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들/금융편

    이노 2006. 8. 10. 18:13
    물화거래를 원활히 하는데 쓰이는 매개물의 일종인 화폐는 가치척도·지급수단·교환기능 등을 가지고 있다. 물물교환시대에는 조개껍질·곡물·베 등이 물품화폐로 사용되다가 금·은·동 등이 화폐로 주조되어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강제 통용력이 인정된 지폐나 주화가 화폐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역사상 선사시대의 교환수단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자급자족단계를 지나서부터는 물물교환이 지배적이었으나 무기와 각종 생산기구·장신구·가축·곡물류 등이 물품화폐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B.C. 3세기의 삼한시대에는 철을 생산하여 인접한 일본에까지 수출하였고, 중국의 전화(錢貨)처럼 철이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동옥저에서는 금·은으로 만든 무문전(無文錢)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B.C. 1세기부터의 삼국시대에는 사회생산력과 교환경제가 발달하여 쌀·조·보리 등의 곡물류와 베·모시·비단 등의 마직물과 견직물이 국가세납과 지출수단으로 사용되는 동시에 일반 유통계에서 물품화폐로서 통용되었다. 또한 금·은과 같은 귀금속이 칭량화폐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은 등의 세공기술을 비롯한 수공업기술이 비교적 발달한 신라에서는 금·은 무문전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나 구체적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한편 물물교환 내지는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하던 시기에 명도전(明刀錢)·포전(布錢)·오수전(五銖錢)·개원통보(開元通寶) 등 중국 각 왕조의 화폐가 다량 유입된 사실을 기록이나 출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화폐가 일부 계층이나 극히 한정된 유통계에서 통용되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국가가 정책적으로 화폐유통을 시도하게 되었으리만큼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삼한시대에 교환수단으로 사용된 철이나 동옥저와 신라에서 사용한 금·은 무문전 등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품질·체재 및 무게를 규격화해서 만들어 사용한 화폐였다기보다는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유통이 지배적인 원시자연경제체제하에서 자연발생적 교환수단, 즉 실용성을 전제로 한 물품화폐와 본질적으로 성격을 같이하는 칭량화폐였다 할 것이다.

    (1) 고려시대의 화폐
    고려정부는 왕조초기부터 토지제도를 개편하고 조세체계를 정비하여 국가재정기반을 어느 정도 굳힐 수 있었다. 그리고 농업과 수공업 등 사회생산력이 증진되고, 그에 따라 상품생산 내지 교환경제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당시 국내 상업조직의 대표적인 것으로서는 개경(開京)의 특권적 좌상(坐商)인 시전(市廛)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고려개국초에 국가에서 설치하여 어용상업을 경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대외무역은 송(宋)을 비롯한 거란·여진·일본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 등을 상대로 하여 이루어졌는데, 당시 개경에는 많은 외국상인들이 내왕하였을 만큼 국제무역은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사회경제적 여건하에서 일찍부터 당전(唐錢)과 송전(宋錢) 등 중국화폐가 유입되어 주로 송 및 일본과의 무역 결제수단으로 사용되고, 일반 유통계에서는 쌀과 베 등 물품화폐와 금·은 등 귀금속이 칭량화폐로 통용되었다. 한편, 고려정부는 건국 이후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 강화하기 시작하여 10세기 말엽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정비 강화과정에서 중요한 경제정책으로서 의창(義倉)·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또한 996년(성종 15)에는 한국화폐사상 최초로 국가가 정책적으로 품질·체재 및 무게를 규격화한 명목화폐, 즉 철전(鐵錢)을 법화로 주조, 유통하였다.

