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의 십장생한국사 - 8회 1919년 그날, 우리는 왜 만세운동을 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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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설민석_십장생한국사

2018. 5. 24.




3.1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벌어진 평화적 만세시위,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3.1운동, 과연 왜 가장 중요한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운동은요, 191931일 벌어지게 됩니다. 1919년이 기미년이에요. 간지로. 기미년. 3.1운동이 왜 벌어졌는지 그 배경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본한테 국권을 피권 당한 게 1910년입니다. 이때 일본인들은 무단통치라는 것을 합니다. 이 무단 통치가 무력으로 처단한다. 그래서 헌병경찰이라. 일본 군인들이 경찰업무를 담당하면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을 짓밟고 목을 졸랐던 시기가 바로 1910년대였어요.

 

우리 자존심 강한 민족들은 막 부글부글 끓고 있었죠. 저 왜인들이 와서 우리를 짓밟다니 라고 10년간을 참아 왔습니다. 그때 바로 고종황제께서 돌아가신 거예요. 고종황제가 가셨는데, 사람들한테는 독살 당했다고 임금님이, 이런 소문이 돈 거예요. 그럼 그 독살을 지금에 와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때 우리 백성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 이런 상황에서 국외에서도 우리에게 한줄기 독립의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외교독립론이 대세였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어요. 그럼 왜 이게 대세였느냐? 당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였거든요. 이런 전쟁이 다시는 벌어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프랑스 파리에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강 대표들이 만나서 파리강화회의를 열게 됩니다.

 

그때 미국 대통령 윌슨이 보낸 서신이 그 유명한 민족자결주의가 됩니다. 그럼 자결이라는 말은 뭐냐? ‘약소민족 스스로가 의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자.’ 이게 자결주의가 되는 거예요. 이 얘기를 바꾸면 뭡니까? 결국 식민지 쟁탈전으로 벌어진 게 1차 세계대전이니까, 이런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식민지를 해방시켜야 되는 게 아닌가. 뭐 이런 주장이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이 연합군, 미국 쪽에 붙어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일본에게 지배당하던 우리나라에는 해당되지 않는 내용인데,

 

사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듣고 싶은 대로 들리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는 거죠.

 

우리 백성들은 , 미국대통령 윌슨이가 우리를 독립시켜 준대요.” 요런 식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듣고 싶은 얘기만 들은 거죠.

 

또 하나 외교독립론에 불을 집힌 것은 뭐냐하면 레닌의 발언이었어요. 일본을 비롯한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당하는 약소민족들아, 너희들의 해방을 도와주겠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얼마나 우리에겐 든든했겠습니까. 일단 우리의 의사를 표명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아니 우리가 독립 의지가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야 이들이 도와줄 거 아니냐. 이거죠.

 

그래서 평화적 만세시위를 기획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3.1이 그냥 독립운동 만세 한 이유가 우리가 평화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기보다는 당시 외교독립론이 대세였기 때문입니다.

 

, 3.1의 직접적인 배경은 바로 1919년이죠. 191928일 일본 동경에서 행해졌던 2.8독립 선언이 그것이었습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다녔던 우리 조선유학생들이 주도가 되었는데요, 조선 유학생 동호회입니다. 이들이 YMCA 회관에 모여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사건이죠.

 

그때 초안을 춘원 이 광수가 썼구요, 그의 동료였던 송계백이가 2.8독립 선언 초안을 숨겨서 국내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지도자들한테 그것을 보여줬어요. 민족 지도자들은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습니까? 학생들한테. 귀까지 빨개졌을 거예요.

 

아니 적의 심장부에서 우리 어린학생들이 만세를 외치다가 적에게 검거가 되었는데, 내 나라 내 땅에서 어른들이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았다? 이건 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겠죠. 그래서 민족대표들과 학생들이 모여서 3.1을 주도하게 된 거에요.

 

, 그럼 왜 3.1절이냐? 3.1일이냐? 원래는 3.3일에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3.3일이 고종의 인산일입니다. 그런데 황제의 장례식 날 우리가 이런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좋지 않다는, 당시 민족대표 33인들이 기독교 불교 천도교의, 천도교가 동학이라고 우리 민족 종교거든요. 3민족자들의 연합체였어요. 천도교계열에서 반대한 거죠.

 

일본의 예의가 아니다. 돌아가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3.2로 하자. 이렇게 된 거에요. 그런데 3.2이 일요일이었습니다. 또 민족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이 반대해요. 주일날 뭐하는 거예요? 우린 예배드려야 된다. 그래? 그럼 3.1어떠냐? 좋다. 이날 토요일이나가 사람도 많고 요 때로 하자.

 

그럼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어디가 제일 많아요? 그렇죠. 종로죠. 그래서 종로에 있는 파고다 탑골 공원에 모여서 우리가 만세 운동을 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3.1운동의 바로 1단계가 되겠다. 점화의 단계다. 이런 얘깁니다.

