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442회] 청정한 마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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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즉문즉설(2018)

2018. 11. 16.



가끔씩 마음이 어두운 감정에 잠시 사로잡힐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마음을 바로 보고 알아차림을 알고 제 마음을 가다듬곤 합니다

불교 방송을 요새 우연히 보다가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가는 연습을 반복해야 된다'

그런 말씀을 듣고

본래의 청정한 마음? 그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생활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방법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질문이 책을 너무 많이 읽고 하는 질문 같아.

그런 질문은 너무 관념적인 질문이오.

자기가 살면서 지금 제일 어려운 게 뭐요?

 

그러니까 자기 지금 현실적인 고민은 자녀가 아토피가 있다가 고민이 아니고 다시 돌아가서 도 청정한 마음이 뭔가? 이게 지금 제일 큰 번뇌군요.

 

그러면 마음을 여기 한번 내놔 봐요.

.

그러니까 본래 청정한 마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게 청정한 마음이다라고 내가 얘기해 준다고 그래서 자기 인생의 변화가 아무것도 없어요.

 

극락이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있다. 한다고 자기에게 아~~~무 변화도 없고

극락이 있습니까? 해서 내가 없다. 한다고 자기 인생에 아~~~~무 변화도 없다. 이 말이오.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납니까? 그래. 한다고 아무 변화도 없고

그런 게 어디 있노? 안 태어난다. 이런다고 해도 아무 변화가 없다.

 

왜 그러냐?

천당이 있느니, 지옥이 있느니, 극락이 있느니, 윤회를 하느니, 안 하느니, 마음이 본래 청정하니 안 하니 하는 것은 실제 세계를 가지고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들의 생각에서 하는 거란 말이오. 생각에서 하는 것.

 

그걸 믿으면 믿는 사람에게는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걸 안 믿으면 안 믿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란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있느냐, 진짜 없느냐 하는 것은 이것은 증명할 수도 없고, 증명 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

 

그 자체는 실제가 아니고

사유에 해당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건 그냥 어떤 사람이 극락이 있다. 그러면 ,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가 보다.’

누가 천당이 있다 하면 ,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구나.’

윤회한다. 그러면 ,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구나.’

안한다하면 , 저 사람은 저렇게 안 믿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진짜가?’ 이렇게 할 게 아니라는 거요.

 

귀신이 있다 그러면 저 사람은 있다고 믿는구나.’

없다고 하면 저 사람은 없다고 믿는구나.’

이렇게 해야지 진짜 있나? 진짜 없나?” 이렇게 할 게 아니라는 거요.

왜 그럴까?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건 실제의 문제가 아니라 가상현실의 문제다. 이런 얘기에요.

 

자기가 꿈에 어머니 심부름을 가다가 꿈을 깼어. 그럼 깨고 나서 심부름을 계속 가야 되나? 안 가나? 안 가지.

그런 것처럼 그것은 꿈속의 얘기와 같은 거요.

그러니까 꿈속에 있을 때는 그게 현실 같은데, 눈을 떠보면 현실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호랑이꿈 꾸고, 어떤 사람은 개꿈을 꿨다 하면 누구 꿈이 더 좋으냐? 누구 꿈이 더 맞느냐?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고,

두 사람의 꿈이 달랐다.

다른 꿈을 꾸었다.

이렇게만 말 할 수 있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본래 마음이 청정하다.’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건 그 스님이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는지는 그 스님한테 물어봐야지, 본래 마음이 청정한 게 있다 없다는 논쟁거리가 되지, 누구도 있는지 없는지 몰라.

 

그럼 법륜스님이 그걸 해석을 한다. 내가 해석하면 그 스님이 해석하는 거 하고 달라.

그러면 산에 있는 다람쥐가 뛰어다니는 거 보면 다람쥐가 괴로워 하더나 안 괴로워 하더나? 그래. 나무가 조금 높다고 불평할까?

 

그런데 사람은 다람쥐보다 낫잖아.

그럼 다람쥐가 사는 게 힘들까? 사람이 사는 게 힘들까? 그런데 다람쥐는 그거 갖고 불평도 안하고 괴로워도 안 하잖아. 그러니까 사람도 사는 걸 갖고 괴로워하거나 불평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거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런데 사람은 가상현실, 환상에 사로잡혀서

괴로워죽겠다. 못살겠다. 난동을 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가상현실에 휩쓸려서 이런 데서만 깨어나면

괴로울 일이 본래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데,

지금 사람이 그 권리를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을 굳이 말한다면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모든 사람은 다 부처다.

모든 사람은 뭐할 권리가 있다고? 행복할 권리가 있어.

남자든 여자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어린애든 어른이든, 신체장애가 있든 건강하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한국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다 본래 부처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

 

이걸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어떨까?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다.

하나님의 아들딸인데 괴로울 일이 뭐가 있겠어? 그죠?

 

그러나 결국은 우리가 그런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행세하지 못한다.

그래서 괴로움에 빠져 있다.

 

그러니까 부처지만 부처의 역할을 못하고 중생노름을 한다.

본래 마음이 청정하지만 물들어서 지금 탁하게 되어 있다.

 

원래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딸이지만 지금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쫓겨나듯이 지금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된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거라.

불교식으로 말하면 본래 부처의 자리로 돌아가거라.

