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알래스카 항구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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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극지 탐사 항해

2020. 10. 23.

 

 

알래스카 서쪽
비교적 큰 항구에 기항해
보급품과 인원을 승선시키는데…



26. 알래스카 항구 놈


알래스카 놈(Nome)에 가까워졌다.
육지가 가까워질수록 바닷물은 조금씩 싱거워지면서 염분은 31.0‰로 내려갔다. 아마도 유콘 강 등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해빙을 녹였기 때문일 것이다.
7월 13일 저녁시간의 기온은 6℃, 풍속 17m/s.
북풍이 불고 파도는 2미터까지 치솟았고, 몸이 가늘게 떨릴 정도의 한기가 스며들었다.
흔들리는 수평선 위로 세인트로렌스 섬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베링해협 앞을 턱 막고 서 있는 큰 섬이었다.
갑판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소리쳤다. 알래스카 대륙에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북위 62° 서경 170°의 하늘은 황혼에 젖었다.
뭉치 구름을 비집고 나온 태양은 붉고 눈부셨다.
자정에 피는 황혼의 꽃이 있는 것처럼.
황혼 경치에 홀려 잠을 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늦게 자도 몸이 가벼운 것은 바다 공기가 깨끗한 탓일 것이다.
이튿날 아침 빵 두 개와 우유 한 잔의 맛이 맑고 정갈한 것은 인간의 똥냄새가 적었기 때문이 아닐까, 양외란은 생각했는데 필시 사람이 사는 동네와 떨어져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알래스카 대륙의 수어드(Seward)반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반도의 이름은 지구가 탄생한 이래 부동산 기획으로선 최대 걸작인 알래스카 매입을 성사시킨 150년 전 미 국무장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720만 달러에 팔아치운 러시아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국방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당시 러시아로선 현명한 거래였을지 모른다.

 

바다 색깔이 점점 진해졌다. 검푸른 바다가 육지와 가까이에선 진초록으로 바뀌는 것이다
항구의 해안 지역은 넓고 황량한 반면, 육지 안쪽으로는 험준한 산들이 시야로 들어온다.
7월 14일 오후 4시
배는 놈(Nome) 항내에 앵커를 내렸다.
해안에서 1해리 떨어진 지점(64°29'N, 165°25'W)으로 수심 8.4미터쯤 된다.
작은 배로 여자 검사원을 비롯한 여섯 명이 승선했다. 큰 배를 보겠다는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각자 맡은 임무가 있어 인원이 많았던가 보다.
갑작스런 선내방송과 함께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훈련, 퇴선 훈련! 전 승조원 갑판 집합.”
선박검사원이 선원의 안전훈련 점검을 시작한 것이다.
선박의 안전을 위한 항만 당사국의 ⌜선박안전검사⌟.
점검이 끝나자 상륙이 허가됐다.
선원들에겐 선원수첩, 탑승자들에겐 여권에 6개월 비자가 첨부돼 있다.
아라빙호보다 더 큰 중국 쇄빙선(13,000톤)의 선원은 2년 전 입항했을 때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한 사람도 상륙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 국력이 더 커지면 상황은 달라질지 모르지만 중국은 아직 미국이 믿기 어려운 나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놈(Nome)은 북극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웃의 작은 동네로 가는 방법은 비행기나 헬리콥터 혹은 겨울에는 개썰매 외에는 교통수단이 없다. 땅이 얼고 녹아 도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놈의 앞바다를 포함한 베링해는 6월부터 9월까지 여름에만 일한다. 그 외 기간은 1미터 두께로 바다가 얼어버려 출입이 불가능하다.

 

놈 항구에 상륙했다.
상륙이라 하면 인천상륙작전 등이 연상된다.
아니다. 선원들이 육지로 외출하는 것을 상륙이라고 한다.
“어서 발바닥을 땅에 대고 뛰어다니고 싶다. 미국도 짓밟고 싶다.”
한 사람이 말했다.
“여긴 미국이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런데 믿기질 않는다.
문명의 첨단으로 달리는 미국이 이렇게 황량한가. 알래스카를 과연 미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게 만든다.
작은 어선이 짐을 잔뜩 싣고 왔다. 대부분 양파, 포도, 멜론 등 신선식료품들이다. 미국 본토에서 가져오는 것인가. 우유, 식빵이 들어 있고 킹크랩도 들어 있다. 짐을 푼 다음 같은 배로 사람들이 상륙한다.
“삼항사, 알래스카 처음이지? 땅 한번 밟고 와.”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많이 가봤다는 일항사가 양보심을 발휘하여 양외란을 상륙시켰다.
이럴 때 일항사는 괜찮은 오빠다.
미국해군 출신의 어선 선장은 양외란을 자기의 막내딸 같다고 했다.
“여름에는 이렇게 일하지만 겨울에는 앵커리지나 시애틀에 있는 딸네들 집에 다니지요.”
그는 아들 다섯과 딸 다섯을 자랑한다.
왜 열 명이냐고?
손가락이 열 개밖에 안 돼서 그렇다나.
딸 하나밖에 없는 울 엄마는 손가락이 몇 개지?
양외란은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인생이 쓸쓸해지려 했다.