    철전을 주조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강화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거액의 국가재정을 염출하고, 또한 국가의 큰 경제권인 화폐권을 정부가 장악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996년에 주조된 철전은 그 이듬해부터 1062년(문종 16)까지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철전은 대도시 유통계의 일부면에서 통용되다가 베와 쌀 등 물품화폐에 구축되어 점차 화폐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다시 1097년(숙종 2)에 이르러서는 법화로서 주화의 주조유통문제가 제기, 논의되어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주조업무를 담당 수행케 하고, 1102년에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비롯한 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 등 각종의 주화(銅錢)를 주조, 유통시키려 하였다. 동전의 주조·유통을 시도하기 시작한 숙종연간에 “국인(國人)이 처음으로 용전(用錢)의 이로움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 각종 동전 역시 국내에 유입된 중국화폐나 철전 등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통용범위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는 데다가 실용가치가 전제된 쌀·베 등 물품화폐에 구축되어 화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명목화폐인 각종 동전을 주조하여 상거래의 매개수단으로서, 또는 관료나 군인의 녹봉으로 지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화폐정책을 추진하면서 1101년에는 일종의 귀금속 칭량화폐로 은병(銀甁)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화폐정책상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사실로서, 해동통보 등 각종 동전을 주조, 유통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숙종 때에 속칭 활구(闊口)라고 하는 은병이 주조, 유통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즉, 당시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와 함께 지은(地銀)형태로 사용되던 칭량은화를 극히 미숙한 형태이기는 하나 법화로서 품질·체재 및 무게 등을 일정하게 규격화하는 단초적 조치로서 나타난 현상이라 하겠다. 은 1근(600g)을 당시의 국토모양을 본떠서 주조하였다는 은병은 사용 초기에 있어서는 칭량화폐로서 일정한 통용가치가 보장되기도 했으나, 뒤에 품질이 조악한 위조 은병이 나타나게 되자 그 가치는 하락되었다.

    은병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자 그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은병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1331년(충혜왕 1)에 소은병(小銀甁)을 주조, 유통시켰다. 소은병 또한 위조행위가 성행하여 은병인지 동병(銅甁)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그 품질이 조악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품질·체재·무게가 일정하게 규격화되어 있지 않은 쇄은(碎銀)을 사용하였으나 그것도 동(銅)이 합주(合鑄)되어 품질이 나빠져서 14세기 중엽에는 화폐기능을 잃게 되었던 것 같다. 이에 다시 품질·체재 등을 규격화한 표은(標銀)의 주조·유통이 시도되어 15세기초엽, 즉 조선왕조초까지 일부 유통계에서 화폐기능을 발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을 목적으로 추진한 화폐정책, 즉 비(卑)·귀(貴)금속화폐의 유통정책이 좌절되자, 일반 유통계는 쌀이나 베 등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물품화폐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베, 즉 포화(布貨) 역시 품질이 나빠져서 유통가치가 하락됨으로써 물가등귀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품질 나쁜 포화의 화폐기능이 둔화됨으로써 경제적 혼란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하여 고려말에 원(元)의 지폐인 보초(寶초)가 강력한 원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하여 국내에 유입, 통용되어 금·은 등 귀금속과 함께 원과의 경제적 거래의 결제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

    이같은 유통계 내지 사회경제적 여건을 배경으로 하여 1391(공양왕 3)에 품질 나쁜 포화의 통용을 금지하는 동시에 저화제(楮貨制) 채용문제가 제기되어 그 이듬해에 송(宋)의 회자(會子)와 원(元)의 보초제(寶초制)를 본떠서 저화를 인조(印造), 오승포(五升布)와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금속칭량화폐의 유통기반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철전이나 동전 등 비(卑)금속화폐가 지속적으로 통용되지 못하는 사회경제적 미숙성에다 왕조교체기의 과도기적 혼란이 겹쳐 저화는 인조되고도 통용되지는 못하고 말았다.

