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의 영화 [국제시장] 1부 _ 6.25.전쟁과 흥남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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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설민석_영화로보는 한국사

2018. 10. 3.



우리 역사를 사랑하시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한국사 전문가 설민석입니다.

 

이번에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국제시장은 1950년 발발한 6.25 전쟁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현대사가 되겠는데요,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직접 몸으로 겪으셨던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를 알고 갑시다. 6.25전쟁의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광복 직전으로 한번 가볼게요.

 

광복 직전에 여기 있는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 북부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그리고 우리나라의 치안유지를 명분 삼아서,

한반도로 밀고 내려왔어요.

 

이 상황에서 광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광복과 동시에 북쪽은 소련군이 장악하게 됩니다.

미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미군도 한 달 뒤인 9월에 남한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는 약 3년간 미소 군정시대를 맞이하게 되죠.

그리고 광복 3주년이 되는 1948815일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을 하게 되고,

같은 해 99일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19506월이 됩니다.

그런데 그 전부터 여기 있는 38도선 근처에서 서로 양측 간의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북한의 평화 제스처에 우리가 순간 방심하고,

비상경계령을 푼 것이 1950624일이었어요.

그리고 북한의 기습 남침.

 

전국의 약 1/3의 병력이 외박 혹은 휴가를 나가 있는 틈에서 북한군이 선제공격, 기습한 것이죠. 38도선 전역에서 그들이 밀고 내려옵니다.

우리는 탱크가 단 한 대도 없었는데, 그들은 소련제 탱크 T-34를 몰고 수백 문의 자주포를 밀고 내려오면서 우리를 유린해 갔습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게 되고요, 한 달여 만에 낙동강 라인 안에 갇혀서 우리 자유진영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 깜짝 놀란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그래서 UN안보리를 개최를 하고, 거기서 도장을 꽝!!! 찍고 UN군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19509월에 맥아더를 총사령관으로 한 미국을 위시한 16개국 UN연합군이 우리를 도우러 부산으로 옵니다.

 

와 봤더니 전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맥아더는 판단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로 밀고 올라가면 좋겠지만, 그러면 아군 측의 피해가 클 것 같다.

그러니 북한군의 허를 찌르자는 것이지요.

 

이렇게 서해안으로 돌아서 저기 있는 인천으로 상륙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보급로를 끊고, 그 다음에 밀고 올라가자 라는 게 맥아더의 작전이었죠.

그런데 이것을 미합동참모본부에서는 반대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나라에서는 밀물, 썰물, 조수간만의 차가 크지 않습니까. 썰물 때는 상륙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갯벌이 4km가 펼쳐지거든요. 거기다 군인들을 내려놓으면 4km 진흙에 빠져서 걷지도 못하죠. 이거 불가능하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이 되게 뚝심 있는 분이거든요.

하면 한다.” 이러게 된 거죠.

그래서 당시 일본 고베하고 요코하마, 그리고 부산에서 동시에 군함이 출발합니다.

 

제주도 남부에서 집결을 해요. 그래서 빙 돌아서 915일 인천으로 상륙하게 되는 것이죠. 이 기적의 상륙작전은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 북한군의 경우는 보급로를 끊길 위험에 처했고요, 심리적인 충격이 엄청났던 거죠.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이 밀고 올라가게 됩니다. 앞으로 계속 밀고 올라갔죠. 그래서 인천에서 김포를 지나 서울로 들어오는 상륙군과 밀고 올라간 우리 국군이 만나고요, 서울을 1950928일 다시 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밀고 올라갑니다.

 

38도선을 통과한 게 101,

그래서 국군의 날이 101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1019일 평양을 우리가 차지하고요, 계속 밀고 올라가서 압록강 두만강 라인까지 우리가 갔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국공산당이라고 그래서 중공군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코앞까지 지금 UN군이 밀고 들어왔으니까, 위기감을 느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투 병력을 파견하는데, 원래 중국 하면 삼국지 그래서 지략이 뛰어나다.’ 그거 다 필요 없어요. 그냥 전술 하나, 인해전술입니다.

 

얼마나 군인 숫자가 많았느냐하면 속설이겠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이 주어지고 나머진 2명한테는 피리하고 꽹과리를 주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실제로 이 사람들이 밀고 내려오는데, 낮에는 제공권을 장악해서 UN군들이 조준폭격을 해버리니까, 땅굴을 파고 그 안에 숨어 있어요. 그때 중국군이 판 땅굴이 6,7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의 길이와 같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땅굴을 많이 팠어요.

