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 교수의 죽음 이야기 첫방송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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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_죽음이야기

2011. 12. 18.

  출처: 유나방송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최준식입니다. 이렇게 유나 방송을 통해서 여러분을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또 죽음이라는 인생의 가장 큰 주제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어서 기쁘고 또한 영광스럽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죽음보다 과연 더 큰 문제가 우리 인생의,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죽음은 종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에 있죠.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종교도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종교의 목표를 우리가 크게 얘기할 때 불멸과 자유.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불멸, 죽음을 극복하는 거. 이게 종교의 목표이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죽음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이 첫 방송이니까요. 본인 저를 잠깐 소개를 하고 본 강의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전공은 종교학입니다. 종교 중에서도 중국이나 한국종교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그것을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현재는 이화여대에서 한국학과에서 종교도 가르치고 또 한국 문화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얘기입니다마는 제가 종교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은요. 아주 간단했습니다. 사는 게 괴로워서. 하루하루 사는 게 즐겁지가 않고 말이죠. 그래서 원인이 뭔가? 찾아봤더니, 찾아보니까 답은 종교에 있더라. 그런 결론을 내게 됐습니다.

 

종교라는 거를 나중에 또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정의를 할 때 우리가 궁극적인 문제,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갖는 문제에 대해서 그 문제가 어디가 문제인가? 이런 것을 분석을 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과연 종교 속에 내가 생각하는 그런 해답이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제가 이번에 죽음에 대해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3년 전쯤 됩니다. 2005년에 제가 한국 죽음학회라는 것을 만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회장으로 있습니다 만은. 그렇게 해서 죽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또 이렇게 유나 방송과 인연이 돼서 여러분과 같이 만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 이 죽음학회가, 한국죽음학회죠. 죽음학회가 만들어진 배경을 말씀드리면요. 칼 베커(C. B. Becker)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일본 교토대학교수인데 미국분이죠. 그런데 불교도입니다. 아주 신실한 불교도입니다. 부인도 일본분 불교도고. 이 분이 이제 한림대학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 이 분이 이쪽에 또 일각 연이 있는 분입니다. 이분이 강연을 할 때 제가 논평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든 좋은 강의 듣고, 논평을 하고 끝나고 식사하러 술 마시러 갔다가 저희들끼리 우리 저 한국교수들끼리 이렇게 하지 말고 우리 한국에서도 죽음학회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생기게 된 겁니다.

 

현재 3년 정도 됐고요. 저는 그 동안에 그 죽음학에 관한 책을 하나 쓴 것이 있고, 번역한 게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거라 생각되는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미국의 저명한 죽음학자가 있었죠? 2~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마는 그분이 죽음 뒤에 삶에 대해서 쓴 그 책이 있습니다. 그걸 번역을 했는데 사후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을 했습니다만 그런 관계로 지금까지 죽음학에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 제가 이제 아마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약 10번 내지 12번 정도의 강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할 얘기가 너무 많구요. 또 하다 보면 얘기가 얼마나 늘어질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저도 지금 딱 몇 번째로 끝날 것이라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한데요. 아마 12번 이내로 끝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주제들을 잠깐 보면요. 오늘 첫 강에서는 왜 죽음인가? 왜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되는가를 말씀을 드리고. 그다음에 역시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삶과 관계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가? 이런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죠. 삶과 죽음의 관계에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얘기를 하겠고. 여기서 아마 종교와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아마 그 제가 강의를 하는 동안에 계속해서 종교 얘기가 나올 겁니다. 불교 얘기도 나올 거고. 때로는 기독교 얘기도 나올 거고 말이죠. 그런 주제가 연속해서 거론이 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다음에는 인간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을 인간이 과연 어떻게 인식을 하는가? 또 왜 인간만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런 문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런 문제입니다.

