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6회 범부와 성자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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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2011. 11. 27.

  방송 보기: 불교TV

지난 시간에 지혜의 성숙되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는데요. 오늘은 수행을 해서 범부가 성자가 되는 과정, 그러니까 범부하고 성자가 어떻게 차이 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에 제가 수행은 우리 삶의 고통을 주는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삶에 행복을 주는 마음을 계발시키는 것이 수행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을 고통을 주는 마음을 내려놓는 그 자체가 행복한 마음을 계발하는 쪽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쥐고 있는 짐을 얼마나 많이 내려놓느냐의 문제인데.

 

그 내려놓는 과정이 지혜가 성숙되면 성숙될수록 내려놓음이 많아지고 나중에는 결국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지혜가 점점 성숙되어가면서 우리가 쥐고 있었던 것들, 다섯 가지 장애요소라든가, 어리석음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점차로 내려놓아 지고, 또 전도몽상들, 전도몽상이 놓아지고 이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에 번뇌가 완전히 소멸되는 완전히 내려놓아 지는 그런 단계가 오는데요. 이거를 초기불교에서는 지혜가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간의 지혜라고 하는 지혜고요, 하나는 출세간의 지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세간의 지혜는 또 다른 말로 하면 위빠사나의 지혜다. 또는 그냥 일반적인 지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지혜하고 출세간의 지혜하고 차이는 뭐냐 하면 우리가 세간의 지혜는 일시적으로 번뇌를 내려놓는 거라고 할 수 있고요. 이 출세간의 지혜는 영원히 번뇌를 내려놓는 거다. 이렇게 두 개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그렇게 많이 느껴보셨죠. 선방에 가서 수행을 하는데 수행을 할 때는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해지는 거 같은데, 집에만 돌아가면 다 원래대로 다 돌아가잖아요. 왜 그러겠어요?

 

수행할 때 우리가 생긴 지혜는 세간의 지혜라고 하는 지혜인데, 이거는 그 조건에서는 전체 수행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좋은 스승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수행을 하니까 마음이 맑아지는 거 같지만. 또 그 지혜가 강하지를 않기 때문에 자기 또 현실로 돌아가면 우리 수행을 방해하는 요소가 더 많아지겠죠. 그렇게 되면 무너지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수행을 하면은 이것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잘되다가 또 어떤 상태로 돌아가면 또 내리막길을 걸었다가 또 올라갔다. 이렇게 되는데. 이 출세간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한번 올라가면 다시 퇴보하지 않는 것이 이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의 차이입니다.

 

빨리어로는 우빠다니로다. 우빠다라는 말은 일어난다는 뜻이고요, 미로다라는 말은 소멸한다. 이런 뜻인데. 이거는 다시 일어나는 소멸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일시적으로 번뇌를 내려놓지만, 수행을 방심을 하면 다시 일어난다 이 말이고. 출세간의 지혜는 아노빠다니로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 소멸이다. 그러니까 한번 소멸되면 영원히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거다. 이런 게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점점점점 성장을 하다보면 우리가 뭘 알게 돼요? 연기나 오온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게 되고,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런 것들이 연기적으로 존재를 한다는 것도 이해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연기를 이해하다 보면 뭐를 알게 되냐 하면 모든 게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이해하게 되니까 무상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이런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되고. 그걸 통해서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 실제로 내가 관찰을 해보니까 집착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집착할만한 것이 없다는 거,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이 쥐고 있는 것을 놓는 것이 이욕이라 그럽니다. 욕망을 버린다. 그러죠. 그래서 무상함을 무상고무아를 이해하게 되면 이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요. 이게 혐오의 지혜인데 이렇게 멀어지게 되고, 거기로부터 조금 더 지혜가 깊어지면 이것을 이런 걸 붙들고 있다가 멀어져서 놓는 거, 이게 離欲이욕이라 합니다. 그러면 해탈이 일어나는데.

 

결국,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부처님께서는 모두 다 형성되었다. 그랬습니다.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다.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법들을 우리가 뭐라고 하냐 하면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또는 빨리어로는 상카라라고 그래요. 상카라. 유위법이라는 것이 무상하고, 고고, 무아라는 이 세 가지의 지혜를 얻는 것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위빠사나수행이다. 또는 세간의 지혜를 닦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이제 유위법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를 관찰하다 보면 이것에 대해서 금강경에서도 이런 얘기가 나오죠.

 

일체유의법을 뭐라 그래요? 여몽화포영이라는게 뭐에요? 꿈같고 이슬 같고, 환과 같고. 이게 순간적이고 실체가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일체 유위법이 실체가 없고 무상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보면, 이렇게 보는 것이 뭐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보라.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것이 이렇게 보고 살아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이런 유위법이 실체가 없고, 변하는 것이라는 것을 관찰하는 겁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서 그 지혜가 충만해 지면 나중에 내가 쥐고 있던 것을 관찰해보니까 이게 쥘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것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겠죠.

