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5회 내려놓음과 지혜 (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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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2011.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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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되기 전까지는 아직도 내가 계속 노력하고 발전해야 된다는 거에 대한 생각을 하면 이런 걸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계는 단지 경계일 뿐이라고 여러분이 받아들여야 되요. 이거를 깨달음이다. 요즘 여러 가지 수행프로그램 중에 며칠하면 깨달아주고 이런 데가 많은데요, 그런 거는 사실 대게 위험한 겁니다. 그런 것은 자기가 스스로를 반조를 해서 그렇게 깨달았다고 하는데, 내 번뇌가 정말 소멸 됐는가를 한 번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깨달았으면 자기 마음에 그런 탐진치가 소멸돼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 경계를 경계라고 보고, 거기에 빠지지 않고 떠나야 됩니다. 미련 없이. 이거는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경계라고 생각을 하고, 그러면 수행이 점점 발전해 나갑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나를 방해하는 요소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훨씬 명확하게 보게 되고, 무상고 무아에 대한 이해가 점점 더 명확해 집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다보면 경전에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데요. 형성된 법은, 그러니까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 형성된 법은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거에요. 이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통찰인데요. 그러면 형성된 모든 법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거죠. 이거는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보는 것은 이 무상함의 극치를 이야기합니다. 정말 이건 무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게 되면, 이렇게 되다보면 무상고 무아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성숙되겠죠. 깊어지고. 예를 들어서 지난번에 제가 삼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말씀을 드렸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선정에 들어가는 삼매에 들어가는 때는 내가 나라고 하는 생각이 있으면 이게 계속 이 대상과 나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가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선정상태에 들어 가면은 누가 인식을 하고 이런 게 아니라, 대상과 마음이 하나가 돼서 그 상태로 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선정에 들어가 있는 상태는 선정에 들어갔다 나와서 그 상태를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내가 뭘 한다 이런 개념이 전혀 없었던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건 뭘 의미하냐하면 그 상태에서는 있다고 생각했던 나가 있다면, 그 상태에서도 있어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그 선정상태에서는 완벽하게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면 이거는 뭐를 의미하냐하면 선정이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거를 의미하죠. 선정이라는 것이 사라졌단 말이에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라진 상태를 완전히 경험을 했잖아요. 그죠? 이런 것도 일종의 사라짐의 지혜의 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현상을 자꾸 관찰하다보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있었던 것들이 계속 어떻겠어요? 과거 현재도 지금 일어났다가 계속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여러분 몸뚱이도 계속 세포분열을 통해서 있던 것이 사라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마음도 아까 일어났던 건 벌써 사리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고, 또 지금 일어나는 건 또 사라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 거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면, 이거는 무상고무아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어집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어요. 내가 이 이걸 만약에 컵이라고 그러면 이거에 대해서 굉장히 집착을 했었는데, 이것이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는, 그런 거라고 본다면 우리 마음이 여기로 계속 이걸 붙들고 있겠어요? 멀어지겠죠. 우리가 나라고 집착했던 나라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까 물질적인 요소, 또는 정신적인 요소, 또는 오온인데. 이런 것들을 관찰해보니까 계속 사라지고 있는 거에요.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고 계속 사라진다는 거.

 

그것을 관찰하게 되면 이 오온에 대해서 공포, 위험, 아 이건 위험하구나. 공포스러운 것이구나. 또는 이거를 혐오하는 지혜. 즐기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거를 계속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진다는 거죠. 마치 내가 이렇게 그 대게 좋은 것이고 내가 즐길만한 것이라고 봤는데 이게 알고 보니까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었단 말이에요. 내가 가지고 놀았는데 이게 알고 보니 폭탄이었다. 독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걸 멀리하려고 하겠죠. 그죠? 즐기지 않고 멀어지려고. 그 지혜를 불교에서는 혐오의 지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대상에 대해서 혐오. 멀리한다 이거죠. 싫어하는 마음하곤 틀려요.