그 스님이 말한 대로 하면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러니까 청정함을 찾아라. 이 말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거라.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그 상황이 나쁘다고 하지만 뭐하고 비교해서 나쁘냐?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관념적인 질문을 하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 아니 아니 여기 봐. 끝을 내야지

 

여기 물병이 있고, 컵이 있고, 컵 뚜껑이 있다.

이 컵을 물병하고 비교하면 이 컵은 물병보다 커요 작아요?

컵 뚜껑보다는? 물병 보다는?

그럼 이 컵은 커요 작아요?

몰라. 아니 이걸 몰라? 큰지 작은지?

 

그러니까 이 컵이 크냐 작으냐는 질문에 따라서 대답을 하는 방법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크다 할 수도 없고 작다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되는 거요.

 

이 컵은 뭐라고?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하면 비대비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컵을 두고 크다 작다할 때는

컵이 커서 크다, 컵이 작아서 작다라고 하는 줄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요.

 

컵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지마는,

이 컵을 내가 인식을 할 때 요 물병하고 비교해서 인식을 할 때는

인식이 작다고 인식이 되는 거요.

 

요 뚜껑하고 비교해서 인식할 때는 요 컵이 나한테 뭐라고 인식이 된다?

크다고 인식이 되요.

 

그러니까 크다 작다는

이 컵에 있는 거요? 인식에 있는 거요?

인식에 있어요.

 

그러면 우리 남편이 나쁜 놈이다. 좋은 사람이다. 할 때,

나쁘고 좋은 것은 남편한테 있어요? 내 인식에 있어요?

(인식에 있어요.) 아따, 공부 빠르다.

 

, 그러니까 법륜스님이 좋다, 훌륭하다. 하는 것은

법륜스님 자체에 있는 거요? 여러분들 각자 자기 인식에 있는 거요?

그러니 믿을 게 못 되요.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그러냐? 일체 유심조라 그래.

크니 작니,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무겁니 가볍니, 새거니 헌거니, 값이 비싸니 싸니, 귀하니 천하니 하는 게 다 존재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뭐의 문제라고? 마음의 문제다. 인식상의 문제다.

 

지금 이 분이 하도 철학적으로 질문을 하셔서 지금 철학적으로 깊은 걸 공부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누가 이걸 질문해. 그 컵이 새거요? 헌 거요? 그러면 뭐라고 해야 된다? 새거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니다.

그 컵이 비싸요? 싸요?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는 거요.

무거워요? 가벼워요? 해도 뭐라고?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이게 뭐하고 비교해서 인식이 되느냐에 따라서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면 안 돼요.

 

때로는 뭐라고 대답해야 될 때도 있다?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이러면 안 돼요.

컵하고? 이러면 작다.

뚜껑하고? 이러면 크다.

 

그러니까 이 컵은

그 무엇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는 거요.

 

이 컵을 컵 자체의 본질적으로는 그 무엇도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가 인식상에서는 이건 무엇이라고도 인식이 될 수도 있어요.

요 물 담으면 물잔, 커피 담으면 커피 잔, 밥 담으면 밥그릇, 국 담으면 국그릇, 정해져 있는 거 아니오.

애가 오줌을 눌 때 가서 얼른 받으면 요강.

 

그러니까 이것을 내가 커피 잔이다. 라고 생각하면 이 존재가 커피 잔은 아니에요.

내가 커피를 담는 용도로 써서 커피 잔이라고 부르는 거지. 이해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작다고 부르면

이게 작기 때문에 내가 작다고 인식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거요.

 

, 객관은 그 무엇도 아닌데, 주관이 작은 건데,

작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작다고 착각한다.

이게 주객전도요.

 

그래서 이 컵을 가지고 애기가 오줌 눌 때, 이걸 갖고 못 받는 거요.

이거는 뭐 담아야 되기 때문에? 커피 담아야 되기 때문에.

 

그러면 이 컵도 있고, 요강도 있는 데 애기 오줌 눈다고 이거 갖고 받으면 되나?

그것은 활용을 잘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용도가 물 잔이 따로 있고 커피 잔도 있을 때는 물은 물 잔에, 커피는 커피 잔에.

그러나 이것이 물 잔으로, 커피 잔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물 담으면 뭐가 되고? 물 잔이고, 커피 담으면 커피 잔이 된다.

이렇게 자유로워야 돼.

 

그러니까 이런, 이 커피 잔은 그 무엇도 아니다. 이것을 공이라고 그래.

뭐라고? .

이런 것을 이름하여 청정하다. 이렇게 말해.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그 무엇도 아니에요.

엄격하게 말하면 이 컵에다 공이라는 이름도 붙이면 이미 어긋나.

이름하여 공이라고 할 뿐이지.

 

그러니까 마음은 청정하다고 이름 붙여도 사실은 어긋나.

그러나 우리가 이름하여 이런 케이스를 뭐라고 한다?

본래 마음이 청정하다. 그냥 이렇게 부를 뿐이에요.

 

내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말은

내가 본래 부처라는 말이고

그것을 생활상에서 쉽게 이해하면

나는 언제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도 뭐할 권리가 있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아이가 아토피로 가렵다고 아우성을 쳐도

그런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왔다 갔다 해도

내가 괴로워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괴로워한다고 그게 치료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하나의 일거리지.

 

아토피 때문에 병원에 데려가든,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데려가든

그냥 하나의 일거리지 괴로워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