 

내가 쥐고 있는 것에 대해서. 쥐고 있었던 게 뭐에요? 유위법이잖아요. 그죠? 우리 몸과 마음 세상. 이런 것들을 쥐고 있다가 이것을 쥐는 게 아니라, 이거는 안전하지도 않고. 불안정하고 확실치도 않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게 되면 그때는 마음이 어디로 향하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믿을만한 확실할 만한 것이 부처님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열반이라 그랬죠? 그거를 우리가 무위법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유위법에 대한 집착이 놓이면 우리 마음은 어디로 향하게 되느냐 하면 열반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반으로 향하게 되면 열반을 체험하는 것을 우리가 출세간의 지혜가 일어났다.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세간의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런 지혜가 점차점차 성숙을 해서 정말 이렇게 지혜가 성숙하게 되면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집착이 없어지게 되겠죠.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을 버리고 열반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는데, 열반으로 마음이 향해서 열반을 체험하면서 열반을 이해하는 그 지혜가 출세간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거를 보통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요, 이 깨달음을 얻은 존재를 불교에서는 딱 네 가지 형태로 말씀을 합니다.

 

금강경에도 나오죠? 수다원. 예류. 수다원, 사다함. 일예과라 그러죠. 아나함은 불환. 그리고 아라한. 이렇게 네 가지 형태의 성자가 탄생을 하게 됩니다. 이런 유위법으로 멀어져서 무위법을 얻게 되면.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좀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셔야 할 게 불교에서 깨달음,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내가 지나가다가 ~ 오늘 날씨가 춥구나!’ 하고 깨닫는 것도 이것도 깨달음인가? 아니면 집에 가다 내 걷고 있구나!’ 하는 것도 깨달음인가? 이 깨달음의 기준이 필요하겠죠. 그죠?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놓은 경전이 있습니다. 이 경전이 나오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요, 아난존자가 맨날 누가 죽으면 부처님께 막 달려가 가지고 이 사람은 어디 태어났습니까? 하고 물어보는 거에요. 또 누가 죽으면 쫓아와서 이 사람은 죽어서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그때 계속 이야기를 해주다가 하루 이틀이지 그것도 그죠? 사람이 뭐 죽을 때마다 자꾸 이야기를 하니까, 대게 번거로운 일이 되잖아요. 그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맨날 나한테 묻지 마라. 그거는 내가 나이도 들고 해서 참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가 말한 기준에 맞으면 이 사람은 수다원이다. 그러니까 예류과에 든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게 이 경전이 벽돌집 어떤 벽돌집에서 설한 경전이라 그래서 벽돌집경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여기 보면 법의 거울. 그건 뭐냐 하면 이 사람에게 거울을 딱 비추어가지고 이 사람이 수다원인가? 아닌가?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 말이에요. 법의 거울 경이다. 이렇게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기준으로 해서 제가 몇 가지 수다원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수다원이 되면은 사라지는 번뇌가 있는데요, 그 제일 먼저 사라지는 번뇌가 수다원에서 좀 거친 형태의 번뇌들이 사라지는데. 그 수다원에서 사라지는 번뇌가 크게 나누면 첫 번째 사라지는게 뭐냐 하면, 삿된 견해가 사라집니다. 사견이라고 하는 삿된 견해가 영원히, 일시적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법에 대한 의심이 영원히 사라집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보살님들 잘 아시는 거. 질투, 질투가 없어집니다. 질투가 영원히 사라지고 인색함.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남에게 나누기 싫어하는 인색함. 이 네 가지가 완전히 사라지고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감각적 욕망이 성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요. 수다원이 되는 거는. 그런데 이 수다원이라는 성자가 되면은 우리가 악처에 떨어지게 만드는 감각적 욕망이 있죠. 그죠? 예를 들면 성폭행을 한다든가, 남을. 타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아주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악행을 하는 이런 아주 거친 그러니까 악처에 떨어 질만한 그런 감각적 욕망이나 큰 분노. 이런 건 사라진다. 이 말이죠. 그래서 수다원의 존재가 되면은 달라지는 게 뭐냐 하면 다시는 악처에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지옥아귀축생수라라는 이 네 가지에 절대 태어나지 않고, 이 수다원이라는 존재는 항상 인간이나 천상계만 태어납니다.