 

이것은 가까이 할 것이 못된다고 지혜로서 통찰하는 걸 이야기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쥐고 있던 나라고 하는 거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혐오라는 것이. 그렇게 하면 아~ 내가 지금 집착하고 있었던 그런 것들이 집착할만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요. 그죠? 여러분들이 계속 집착하고 있던 것이 나름대로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집착하고 있던 것을 관찰해보니까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이 계속 사라지는 현상들이고, 그렇게 보게 되면 이것은 아~ 정말 내가 가까이 할 것이 못되는구나. 즐길만한 것이 못되는구나.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것을 혐오의 지혜. 이거는 경전에서 굉장히 자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무상함을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에 혐오의 지혜라고 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 혐오의 지혜는 내가 어떤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을 분리시켜주는 그런 아주 중요한 지혜에 해당합니다. 이거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거죠. 그죠? 이런 지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상카라. 상카라라고 하는 건 유위법이라고 이야기라고 합니다. 물질과 정신, 또는 오온을 상카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상카라에 대해서 평온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이게 우리가 소위말해서 깨달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생기는 가장 최고의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는 깨달음의 문턱에까지 온 지혜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지혜가 생기면. 이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어떤 대상이 있으면 어떻게 했어요? 어떤 걸 즐겼잖아요. 그죠? 계속그거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여러분들이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또 아름다운 형상을 즐기고, 경치 좋다그러면 막 몇 천리를 마다않고 가잖아요. 음식이라든가, 또 아름다운 음악 같은 거. 그런 거를 계속 즐기고 살았는데. 그런 것들이 결코 즐길만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한쪽은 즐기는 쪽으로 우리가 보통 범부들은 살았고. 수행을 하다보면 이걸 혐오하는 지혜도 생겼어요. 그죠?

 

이제는 그 두 가지를 다 놔버리는 거죠. 그냥 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평온하게 바라보는. 그러니까 이걸 즐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혐오하지도 않고 평온한 상태. 이건 지혜가 더 성숙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는데. 이거는 쉽게 말 하면은 여러분들이 어떤 경계에 부딪치더라고 마음이 동요가 없는 상태라고 보시면 되요. 끄달리지 않는다. 그러잖아요. 우리가. 어떤 경계가 와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상태라고 보시면 되죠. 그래서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잘될 때나 못 될 때나. 잘나가고 있을 때는 보통 사람은 흥분하고, 못될 때는 이렇게 실망하고 그러잖아요. 그죠?

 

그런 거에 연연하지 않고 남이 칭찬하거나 비방하거나, 거기에도 연연하지 않고. 또 내가 괴로울 때나 행복할 때나 항상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그런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지혜는 대게 중요한 상태인데요. 처음에는 이렇게 우리가 즐겨요. 대상을. 즐기다가 좀 혐오하는 지혜가 일어나면 멀리하는데, 멀리하면서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이제는 이런 거에 대해서 우리가 집착하던 거에서 무관심해지고, 이거는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 계속 변하고 사라지는 거니까 그죠? 그래서 이거로부터 멀어져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우리를 안전하게 해주고, 우리가 진짜 의지할만한 것이 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뭐에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게 뭡니까? 열반이죠. 이거로부터 벗어나는 열반의 상태. 그래서 더 이상 내가 오온에 집착하지 않고, 열반의 상태로 마음이 향하게 되는데. 그런 직전의 단계가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 이런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평온한 지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거를 우리가 다른 말로 뭐라고 하냐하면 지혜의 절정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이 일어나기 전에 일반 범부가 가질 수 있는 지혜의 절정이다. 그리고 또는 해탈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지혜다. 그러니까 이런 정도의 이런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예를 들면 게송 사구게 게송을 한마디 딱 해주면 바로 아라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정도 지혜에 성숙한 사람은.

 

그런데 번뇌가 죽 끓듯이 일어나는 사람한테 부처님께서 사구게 한다 해서 갑자기 어느 날 돈오가 되겠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는 인연이 성숙해야 결과가 일어난다, 그러잖아요.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도 여러분의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갑자기 전혀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아무리 부처님이 아니라 부처님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와도 갑자기 중생을 깨닫게 해 줄 수는 없어요. 그 사람이 충분히 성숙해서. 예를 들면 지금 이런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정도 이른 사람에게는 은하의 돈오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 말에 깨닫게 한다는 것도 경전에도 법구경 같은데도 그런 예가 나와요.

