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의 십장생한국사 - 9회. 임진왜란, 피로 쓴 교훈.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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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설민석_십장생한국사

2018. 6. 12.



,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우리나라가 이렇게 있잖아요. 이렇게 있고, 중국이 이렇게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였죠. 조선이 있고. 일본이 사고를 친 거예요. 1592413, 오늘날로 따지면 부산입니다. 상륙을 했어요. 부산으로 상륙을 해서 여기 있는 서울까지 올라오는데, 서울 함락된 게 52일이거든요. 그럼 2주 조금 더 걸린 거예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때는 경북고속도로가 없었거든요. 일본군은 산 넘고 물 건너서 와야 되는데, 거의 2주 만에 서울까지 왔다는 것은 이건 빠른 속도로 행군, 거의 구보수준으로 달려왔다는 겁니다. 그럼 중간에 전투가 없었습니까? 뭐 있기는 있었는데, 부산성에서의 전투는 순식간에 끝나버리고요, 가장 큰 전투가 바로 여기 있는 충주에서 있었어요.

 

여기 충주전투를 맡았던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신립장군(1546~1592 조선 중기의 무장, 여진족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함)이었는데, 이 신립장군과 함께 사실상 우리나라 전군이 여기 있는 충주에서 다 전멸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당시 일본군의 규모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았다는 거 아닙니까. 수만 명이었고 우리는 만 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수적으로 무기로 열세면 산기슭에 숨어서 어떤 기습을 하고 다시 후퇴를 하는 게릴라전을 폈어야 되는데, 여기 있는 신립장군이 탄금대, 배수의 진을 치고 개발지에서 적을 맞이한 거예요.

 

신립장군이 왜 그랬을까요? 이분이 바보가 아니었잖아요.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 첫 번째는 뭐냐하면 우리나라 전군이 여기 모였어요. 충주에 모였고, 신립장군은 당시 서울에서 사령관으로 급파되어서 나와 보니까 너무나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들인 거예요.

 

산기슭에서 적들을 맞이하면 산으로 숨거나, 도망을 가거나 명령체계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것 같았던 거죠.

, 이럴 바에는 우리가 도망 못 가게 배수의 진을 쳐서 같이 죽는 심정으로 나가 싸우자.”이래서 개발지에서 싸운 것이고,

 

* 두 번째는 이분께서 임진왜란 이전에 여기 있는 우리나라 동북면 함경도 근처에서 여진족 때려잡던 분이거든요. 여진족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 기병이기 때문에 그들을 때려잡으려면 같이 말을 타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병전에 능하신 분이에요. 그럼 말이 산에서 어떻게 싸워요. 다리가 기니까 산을 오를 수도 내릴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본인한테 유리하다 생각하고 여기 있는 개발지에서 싸운 거예요.

 

그런데 미스는 뭐였습니까? 그렇죠. 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라는 거죠. 일본군의 규모, 훈련정도, 이동, 그리고 그들의 어떤 무기체계, 이런 것에 대한 정보를 외면했다라는 게 미스였습니다.

 

당시 일본 같은 경우는 조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여기는 조총수들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보병을 맞히는 게 쉬워요? 기병이라는 게 뭐에요? 기병이라는 건 뭐에요? 과녁이 커지는 효과를 줄 거 아닙니까. 그들한테. 그래서 여기서 완전히 적들한테 유린당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조총 얘기가 나왔는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거 짚고 넘어갈게요.

과연 우리가 조총 때문에 육지 전에서 그렇게 그들한테 졌느냐?” 이런 질문 참 저한테 많이들 하십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해서 조총이라고 부르는데, 이 조총은 우리 조선군의 주력 장거리, 원거리 무기인 활에 비해서 현저한 단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사거리가 떨어집니다. 사거리가 활의 1/3밖에 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단점은 연사력이 떨어진다는 거예요. 화약 넣어야죠, 그리고 쑤셔대야죠, 거기다 총알 넣어야죠. 그리고 심지 달아서 빵하고 당기면 노리쇠가 치면서 심지에 불어 붙어요. 일본 같은 경우는 일반 농민이 반나절만 연습하면 조총사격을 할 수 있으니까, 전체 백성들이 군인들이 될 수 있는 완벽한 병농일치가 가능하다는 거죠. 이런 장점을 십분 살린 게 당시의 일본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얘기를 하면 이 조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무시무시한 무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전술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아무리 활용을 잘 했다 하더라도.

 

그런데 우리는 왜 조총 때문에 졌다고 생각해요?

선조가 그렇게 주장하고, 사관들이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왜요?

 

당시 일본인들이 수적으로나 훈련으로나 굉장히 뛰어난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강목만, 몽둥이만 들고 왔어도 우리가 졌을 것이다.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얘기입니까. 우리 잘 훈련되어있었고, 굉장히 용감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신무기 때문에 우리가 졌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여기 있는 조총이 크게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다는 거. 요런 내용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임금님께서는 서울을 버리고 아예 중국 본토로 도망가려고 하셨는데, 명나라에서 부담스러워하자 여기 있는 평양을 지나서 의주에 몸을 숨기십니다. 그리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준비를 하셨구요, 이때 백성들이 화가 나서 당시 관노비라고 그래서 궁궐에 소속된 노비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선조는 아들 광해한테,

, 18이지? 젊고 건강하니까 네가 전국을 뛰어다니면서 의병을 일으켜라. 아빠는 지금 힘이 없어서 여차하면 중국으로 튀셔야 겠다.” 이런 소리했던 분이 바로 선조가 됩니다.

