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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lee 2020. 1. 9. 12:12

부르조아 사회의 표면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의 가격, 곧 일정한 크기의 노동에 대해서 지불되는 일정량의 화폐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이 가치의 화폐적 표현을 노동의 필요가격 또는 자연가격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의 시장가격 [곧 노동의 필요가격의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가격]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런데 상품의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상품의 생산에 쓰여진 사회적 노동의 대상적 형태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써 그 가치의 크기를 측정하는가?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크기에 의해서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의 가치는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가? 12시간이라는 1노동일에 포함되어 있는 12노동시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무미건조한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노동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판매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판매되기 전에 이미 반드시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노동에 하나의 자립적인 현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지 노동을 판매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여러 모순들을 접어 두더라도 화폐 [곧 대상화된 노동]과 살아 있는 노동을 직접적으로 교환한다 함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 위에서 비로서 자유롭게 전개되는 가치법칙을 지양하거나 아니면 바로 임노동에 입각해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를 지양함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이 6실링의 화폐가치로 표현된다고 하자. 우선 등가물끼리 교환이 이루어진다면 노동자는 12시간의 노동에 대해서 6실링을 받는다. 그의 노동의 가격은 그의 생산물의 가격과 똑같아질 것이다. 이 경우에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구매자를 위해 어떠한 잉여가치도 생산하지 않고 또 6실링은 자본으로 전화되지 않으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는 소멸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그의 노동을 팔고 그럼으로써 그의 노동이 임노동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이다. 다음에 노동자가 12시간의 노동에 대해 6실링보다 적게 [곧 12시간 노동보다 더 적게] 받는다고 하자. 12시간 노동은 10시간이나 6시간 따위의 노동과 교환된다. 이와 같이 동등하지 않은 크기들을 등가시키는 것은 그저 가치 규정만을 지양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자기 지양적 모순은 일반적으로 법칙으로 말해질 수도, 정식화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