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16. 열반은 무엇으로 먹이를 삼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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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2018. 6. 20.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10대 제가가운데 천안제일 아니룻다 존자에 대한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아나율 존자 또는 아니룻다 존자는 석가족 출신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 후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그때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석가족 청년들 가운데에서 똑똑한 7왕자가 즉, 7공자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동시에 부처님께 출가를 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이 분은 크게 발심해서 출가수행자가 되었지만, 어느 날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는 자리에서 꾸뻑꾸뻑 졸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니룻다를 불러서

아니룻다야, 너가 마음이 많이 헤이 해졌구나. 어떻게 수행자가 법을 듣는 자리에서 졸고 있는가?” 이렇게 경책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니룻다 존자는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부처님께 참회를 하고는 다시는 내가 졸지 않겠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졸지 않겠다.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예 잠을 안 자버렸어요.

 

그러니까 하루 안 자고, 이틀 안 자고, 삼일 안 자고 이렇게 하니까, 나중에 눈병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니룻다를 불러서

아니룻다야, 너무 열심히 정진을 하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들뜨게 된다. 그래서 정진에 도리어 장애가 된다.

 

그렇다고 게을러지면 어떠냐? 마음이 헤이 해져서 집중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정진에 또한 장애가 된다. 그러니 아니룻다여, 너무 긴장해서 열심히 하지도 말고, 너무 게을러서 마음이 헤이하지 않도록 적절한 집중을 통한 정진을 해라.”

 

이렇게 일러주었건마는 계속 잠을 자지 않고 정진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니룻다의 눈은 더 나빠지고, 그래서 부처님께서 의사 지바카를 불러서 아니룻다 눈을 검진하게 했습니다. 지바카가 부처님께 사뢰기를

아니룻다 존자는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자지 않는 한은 이 눈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니룻다를 불러서

아니룻다야, 잠을 좀 자도록 해라. 모든 법은 먹이가 있어서 존재를 한다. 눈은 잠으로 먹이를 삼고, 귀는 소리로 먹이를 삼고, 코는 냄새로 먹이로 삼고, 혀는 맛으로 먹이를 삼는다. 그러니 아니룻다여, 잠을 자도록 해라.”

 

그러니까 아니룻다 존자가

부처님,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으로 먹이로 삼습니까?”

열반은 게으르지 않는 부지런한 정진으로 먹이를 삼는단다.”

알겠습니다.” 하고는 아니룻다는 돌아가서

나는 비록 이 몸을 버릴지언정 열반을 증득하리라.”

 

이렇게 결심하고는 계속 정진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눈이 멀게 되었고, 그러나 아니룻다는 용맹정진 덕분에 천안, 마음의 눈이 얻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룻다 존자를 천안제일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당시에 부처님으로부터 경책을 받았을 때, 그것을 굉장히 깊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것을 고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아니룻다 존자는 한번 조는 것을 경책 받고 다시는 자지 않는 정진을 했고, 마아가섭파 존자의 경우는 아주 고귀하고 부잣집 즉, 바라문 가운데도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해서 정진을 하면서도 아마 그 부잣집에 살던 신분이 높은 집에 살던 습관을 잘 못버렸나 봐요.

 

그것이 옷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식사가 끝난 뒤에 옆에 앉아 있는 마아가섭 존자에게 그 옷을 손으로 만지면서

존자여, 옷이 참 좋구려.” 그랬어. 그런데 가섭 존자가 자기 옷을 보니까 자기는 아주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부처님을 보니까 부처님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

 

그때 마하가섭 존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 옷을 벗어서 부처님께 드리고, 부처님의 그 헌 옷을 받아서 자신이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그래서 마하가섭 존재를 뭐라고 그래요? 두타제일이다. 이렇게 말하죠.

 

음식도 아주 거친 거 먹고, 옷도 분소의만 입고, 잠자리도 숲이나 동굴에서만 자고. 그러니까 자기 몸에 배어있는 부잣집에서 자라난 습관이 한번 지적을 받자 철저하게 그것을 버렸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죠.

 

또 목갈라나 존자 같은 경우는 신통이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신통을 얻은 분이 아니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이 수행자 그룹 중에는 신통이 제일 뛰어난 분이었어요. 그런 분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셨거든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 신통을 사용하지 말 것을 지적받고는 돌아가실 때 이교도로부터 소위 공격을 받고 돌아가셨거든요. 자기가 죽으면서도 그 신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수닷타 장자같은 경우는 장자, 즉 사업하는 사람이오. 사업하는 사람은 돈벌이를 굉장히 중요시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닫고는 돈벌이 아무 관계가 없는 이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데,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가지고 기원정사를 지었지 않습니까. 털끝만큼의 아까움도 없이. 부처님과 제자들과 그리고 이 좋은 법이 널리 전해지는 것을 바라면서 금화로 땅을 깔았지 않았습니까.