세상에 그런 선조 밑에 류성룡이 있었고, 이순신이 있었으니, 야 이거 참.

 

어쨌든 여기는 이순신을 대표로한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전쟁은 2년 만에 일단 마무리되게 됩니다. 임진년에 벌어진 왜인들의 난동이 2년 만에 마무리가 되었어요. 일본이 완전히 후퇴를 한 건 아니구요, 이때 휴전이 3년 동안 들어갑니다.

 

3년 동안 휴전 상태에 들어가는데, 그 휴전 기간 동안 일본인들은 여기 있는 부산에다 성을 쌓고 농성, 나름대로 완전 후퇴한 게 아니라 나름대로 여기서 농성전을 펼치고 있었고요, 여기는 휴전이 결렬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일본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해요. 여기 있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일본한테 내어놓고, 그리고 명나라 황제 딸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첩으로 보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전쟁이 벌어졌으니 1597년에 벌어진 바로 정유년의 재차난이 벌어지게 되죠. 그래서 이것을 정유재란이라고 하고, 통상 우리는 이 232년을 통해서 7년 전쟁, 임진왜란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 우리가 그렇게 가슴 뜨거웠던 영화 명량 기억하시죠. 그 명량해전이 바로 정유재란 때 벌어졌던 전투가 됩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께서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적들을 잘 막아내셨구요, 다음 해인 1598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음으로서 임진왜란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 전쟁 이후에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먼저 중국입니다. , 중국 명같은 경우는 이 이전부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굉장히 좋지 않았었는데, 7년 동안 우리나라를 원조해주다보니까 완전 경제가 파탄이 나게 됩니다. 힘이 약해져있었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여기 있는 만주벌판에서 만주족들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죠.

 

임진왜란 7년 동안 얘들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어요. 후금의 공격을 받아서 결국은 멸망하게 되요, 여기 있는 만주족, 구 여진족입니다. 만주족들이 세운 나라가 명 다음에 등장한 청이라는 나라가 되겠습니다.

 

* , 우리 조선은 어떻게 됩니까? 후금의 위협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후금이 한번 쳐들어 왔지 않습니까. 정묘년에, 그것이 정묘호란이라는 겁니다. 이때는 적당히 하십시오. 형제관계를 맺기로 하고 돌려보냈는데,

 

그다음에 이 작자들이 하는 소리가 국호를 청으로 딱 바꾸고 나서,

, 네가 임금님처럼 모시던 명나라가 거의 망했다. 새로운 임금을 모셔라.”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거예요.

 

아니 건방진 오랑캐가 어디 우리한테 갑자기 임금 행세를 하고 있어. 절대 안 돼.” 그러면서 전쟁을 주장하게 되고, 결국 청나라는 다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으니, 병자년에 오랑캐가 난을 일으켰다는 것을 병자호란이라고 부릅니다.

 

임진왜란 끝나고 얼만 되지도 않아서 정묘. 병자호란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맞아하게 된 것이 조선의 운명이었습니다.

 

* , 일본은 어땠습니까? 일본은 엄청나게 발전을 하게 됩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요, 문제 있는 장군들이죠. 자기한테 반기를 벌일 수 있고, 소위 말해서 골통, 이런 문제 있는 사람들을 제일 앞장서서 내보냈어요, 임진왜란에, 전쟁초반에 다 죽었습니다, 그 사람들.

 

죽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을 잡아가게 되는데, 그때 성리학자도 있었고, 기술자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뭐냐하면 도자기 기술자, 도공들을 잡아가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이삼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도자기 기술자가 우리나라에서는 평민인데요, 일본에 가면 거의 귀족취급을 받았다고 그래요. 엄청난 지원을 받아서 일본에서 도자기를 굉장히 많이 만들어요. 그래서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수입 했다고 그랬죠. 거꾸로 유럽에다가 우리나라 도자기를 팔기 시작합니다. 우리 기술의 도자기를 일본산으로 팔기 시작한 거예요.

 

요런 모양들, 여러분들 유럽 여행 가시거나 아니면 그림으로 많이 보셨죠. 요게 독일의 마이센 자기인데, 요것이 바로 조선기술이 일본을 통해서 유럽에 전해진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구요,

 

일본은 전쟁 이후에 엄청난 부를 획득하게 되었구요, 그 부를 바탕으로 일본은 차근차근 발전을 했고, 그래서 결국 19세기에, 개화기에 한중일 3국 중에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가 일본이고, 그 근대화를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병참기지화 삼아서 여기 있는 중국을 공격하는 좋지 않은 행동을 현실로 이루게 됩니다.

 

 

,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면역력이 떨어지고요,

내분이 벌어지고요,

국력이 약했을 때, 항상 이들은 우리를 침략했습니다.

 

안창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각자 맡은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고 애족이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들,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우리 후손을 위해서라도

각자 맡은 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