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3. 타인의 불행 위에 행복을 쌓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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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2018. 5. 30.



 

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이 사위성 사람들은 문화수준이 조금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왕사성은 한마디로 말하면 오래된 도시고, 오래된 왕국이에요. 문화의 중심지이고, 수행자를 잘 공경하는 그런 전통이 있고, 이 사위성은 코살라국의 수도인데 신흥강국이오. 그러니까 물자는 굉장히 풍부한데 문화 수준은 떨어졌나 봐요. 그래서 수행자를 공경하는 이런 분위기가 별로 없었다고 그래요. 그러니 왕도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부처님이 다른 나라에 가서 교화를 할 때는 그 많은 얘기 중에 신통을 썼다. 이런 것은 거의 안 나오지 않습니까. 코끼리가 부처님께 굴복을 했다.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했다. 이런 많은 일상을 넘는 얘기는 물론 많지마는, 또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해탈의 길은 신통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을 금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위성 사람들은 부처가 어떤 분인지, 법이 뭔지, 이런 걸 전혀 몰랐고, 받아들이려고 잘 하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제자들이 또는 신자들이 부처님께

꼭 한번만 이 사위성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뭔가 신비한 것을 보여 달라.”고 부처님께 청했단 말이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성 밖 어느 곳에 모여라.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 그런데 부처님께서 망고 열매 하나를 땅에다 심었어. 조금 있으니까 거기 싹이 텄어. 쭉쭉쭉쭉 자라서 망고가 고목이 됐어.

 

그리고 그 나무에 망고가 주렁주렁 열렸어. 그 망고가 다 부처님 모양으로 변했어. 이걸 뭐라고 그러냐하면 천불화현이라고 그럽니다. 천분의 부처님이 화현을 했다. 이게 사위성, 쉬라바스티를 상징합니다.

 

그때 거기 모인 대중들이 다 감동을 해서 그 다음부터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은이가 많이 나왔다고 그래요. 이런 얘기는 유독 여기만 있어요. 부처님은 45년 교화기간 동안에 24회 안거를 이 사위성에서 보냈습니다. 그 중에 19번을 기원정사에서 보냈어요.

 

그러니까 이 기원정사는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신 곳이죠. 그래서 불교 경전 중에 그 법이 설해진 장소가 제일 많은 데가 어디다? 기원정사에요.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시는 어느 때 이 나라 왕인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그래서 부처님께 문안을 드리고는

제가 여쭈어 볼게 있는데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으시오.” 그러니까 프라세나짓 왕이 이렇게 말했어요.

부처님,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됩니까?”

법을 물은 게 아니라 뭘 물었다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되느냐 이거야.

 

그렇게 물으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대왕이시여, 훌륭한 왕이 되려면 먼저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라는 거요. 이때가 절대 왕중의 시대인데, 그 나라에 있는 인명과 재산이 다 누구 겁니까? 왕의 소유물이오.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대요.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

타인의 불행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아서는 아니 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이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행복은 타인의 불행위에 쌓고 있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요즘 선거 하는데,

, 우리 패가 걸렸다하면 그 순간 다른 쪽은 어떻게 됩니까? 떨어지죠.

여러분들이 어떤 물건을 팔 때, 시가보다 좀 비싸게 팔았다 그러면 상대편은 어떻게 됩니까? 시가보다 비싸게 샀죠? “, 잘못 샀다.”

 

결혼도 어떻습니까? 잘난 남자가 좀 못난 여자하고 결혼을 했을 때, 여자 편에서는

, 그 여자 남자 복은 있네. 결혼 잘했더라.”

 

그런데 남자 쪽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아이고, 걔는 똑똑하고 다 좋은데 여자복은 와 이리 없노.” 이렇게 된단 말이오.

 

버스를 타고가다 버스가 넘어져서 다쳤어. 자기 몸을 돌아보니까, 팔목이 부러졌어. 그래서 딴 사람은 어떻게 됐나 둘러보니까 다 멀쩡해.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는데 자기만 팔목이 부러졌어. 그러면 뭐라고 그럽니까?

, 재수 없다.” 이러죠. 불행 아니야.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까 다 죽고 자기만 살았어.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살았다.” 이러지.

 

똑같이 팔목이 부러졌는데,

다른 사람이 죽으면 자기에게는 행복이 되고,

다른 사람이 안 다치면 자기에게는 불행이 된다는 거요.

이게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오.

 

부처님이 처음으로 농경제에 참여해서 이 인생의 화두를 가진 게 뭐요?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는 죽어야 할까?

이게 큰 화두였어.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

같이 행복해 지는 길은 없을까?

같이 이익을 보는 길은 없을까?

이 화두가, 이 의문이 보리수아래에서 연기법을 깨닫고 풀린 거요.