 

, 1단계는 누가 주도를 합니까? 민족대표 33인과 학생들이 주도를 하는데, 그 이유는 뭐냐하면 1910년대는 일본이 무력으로 처단하는 통치였기 때문에 하여튼, 집회결사의 자유가 없어요. 3사람만 모여서 얘기를 하면 당장 군화발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보면, 합법적인 집회가 뭐에요? , 교회, 합법적인 모임장소가 학교죠. 그래서 민족대표와 학생들이 주도를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3.1운동 당일 현장을 이끌었던 것은 민족대표가 아니라 우리의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것입니다. , 무슨 얘깁니까? 민족대표들이 당시 파고다 공원으로 오다가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이게 그 유명한 미스터리한 사건이에요. 왜 그랬는지 저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됩니다.

 

교과서에서는 전에 뭐라고 썼었냐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이니까 일을 커질 것을 우려해서 발길을 돌렸다라고 하는데, 그럼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하면 뭐 하러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시위를 해요. 화장실에서 혼자 대한독립 만세하면 되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래서 당시에 어디로 가냐 하면 우리나라의 1, 서양식 술집이었던 태화관으로 향합니다. 술집에 가서 거기서 대낮부터 낮술 판을 벌인 거예요. 그리고 건아하게 취해서 조선총독부로 전화를 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민족대표야. 우리 당장 데려가라.”고 거기서 자수를 해요.

 

그래서 인력거를 대령해도 , 인력거 안탄다.”고 난리를 쳐서, 그 당시에 몇 대 있지도 않은 택시를 대령하고 택시타고 편안하게 스스로 잡혀 들어가신 분들이 민족 대표들이다. 그래서 20년대 대부분 친일로 돌아서게 됩니다.

 

, 우리 학생들은 어떻습니까. 순진한 학생들 아무리 기다려도 시간에 맞춰서 어른들이 오지를 않는 거예요. 겁이 났겠죠.

, 우리 그냥 가자. 무섭다. 어른들도 없는데, 우리끼리 뭘 해?”

뭘 하긴 뭘 해? 독립만세 해야지

그러면서 한 학생들이 연단으로 뛰쳐 올라갑니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를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 시작합니다.

 

그때 군중들이 놀라서 뭐야? 뭐야?” 그러면서 모이게 되죠. 이때 동료학생들이 미리 준비해온 기미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태극기. 손에 들고 싶어도 들 수 없었던 우리 민족의 상징 태극기, 이 태극기를 쥐는 순간, 기미독립선언서를 읽는 순간, 당시에 우리 백성들은 가슴 그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불길이 올라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나지막이 소리칩니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온통 사람들이 그때부터 목이 터져라 지난 10년 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대한독립 만세로 표출하게 됩니다.

 

당황한 일본의 헌병경찰들이 말을 타고 뛰어와서 총을 쏘고 그리고 칼로 내려쳤지만, 우리는 팔이 잘려 나가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것입니다.

 

2단계는요, 중소도시로, 1단계가 서울에서 시작되었다면 2단계는 중소도시로 번져 나갔습니다.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요, 고향으로 내려와서 역시 학생들이 주도를 하고, 여기에 함께 참여한 분들이 바로 상인들하고 노동자분들이 참여를 하게 됩니다.

 

, 그리고 3단계로 번지게 됩니다. 3단계 같은 경우는 농촌으로 확산되게 되죠. 농촌확산단계. 지난 10년 동안 가장 일제에 고통을 당한 것은 우리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단계, 2단계는 평화적 만세 시위였다면

3단계의 경우는 폭력시위로 변모하게 되죠.

 

그럴수록 일본은 더욱더 잔인하게 우리는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3.1운동은 지도에서 보시듯이 북쪽으로는 두만강 압록강, 남쪽으로는 제주도까지 전국적으로 불붙듯이 번졌고요, 미국 연해주, 중국에 있는 만주, 일본까지 전 세계까지 여기 있는 3.1운동이 번져 나가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벌어졌던 민족운동 중에 가장 큰 규모의 운동이었다. 라고 보시면 되겠고요, 그 결과 일본의 통치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일본은 본래 무단 통치를 했었는데, “, 조선 민족은 무력으로 처단하면 이렇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민족이구나.”라는 생각에 이른바 소위 문화통치로 좀 부드러운 통치로 바뀌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요, 그리고 독립운동의 자신감을 가진 우리민족이 다양한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부터 의거활동, 여러분들 들어보셨죠. 이 봉창, 윤봉길의 의거. 그리고 무장독립전쟁 김좌진 홍범도 들어보셨죠? 이런 모든 의거활동과 독립전쟁과 여러 가지 계몽운동들, 다양한 독립운동들이 여기 있는 ‘3.1운동에 자신감을 얻어서 생겨난 민족의 운동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지만은요, 3.1운동이 없었다면 실패했다면 그 이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 운동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 제국주의에 핍박받던 여러 약소민족들에게도 용기를 줍니다.

 

3.1운동직후에 있었던 5.4이죠. 중국 반제국주의 운동, 5.4운동에도 영향을 끼치고요, 당시 영국에게 지배당하던 인도의 마트마하 간디의 경우도 우리 3.1운동을 롤모델 삼아서 무장비폭력 운동을 벌이게 되니, 가히 일제강점기 최고의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광복한지 70년이 지난 우리, 여기 있는 태극기와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너무 등한시 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시 한 번 이 나라를 광복케 하고 되찾아 주신 우리 선배들의 만세 운동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 목숨 바치신 순국선열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