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7회 중도와 화합과 소통(마지막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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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2011. 12. 4.

  방송 보기: 불교TV


~ 그동안 팔정도에 대해서 법회를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 팔정도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은 다 말씀을 드렸고요, 팔정도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마지막으로 정리만 한 번 하고, 제가 하기로 한 법회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스님이 성철스님이신데요, 성철스님께서 항상 강조하신 내용 중의 하나가 중도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100일 법문을 보신 분도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 백일법문의 내용이 초기불교부터 시작을 해서 부파불교시대. 그리고 중론, 유식, 지금 천태, 화엄, 선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파에서 공통적으로 중도라는 것을 불교수행의 가치로서 이야기를 했고, 중도를 이야기하는 가르침이면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렇지 않으면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백일법문을 하셨는데요.

 

중도라는 것이 불교에서 있어서 대게 중요한데. 중도라는 내용을 가지고 팔정도를 마무리를 지어볼까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말하는 중도라고 하는 말은 빨리어로도 마찌마빠띠빠따라고 용어가 있습니다. 중도라는 용어가. 경전에서 말하는 중도라는 말씀은 항상 뭐로 표현이 되느냐 하면 팔정도로 표현이 됩니다. 나는 중도에서 법을 설한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항상 팔정도를 설명을 하시게 되고요. 그 성철큰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내용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약간 같이 들어있는데요. 팔정도에 첫 번째가 뭐죠? 제일 첫 요소가 정견이잖아요. 그래서 경전에 보면 용어가 약간 다르게 쓰여지고 있는데요. 정견을 가지고 중이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그리고 보통 우리가 중도, 그러니까 마찌마빠띠빠다라고 중도를 이야기할 때는 항상 팔정도를 이야기했고요. 나는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말할 때는 정견을 이야기하는 거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마찌마라고하는 그 용어만 들어가는 것은 중, 그러니까 중도라고 표현을 하기보다는 중이라고 표현을 했고요. 그래서 정견이라고 하는 것을 중이라고 표현을 하고, 보통 팔정도 전체를 이야기할 때는 중도라는 표현을 보통 많이 쓰셨어요. 그러면 중이라는 표현, 이걸 그냥 통칭해서 중도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면, 중도의 첫 번째 요소가 중이라고 하는 정견인데요.

 

이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우리가 수행을 해나가는 뭐라고 이야길 할 수 있죠? 뭐라고 할 수 있어요? 방향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해야 되느냐? 요즘 말로하면 좀 패러다임이라고 그러죠. 어떤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 이런 관점인데요. 정견이 바로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게 되면 수행의 방향성 자체가 잘못된 길로 갈 수가 있다는 거에요.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지점이 분명하게 설정이 된 상태에서 노력을 해야 그 노력이 올바른 노력이 될 수가 있는데. 노력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노력을 하게 되면 그것이 얻어지는 결과가 올바른 결과로 얻어진 다기 보다는 어떻게 되겠어요?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겠죠? 그런 걸 외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를 갖는다라는 것은 수행의 시작이고요. 어떤 방향성을 설정하느냐고도 관계있습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해야 그 수행이 올바른 결과를 이끌어 낸다는 거죠. 우리가 쉽게 쉬운 비유로써, 그러니까 전에도 그런 말씀 한번 드렸지만, 독사가 물을 먹으면 어떻게 돼요? 독을 만들잖아요. 그죠? 그런데 젖소가 물을 마시게 되면 우유를 만들죠. 그러니까 이거는 그 사람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하느냐에 따라서 아주 좋은,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으로 갈 수도 있지만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하게 되면 외도의 길을 갈 수가 있다. 이거죠. 그래서 바른 견해라는 것이 중요한데.

 

불교에서 말하는 이 바른 견해라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중도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때 부처님께서 중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설명할 땐 항상 뭐로 설명을 했냐 하면 연기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극단적인 견해. 자기만의 고집을 가지고 사견의 뜻이 바르지 않은 견해에 대한 고집이거든요. 그것이 옳지도 않은 건데 고집을 피우는게 사견인데. 그런 극단적인 견해에 빠지지 않고 항상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견해에는 주로 뭐가 있어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게 자아가 있다고 생각, 영원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뭐라고 그럽니까? 상견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변하지 않는 무슨 실체가 있다는 거에요.