 

이런데 보면 우리가 늘 고집해 오던 것, 자기가 중요하다가 생각했던 것이 마치 우리가 꿈을 꾸면 그것을 버리듯이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버려버렸어요. 이것이 당시에 부처님의 제자들의 태도였습니다.

 

바로 아니룻다가 그런 경우죠. 한번 졸음을 지적받고, 다시는 자지 않는 그런 용맹정진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안제일이라고 하는 십대제자 가운데 한분이 되셨다. 이런데서 우리가 법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째야 되느냐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극단적인 것을 피하신다. 언제나 적절한 것을 가르치신다. 육체를 괴롭혀서도 안 되고, 육체의 욕망에 끌려가서도 안 된다.

 

이런 적절함이 때로는 우리들에게는 우리들의 업에 끌려가려는 것을 막으려고 할 때, 거기 벗어나려고 할 때, 그 업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그럴 때는 그 고통을 감내해야 됩니다.

 

일부러 고통을 만들면 고행이 되고,

바르게 가는데, 이미 지어진 업으로 인해서 고통으로 느껴질 때는

그걸 감내해야 됩니다.

 

담배를 끊겠다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못해서 그 고통은 감내를 해야 되는 거요. 그런데

, 이 고통을 참는 것은 중도에 어긋나지 않느냐. 부처님이 적절하게 하라고 그러셨다. 그러니까 요럴 때는 한 대를 피워서 적절하게 하는 게 좋겠다.”

이런 것이 적절한 게 아니라는 거요.

 

그런데서 아니룻다 존자는 자신이 게으름에 대한 반성으로 부처님께서 조금 문을 열어줬는데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말을 안 듣고 고집스럽게 한 게 아니라, 용맹정진을 했다. , 몸을 돌보지 않고 용맹정진을 했다.

 

보통 정진을 할 때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이런 말을 하죠. 일부러 떨어져서 죽는다든지, 일부러 몸을 괴롭힌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이 몸과 목숨에 배어 있는 이 업, 집착이라는 것은 참 끈질기거든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 이런데서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아니룻다 존자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마음은 편안했지만 생활은 참 불편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천안을 얻었다 그러니까 눈감고도 훤히 보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마음의 눈, 지혜의 눈을 얻었지 육안을 잃었기 때문에 생활은 불편한 거요.

 

수행자는 옷을 빨래하거나 또 옷을 꿰매거나 할 때 자기 일은 자기가 합니다. 그러나 아니룻다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마땅히 자기가 해야 되지마는 그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은 할 수가 없어. 남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 이렇게 말했어요.

 

수행자들이여, 누군가가 복을 지으려하면, 복을 구한다면 내 바늘에 실을 좀 꿰어주시오.”

이건 복 짓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죠? 이렇게 얘기를 했어. 그런데 누가 와서

내가 꿰어주지.”하고 받아 가는데 부처님의 음성이오. 부처님께서 아니룻다의 실을 꿰어줬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니룻다가 부처님이시여, 제가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복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바늘에 실을 꿰어달라고 했는데, 부처님께서 위없는 도를 이미 이루셨는데, 무슨 복을 지을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부처님께서

 

아니룻다야, 그런 말을 하지마라. 여래도 만족할 줄 모르는 6가지 복을 짓느니라.”

그러니까 복을 구하는 또는 복을 짓는데 있어서 부처님도 6가지는 만족할 줄을 모른다는 거요. 그것이 어떤 것인가?

 

첫째, 보시하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돌보고 베푸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함이 없다. 많이 베풀려면 복을 많이 지어야 되요? 안 지어야 되요? 많이 지어야 되지.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널리 베풀기 위해서는 많이 복을 짓는다. 내가 갖기 위해서 짓는 게 아니다.

 

두 번째는 교훈을 얻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교훈을 얻는다 이 말은 배운다 이 말이죠. 배움에 있어서 부처님은 만족할 줄 모른다. “이 정도 배웠으면 됐다. 이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 이런 게 아니라는 거요. 언제나 새로운 것을 계속 배워나간다.

 

세 번째는 어려움을 닥쳐서 인욕하기

참는데 만족할 줄 모른다. 그 어떤 것도 참아낸다. 이런 얘기죠.

 

네 번째, 이치에 맞는 설법하기

중생들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그 처지와 조건에 맞춰서 알아들을 수 있게 이치에 맞게 설법하는 이것이 이 정도면 됐다.” 이렇게 만족하는 게 아니고, 늘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설법을 해야 된다는 거요.

 

다섯 번째, 중생을 보호하는데 만족할 줄 모른다.

여섯 번째, 위없는 참된 도를 구하는데도 만족할 줄 모른다.

이 정도면 나는 다 도를 얻었다.’ 이런 게 아니라는 거요. 늘 살피고 참됨을 구해나간다. 그러기 때문에 나야말로 복을 많이 지어야 할 사람이다. 이러면서 아니룻다의 바늘에다 실을 꿰어줬다.

