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2. 부처님 오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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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2018. 5. 23.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금부터 2600여년 전 인도대륙의 북쪽, 히말라야 산 기슭 카필사성의 룸비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정반왕, 어머니는 마야부인, 왕자로 태어나셨어요.

 

부처님 어머니 되시는 마야부인이 애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으로 가시다가 카필라성과 어머니의 고향인 천비성, 데바다하 라고 불리는 그곳의 중간 정도 되는 위치에 룸비니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숲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시다가 아쇼카 꽃, 무수우라고도 하죠. 흩트려져 피어있는 것을 보고 마음의 기쁨을 느끼고 마차에서 내려서 꽃구경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너무나 아름다운 꽃송이를 보고 꺾으려고 오른손을 들어 그 가지를 잡을 때, 산기를 느끼고, 바로 애기가 태어났다.

 

태어날 때,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

, 오른손을 들어 나뭇가지를 잡으니까 그 옆구리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7발자국을 걸었다. 그 발자국마다 송이송이 연꽃이 피어났다.

7발자국을 걷고 난 뒤에 한 손을 하늘 위로, 한 손을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부처님의 탄생에 대한 모습니다.

이때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 어떻게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날 수가 있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수술을 하셨다 하더라도 옆구리로 수술을 하시지는 않았겠죠. 우리가 이런 종교적인 언어는 어떤 상징성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 하는 것은

인도의 전통적인 그런 사상에서 바라본다면 인도는 4가지 계급이 있는데,

브라만은 신의 입에서 태어났다.

크샤트리아, 왕족은 신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바이샤, 평민은 신의 배에서 태어났다.

수드라, 노예계급은 신의 발바닥에서 태어났다라고 하는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그런 것에 견주어 본다면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이런 것은 부처님이 왕족출신이다. , 그 종족, 그 출신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구요,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서계셨다. 우리 애기 낳으면 어떻게 합니까? 누워서 울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데 이 애기는 태어나자마자 탁 섰다는 거요. 가능한 일일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어릴 때 망아지, 송아지 태어나는 걸 보면 말이에요. 태어나자마자 서요. 비틀비틀하지만 서거든요. 왜 새끼가 설까? 이렇게 제가 유심히 살펴봤는데, 어미가 서서 새끼를 낳아요. 그러니까 새끼가 서더라고.

 

그런데 우리는 엄마가 다 누워서 애기를 낳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애기도 누울 수밖에 없다 싶어요. 그런데 마야부인만 서서 애기를 낳았어. 그래서 아마 부처님도 서 섰던 것 같아. 송아지도 서고, 망아지도 서는데 사람이 못 서겠어요? 왜냐하면 딴 것이 다 길 때도 사람은 서잖아. 그죠? 직립 원인이라 그러잖아.

 

아무튼,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스셨다.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뭘 상징하는가?

부처님이 스셨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은 스스로 존귀한 존재라는 걸 말해요.

어떤 것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선 존재다.

, 부처가 될 존재다. 이런 것을 말하는 거요.

 

부처는 자기 운명의 주인, 세계의 주인, 이렇게 말합니다. 뭔가에 의지해서 행복을 찾거나 존립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서는 존재다. 이런 얘기죠.

 

*‘7발자국을 걸었다.’ 하는 것은 뭘 상징하는가? 그것은 6발자국이 육도를 상징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이라고 하는 이 욕계에 6가지 서로 다른 생활환경, 이 육도의 수레바퀴를 우리가 돌고 돕니다.

 

우리가 바라는 천상에 태어나고 싶다. 해서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육도 안에 있고, 태어나기 싫지만 거기에 태어나서 고통을 겪는 지옥도 육도 안에 있습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지옥에 가면 영원히 기옥에서 고통을 겪고, 천상에 태어나면 영원히 천상락을 누린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지은 복이 있어서 천상에 태어나게 되고, 그 복이 다 하면 다시 떨어지고, 죄를 지어서 지옥에 나게 되면 고통을 겪고, 그 죄가 다 사하게 되면 다시 돌아오고. 이렇게 오르고 내리고, 돌고 도는 것이 육도입니다.

 

이 육도에서 벗어났다. 이것을 해탈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육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7발자국은 6발자국에서 한발 더 나가 버렸다. 모든 사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러니 부처님은 해탈하실 분이다. 하는 것을 암시한다.

 

* 그리고 한 손을 위로, 한 손을 아래로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 그럼 한 손을 위로 가리켰다. 그건 천상을 말하고, 한 손을 아래를 가리켰다. 그건 천하를 말하는데, 천상은 무엇을 뜻하느냐? 천상은 형이상학적, 천하는 형이하학적,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런 요소라고 볼 수 있어요.

 

인도 당시에 말한다면 부처님은 천상도 버리고 천하도 버렸다.’ 또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상에 태어나는 게 꿈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천상 중에 천상, 하늘 중에 하늘인 도솔천주였는데, 그것을 버리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다.

