가 텐트로 학교를 만들 테니까 선생을 파견해 달라. 선생을 파견 못한다니까, 우리가 동네에서 조금 배운 사람들 선생을 구 할 테니까 1년은 우리가 운영 할 테니까, 앞으로 그 이후에는 당신들이 운영을 해라. 우선 인가를 해 달라. 이 사람들을 선생으로 신분보장을 해 달라. 필요하면 훈련을 시켜 다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학교를 4군데나 만들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식량을, 병든이에게 약을, 그리고 세 번째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하는 그것의 핵심이 '아이들은 제때 배워야 한다.' 청정히 수행하는 수행자를 잘 외호한다.

 

이것도 중요한데, 현재 우리나라 스님들 치고 현재 입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수행 못한다. 제가 볼 때는 그런 사람 혹 있는 줄은 모르겠는데, 많지 않은 것 같아. 자기만 마음먹는다면 어디서든지 공부할 수 있지 않느냐. 물론 훌륭한 사람을 잘 외호하는 것은 좋지마는. 그래서 우리가 이 3가지를 우리가 잡은 거요.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 안에서 그 아이디어를 찾아내면 이 시대에서 가장 앞서가는 그런 활동을 할 수가 있다. 그런 정책을 할 수가 있다. 꼭 미국에 가서 배우고, 일본에 가서 배우고, 이렇게 안 해도 된다. 다른 종교에 가서 배우고 그렇게 안 해도 된다.

 

경전에 안에, 부처님 가르침 안에 이런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경전을 읽지 않고, 설령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있는 이 주옥같은 보배를 찾아내지 못하고, 설령 그것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것을 현실 사회에 적용해서 새롭게 포장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다.

 

이런데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축하한다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하시고자하는 일들을 우리가 따라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오심을 가장 축하하는 행동이 되지 않겠느냐.

 

5월이라 날씨도 좋고, 또 우리나라에는 어린이날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그런대로 보살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저편에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부모도 돌보지 못해서 버려진 아이들이 매우 많다. 이런 아이들을 우리가 돌보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 저는 이것이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서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매년 연말이 되면 크리스마스를 기해서 여러 가지 자선활동을 많이 하죠. 우리야말로 부처님오신날을 기해서 불우한 이웃을 돕고, 저 멀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는 이런 일, 부처님의 유훈을 따라 행하는 일,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 이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야 되지 않을까.

 

불을 왜 밝힙니까? 어둡기 때문에 밝히죠. 니르바나, 열반은 고라고 하는 괴로움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부처님오신날의 기쁨이 우리들에게만 머무르지 말고,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광명의 등불이 비추도록 하자. 이것이 우리가 연등을 켜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원래 우리들 자신도 우리를 위해서 연등을 켜지마는, 가난한 이를 위해서 연등을 켜고, 또 각 사찰에서는 연등 수입을 우리 생활에만 쓰지 말고, 그 중의 일부를 어둠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등불의 일부를 주는, 밝히는 그런 활동이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