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의 영화 [봉오동 전투] 해설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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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설민석_영화로보는 한국사

2019. 8. 2.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설민석입니다.

 

이번에는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로 여러분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영화 <봉오동 전투>3.1운동 다음 해인 1920

우리 독립군이 중국 봉오동 지역에서 최초로 일본 정예 군을 격파한 승리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데요,

 

, 그러면 이 봉오동 전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왜 기억해야 하는지,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국권피탈 직전에 우리 민족은 한반도 지배의 야욕을 품은 일본을 상대로 의병을 조직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일체의 무차별적인 학살과 탄압이 극에 달하자,

우리 의병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 일대로 이주하게 되는데요

 

그리고 1910, 국권을 피탈 당하게 되었고,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우리의 의병들은

이름을 독립군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의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낮에는 낫과 곡괭이를 들고 농사를 지었고

밤에는 죽창과 총칼을 들고 군사훈련을 하죠.

그렇게 약 10년간 전의를 다지던 중, 191931, 만세의 함성이 조선 팔도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이 진격의 울림을 만주의 동포들도 똑똑히 듣게 되죠.

 

드디어 10년간 갈아온 칼을 뽑을 때다!

일본군에게 본때를 보여주마!”

이렇게,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전사가 되어 일본과 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만주 곳곳에는 여러 독립군 부대가 조직돼 있었습니다.

군무 도독부, 국민회군, 대한 독립군이 대표적이었죠.

이들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일본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상대는 동아시아 최강인 일본군이었습니다.

풍족한 보급, 잘 훈련된 군사, 최강의 무기, 계속된 전쟁으로 쌓은 실전 경험까지 두루 갖춘 일본군.

열악한 독립군들에겐 어쩌면 이길 수 없는 버거운 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독립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바로, 가난이었는데요

척박하고 추운 만주벌판에서 어렵게 농사를 짓고 쌀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먹을 양식을 반으로 줄여가며 총과 폭탄을 구입했죠.

 

당시, 총기 1정과 총알 100개 구입 비용이 약 35원이었는데요,

이 돈이면 만주 지역 주민 1명이 한 달간 풍족하게 먹고 살만한 액수였습니다.

 

문제는 가난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독립군들은 그때그때 모인 돈만큼만 기회가 될 때마다 무기들을 몰래 사들였는데요

, 이러다보니까 무기의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총알이 내 총에 호환이 되지 않았죠.

, 내 총은 러시아제인데 동료의 총알은 독일제, 이런 식인 거죠.

이것은 대규모 작전을 전개하기에 큰 어려움을 주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웠던, 열세였던 우리 독립군이

아시아 최강 일본 정예 군과 싸워 대승을 거뒀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으실 텐데요.

, 기적과도 같은 승리의 그날 속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본군에게 우리 독립군은 오합지졸로 보였을 겁니다.

뭐 이런 비정규군이 자꾸만 강을 건너와서 일제 관공서를 파괴했으니 화딱지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겠죠.

이에 일본군이 복수의 칼을 뽑으며 강을 건너 만주로 쳐들어옵니다.

 

일본군은 발 빠른 우리 독립군을 놓치게 되고, 이에 대한 화풀이로 인근에 있던 삼둔자라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서 죄 없는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힘없는 아이, 노인, 여성, 심지어 임신부까지 있었죠.

 

이때 우리 독립군들이 나타나서 일본군을 한방에 섬멸해 버렸으니

이것이 바로 봉오동 전투의 서막이 된 삼둔자 전투입니다.

 

, 복수하러 갔다가 된통 당한 일본군, 완전히 눈이 뒤집혀버립니다.

그래서 월강추격대, 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는 특수부대를 만들어서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 지역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이렇듯 삼둔자 전투부터 봉오동 전투까지 긴박하고 치열했던 한일전이

바로 우리 영화 봉오동 전투의 줄거리입니다.

 

우리 독립군의 정보망은 이미 월강추격대의 진격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봉오동 주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뒤에 봉오동 골짜기 요소요소마다 매복을 하게 됩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은 이화일 분대장에게 일부 병력을 주고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유인해 오라는 미션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화일 부대는 일본군과 싸우며 지는 척, 밀리는 척, 힘 빠진 척 적절히 싸우면서 쭉 끌어들여야 하는데, 너무 잘 싸운 거예요, 우리가.

그래서 월강 추격대 선봉부대를 섬멸해버린 것이죠.

 

만약에 이때, 일본군 후방부대가 겁을 먹고 회군했더라면 역사의 길이 남을 봉오동 전투는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고, 그 후방부대는 중무장을 하고 대규모로 진군해 옵니다.

 

이번에는 이화일 분대의 침착한 유인 작전으로 점점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침착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우리 독립군

매복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기 위해 일본 정탐병이 왔을 때에도 숨죽이고 때를 기다립니다.

아무도 총을 쏘지 않았죠.

 

그리고 마침내 적들을 포위망으로 완전히 끌어들이는 데 성공합니다.

지금이다! 쏴라!”

 

홍범도 장군의 선제 사격을 신호로 독립군들의 집중포화가 쏟아지고

월강추격대는 추풍낙엽처럼 고꾸라지게 됩니다.

 

3시간 동안 우리에게 저항을 하던 일본군은 견디지 못하고 퇴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때는 하늘마저 우리 편이었습니다.

급격한 기상 악화로 봉오동 골짜기는 폭우와 안개에 휩싸이게 됩니다.

피아 식별이 어려웠던 일본군들 퇴각을 하다가 서로에게 방아쇠를 당기기도 했죠.

 

이 봉오동에서의 숨막히는 전투로

일본군은 무려 157명 전사, 3000여 부상, 450명의 사상자가 나오는데요,

우리 측 사상자는 채 10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반 농민 출신의 독립군이 일본 정예부대를 격파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요

이 어려운 일을 해냅니다, 우리 독립군이.

 

출신지역도, 계층도 활동 배경도 다 달랐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눈앞의 이익, 진영 논리, 기득권, 이런 사사로운 것 따윈 일단 접어두고

각자의 눈과 손과 발이 되어주니, 실로 엄청난 시너지를 내게 된 것이죠.

이 단결력이야 말로 봉오동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우리 독립군의 진짜 저력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들, 100년 전 이 땅을 지켰던 선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대립과 반목과 갈등의 벽을 넘어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손을 잡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그 어떤 어려움도 함께 딛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100년 전 우리 선배들이 실제로 이 땅에서 써 내려갔던 승리의 역사를

영화 <봉오동 전투>를 통해서 만나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