 

물론 부처님은 위없는 도를 얻으셨고, 끝이 없는 복을 다 이미 지으셨고, 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셨다. 그러니 부처님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가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부처님께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교화를 하셨고, 부처님은 어떤 행을 하셔도 걸림이 없으셨지마는

 

, 맛있는 음식을 공양 받으셔도 집착이 없고, 좋은 옷을 입으셔도 걸림이 없으셨고, 어떤 접대를 받건 걸림이 없으셨지마는 그러나 그분은 계율을 청정히 지키셨고, 검소한 옷을, 검소한 생활을 걸식을 하시면서 살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부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금강경에서는 왜 그렇게 하셨느냐. 이럴 수보리가 깨친 거요.

 

바로 미래의 수행자들을 위해서,

미래 수행자들을 바른 법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미래의 수행자들에게 바른 법을 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고구정녕이 일러주시고 행하셨다.

 

그 하루하루 생활이 다 미래에 공부하는 사람들에 모범이 되도록 하려고,

그걸 수보리가 깨닫고 너무너무 감동을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눈물을 머금고 부처님을 찬탄한 거 아니에요.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또는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미래의 보살을 잘 보호하고 부촉하십니다.” 이렇게 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그 깨달음을 알았죠. 그렇기 때문에 응답을 하셨잖아요.

 

선재선재라. 착하고 착하구나 수보리여. 네가 말한 그대로다. 네가 말한 대로 여래는 미래의 수행자들을 생각하며 법을 보호하고 법을 잘 부촉하느니라.” 이렇게 말을 했단 말이오.

 

우리가 세속적으로 들으면 칭찬을 받으면

에이, 아닙니다.” 사양을 해야 되는데, 수보리가 찬탄하니 부처님께서

그래, 네가 말한 그대로다.”

 

부처님이 칭찬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부처님은 칭찬에도 들뜨지 않는다.

그런데서 우리는 부처님의 인격을 엿볼 수가 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구족하셨다 하더라도 거기에 멈춤이 있거나 게으름이 있거나 하지 않고 끝없는 정진을 해나갔다.

 

그래서 우리 선가에서도 화두를 타파했지만 다만 이 뭐꼬하든지, 이미 화두를 타파했지마는 아이 돈 노우, 모른다.” 여기에 집중이 되어 있어야 한다.

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된다. 그럴 때 정진이 여일하지,

, 나는 알았다.” 이럴 때 그 앎이 순식간에 교만함으로, 그래서 열린 창이 닫혀버리는 쪽으로 가기가 쉽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았다. 도를 얻었다.’ 라고 말하면서 그에서 풍기는 인격이 세상 사람을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을 받는 행위가 나올 때도 있고, 도를 얻었다고 하면서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중생을 보살피는 마음, 이런 것들이 없는 경우가 있다.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중생의 눈에 보이는 부처님은

깨달음이 아니라 자비다.

중생의 눈에 비치는 부처는

부처의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부처님의 방편이다.

 

그러니 중생을 떠난 부처가 아니라

중생에게 비친 부처님이 오늘날 절실한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서 우리 부처님은 눈먼 아니룻다에게 친절하게 바늘에 실을 꿰어주는 그런 모습에 부처님이였다. 그래서 우리가 경을 읽으면 항상 부족감을 느낀다. 제가 만약에 옆에 있었으면 어떨까.

 

아무개, 여기 아니룻다가 실 좀 껴달라는데 껴줘라.” 해결은 해줍니다. 해결은 해주는데 내가 해결해 주기보다는 남을 시켜서 해결해 주기가 쉽잖아.

그래, 내가 끼워줄게.” 이렇게 잘 안 된다. 이거야. 왜 그럴까?

나는 바쁨으로, 나는 더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기가 쉽다.

 

그런데서 우리는 이 부처님의 고귀한 인격이 늘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가. 바로 이런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자. 이거야. 못 간다고 너무 좌절하지 말고, 그것을 목표로 가고, 또 조금 된다고 너무 교만하지 말고, 어떤 경우에 비교해도 우리가 부처님의 인격만큼 안되는 게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인정하고 여기에 서서 그 목표를 향해서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면서 한발 한발 가는 게 수행이 아니겠는가. 여러분도 오늘 아니룻다가 정진하는 그런 마음, 부처님께서 아니룻다에게 베푸는 그런 봉사죠 이게. 자비라고 할 수도 있고, 이런 봉사를 할 일이 우리 주위에도 마나 많겠느냐.

 

봉사는 불교하고 관계없는 것 같지마는 부처님께서 이렇게 봉사를 하셨지 않습니까. 이런 봉사할 기회가 오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장애자에게, 병자에게, 노인에게, 어린 아이에게 많은 부분에서 부처님이 하셨던 역할을 할 일들이 우리들에게 있다. 그것을 우리가 한번 해 나가는 그런 마음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