    이와같은 저화제 실시의 중단은 정부가 물물교환 내지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하는 원시자연경제적 유통질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도한 화폐제도개혁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2) 조선전기의 화폐
    조선정부는 개국초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대외관계의 불안을 극복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부면에 걸쳐서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전기(1392∼1592)에는 제반 문물제도를 중앙집권적으로 정비, 확립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지배적 유통질서인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저화(楮貨)·동전(銅錢)의 유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그에 대한 반동 내지 미봉적 조처로서 당시 유통계를 지배하던 물품화폐인 베(布貨)를 법화화하거나, 실용가치가 전제된 전폐(箭幣)를 법화로서 주조, 유통시키려 하기도 하였다. 조선정부가 고려시대에 실시하였던 것처럼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해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서 유통시키려 하였던 동기 내지 그 시대적 배경으로서 다음 몇가지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역사적 배경을 들 수 있다. 고려정부가 10세기말 이후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기 위하여 화폐유통정책을 거듭 시도하였던 사실은 조선전기에 저화와 동전인 조선통보(朝鮮通寶)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게 된 역사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정부는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킴으로써 국가의 궁핍한 재정을 보완하고 국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셋째, 중앙집권적 정부는 국가의 중요한 이권(利權)인 화폐권을 국왕 또는 중앙정부에서 완전 장악하기 위하여 저화나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려 하였는가 하면, 베와 같은 물품화폐를 법화화하려 하기도 하였다.

    넷째, 일찍부터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의 직접·간접적 영향은 조선전기에 각종 명목화폐의 유통을 시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다섯째, 상인의 매점적 도고(都賈)활동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논의되고, 실용가치가 없는 품질 나쁜 베가 법으로 금지하는데도 계속 화폐기능을 발휘하게 된 그 당시의 상품·교환경제발전은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게 한 중요한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몇가지 사실을 직접·간접적 동기 내지 배경으로 하여 정부는 우선 저화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401년(태종 1)에는 고려말에 한갓 시도에 그친 바 있는 저화를 법화로 통용할 것을 결정하고, 그 이듬해에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고 저화를 인조(印造)하여 베와 함께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저화의 가치가 점점 하락하게 되자 유통계에서 명목화폐인 저화는 사라지고 일반 민중은 물품화폐인 베만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1403년 9월 저화의 사용을 일단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뒤 베만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1410년 5월에는 포화, 즉 베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제도의 모순성이 논의되어 다시 저화를 법화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같은 화폐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보완책으로 1423년(세종 5)에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여 저화와 법화로 병용하게 하였다. 동전 역시 퇴장되거나 가치변동이 심해져서 법화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445년 12월 동전유통정책의 실패에 대비해 다시 저화를 유통시키기로 하여, 뒷날 <경국대전>에 저화가 포화(베)와 함께 법화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저화는 그 당시의 사회경제적 미숙성이나 원료의 공급난 또는 화폐정책 자체의 모순성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16세기까지 극히 한정된 일부 유통계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전기에 저화를 법화로 사용하였던 사실은, 조선후기 화폐정책의 입안과 시행과정에서 종종 역사적 사례로서 참고, 활용되었다.

    한편, 정부는 저화 못지않게 동전, 즉 조선통보를 법화로서 주조, 적극 유통시키려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동전주조유통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1394년이었으나, 정책으로 채택 결정된 것은 1415년이었다. 그러나 당(唐)의 개원오수전(開元五銖錢)을 본떠서 조선통보를 주조유통시키기로 했던 그 당시의 정책결정은 한해로 인해 민심이 동요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실현될 수 없었다. 1423년에 이르러서야 1402년부터 통용된 저화의 유통부진을 보완키 위해 처음으로 동전을 주조하여 저화와 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사섬서의 주관으로 당(唐)의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본떠서 조선통보라는 동전을 주조, 유통하게 하였다. 중앙에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으나, 다량의 동전을 단시일내에 주조, 발행할 수 없어 연료나 화폐원료 및 노동력의 공급사정을 고려하여 각 지방에도 주전소(鑄錢所)를 설치, 동전을 주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화폐원료의 절대량 부족으로 충분한 수량의 동전을 주조, 발행할 수 없었다. 저화의 유통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을 저화와 병용하게 되자, 저화는 일반 유통계에서 사라지고 겨우 조세의 납부수단으로만 사용되었다.