 

그 대표적인 예가 요즘 우리 세계에서 보통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

이 뭐냐 하면 기독교라든가, 이슬람교라든가 이런대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하죠. 힌두교도 그렇고. 변하지 않는 뭔가 실체가 있다고 보는 쪽이 상견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무슨 실체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뭐가 있어요? 보통 유물론자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당견이라고 그러죠. 죽으면 끝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는 걸로서 모든 게 끝이지. 우리 불교에서 말하듯이 죽었다 하더라고 업이 남아 있으면 어떻게 돼야 되요? 불교에서는. 태어나야 되잖아요. 그죠?. 그런데 그런 것이 없이 죽으면 끝이라고 보는 것. 이런 걸 단견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보통 자살을 많이 하는데 자살하는 배경에는 내가 지금 현생이 고통스러우니까 이것으로서 이 현생을 마감하고 죽으면 고통은 끝날 거다라는 그런 과정이 포함되어 있잖아요. 그런 견해가 포함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단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우리가 불교에선 두 가지 아까 말씀드린 상견, 항상 있는 모든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보는 상견이라는 것이 있고, 죽으면 끝이라고 보는, 대표적인 것이 유물론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유물론자들이 가지는게 죽으면 몸이 땅으로 흩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이거죠. 그렇게 보는 견해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이 두 가지 견해가 부처님 당시에 주된 견해였습니다.

 

한쪽은 상견, 한쪽은 단견인데. 부처님께서는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버리고 어떤 견해로서 법을 설하셨느냐 하면 조건 따라 일어난다. 연기의 가르침을 설하시게 되시는 거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냥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보는 입장에선 그 실체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발생한다고 보는 게 있단 말이에요. 그죠? 그러니까 실체가 원인이라고 보는 거죠.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거에요. 원인에 의해서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 인과법을 말씀하신 거죠. 원인이 있으면 일어나고 원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 하는 것이 기본적인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은 굉장히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뭔가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말은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실체가 있다면 그 실체에 의해서 모든 일이 발생을 하는데. 이거는 예를 들어서 이렇게 손으로 치는 손과 이것이 부딪침으로 소리가 나는 거지. 이런 조건에 의해서 어떤 일이 발생을 하는 거지, 자아라는 것이 지금 일어나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고, 조건이 사라지면 결과가 사라지는 것이지. 어떤 영원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보진 않는 거에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말을 통해서 상견이라는 것이 부수어지고요, 일어난다. 조건이 있으면 결과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라고 보는 것이 단견을 부수어 버립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아까 말했듯이 자살을 한다고 해서 내가 죽으면 끝이다, 라고 생각하고 죽는다. 하지만 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업이 남아 있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거에요. 나는 안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안 태어나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거는 자기가 업이 있는 한은 우리가 끊임없이 윤회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조건 따라 일어난다는 의미이거든요. 그럼 단견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죠. 그죠? 단견은 내가 업이 있건 없건, 죽으면 끝이라고 보는 게 단견이란 말이에요. 그죠? 그리고 또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말은 어떤 실체에 의해서 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적당한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일어난다는 거기 때문에 그건 또 상견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어떤 견해에도 치우치지 않고, 조건에 의해서 이 양쪽을 치우치지 않는 범위에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걸 뭐라고? 중에 의해서 법문을 하셨다. 상견도 아니고 단견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중이라는 표현을 쓴 거죠. 그런데 이건 좀 이론적인 이야기고 우리가 실제로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 하면요. 조건 따라 일어난다는, 이 일어난다는 측면에서 보면은 보통 인과법이라고 그러잖아요. 내가 선행을 하면 선업이 일어나고 악행을 하면 악보를 받는다. 그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부처님께선 원인과 결과라 그랬거든요. 여러분들이 마음을 나쁘게 쓰면 나중에 그것에 의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일어난다. 이거요.

 

예를 들어서 전생에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이 이생에 수명이 짧아진다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리고 남을 많이 괴롭힌 사람은 몸이 많이 아파요. 아픈 데가 많다. 이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이야기하는 인과법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거는 그러니까 조건이 있으면 일어난다는 거죠. 어떤 조건이 형성이 됐을 때는. 그런데 또 한쪽 측면,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거는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진단 말이에요. 그죠? 그거는 뭐를 의미하는 거겠어요? 실체가 없다는 뜻이에요. 실체라면 사라지면 안 된단 말이에요. 영원한 뭔가가 있다면 사라지면 안 되죠. 항상 있어야 되잖아요. 그죠?