 

7월 15일과 16일 이틀간.
놈은 아라빙호의 선원과 탑승자들이 상륙함으로써 시내가 분주해졌다. 항구의 이름이 개떡 같지만 대리점은 Nome(놈)이 Name(이름)에서 유래된 좋은 뜻이라고 강조했다.
항구는 평온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이 도시로선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외국인을 대해보기는 처음일지 모른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아라빙호에 승선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북극탐사 관계자도 많아 시내는 분주해진 느낌이다.
낮고 편편한 곳에는 늪이 있고 작은 호수가 있으며 꾸불꾸불한 강이 있다. 강 주위에는 관목과 풀이 분포돼 있다. 높고 경사지며, 자갈과 모래가 있는 비탈면이나 바위산에는 나무와 숲은 없지만, 흘러내린 빙퇴석에는 수분이 있어 식물이 자란다.
지나가는 쥐가 꼬리를 세우고 멀뚱히 쳐다본다. 사람을 모처럼 보니 신기한가보다.
순록과 여우를 만나는 것은 먹을 것이 있다는 뜻이다.
사향소, 무스 등의 식용 동물이 있는가 하면, 이들 동물에게 위협이 되는 늑대와 곰도 있다.
겨우내 얼었던 길은 봄이 되어 녹으면서 울퉁불퉁해진다. 포장은 시내 도로에만 한정된다. 자동차는 픽업이나 밴이 대부분이다. 눈길이나 자갈길은 고급승용차가 다니기에는 너무 험악하다. 겨울에는 스키가 더 유용할 것이다.
내륙 강에는 금광 채굴 장비와 광부 숙소들이 유령처럼 흩어져 있다. 한때의 영광이 누추하게 늘려 추억을 들춰낸다.
극지 식물이나 지질 탐사에는 여자 연구원들이 더 적극적인 것 같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여성에게서 묻는다.”
남자 연구원들이 추켜세웠다.
“저온재배 식물을 개발한다면 대박이 되겠네요.”
극지생물 연구원 못지않게 양외란은 알래스카 곡류나 채소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극지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인구 3천명에 원주민은 75%가 넘는다. 주로 에스키모인 이누이트(Inuit) 족이다. 알래스카의 가장 북쪽 포인트 배로우(Point Barrow)는 위치가 71°23'N, 156°28'인데도 인구 5천명이 산다. 이들이 누리는 낮은 5월10일부터 3개월밖에 되지 않으니, 나머지 기나긴 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랄까.
툰드라 걷기 관광, 북극곰 수영대회, 개썰매 경기를 즐기는 것은 이들에게도 스포츠는 필요하다.
작은 도시에도 호텔은 있다.
‘호텔 오로라’
원주민 합동 소유이나 운영은 백인이 한다.
호텔은 게와 새우, 킹크랩 요리가 유명하다. 극지식물과 지질을 연구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연구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요리다.
열 개의 다리를 가진 이들 시푸드는 잊을 수 없는 맛.
호사다마라던가, 잘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통선으로 사용하는 어선에서 사다리를 타고 아라빙호로 승선하는 중이었다.
한 연구원이 다리를 헛디뎌 사다리 모서리에 가랑이가 받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남성의 주요 부위가 찢기는 치명상을 입었다.
부상자는 급히 선내 의료실로 옮겨졌고 찢긴 부위의 봉합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삼항사가 도와줘야겠어.”
선내 의사는 의료담당 사관인 삼항사 양외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양외란이 머뭇거리자 의사는 정색을 하며 명령했다.
“간호사는 의료 업무에 남녀가 따로 없어요.”
결국 양외란은 그것을 만지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데 무난히 임무에 충실했다.
워낙 위중한 사건이라 환자와 간호사가 서로 부끄러워할 새도 없었다.
치료가 잘 마무리된 것은 다행이었다.
의사는 만족했다.
이후 양외란은 남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서운했으나 그녀의 과감한 임무 수행으로 한 남성이 건강하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