    1425년 4월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저화의 통용은 중단되고 동전만이 사용되었다. 이로써 각도의 세공(稅貢) 저화를 비롯한 각종 세납을 동전으로 납부케 하고, 동전으로 바치지 않는 자를 엄벌하는 등 동전의 유통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명목화폐인 저화의 유통이 그러했듯이 베나 쌀 등 물품화폐의 유통이 지배적인 당시의 유통계 실정에서 동전의 유통정책도 별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저화나 동전 등의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되자, 그것에 대한 보완 내지 미봉적 조치로서 일찍부터 유통계를 지배해온 대표적 물품화폐인 베, 즉 포화를 법화화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5세기 말엽에 편찬, 공포된 <경국대전>에도 국가의 법화로서 포화를 저화와 함께 통용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포화를 법화화하려는 화폐정책과 본질적으로 성격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철촉(鐵촉)을 법화로 사용하는 정책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세조 때(1464)에 유사시에는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화시에는 화폐로 사용한다는 목적에서 화살촉 모양의 이른바 전폐(箭幣, 일명 八方通貨)를 법화로 주조유통하려 했던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해 추진한 화폐정책의 부진 내지 실패를 보완하거나, 또한 그 미봉적 조치로서 취해진 베나 전폐 등 물품화폐의 법화화 시도는 실현될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전기에 베나 쌀 등 물품화폐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저화·동전 등 명목화폐를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해 추진한 화폐정책은 고려시대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사회경제적 제반여건의 미비, 화폐원료의 공급난, 화폐정책의 모순성 등이 원인이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 및 조선정부가 시도한 명목화폐유통정책이 비록 실패로 돌아갔다 할지라도 역사적 의의는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축적된 명목화폐 유통정책에 대한 역사적 경험은 조선후기에 동전을 법화로 유통보급시키기 위해 화폐정책을 입안, 시행하는 과정에서 참고, 활용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3) 조선후기의 화폐
    대체로 고려시대와 조선전기를 포괄하는 시기를 한국화폐사 발전과정에서 볼 때 명목화폐제도의 도입시기라고 한다면, 조선후기(17세기초∼19세기 중엽)는 명목화폐제도의 확대시행기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정부가 명목화폐인 동전을 법화로 채택, 유통시키기 위하여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게 된 시대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1592∼1598)을 전후해서 봉건사회의 전통적 관영상공업체제는 와해된 반면 사영수공업과 자유상업의 발전은 급진전되었다.

    둘째,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특권층의 토지겸병 또는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되어 특수계층에 의한 토지광점(土地廣占) 내지 대토지경영의 가능성이 증대되고, 영리위주의 상업적 농경이 보급되었다.

    셋째, 전통적으로 농민층의 부역노동에 의존해온 봉건정부의 관영광업체제가 해체되어 민간인이 자본을 투입, 광업경영에 참여하는 민영화방안이 시도되었다.