 

타인의 불행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아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다 이런 겁니다. 원효대사가 출가한 동기도 이 모순을 본 거요. 전쟁터에 가서 전투마다 승리를 해서 한마디로 말해서 인기가 절정이었는데, 출세가도를 막 달렸는데, 어느 날 자기 절친한 화랑이 전사를 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의 무덤가에서 화를 꺾고 복수를 결심을 했어요.

 

지금 내 친구를 죽인 그 적장은 상을 받고 환호를 받죠. 내가 지금까지 전쟁에서 승리해서 환호 받을 그 시간에 상대편은 오늘 나처럼 눈물을 흘리며 원수 갚을 걸 다짐했잖아요.

 

그 양쪽을 동시에 보는 것. 동시에 보는 것.

총체적으로 보는 것, 이게 연기요.

총체적으로 봐야 연기를 볼 수 있어요.

 

그때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짓이냐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 자리에서 왼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오른 손으로 칼을 빼서 잘라버린 거요. 자기 집을 절로 만들어서 승려가 되고 불법에 귀의했지 않습니까.

 

타인의 불행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아서는 아니 됩니다.

저는 이 세상에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절묘하게 이 세상의 모순을 표현해 낼 수 있느냐는 거요.

그러니 대왕이시여, 백성의 삶의 토대를 마련해 주십시오.”

좋은 거 있는 거 다 뺏어서 그 많이 가지고 있는 게 위대한 왕이 아니다. 이 말이야.

 

만약에 대왕이 그렇게만 하신다면 굳이 고행을 안 해도 됩니다. 그 당시 수행이라 하면 음식을 안 먹는다. 잠을 안 잔다. 밖에 가서 어떻게 해야 된다. 그래야 깨닫는다.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 거 안 해도 된다는 거죠.

 

어리석으면 타인의 행복은커녕,

자신의 목숨도 지키지 못한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어리석으면 제 목숨도 자기가 해친다.

 

이런 어리석은 중생은

쥐가 쥐약을 먹듯이, 물고기가 낚싯밥을 물듯이,

잘한다고 했는데 살라고 먹었는데 도리어 죽게 된다.

잘하려고 한 게 잘못된다.

행복을 위해서 했는데, 결과는 불행을 돌아간다.

 

돈 벌려고 주식투자 했다가 도리어 벌기는커녕 날린다. 그래서 나중에 본전 생각하는 수준이오. 결혼도 마찬가지 아니오. 행복하려고 했는데, 그 결혼이 도리어 불행의 원인이 되고, 행복하기 위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것이 도리어 불행의 원인 되고, 돈을 벌려고 가게를 내고 회사를 차렸는데 그것이 있는 재산까지 까먹게 되고. 이것이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은 거요.

 

어리석게 되면 남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자기 생명도 지키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 생명을 해치게 된다.

 

그러니 대왕이시여, 부디 선정을 베풀고, 바르게 정진하십시오.”

왕이 이 말을 듣고 너무너무 감동을 한 거요.

 

그런데 요즘 같은 민주사회에, 대통령이 국민의 머슴이라고 하는 이런 시대에도, 스님들이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 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지금 말할 수 있어도 당시에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그런 절대 왕에게도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는 민주사회에서도 정치지도자에게 이런 말을 못하죠.

 

대통령과 밥을 먹거나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들까? 뭐 하나 해달라고 하겠죠. 그죠? 개인의 이익은 아니더라도 불교를 위해서 뭐 해달라고? 불교병원하나 지어달라든지, 불교방송국을 하나 해달라든지, 어디 큰 거 하나 해달라든지,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불교를 위한 일이라고 우린 지금 생각하고 있잖아. 이것은 세력으로서의 불교, 물질로서의 불교인지는 몰라도 법은 아니죠. 법을 위하는 불교는 아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이런 것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정말 불교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우리가 어떻게 법답게 살아야 하느냐.

 

정말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불교를 지키고, 불교를 아끼고, 불교를 사랑하고, 불법을 널리 홍보하는 거냐. 이 부처님의 행적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자신들, 내 자신부터 돌아보면, 자꾸 형상으로 보여주려고 하잖아요.

 

동양의 최대의 절이다. 동양 최대의 종이다. 동양 최대의 불상이다. 이렇게 뭔가 물질로 뭘 하나 안 해놓으면 한 게 없는 것 같고, 내가 이 세상에 온 보람이 없는 것 같고, 이것에 세속적이라는 거요.

 

마음의 무지를 깨쳐서

열반에 이르러서

모든 번뇌를 여의고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하는 게 아니고,

이런 것들을 만들어서 만족을 삼는다면

이것은 법에 귀의한 수행자의 길은 아니다.

꼭 스님들뿐만 아니라 우리 신자의 길도 아니지 않겠느냐.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란 얘기에요? 그런 뜻이 아니다. 법 따위 해라. 중요시 여겨야 될 것을 중요시 여겨라. 그 법 따위 하란 말은 법에 맞게 다른 것들이 주어질 때는 받아들여야 돼. 부 처님이 달라고 해서 중림정사나 기원정사를 지은 것은 아니잖아요.