 

그래서 이 사라진다는 측면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 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봤을 때 그 현상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측면이 있고. 이 형성된 것에서 뭔가 영원하게 변하지 뭔가를 찾아보면 없다는 거에요. 실체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예를 들어서 이런 시계가 있는데요. 이 시계가 있어요? 없어요? 지금? 없지는 않죠. 여기 지금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거에서 뭔가 변하지 않는 실체를 찾아보면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거는 현대 물리학에서 다 확인해 봤습니다. 없어요. 이런 게. 옛날에 원자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봤는데, 지금은 원자도 깨보니까 그중에 전자하고 원자핵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원자핵도 깨니까 중성자 그다음에 양성자 이런 걸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걸 또 깨보니까 쿼크나 기본 입자라고 하는 걸로 이루어져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있기는 있지만 여기서 고정불변한 실체는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측면, 거기서는 이걸 공이라 그러고 무아라 그럽니다. 그런데 또 이것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 부분. 이건 있단 말이에요. 이런 거는 뭐라 그러냐 하면 인과의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공이라는 측면과 인과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다고 보는 이것을 우리가 뭐라 그래요? 이걸 중도라 그럽니다. 이걸 중이라 그러고.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이해할 때 너무 공이라는 측면만 이해를 하다보면, 뭐 걸리지만 않으면 돼. 모든 게 공인데. 뭐 내가 무슨 행위를 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이런 거는 소위 말해서 원인을 부정하는 단견, 이런 건 아주 위험한 사견에 해당합니다. 그런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공이라는 측면을 잘못 이해하면 소위 말해 단멸공이라고 하는 아주 위험한 견해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여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 다 공한데 실체가 없는데, 이런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견해고요. 또 너무 인과적인 측면만을 이해하고 공을 이해를 못 하면 여기에 집착이나 이런 게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죠? 그래서 공이라는 측면과 실제 현상적인 측면. 이 실체가 뭔가 현상이 형성 돼 있기는 하지만 이 형상의 본질적인 면에서는 변하는 것이고 실체가 없다. 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공이라 그래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측면을 다 두루 이해를 하면 이 두 가지를 초월하는 의미도 되잖아요. 그죠? 그런 의미에서 중도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이해할 때는 너무 한쪽 측면만 이해를 하다 보면 이것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서 보세요. 아라한들, 깨달은 분들은 무슨 행위를 하지만, 제가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일반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집착이 달라붙을 수가 있어요. 그죠? 그런데 아라한, 깨달은 존재들은 아름답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공한 줄을 알아요. 실체가 없는 것이고. 그것이 집착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게 중도적인 관점이죠. 그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떤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게 되면 그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모르니까 그것이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집착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그죠? 여러분들이 부처님께서도 내가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부처님께서 여래가 이렇게 할 때 내가 여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그죠?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거기에서 공하다는 것은 명확히 통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연기에 대한 통찰이고, 연기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바로 중이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게 중에 의한 바라보는 것. 이게 바른 견해라는 거죠.

 

그런데 불교를 너무 한쪽 측면에서만 이야기해서 뭐 인과가 없다. 이것은 그렇게 바라본다면 이거는 정말 위험한 생각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공하다고 안다 할지라도 그 과보는 있습니다. 과보가 약해지기는 하죠.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어떤 적이 있었느냐 하면, 부처님의 전생에 보면 레스링선수였던 적이 있어요. 부처님께서 등이 아파서 고생한 적이 있죠. 그게 전생에 레스링선수일 때 상대의 등을 부러뜨렸대요. 그래서 그 과보로 부처님당시에 그 과보가 익은 건데. 부처님께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셨잖아요. 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지었던 그 업은 받아야 돼요. 그거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요.

 

다시 업을 짓지 않고, 죽은 이후에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업을 받을 조건이 없어지는 거지만. 그래서 인과라고 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선업을 많이 하면 그런 것이 좀 약화되기는 하지만. 그래서 이 공이라는 측면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서 인과라는 측면을 반드시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불교가 아주 이상하게 될 수도 있어요. 뭐 무슨 행위를 해도 걸림만 없으면 된다. 이런 거는 굉장히 위험한 불교를 타락시키는 관점이거든요. 이렇게 바라보는 게 중도다. 올바른 견해라는 거죠. 그런 견해가 바로 불교의 시작이고, 이것이 올바른 방향성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거죠.

 

그게 중도라고 말하는 팔정도에 처음이 왜 바른 견해이냐? 하는 거에 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제 우리가 부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뭐라고 그랬어요? 오온이라 그랬죠. 오온이고 실체가 없다고 그랬는데, 왜 또 비구들이여, 여인이여. 막 이렇게 했겠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공이라는 건 알지만,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도 필요하고 부처님께서 또 이런 공으로 말하는 지혜를 말씀하셨지만, 또 뭐를 말씀하셨어요? 자비를 이야기했잖아요. 그죠? 우리가 공이지만 이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또 이렇게 형성되어 있는 동안에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거에요. 그게 자비심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