 

그다음에는 역시 우리가 죽음을 얘기할 때 말이죠. 죽음 이후의 문제를 얘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것은 존재하느냐? 마느냐? 가장 기본적인 문제부터요. 이것은 그 죽음 이후를 갔다 와서 뭐 그걸 체계적으로 쓴 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분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학술적으로 돼 있는 거 같지는 않고요. 그런 분들 말고, 이른바 죽었다 깨어난 사람들, 임상적으로, 의학적으로 죽음을 선고받고 다시 되돌아온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체험, 이 분의 임사체험, 근사체험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을 중심으로 죽음 이후의 생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다음에 역시 한국인, 우리가 지금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어떤 죽음 관을 갖고 있겠는가? 특히 죽음이라는 것은 종교에 영향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어떤 종교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죽음교육, 이 죽음학이란 관계된 주제는 결국은 죽음교육으로 귀착이 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왜 죽음학을 하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잘 죽느냐? 이런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이 돼서 죽음교육이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고 저도 이 주제를 마지막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 여기까지가 서론 격에 해당되겠고요. 오늘 얘기로 들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왜 죽음인가? ~ 왜 죽음인가? 이것 참 거대한 주제고 말이죠. 무겁기도 하고, 피하고 싶은 이런 주제죠? 왜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여러분 뭐 다 아시는 것처럼 죽음과 삶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거겠죠. 죽음을 빼고 삶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겠습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태도, 우리 보통사람들이 한국인이나 다른 나라 사람이나. 특히 우리 한국인들 같은 경우에 죽음에 대한 태도가 한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는 거 같애요. 뭐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만.

 

첫 번째는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혹은 혐오하는 태도. 제가 죽음학을 하고 죽음학과 연관해서 여러 사람을 만날 때 죽음 얘기를 하면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마는 많은 사람들이 재수 없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왜 살기도 바쁜데 죽음 얘기를 하느냐? 또 죽음문제를 가지고 특히 TV 방송국하고 다큐를 만들자. 무슨 토론 프로를 만들자. 이렇게 얘기 하면은 한국 시청자들이 죽음 얘기만 나오면은 이게 바로 채널을 돌려 버린다 이거죠. 여러분 잘 아시는 KBS 생로병사라는 다큐 프로그램 있지 않습니까? 거기 생로병사라고 해 놓고 사가 있죠? 죽음이라는 게 있죠? 죽음에 대해서는 다루지를 않아요. 그만큼. 그 사람들은 그러는 거에요. 죽음 다뤘다가는 시청률 그냥 곤두박질한다. 이 말이죠.

 

아주 예민한 주제가 됩니다. 이런 태도, 바로 부정하는 거, 혐오하는 거, 마치 자신은 안 죽을 것처럼. 우리 전부 그렇게 생각하죠. 남은 다 죽지만 나는 안 죽을 거다. 이성적으로는 나도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감성적으로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부정과 혐오 태도가 있고. 그다음에 외면과 배타의 태도입니다. 이게 무조건 외면하는 거에요.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피해 가는 거죠. 제가 한 번 친구를 만났는데. 음반 만드는 친구에요. 그래서 잘 만났다. 왜냐? 내가 너 돈을 벌게 해 줄 수 있다. 그래 뭐냐? 그러 길래.

 

제가 죽음 음악을 만들면 돈을 벌 수 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게 우리가 그 마지막 죽기 직전까지 말이죠. 거의 식물인간 상태.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거는 청각이라 그래요. 아무리 의식이 없고, 코마상태에 있더라도 다 듣고 있는다는 겁니다. 만약 가족 중에 그런 분이 있으면 가서 자꾸 얘기를 하세요. 다 듣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청각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 힘든 시간에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그러더라고요. 이런 음악, 음반을 만들면 많이 참 팔릴 것 같다.

