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최준식 교수의 죽음 이야기 8월 14일 방송 (29:44)

댓글 0

최준식_죽음이야기

2012. 2. 19.

  출처: 유나방송

뭔고 하니 이거는 죽어가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가족, 혹은 친지들 친구들의 문제입니다. 죽음학에서는 세 단계로 나누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주변에 있는 가족들이 세 단계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일단 영어로 얘기를 해볼게요. 첫 번째 단계는 bereavement, 상실이라고 합니다. 상실의 슬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의 슬픔. 그다음엔 grief. 비탄. 첫 번째 것은 상실이 중요했다면 이번에는 슬픔이 중요시하게 됩니다. grief, 비탄. 그다음에는 mourning. 애도라고 하거든요. 이건 뭔고 하니 슬픔의 단계는 지나고 그다음에 다시 본래 생활로 적응되는 데 걸리는 그런 시간이라든가 과정을 애도라고 부릅니다. 그렇죠?

 

일단 상실감을 갖게 되고 아주 큰 슬픔에 비탄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죠. 그걸 극복해 나가면서 또다시 현실에 적용해 나가는 것. 이것을 애도 혹은 모닝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바로 죽음 교육은 이런 과정을 순탄하게 겪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사실은 임종당사자에 대한 죽음 교육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애도 교육입니다. . 한 예를 들어볼까요? 부모가 타개한 경우에는 그래도 어렵지 않게 죽음 그 슬픔을 극복을 하게 되는데. 자식이 먼저 세상을 버린 경우에는 이게 간단치가 않다고 얘기를 합니다. 특히 거기다가 이 자식이 자살을 하면은 또 이건 또 더 몇 배 더 힘들어진다고 그래요.

 

좌우간 어떻든 자식이 죽으면. 우리말에도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해서 평생을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부간에 몇 년 동안 말을 안 해요. 팔짱만 끼고. 그러면서 그러다가 서로 탓을 합니다. 당신이 그때 전화만 안 했으면 라고 얘기하든가, 아니면 전화를 해서 오라고 했으면은 게가 우리 아들이 오다가 사고를 안 당했을 텐데. 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그 슬픔을 참지를 못하니까 밖으로 투사를 하는 거죠. 그게 다 이해가 되는 겁니다. 이런 게. 이렇게 해서 이혼하는 부부도 적잖게 있다고 하고요. 슬픔을 참아낼 수가 없는 거에요. 분노를 참아낼 수가 없는 거에요.

 

이럴 경우는요, 어떤 것이 가장 묘약인고 하니 같은 체험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서로 치유를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역시 동병상련이죠. . 이런 식의 교육을 죽음교육에서 도와줘야 된다. 이런 겁니다. ~ 그다음에 네 번째 목표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져서 심리적으로 괜한 짐, 필요 없는 짐을 지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거다. 우리가 뭐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말 할 수 없이 크죠. 그런데 그것과 더불어서 제가 얘기를 했죠. 죽음은 영적으로 진화하는, 혹은 성장하는 대단히 좋은 기회다. 이런 것들이 연구결과에 나온 게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알려줘서 죽음을 너무 큰 공포로 대면하지 않게 큼 도와주는 겁니다. 다섯 번째 목표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금기시한다고 그랬잖아요. 이걸 더 이상 금기시하지 못하게 하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좀 자유롭게 얘기를 하자라는 거에요. . 좀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를 하고, 그 죽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 정서적인 거, 감정적인 것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 우리가 죽음을 금기시하고 그저 외면하는 것, 이거 가지고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죠. 우리는 보다 더 공개적으로, 적극적으로 죽음을 이야기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되겠다. 바로 이게 죽음교육의 다섯 번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목표는 암에 걸린, 혹은 좌우간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문제입니다. 아까도 잠시 말씀드렸지마는 죽음학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모범답안이라고 얘기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알려주지 않으면 문제가 되느냐? 알려주지 않으면 그건 뭡니까? 환자를 속이는 게 되는 거죠. 따라서 의료진과 환자 사이에 불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환자들은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지만 안으로는, 속으로는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겉으로만 모른 척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제 불신감이 싹트는 거죠.

 

그런데 이럴 때 이때 알려줄 때 말이죠. 불치병이라는 것을 알려줄 때도 상당히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다. 이 직격적으로 대 놓고 얘기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좀 간접적으로 돌려서 알게 하고, 그래야 충격이 덜하고 받아들이는데 좀 편하게 알게 됩니다. 편하게 알 수 있게 되죠. 사실 말씀 드린 것처럼 환자가 미리 알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얘기를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다음은 일곱 번째가 되겠죠. 죽음에 관한 윤리적인 문제라든가 의학적인 문제, 의학법적인 문제에 대해서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거다.