    넷째,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봉건적 신분질서(양반·중인·상민·천민)의 혼란으로,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전통적 생업관(生業觀)(사·농·공·상)은 변질되고, 취약한 농업중심 경제체제의 보완을 위해 부분적으로 상공업진흥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다섯째, 왜란과 호란(1637∼1638) 이후 인구급증현상은 당시 봉건사회의 제반 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증가된 인구를 수용할 새로운 생산양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여섯째, 상품·교환경제의 발달을 전제로 해서 실시된 대동법이 확대 시행됨에 따라서 조세체계가 단순·합리화되는 동시에 봉건사회의 상품생산 내지 유통경제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일곱째, 청·일과의 무역이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어 국내 제반 생산력의 증진 내지 상품·교환경제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여덟째, 화폐경제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 받은 화폐통용에 대한 자극은 지식계층의 화폐유통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아홉째, 청의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문명의 영향을 받아 윤리지향적 가치체계가 실용·실증성과 객관·합리성을 중요시하는 논리지향적 가치체계로 전환이 촉진되고, 새로운 사회사조로서 실학이 학문적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봉건사회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본질적 변화를 촉진한 양난(兩亂,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상품·교환경제의 발전이 급진전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베나 쌀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는 한계를 드러내게 된 한편, 명목화폐인 동전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은 절실해졌다. 따라서 정부는 명목화폐의 유통을 필요로 하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요청에 부응하는 동시에 직접적으로는 국가재정수요를 충족시킴으로써 전란으로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동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게 되었다. 즉 17세기초부터 동전을 법화로 유통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화폐정책 시행초기에는 조선전기에 주조되었던 조선통보를 우선 유통시켰다. 그러나 화폐유통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댜량의 동전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620년대부터 1650년대말까지는, 별도로 주전청(鑄錢廳)을 설치하고 동전을 주조하거나 중앙관서 및 군영에서는 물론 개성·수원·안동 등 각지방관청으로 하여금 동전을 주조하게 하였다. 한편, 중국동전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7세기 전반에는 조선통보와 십전통보(十錢通寶)를 주조, 유통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전기에 주조된 조선통보 및 중국동전 등 여러 종류의 동전을 유통시켰다.

    그리고 1650년대말 중단되었던 화폐유통정책을 1678년(숙종 4)에 다시 실시하면서 상평통보(常平通寶)라고 하는 동전을 주조, 유통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상평통보는 유일한 법화로서 필요할 때마다 각 중앙관서·군영 및 각 지방관청에서 주조, 발행되었다.

    명목화폐인 동전을 법화로 유통보급시키기 위해서, 우선 화폐유통문제를 중요한 정책적 과제로 생각하고 국가가 주조, 발행한 동전은 계속 통용되리라는 점을 국민에게 강조하여 화폐정책에 대한 민중의 불신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또한 동전을 매개로 한 상품거래와 국가 수입지출의 화폐화를 통해서 민중의 화폐가치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품질이 나쁜 베와 같은 물품화폐의 통용을 금지하거나 칭량은화의 사용을 억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동전의 유통영역을 확대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국가의 화폐유통정책은 정묘·병자호란 등 외침(1627∼1638), 사회경제발전의 미숙, 화폐원료의 공급난 및 화폐정책의 불합리성 등이 직접·간접적 원인이 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40년대에는 국내외의 상업이 발달한 개성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방에서 동전이 원할히 유통되었고, 1650년대에는 평안도 일부지역에서도 동전이 통용되었다.

    1670년대말에 상평통보를 법화로 채택, 유통시킨 이후부터는 화폐경제의 확대보급추세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후에도 봉건사회질서의 해체를 수반하는 화폐유통에 대한 보수적 반동이나, 또한 전황(錢荒)과 같은 화폐유통량 부족현상과 같은 저해적 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목화폐의 통용을 필요로 하는 당시 사회의 근대를 향한 역사의 흐름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전유통영역은 점차 전국 각지방으로 확대되고 각계층의 화폐에 대한 가치인식은 심화되었다.

    명목화폐인 동전이 널리 유통보급됨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봉건사회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첫째, 동전의 유통보급으로 국내외의 상업발달 내지 화폐자본화한 상업자본의 성장이 촉진되고,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서 전환가능성이 증대되었다.

    둘째, 화폐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동(銅)을 비롯한 화폐원료의 수요가 급증하여 화폐원료의 공급을 목적으로 각 지방의 동광이 적극 개발되었는데, 동광개발경영면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엿보였다.