 

, 도솔천 천주로 있을 때가 호명보살이죠? 호명보살의 지위를 버리고, , 도솔천의 천주의 지위를 버리고 이 사바세계, 인간계에 하강을 하셨다. 이 세상에 오셔서 왕자로 태어나셨고, 왕이 되실 위치에 있었고, 나아가서는 천하를 통일할 전륜성왕의 지위에 오르리라고 예언이 되신 분이에요.

 

그런데 그런 전륜성왕의 지위도 버렸다. 천하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요? 전륜성왕입니다. 그 전륜성왕의 지위도 버렸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천상의 지위도 천하의 지위도, 다시 말하면 도솔천주의 지위도, 전륜성왕의 지위도 버리셨다.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에요.

 

여기서 우리는 보통 천상이라고 말하면 결국은 여러분들이 죽어서 내세에 가는 하나의 꿈의 세계, 또는 신들의 세계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신의 노예입니다. 신의 종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이 천상 가운데서도 천하 가운데서도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부처님이 해탈하시자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선언하셨거든요. 이것도 역시 해탈을 말합니다.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관념이죠. 형이상학이죠. 그리고 여기서 천하라고 표현되는 그것은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이런 것들이에요. 바로 그런 것들을 한손에 움켜쥔 사람이 누굽니까? 왕이죠.

 

우리는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거나 살아서는 왕이 되고 싶어 해요. 그런데 그 왕의 길도 신의 길도 그것이 해탈의 길은 아니에요. 그래서 그것을 다 버리셨다는 거요.

 

여기서 바로 이 신들 가운데서도

인간들 가운데서도

깨달은 붓다가 가장 높다. 이것은 해탈한 이, 홀로 존귀한 이다.

이런 의미에서 붓다의 위대함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러한 붓다가 다만 이렇게 깨달아서 걸림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에 머무르는 게 아니에요. 바로 나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중생들이 다 나와 같이 될 수가 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 그래서 삼계개고 아당안지. 삼계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하는 거요. 이 삼계가 고통 속에 있다. 삼계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이 다 괴로움에 빠져있다. 지옥 중생만 괴로운 게 아니라 천상 중생도 사실은 괴로움 속에 있다.

 

내일을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이것이 붓다가 이 세상에 오심의 뜻이다. 부처님이 올 때 이렇게 선언했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 근본 뜻이 이런 뜻이다. 그것을 오실 때 가장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을 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죠.

 

 

오늘 우리들은 부처님의 오심에 있어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과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셨다. 이건 다 알아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이것은. 그런데 그 뒷 문장을 몰라. ‘삼계개고 아당안지

 

이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고,

모든 중생들을 생각해서,

그들을 편안하게 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

 

이 문장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잊고 있다는 것이

오늘 한국 불교의 모습을 말한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가 구족하신 분이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지혜만 말하지 자비를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분이다. 라는 것만 말하지,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해서 그들 또한 복된 삶을 누리도록 하신 분이다. 이 뒷문장이 없다 보니까 중생의 아픔에 대한 연민이 없고, 그 아픔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강력한 전도의 정신이 없다.

 

그러다보니까 깨달음이 추상화되기가 쉽다. 마치 잘난 사람 되고 싶은, 그래서 유아독존이다. 그러면 뭐에요? 지가 제일 잘났다. 이런 의미로 오해되어 사용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오늘 우리 불교가 온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중에 어느 반쪽, 한쪽 모습만이 너무 부각이 되어서 결국은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수행자중에서 정말 이 고통 받는 중생에게 헌신하고, 봉사하고, 그들의 아픔을 껴안기 위해서 출가를 하고 구도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바로 그런 길 가운데에서 해탈의 길이 있고, 바로 성불의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혼자 돈 많이 벌겠다. 자기만 높은 지위에 오르겠다. 이런 심리현상과 비슷한 심리로 나 혼자서 확 깨쳐버리겠다. 깨쳐서 뭔가 세상에 영광을 얻겠다.” 이런, 마치 요행을 바라는 거 같은, 일확천금을 바라는 것 같은, 그러한 심리현상과 비슷한 마음으로 우리가 도를 닦는다면, 이것은 욕심이 기반이 되어 있다.

 

욕심을 버려야 해탈의 길로 가는데, 욕심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욕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해탈은 멀고, 설령 뭔가를 깨쳤다 하더라도 이것이 중생에 대한 연민, 자비심, 나눔으로 실천되어지지 않게 된다.

 

바로 우리가 부처님의 인격과 오늘 우리 수행자들의 인격 사이에서 이 부분에 차이가 아주 많이 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부처님은 그냥 높으신 분, 훌륭한 분, 거룩하신 분, 이런 생각만 있지,

 

부처님께서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의 고통과 함께 있고,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서

우리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인도해주시는 인도자다, 안내자다.

그래서 참 고마우신 분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데서 오늘 부처님오신날, 이 게송,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기억하지 마시고 그 뒷문장인 삼계개고 아당안지라는 문장을 함께 기억을 할 때, 바로 지혜와 자비가 조화를 이루게 된다.

