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픽 21화 - 새우 등 터지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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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2019. 7. 2.



전우용의 픽입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중 사이의 무역 전쟁이 갈수록 격화하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종전 기미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이런 이야기들, 언론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우라고 할 수는 없는데요, 새우라던 시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던 시절의 역사와 또 그 흔적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죠.

(*임오군란: 조선 고종 19년인 임오년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불만을 품고 군제 개혁에 반대하며 일으킨 난리)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진압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에 있던 김윤식, 어윤중 등이 중국에 북양대신 리훙장을 설득해서, 설득이라고 보다는 뭐 중국은 개입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중국군 4천 명을 파견합니다.

광동수사제독이었던 우장칭이라는 사람이 인솔했죠.

 

이 사람들을 따라서 수십 명의 중국 상인들이 군용조달상으로 같이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군란을 진압한 이후에 이 조달상들은 서울에 계속 눌러 앉았고요,

청나라는 군대 파병의 대가로서 조선을 본격적으로 실질적인 속박으로 만들 기회를 촉진합니다.

그 수단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고 하는 무역 협정이었습니다.

 

본래 조약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 것인데, 중국 쪽에서 중국과 조선은 특수관계이니 대등한 국가 간의 협정에 이르는 조약을 붙일 수는 없다라고 해서 장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이죠.

 

이 장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은 서울과 양화진에서 자유롭게 점포를 열고 장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습니다.

거꾸로 우리 조선상인들이 중국베이징에서 그렇게 장사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죠.

 

이후 중국 상인들은 서울에서 이곳 저곳에 점포를 열고 장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는 관행적으로 최혜국 조관이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었습니다.

뭐냐하면 자국이 한 나라와 조약을 맺은 뒤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에서 자국이 얻은 거 보다 더 많은 권리를 인정받으면 조약계정 없이도 그 권리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 이런 조항이었어요.

 

그러니까 조선과 먼저 조약을 맺었던 일본이나, 임오군란 직전에 조약을 맺었던 미국, 그리고 그 이후에 조약을 맺기로 했던 영국 독일 등에서는 청나라 상인과 같은 권리를 달라고 주장을 했죠.

조선 정부도 청나라 정부도 이건 특수관계에 입각한 특수관계 협정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관계없다. 이렇게 주장을 해서 몇 년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1885년에 와서 영국이 아주 강력하게 청나라 상인에게만 특권을 주는 것은 국제적인 무역규정에 어긋난다 라고 요구를 하는 바람에 결국 거기에 굴복해서 다른 상인들에게도 서울을 개방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 서울 개방 조치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들은 바로 일본 상인들이었습니다.

1885년 조형 수호 통상 조약을 계기로 해서 서울은 그야말로 일본 상인과 청나라 상인들의 무역 각축장이 되어버립니다.

 

, 새우를 빼놓았네요.

그럼 조선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있었느냐?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다들 배우셨을 거 같아요.

 

1791년에 정조가 신해통공이라고 해서 그때까지 서울의 상업은 모두 정부의 허가를 얻지 않으면 장사할 수 없는 이른바 독점체제를 유지되어왔던 것을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업종에서는 자유롭게 장사 할 수 있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육의전이 뭐냐?

비단, 포목, 종이, 어물, 등 거래량이 특히 많은 6가지 업종에 대해서는 이 독점권을 폐지하지 않았어요.

주로 어떤 것들을 했냐하면

궁궐의 도배가 필요하다. 도배할 때가 됐다그러면 지전상인들이 가서 자기들 종이로 무료로 도배해 주거나

나라의 국상이 났다하면 시전 상인들이 나가서, 육의전 상인들이 나가서 상여를 매고 행여를 이끌거나 이런 일들을 했던 거죠.

 

국가의 부담을 지는 만큼 상품 값은 오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서울 시전 상인들이 파는 물건들은 지방의 물건 값보다 당연히 비쌌습니다.

그런데 중국 상인과 일본 상인들은 일물재세금지원칙이라고 해서 아주 저율의 관세를 부과한 뒤에는 어떤 세금도 조선 정부에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가사키나 상해에서 유럽에서 물건을 직수입하거나, 자기들 본국에서 자국산 물건을 직수입해서, 세금도 내지 않고 파는 중국 일본 상인들에 맞서서 같은 수입품을 취급하더라도 수입경로가 더 복잡하고, 그리고 거기다가 세금까지 내는 조선상인들이 이길 수는 없었던 거죠.

 

그러니 조선상인들은 날로 어려워지고, 또 서울에서 일본인과 중국인 상인들의 상권은 날로 강해지는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조선상인들은 당연히 누구한테 하소연하겠어요? 정부에 하소연 할 수밖에 없죠.

양국 상인들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 다오.’ 라고 요구도 하고, 청원하고, 시위도 하고, 철시도 하기도 했습니다마는, 당시 새우 처지였던 조선 정부의 힘으로는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이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들 개별적으로 쫓아내기 위해서 조선 상인들이 범죄와 비슷한 일들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당시 일본 공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그랬다고 그래요. 조선 상인들이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들을 다 공격하는데, 청나라 상인들은 뒤에서 돌을 던지고 도망가는 정도였고, 일본 상인에 대해서는 일본 상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 우물에 독을 풀 정도였다.