 

절대로 그러니까 악처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게 수다원이 되는 거의 차이점인데요. 이거를 지금 여러분들이 실감이 잘 안날 수가 있는데. 이걸 비유로서 설명을 드리면, 부처님께서 이걸 비유를 어떻게 하셨냐하면, 이 지구상에 있는 흙을 손톱으로 이렇게 긁으면 어떤 게 더 많아요? 이 지구상에 있는 흙하고, 이 손톱위에 있는 흙하고? 비교가 안 되겠죠. 수다원이 된 존재에게 남아 있는 괴로움은 이 손톱 위의 흙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에요.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괴로움이 이 지구에 있는 흙이라고 비유를 한다면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괴로움은 이 손톱위의 흙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손톱경이라는 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또 바다경이라는 경이 있는데 거기도 뭐라고 비유가 돼 있느냐 하면. 바다가 있어요. 그 바다에 있는 물하고 바다에 있는 물을 두세 방울 끄집어내면 이 바다에 있는 물하고 어느 게 많겠어요? 그러니까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괴로움은 이 두세 방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수다원이라고 하는 존재가 되게 여러분들이 쉽게 생각하는데, 깨달음이라는 걸 쉽게 생각하지만, 이 수다원만 되기만 해도 벌써 괴로움의 거의 대부분이 사라진 존재라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부처님께서는 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열반이 확정된 사람이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아라한이 되는 그게 확정된 존재다. 이거는 자동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우리가 수행을 처음 할 때는 수행하는 게 꼭 뭐 같겠어요? 오르막길을 열심히 오르는 거와 같아요. 갈라 그러면 번뇌가 또 막아서서 그냥 또 헤이하게 만들고. 그죠? 그런데 어느 정도 수행이 깊어진 사람은 평지 가까이 가는 거라고 할 수 있고. 이 수다원이 되면 내리막길입니다. 돌이킬 수가 없어요. 수다원이 된 존재는. 자기가 다시 중생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가지지도 않아요. 물론 뭐 수다원이 중생으로 가고 싶어 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동으로 아라한이 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확정된 길을 가는 존재다. 이렇게 설명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 수다원이라고 하는 존재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높은 그런 경지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히 법에 대한 이해가 조금 되고, 또 뭔가 밝음이 좀 나타나거나, 어떤 정신적인 체험을 하거나,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요. 적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뇌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그리고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괴로움이 거의 다 끝나고, 더 이상 악처에는 태어나지 않고. 아라한이 돼서 완전한 무여열반이라고 하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된, 그런 존재라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 불교를 잘못이해하다 보면요, 지난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수행을 하다 보면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게 있잖아요. 그런 경계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걸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단 말이에요. 그죠? 어떤 환한 빛이 나타나거나. 무지개가 나타나거나. 뭐 이런 걸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절대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수다원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쉽지 않은 그런 것이고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깨달음의 길이 확정된 존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면 보통 사람들하고 뭔가 달라지는 게 있겠죠. 그죠?

 

달라지는 게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삼보에 대한 신심이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게 아까 말씀드린 아난존자가 물어봤을 때 부처님께서 법의 거울이라고 말한 경전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면 이 사람은 확실하게 예류과에 들어간 존재라고 말씀하신 게 첫 번째가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확고한 거, 법에 대한 신심. 그리고 승가에 대한 신심이 확고한 거. 그러니까 세 가지죠. 불법승삼보에 대한 신심이 확고한 거. 이게 첫 번째고요. 법구경에 보면 문둥병에 걸린 수빠부따라는 재가자가 있었는데요. 이 사람이 부처님 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수다원이 됐어요.

 

그래서 사람이 많으니까. 사람이 많을 때. 내가 도과를 얻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니까. 다 떠나고 나서 이야기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그 제석천왕이라고 들어보셨죠? 그죠? 제석천왕이 와서 이 사람이 진짜 수다원이 됐는지 안됐는지 실험을 하려고 그런 거죠. 와서 물어보는데. 너는 참 가난하게 살고 몸도 문둥병도 걸리고 참 고생을 많이 했다. 네가 만약에 이 자리에서 내가 제석천왕인데,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니가 이 자리에서 불법승삼보를 비방하고 거부를 한다면 너를 최고의 거부로 만들어주고 몸도 낫게 해주겠다. 이렇게 살~ 꼽니다.

 

그런데 이 수다원이 된 존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불교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죠. 신심이 확고해지기 때문에. 왜 신심이 확고해지겠어요? 아까 말했듯이 수다원이 되면 사라지는 번뇌 중의 하나가 의심이거든요. 법에 대한 의심이 영원히 사라지기 때문에 이건 절대로 법을 포기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무슨 소리냐? 내가 어떻게 가난하냐? 내가 부처님의 이런 법을 얻었는데 어떻게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하면서 그거를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네가 아무리 꽈도 이 사람 마음은 흔들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