 

그렇지만 이정도 지혜가 안 되고, 그냥 아직도 온갖 번뇌가 죽 끓듯이 일어나는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사구게를 읽어줘 봐야 그거는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혜도 성숙되는 그런 과정이 있다는 걸 여러분이 이해하시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정도 지혜가 성숙되는 지혜를, 그러니까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이 끄달리지 않고 평온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이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 행에 대한, 또는 유위법에 대한, 오온에 대한 평온하게 보는 지혜라고 볼 수가 있겠죠. 여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그게 바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그런 도의 지혜, 깨달음의 지혜가 일어난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런 해탈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 오온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중에 이것에 뭐를 봤어요? 일어나고 사라짐.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여러분주의에 있는 것들이 계속 어떤 상황에 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보게 되면, 그걸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게 됩니까? 어떤 지혜가 생겨요? 무상이라는 지혜가 생기잖아요. 변한다는. 그죠? 그럼 무상의 지혜가 깊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뭐가 일어난다. 그랬어요? 혐오. 우리가 이 대상에 대해서 즐기지 않고 멀리하려는 염오. 혐오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서 그러면 두 가지가 균형이 잡혀져서 평온하게 바라보는 지혜가 생기게 되는데, 이렇게 되는 키포인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현상을 뭐로 보는데서 모든 게 다 비롯되는 겁니까? 무상고 무아라고 하는 이걸로, 변한다는 거 그죠? 그리고 또 이것은 본질적으로 괴로움이라는 거, 그리고 실체가 없다는 이 세가지에대한 이해를 통해서 이런 지혜가 깊어졌잖아요. 그죠? 불교에서 뭐라 그래요? 이 세 가지를? 제생무상, 제법무아, 삼법인이라는 표현을 쓰죠. 이 세 가지가 이 경전에 보면 항상 이렇게 나옵니다. 형성된 법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죠. 무상하고 변하고 괴로움인 것이 어떻게 나의 것이고 나고, 나의 자아라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고 변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두카, 괴로움이라는 거죠. 그리고 이것은 자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아니따. 자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지혜의 통찰이 우리가 이런 지혜가 성숙되게 만든는 아주 키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깨달음으로 위빠사나의 지혜. 그러니까 이런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키포인트는 이런 오온, 물질과 정신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로 통찰하는 지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지혜라는 거죠. 그래서 해탈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그죠?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집착이 내 몸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죠. 내 마음에 대해서도 일어나죠? 몸에 대해서도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몸에 대해서만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걸로 약간 부족할 수 있겠죠. 왜냐하면 마음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잖아요. 보통 淸淨道論청정도론에선 깨달음이 일어나기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관찰을 합니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관찰이 성숙되면 이 물질을 우리 몸을 의지해서 또 뭐가 일어나요? 우리 몸이 있으면 마음이 일어나잖아요. 내가 걸어가다가 누굴 만나면 그 만남에서 그 사람에 대해서 또 기분이 좋다 싫다 이런 마음도 일어나고,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잖아요. 마음에. 그죠?

 

그래서 몸을 이해하면 또 마음도 이해하게 돼 있어요. 몸과 마음을 이해하면 자기 몸과 마음에 대한 무상고무아를 이해하게 되고. 또 이것만으로 약간 부족한게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도 있지만 또 누가에 대한 집착도 있어요? 다른 존재에 대한 집착도 있잖아요. 보통 보살님들 자식에 대한 집착이 되게 강하잖아요. 자식에 대한 집착, 나중에 아들도 오온의 집합니다. 저 오온도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계속 아들을 아들로만 보게 되면 집착을 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것도 하나의 이렇게 자기 자신과 남에게 대한 집착도 버리게 하기위해서는 안과 밖으로 관찰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 보면 안으로 밖으로 무상고무아를 관찰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안으로 밖으로. 또 무상으로 관찰을 하고, 무상으로 관찰을 하게 되면 괴로움도 알게 되고, 또 무아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자식이 여러분들 것일 거 같아요? 아니란 말이에요. 그죠? 그 자기 맘대로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데 어떻게 남의 마음을 내 맘대로 하겠어요? 그죠? 그래서 그렇게 보게 되면 내가 어떤 현상을 무상하다고 보면서 그 무상하다고 보는 걸 통해서 혐오의 지혜가 일어나서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이렇게 놓는 방법이 있고, 괴로움으로 관찰을 하다가 그 괴롭다. 이건 괴로움이라고 보면서,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을 놓게 되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번뇌를 버리는 방법도 있고.