 

부처님의 법을 듣고 거기에 감동해서 부처님과 제자들을 위해서 장소를 제공한 거란 말이오. 이 걸식을 할 때, 걸식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밥을 얻으러 갔을 때, 상대가 줄 때,

, 저는 그건 필요 없고 저거 주세요. 양이 너무 작은데 많이 주세요. 음식이 싱거우니까 소금 좀 주시겠어요?” 우리 보통 이렇게 많이 하잖아. 그죠.

 

그런데 걸식할 때 이렇게 하면 수행자가 아니오. 걸식을 어떻게 해야 된다?

주는 대로 받아야 되요.

어떻게 주는가 하는 것은 주는 자의 마음이에요.

받는 자는 거기에 아무런 분별심이 없이

주든지 주지 않든지 관계하지 않아야 된다.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무엇을 주든지 관계하지 않아야 된다.

 

다만 그것이 수행에 합당하지 않는 것을 줄 때는 거절할 수 있어도 요구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자신의 문제가 아닌 거에 대해서는 요청할 수가 있어요. 내가 , 이 스님들은 음식이 짜니까, 싱거우니까 소금을 어떻게 하라.” 하면 안 되는데, 나를 위해서는. 남을 위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요청한 것을

내가 받을 수는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일체 사물에 대해서

분별심이나 요구를 놔버리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런데서 우리가 걸식을 할 때,

나는 채식만 주세요. 나는 뭐는 빼고 주세요.”

그것이 도리어 분별심에 속하는 거요. 주는 대로 받아야 돼.

 

그럼 반대로

고기 밑에 좀 깔아주세요.” 이래도 그것도 안 된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 가난한 대중들이 1년에 고기한번 먹을 일이 있겠나? 없겠나? 그런데 가서 걸식을 하니 거의 채식이오. 그러나 불자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오.

 

채식과 채식주의자는 다릅니다.

채식은 주로 먹는다는 얘기고,

채식 주의자는 딴 건 절대로 못 먹는다는 얘기요.

그 차이가 있는 거요.

 

그래서 남방불교에서 음식에 가끔 고기가 섞여 나오는 경우가 있는 것은 걸식을 하기 때문이오. 우리는 절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니까, 고기를 우리가 안 만들면 되죠. 그러니까 저절로 채식이 되는 거요.

 

그렇다고 해서 채식주의자가 되면 뭔가 음식에 집착하는 게 된다. 그러니까 수행자는 채식을 합니다. 그러나 채식주의자는 아니에요. 자이나교는 채식주의자입니다. 거기는 숟가락이 거기에 닿더라도 절대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금기다 이 말이오. 금기.

 

이런데서 이 불법이 아주 원칙이 있는 가르침인 동시에 이 불법이 굉장히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또 불법은 세상으로 부터 떠나있는 가르침인 동시에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갖추어진 가르침이오.

 

그래서 부처님의 10대 명호 가운데 뭐가 있습니까? 세간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사에 대해서 훤히 다 아시는 분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수행자들은 스님들은 세상에 집착은 해도 세상을 훤히 꿰뚫어 안다고는 못하는,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외면하거나 세상에 휩쓸리거나 늘 양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세속에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속을 떠나 있어도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고,

그것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는 정상의 위치다.

 

그리고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해도 그건 도가 아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되느냐?” 는 질문을 해도 그건 그 사람의 관심이니까, 그러나 부처님이 가르치는 법의 맞는 가르침.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되느냐?” 정답은 뭐요? 법률은 어떻게 만들고, 마차는 몇 대가 있어야 되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집은 얼마나 높아야 되고, 코끼리 부대가 있어야 되고. 이런 얘기요. 당시로 말하면. 그런데 전혀 그런 얘기가 아닌,

 

자기를 이기는 자가

백만의 대군을 이기는 자보다

더 영웅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어차피 왕이 됐으면 왕위를 버리는 것만 능사가 아니고, 그 왕위를 이용해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이게 어떤 하늘로부터 주어진 절대 권력이 아니라는 거요. 그것을 깨우침으로 해서 이러한 세속적인 것들이, 출가한 승려들은 세속적인 것들에 한발 떨어지지만, 세속에 사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정의를 지켜갈 수 있도록 이렇게 가르침을 편다.

 

그런데서 우리가 불법에 귀의한다고 해서 이 세속에 실패하는 게 아니오. 거의 이 세속의 부조리 부정의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거요. 가장 건강한, 그 사회에서 존중받는 세상 인이 되는 거요.

 

수닷타 장자 같은 사람이 가장 대표적이죠.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그 돈을 이 세상에 필요에 의해서 쓸 수 있는 분이었어요. 그러나 법에 귀의한 뒤에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 미묘하고 좋은 법을 널리 세상에 펴서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기쁨을 얻게 해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부처님을 자기 나라로 초청을 하고, 자기 전 재산을 다 내놔서 법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셨던 거요.

오늘 우리 불자들도 이런 전법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께 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