 

* 그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것은 종교적인 영역입니다. 이건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부처님께서는 도솔천 천주로 계셨다. 호명보살로 계셨다. 그러다가 이 세상에 고통 받는 중생을 어여삐 여기시어 천주의 자리를 버리고 이 세상에 몸을 나투셨다.

 

그럴 때, 어디로 나타날까? 이것을 많이 고심을 하셨다 그래요. 그래서 하계를 내려다보다가 나라는 카필라성을, 종족은 석가족을 선택을 하고 그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정반왕으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으로, 마야부인의 태중을 빌어서 이 세상에 오시려고 했다.

 

그래서 상아가 6개가 달린 흰 코끼리의 모습으로, 상아가 6개 달렸다는 것은 아주 신성함을 상징합니다. 모습으로 해서 마야부인의 태중에 들었다. 또 반대로 이 세상사에서 말하면 마야부인과 정반왕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 낳기 위해서 많이 기도를 했는데, 나이 40이 넘어서 어느 날 마야부인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바깥에서 어떤 음악 소리가 들려 일어나서 2층 난간으로 가봤더니 음악 소리가 저 하늘위에서 들리는 거요.

 

그래서 하늘을 쳐다봤더니 저 멀리서 별빛처럼 하나가 반짝반짝 빛이 나서 한참을 보고 있으니까 상아가 6인 흰 코끼리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거요. ‘참 귀하다고 쳐다보고 있는데 옆구리로 코끼리가 순식간에 옆구리가 탁 들어오는 꿈을 꾸고 너무 놀라, 깜짝 놀라 눈을 뜨니까 꿈이었어요. 이것을 태몽이다. 이렇게 말하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이런 하나의 꿈으로 나타났고, 또 전생으로 기록된 걸 보면 이렇게 마야부인의 몸을 빌어서 태어난 것으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호명보살이 마야부인의 몸을 빌어서 이 세상에 나투자,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

 

토끼와 사자가 같이 뛰놀고, 뱀과 개구리가 같이 뛰놀았다. , 토끼는 사자를 잡아먹고,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지 않습니까? 살기 위해서 죽이는 관계죠. 그런데 토끼와 사자가 같이 뛰놀고, 뱀과 개구리가 같이 뛰놀았다. 앉은뱅이는 일어서고 꼽추는 등이 펴지고, 눈이 어두운 봉사는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말을 하게 됐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있어요.

 

이것을 바깥으로 얘기한다면 호명보살이 이 세상에 오면서 이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정신적으로 바라본다면 애기를 밴, 마야부인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

 

애기를 밴, 엄마의 마음이 뭘 죽이고자하는 그런 살생의 마음이 없어졌고, 바로 봉사가 눈뜨듯이 지혜의 눈이 열렸고, 벙어리가 말을 하듯이 진실의 말을 하게 되고, 꼽추가 등을 펴듯이 이렇게 비굴한 마음이 사라지고 꼿꼿이 등허리를 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듯이 실천하는 그런 자세가 됐다.

 

그러니까 이것이 불교에서의 태교입니다. 엄마나 이런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에 뱃속에 있는 아이가 성인으로 잉태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반대로 호명보살이 마야부인의 뱃속에 들었기 때문에 마야부인의 마음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겠죠.

 

종교적으로 이 후자를 선택하겠지만, 사회학적으로 얘기를 하면, 애기를 밴 엄마가 이렇게 어떤 화내는 마음, 짜증내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초조, 불안, 슬픔, 이러 것들이 없고, 오직 자비스런 마음, 기쁜 마음, 밝은 마음, 이렇게 가졌기 때문에 바로 뱃속에 있는 아이가 이런 성인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형성되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이 앞으로 애기를 가질 때는 이 마야부인이 가졌던 마음을 본받아서 가져야 되고, 그렇게 가질 수 있도록 주의사람들이 남편이나 또는 시부모나 주위사람들이 이렇게 보살펴 드려야 됩니다. 이런 어떤 그런 태교의 의해서 바로 부처님 같은 아들을 낳게 되었다.

 

아들을 낳으려면 부처님 같은, 원효대사 같은 아들을 낳으면 좋겠죠. 그런데 여러분들의 아들이 부처님의 길을 가거나 원효대사의 길을 가면 아마 한사코 반대를 할 거요. 그래서 우리 아들들이 부처님처럼 못가는 거요. 재능이 없어서 못가는 게 아니라, 내가 한사코 말려서 결국은 그 길을 못갑니다.

 

다 사춘기 때 그런 마음을 냅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이 세속의 길을, 자기가 간 길을 따라가기를 원하지, 부처님처럼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길을 간다 그러면 뭐라고 그럽니까? “네가 뭣 때문에 그 길을 가느냐?”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서 부처님의 오심의 의미도 생각해봐야 되고, 그냥 위하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바로 어머니가 애기를 밴 상태에서 이렇게 마음을 쓰셨기 때문에 위대한 성자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함께 생각해야 됩니다.

 

드러난 현상만 갖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뒤에 있었던 그 배경, 그 뿌리, 이것도 우리가 함께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 오늘 부처님오신날, 다함께 기뻐하면서 또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고통 받는 사람께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