밤이 되면 피리를 불면서 전진을 하게 됩니다. 무서운 것이죠.

 

당시 UN군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영하 30도에 달하는 개마고원의 추위와 밤마다 30만 명이 불어대는 피리 소리에 너무 무서웠죠.

그래서 속절없이 우리는 다시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때 적의 포탄이나 파편에 맞아 죽은 병사보다는 추위에 온몸이 동상으로 썩어가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는 19511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되니 이것이 가슴 아픈 1.4후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었습니다. 중공군들한테 퇴로를 차단당한 미국의 10군단 같은 경우는 보시다시피 여기 있는 흥남부두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여기 있는 배로 탈출을 시켜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미군 10만 명이 군수물자 35만 톤을 가지고 여기서 탈출 하려는 엄청나게 큰 작전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흥남철수였습니다.

 

그때 당시 미군들한테는 눈앞에 놀라운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문제는 뭐냐면 피난민 10만 명이 몰려든 거예요. 우리도 데려가 달라는 것이죠.

우리는 UN군한테 끝까지 협조했던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북한군이 우리 마을을 점령하게 되면, 우리는 모두 죽어요. 학살당합니다. 제발 우리를 데려가세요.”라고 호소를 합니다.

미군은 고민했죠.

 

이때 민간인을 실은 마지막 배가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라는 배가 되겠습니다. 정원이 60명밖에 안 됩니다. 화물선이거든요. 그런데 승선인원 중에 선원이 47명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더 탈 수 있는 사람이 13명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때 미 10군단장의 고문이었던 현봉학 박사께서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

장군님! 라루 선장님, 제발 도와주세요. 저 사람들 여기에 두고 가면 다 죽습니다. 저 사람들을 태워주세요.”라고 얘기를 합니다.

 

군수품 다 버려. 다 내려놔.”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25만 톤의 군수품을 버리고 그보다 몇 배 더 중요한, 몇 백 배, 몇 천 배 더 중요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로 결정을 한 겁니다.

그래서 승선인원 60명인데, 거기에 14,000명이 탑니다.

여기 있는 부도와 공장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이 지역은 폭파시켜 버립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이틀간의 항해를 합니다. 그래서 부산을 거쳐 거제도로 오게 되는데요, 누울 수도,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비좁은 배안에서 새 생명이 5명이나 태어나게 되죠. 이 아기들의 이름을 당시 미군들은 김치1, 2, 3, 4, 5 이렇게 붙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5명을 김치 파이브라고 불렀던 것이죠.

 

이틀 만에 크리스마스죠. 여기 있는 거제도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14,000명 중에 사망한 사람 단 한 명도 없구요, 오히려 인원이 5명 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 이것으로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성공한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습니다.

 

, 다시 전쟁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4후퇴로 태안반도 근처까지 밀렸던 우리 국군은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서 밀고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38도선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죠.

 

19513월부터 6월까지 3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러니까 중국이 자꾸 이제 소련한테 눈치를 주는 거예요.

소련, 뭐하는 거야. 너희도 전쟁 참여해. 도와줘!”라고 얘기를 합니다.

 

당시 소련군은 두만강 근처에서 공중지원 정도를 해주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소련 생각에 만약에 전쟁에 참여하면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 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안 되겠다. 그러면서 중재를 하게 됩니다. 소련이 휴전을 제의한 것이에요.

 

, 북한 중공! 그만해! 그리고 한국하고 UN군 이제 그만해. 휴전해라고 제의를 한 게 19516. 그럼 이때 휴전이 됐으면 피해가 덜했을 텐데, 휴전 제의하고 2년 동안 전쟁이 계속 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휴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 그리고 포로송환은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할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양측에서 합의를 못 본 것이죠.

애꿎은 우리 젊은이들의 목숨이 끊임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2년 뒤인 1953년에 휴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 휴전선이 그어졌습니다. 전쟁 끝났습니다. 전쟁의 피해는 심각했습니다. 양측 군인들의 사망자는 160, 그리고 민간인 사망자는 대한민국 집계로만 99, 그리고 10만의 전쟁고아와 수백만의 이산가족이 생겨났습니다.

경제규모 120개국 중에 119, 꼴찌에서 두 번째였습니다.

 

1950~1960년대에는 우리와 전쟁을 했던 북한보다도 못 살았습니다. 폐허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이후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겪으셨던 눈물겨운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한국 전쟁이 휴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 폐허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았을까요?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

어렸을 땐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는데

(저도) 나이가 들고 생각해보니 너무나 가슴이 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