 

가령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고 법적으로 말이죠, 이게 언제가 죽음이라고 얘기할 수가 있고, 그다음에 안락사나 존엄사 같은 문제. 이게 의료법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되죠. 이런 것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또 나는 과연 어떤 죽음을 택해야 될 것인지. 이런 윤리적인 문제. 안락사는 윤리적으로 허용하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안락사는 적극적으로 임종환자를 죽게 만드는 거죠. 주사를 놓는다거나, 아니면 뭐 가장 연명장치를 떼어버린다거나. 이런 식이라면 존엄사는 적극적인 게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자연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겁니다. 단지 통증만 저하시키고 나머지 기계들은 빼는. 그런 식에. 말하자면 이런 세세한 것을 얘기를 해 줘서 의료법적인 문제에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거다.

 

여덟 번째는 자살을 방지하는데 있다. 이건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죠? 자살을 해도 문제가 풀리면 자살을 해서 문제가 풀린다면 다 죽죠. 거 뭐하러 삽니까? 그러나 자살을 해도 절대 문제가 안 풀린다는 거 아닙니까. 소명의식. 삶에 대한 소명의식을 심어줘야 되겠다. 이런 겁니다. 그다음에가 아홉 번째, 장례식 역할에 대한 설명. 장례식. 이거 참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안 되는 얘기인데요. 장례식을 환자가 스스로 준비하고 그 방법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 거에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결혼식을 자체에서 디자인하는 경우가 꽤 있죠. 요새. 마찬가지입니다. 장례식도 그렇게 하라는 거에요.

 

제가 어떤 책을 보니까 독일 간호사인데, 자기의 장례식을 다 설계를 해서 자기 목소리도 녹음을 해놓고, 장례식에 온 사람들한테 인사 말씀이죠. 그것도 녹음을 해놓고. 또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었던 모양이에요. 찬송가 몆 장을 몇 절을 읽어라. 노래를 해라. 설교를 어떤 거를 해라. 감사의 말씀을 하고. 뭐 이런 경우. 또 어떤 할아버지는 이렇게 짜놓고 자기 손주들에게 와서 무슨 얘기를 해 달라 그러든가 그렇게 다 짜고 가는 거에요. 참 멋있는 일이죠. 이렇게 하는 게. 아주 품위 있게 그런 장례식에선 그렇게 슬퍼할 게 없죠. 품위 있게 그 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그분을 기리면서 전 가족이 같이할 수 있는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는 시간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하고, 가치관을 재정립할 수 있게. 자극하는데 있겠다. 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이죠. 가령 우리가 암에 걸려서 일 년 밖에 살 수 없다. 이렇게 됐을 경우에 이 환자는 일 년 동안 열심히 살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준비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그런 봉사활동을 하게 됩니다. ~ 그렇게 일 년을 살고 가는 것과 30년을 살아서 70~80 사이에 죽는데 마지막 인생후반부를 엄벙덤벙하고 살다가 마지막에 그냥 속절없이 아무 준비하지 못하고 죽음에 빨려들어 가듯이 죽는, 이렇게 죽는 죽음과 어떤 죽음이 더 의미 있겠느냐 이겁니다. 전자겠죠. 그러니까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는 거에요.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겠다.

 

바로 이게 시간의 소중함, 혹은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것, 이런 겁니다. 어떻게 보면요, 암이나 좌우간 제가 이렇게 그런 경험 안 해 보고 당돌하게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불치의 병에 걸린 게 어떻게 보면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들면 된다는 거죠. 쉬운 일은 절대 아닙니다. 어렵지만 정말 인생을 농밀하고 밀도 있게 살고 준비할 수 있는 이런 기간이 바로 이 기간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 이런 겁니다. 그다음 목표는 개인으로 하여금 죽음의 철학, 혹은 종교적인 해석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죽음을 통해서 제가 누누이 얘기를 했죠.

 

이 죽음을 직면했을 때 그제서야 종교가 얘기했던 본령, 인간의 본령, 인생을 사는 방법. 그런 것을 얘기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 정말 진정한 종교. 어떻게 사느냐? 이런 문제를 이때 관심 갖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마지막 목표는요, 죽음 이후에 생명의 가능성. 사후생이죠. 이 가능성에 대한 사실을 생각하도록 격려하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요, 사후생에 대한 교육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참~ 큰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육체로는 죽지만, 육체로서는 소멸이 되지만, 또 다른 영체로. 영체라고 그랬죠. psychic body. 이렇게 얘기했죠. 영체로서 다시 존재한다. 이런 것들. 훨씬 더 위로를 받을 수 있겠죠. .

 

~ 여기까지가 죽음교육이 추구하는 그런 목표를 들어봤습니다. 이런 죽음교육의 목표는 아주 간단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전환시키자. 다시 말해서 죽음을 준비하자. 이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고요. 이제 두 번이 남았는데요, 두 번의 강의는 보너스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죽음학 일반, 전반에 대해서는 끝나는데, 다음 시간, 다다음 시간 두 번은 우리 한국 사람들의 죽음관, 한국 사람들은 과연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문제는 제가 지금까지 강의하면서 간간이 다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종교와 관계를 해서 좀 더 세밀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장시간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