 

또 하나는 이건 나의 것이 아니다. 내게 아니다. 이거는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관찰을 함으로써 그렇게 해서 그 버리는 방법.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이 일어나는 방법이 세 가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무상을 관찰하다가 깨달음이 일어날 수도 있고, 고를 관찰하다가 깨달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자아가 없다는 것을 관찰하다고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는 다 해탈이 일어나는 하나의 관문이라는 거죠. 어떤 형태든지 가다가 아~ 이건 무상한 것이라는 뼈저리게, 정말 깊이 통찰하면 그걸 통해서 이 메커니즘은 똑같습니다. 무상고무아를 관찰하게 되면 그 다음에 무슨 지혜가 일어난다, 그랬어요? 혐오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그 혐오의 지혜가 일어나고 나면 이런 혐오라는 건 내가 이 집착하고 있던 것이 집착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놓는 멀어지는 상태입니다. 집착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놓게 되겠죠. 그죠? 이렇게 놓게 되잖아요. 이 놓는 것을, 이욕. 욕심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니까 이거는 깨달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이야기를 합니다. 쥐고 있는 걸 놓는 상태죠. 그러면 그 다음에 이러한 것이 해탈이다. 이렇게 우리가 보통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경전에서 보통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게.

 

그래서 결론적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이런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은 보면 우리나라에선 화두선이나 이런 공부가 주류가 되면서 너무 단박에 깨닫는다는 이런 거에 좀 많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라는 뜻이 아니고요. 그렇게 단박에 깨달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성숙되는 과정이 좀 필요하다는 거죠. 지혜가. 지혜가 어느 정도 성숙되고나면 그 성숙된 사람한테는 사실 한마디만 해줘도 말 그대로 깨달음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요, 지혜가 전혀 성숙되지 않은 아직도 번뇌덩어리인 사람들이 갑자기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는 거죠. 그건 연기법에도 안 맞습니다. 연기라는 것은 조건이 성숙했을 때 결과가 일어난다는 이야기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 부분을 잘 이해를 하시고요, 그래서 이 지혜가 성숙되어가는 그 과정을 마지막으로 간단히 요약을 해서 한 번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지혜를 통해서 내려놓는 그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를 제가 간단히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가면서 악행을 많이 짓잖아요. 그런 악행, 아주 남에게 비난받을 만한 그런 악행을 놓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계율입니다. 오계. 이런 계율을 잘 지키면 남에게 비난받을 만한 악행을 하지 않게 되요. 여러분 오계는 잘 지키세요. 불자라면 오계를 지키는 게 좋습니다.

 

그 다음에 알아차림을 계속 하고 지혜를 계발하다보면 다섯 가지 장애요소하고 어리석음이 우리 마음에 개입하지 않겠죠. 그러면 이것이 놓아지고, 그러다보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오온에 대한 이해, 무상고무아에 대한 이해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 무상고무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지혜를 통해서 무엇을 놓을 수 있겠어요? 전도몽상이 놓아집니다.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거, 또 이 세상에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전도몽상이 놓아지고. 그 다음에 아까 말했듯이 이런 무상고무아를 관찰하고 나서 혐오의 지혜가 생기고 나면 뭐가 놓아지겠어요? 오온을 즐기는 것, 우리가 이런 현상을 즐기는 마음이 놓아집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이런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가 생기면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그냥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지혜가 생기고. 그리고 나서 소위말해서 깨달음이 일어나는 순간 이 욕망을 놓게 되죠, 집착을 놓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해탈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지혜가 성숙되어 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은 점점 놓아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쥐고 있는 것들이 하나, 둘 놓아지면서, 나중에 마지막으로 정말 이건 이 세상에 어떤 거보다 질긴 갈애라고 하는 집착이라고 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놓아지면서 해탈이 일어나는 그런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어떻게 성숙 됐는지 좀 이해가 되십니까? 다음시간에는 제가 이런 지혜가 성숙해서 깨달음이 일어난 존재가 이런 일반범부하고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걸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