일본인에 대한 적대감이 중국 상인에 대한 적대감보다 더 컸다는 거였죠.

 

이렇게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이 서울 곳곳에서 조선상인들과 충동을 빚게 되고,

충돌을 빚을 때마다 청나라 군인이 출동하거나, 일본 순사가 출동하거나 이러면서 외교 분쟁으로 비유하니까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라는데 각국의 외교대표들이 동의를 공감을 하게 됩니다.

 

외교담당 대표였던 김윤식과 일본의 하나부사 또 중국의 진수당, 3사람이 모여서

조약으로는 서울 전부를 개방하기로 했지만, 이렇게 개방하면 서로가 섞여서 분쟁이 자꾸 일어나니까, 일본인들에게 거류지와, 중국인들의 거류지를 제한할 필요가 있겠다는 협정을 체결합니다.

 

중국은 당시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지를 않고 상무공서라고 하는 것을 두었습니다.

일대일의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던 거죠.

그래서 총판상무위원이라는 사람이 공사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상무공서가 어디냐 하면, 바로 지금의 명동 중국대사관 그 자리입니다.

거기는 임오군란 전에 무위대장 또 그 전에 포도대장을 했던 이경하의 집이었는데, 이 경하가 임오군란 당시에 반란군과 대원군을 연결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귀향 가서 집이 비어있는 상태였어요.

그 집을 샀는지 빼앗았는지 경위는 정확치 않습니다마는 중국인들이 빼앗아서, 중국인들이 차지해서, 거기를 상무공서로 사용했고, 뒤이어 새 건물을 짓고 입주를 했습니다.

그 북쪽으로 청계천에 이르는 일대를 중국인들의 거류지로 지정을 했던 거죠.

그리고 일본인들의 거류지는 그보다 더 남쪽, 남산 기슭으로 또 몰아버렸습니다.

 

왜 그랬느냐?

청계천 이북은 궁궐, 관청, 시전 등 국가의 중요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청계천 이북으로 넘어오지 않게 막는 것이 좋겠다.

또 청계천이 자연의 경계선이기 때문에 그것이 유효한 차단 수단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해서 중국인과 일본인의 거류지를 청계천 남쪽으로 밀어 놓았던 것입니다.

 

본래는 서울의 중심상권이 종로였었는데,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이 경제권을 차지함에 따라서 이 조치 이후에 점차 서울의 남쪽에 중국 상인들이 사는 지역과 일본 상인들이 사는 지역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고, 그 쪽에 상권이 종로에 전통상권을 압도하거나 억누르는 이런 현상이 광범위 하게 벌어집니다.

 

1894년 청일 전쟁 이후에 청나라 인들의 상권도 일본상인들의 수중에 넘어갔죠.

청계천 이남의 상권을 일본 상인들이 장악한 상황은 그 이후 일제강점 말기까지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근래까지도 지속됐습니다.

 

19458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가 해방을 맞은 뒤 일본인들이 함부로 바꿔놓은 지명을 고쳐야 한다 하는 여론이 일었구요,

그래서 1946년 하반기에 지명을 되돌리기 위한 기구로 가로명제정위원회가 만들어집니다.

이 가로명제정위원회에서는 일본인들이 무슨 마치, 무슨 마치하는 식으로 마음대로 바꿔놓은 이름을 옛 이름인 으로 되돌린다는 원칙을 정하는 한편

중요간선도로, 특히 일본인들이 자기들 일본인들 이름을 붙였던 주요 간선 도로에는 우리 역사상 위인들의 이름을 붙이자는 합의도 이루어졌습니다.

 

1882년부터 1894년까지 또 그 이후에도 상당히 그 세력을 유지했던 중국 상인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에는 고구려의 명장, 수양제의 대군을 물리쳤던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 일본인들의 본거지로 지정되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 최고의 번화가 게이죠의 긴자, 다른 말로 하면 경성의 은좌, 일본 도쿄에 가면 긴자가 있잖아요.

경성의 은좌로 불렸던 혼마치, 일본인들이 가지들의 근본이 되는 땅이라고 하서 혼마치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혼마치라는 곳에는 일본 하면 떠오르는 우리 역사상의 영웅이 있죠.

임진왜란의 명장, ‘충무공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을지로라는 충무로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상의 위인들의 이름을 딴 것이기는 하지만, 개항이후 중국 상인들과 일본상인들에게 서울상권을 빼앗기고 서울의 땅마저 빼앗겼던 아픈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130140년 전에는 우리가 새우의 처지여서 이 땅에 외국상인들 들어와 횡포를 부리고 국내 상권을 다 차지하는 상황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방이후에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빠른 경제성장과 대단히 수준 높은 민주주의를 달성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제 사담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이제 우리는 스스로 중견강국이라고 이야기할 만한 지위에 있는 것이죠.

 

더 이상 그런 시대적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 지금 우리가 세계 초강대국 사이에 무역전쟁, 그리고 그에 뒤따라 진행될 수밖에 없는 세계 경제체제의 재편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에 직면해서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 자신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우용의 픽, 오늘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