 

제가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 친구가 아~ 그게 무슨 소리냐? 왜 죽음을 얘기하느냐? 이거에요. 그래서 왜 죽음을 얘기하면 안 되냐? 그랬더니. ~ 죽는 거는 죽을 때 가서 보자. 이렇게 외면해 버리는 거예요. 제가 그랬죠. 죽을 때 가서 보면 늦는다. 그때는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지. 그땐 너무 황급하고 얼떨결에 그런 죽음을 직면하기 때문에, 늦기 때문에 안 된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역시 말이 잘 안 통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이 죽음에 관해서 역시 불교가 굉장히 많은 콘텐츠를 갖고 있죠? 여러분 다 아실 거로 생각되는데. 그 유명한 사형수의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떤 불교에 나오는지는 확인 못 해봤습니다만 인간은 모두 죽는 존재다. 이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든 비유죠. 사형수가 있었죠? 코끼리가 죽이게 됐는데 마침 풀려나서 도망갑니다. 코끼리는 죽이려고 바로 쫓아옵니다. 바로 이게 우리 그 죽음, 인간의 모습이라는 거죠. 죽음이 계속 쫓아오는 그런 모습.

 

그래서 사형수가 계속 도망가다가. 사형수 참 설정한 거는 인간은 죽기 때문에 사형수라고 설정한 거 같구요. 앞에 그 우물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잘 됐구나! 봤는데. 우물 바로 옆에 나무가 하나 있었고, 나무줄기에서 칡넝쿨이 드리워져 있었던 거예요. ~ 잘됐다. 저기를 타고 내려가면 난 살겠구나. 그래서 그걸 타고 내려갔는데 우물 그 돌 사이에서 뱀이 쉭~ ~ 거리면서 죽이려고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큰일 났다 싶어서 발로 더 내려가야 되겠다. 싶어서 밑을 봤더니 악어가 어서 내려오십시오. 내려오시기만 하면 다 잡수실 테니까. 이런 식으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이거 뭐 絶體絶命절체절명이죠.

 

그랬는데 또 위를 쳐다봤더니 쥐 두 마리가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는 거예요. 참 이게, 바로 이런 게 부처님, 예수님 성자들이 성인들께서 하는 비유입니다. 참 대단한 비유죠. 그런데 여기서 이 비유가 끝났으면은 그 효력이 많이 절감됩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의 대단한 천재성이 여기서 나오죠. 나뭇가지 위에 꿀통이 있고, 벌꿀 집이 있고. 거기에서 똑똑 그 벌꿀이 떨어져서 그게 사형수 입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 사형수는 그 벌꿀 맛에 취해서 자기가 그렇게 엄청난 위기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런 게 바로 인간의 상황이다. 이렇게 비유를 합니다.

 

이것을 듣고서는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그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뒤로 나자빠졌다. 그래요. 어쩌면 이렇게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정확하게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감동적으로 묘사를 하고 있느냐?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강의 시간에 학생들한테 들려주고 만약 너희들이 이런 얘기 듣고 감동이 없다면 정말 너희들 큰 문제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어떻든 죽음에 대한 얘기는 종교에서 많이 되고 있습니다.

 

제 주위에 보면요.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는 죽음에 대해서 뭐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때 가서 죽으면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얘기하고. 난 죽음 얘기할 필요 없다. 이런 얘기 하는 분이 있습니다. 참 저는 오만한 발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럴 때 그런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 아직도 당신 주위에서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경우가 없다. 당신 죽음을 아직 못 만났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그 사람이 죽게 되면 아마 당신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게. 물론 부모님 죽음이 있겠죠. 그런데 부모님 죽음은 대체로 일 년이면 다 잊습니다. 정말 슬픈 죽음은 자식들 죽음이죠. 자식들 죽음은 우리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가슴에 묻는다. 이렇게. 정말입니다. 평생을 갑니다. 자식의 죽음을 당하고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 안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다음에는 사후생 문제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자긴 죽은 뒤에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죽으면 다 꽝이다. 다 없어진다. 그렇게 쉽게 판단 내릴 수 있을까요? 그게. 그때 다시 반문합니다. 만일에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면 과연 지금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죽어서 말이죠. 다 사라지는데 지금 살면서 뭔 의미를 찾을 것도 없고. 특히 안되는 게 도덕입니다. 윤리. 왜 착한 일을 해야 되는가? 남을 왜 도와야 되는가? 이런 것들. 거짓말 하지 말아야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