    셋째, 화폐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화폐의 절대수요량은 급증하였고, 이에 대규모적인 화폐주조업을 빈번히 개설해야만 하였다. 따라서 화폐주조업은 공장제수공업체제로 관리경영되었고, 주조기술의 정예도나 공정의 분업화면에 있어서는 물론, 규모와 개설빈도에 있어서 당시 금속수공업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넷째, 화폐자본화한 고리대자본의 성장이 촉진되었고, 고리대자본이 농촌사회에 침투되자 농민의 몰락 내지 농촌사회의 분화가 촉진되었다. 농촌분화과정에서 다수 임노동자가 창출되었고, 특수계층에 의해 광점(廣占)된 대토지는 농업기업화의 전제가 되었으며, 보다 많은 이윤추구를 위한 상업적 농경이 확대 보급되었다.

    다섯째,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의 수입지출에 있어서는 물론 노임·지대 등의 화폐화 비율이 높아지는 등 국가재정의 관리운용이나 민중의 경제생활의 객관화·합리화 경향이 증진되었다.

    여섯째, 화폐경제 확대보급으로 촉진된 농촌사회의 분화과정에서 몰락농민의 수는 급증되고, 이들의 일부는 도적집단이나 반체제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일곱째, 화폐경제의 확대보급으로 일반 민중의 소비·사치성향과 투기·사행심이 조장되고, 이로 말미암아 절약과 검약이 생활미덕으로 강조되던 봉건적 경제윤리의 변질이 촉진되었다.

    여덟째, 화폐경제가 가족경제에 침윤됨에 따라 가족구성원 각자는 이기적 타산에 보다 민감해지는 반면, 공동체의식은 약화됨으로써 성리학적 가정윤리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대가족제도의 와해가 촉진되었다.

    아홉째, 문벌이나 정치권력 지향적이었던 봉건사회의 전통적 사회위신척도가 재부(財富) 중심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촉진되었다.

    이상에서 지적한 사실들로써 조선후기, 특히 1670년대말부터 점차 확대보급된 화폐경제의 발전은 봉건사회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가치체계의 해체 내지 근대지향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4) 조선말기의 화폐
    조선말기(1860년대∼1900년대초엽)에는 근대화폐제도의 수용기라 할 수 있다. 조선말기 화폐제도의 혼란은 대체로 악화 당백전(當百錢)을 남발함으로써 종래의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가 문란해지는 흥선(興宣)대원군 집권기로부터 시작된다.

    대원군은 폐쇄적인 중앙집권적 조선정부가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1860년대초에 집권하게 되었다. 그는 정부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비상적 재원확보책으로서 실질가치가 종래의 당1전 상평통보 5∼6배에 불과한 것에 액면가치만 백배로 고액화한 당백전을 주조, 유통하는 파격적 조치를 취하였다. 6개월 동안에 악화 당백전 1천6백만냥을 남발하여 당1전 상평통보와 병용함으로써 1670년대말 이래 비교적 안정적으로 확대시행된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 즉 상평통보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일법화유통체제는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당백전의 남발이 직접적으로 전근대적 명목화폐제도 혼란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가가 폭등하여 심각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폐단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사용한지 2년만에 당백전의 통용을 금지하고, 그로 말미암아 초래된 거액의 재정적 손실을 보전할 목적으로 역시 악화 중국동전 300∼400만냥을 수입하여 유통시켰다. 이같은 악화의 강제유통으로 야기된 명목화폐제도의 혼란현상은 모든 봉건국가말기에 일어나는 현상과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다.

    조선정부는 당백전 등 악화를 남발 내지 통용케 함으로써 심각해진 화폐제도의 혼란 내지 사회경제적 모순과 폐단을 수습, 재정비하지 못한 채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 및 서양 여러나라와 통상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근대화폐를 사용하는 여러나라와의 통상거래과정에서 체재와 품질이 통일되지 못하고 운반이 불편하며 가치변동이 심한 국내 화폐, 즉 전근대적 명목화폐의 모순은 보다 심각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상평통보를 계속 주조, 유통시켰다. 한편으로는 체재와 품질이 통일되고 운반이 편리하며 가치가 안정된 근대 금은본위제도를 도입하여 선진 여러나라와의 통상거래에서 초래되는 애로와 거액의 경제적 손실을 막으려 하였다.

    정부는 근대 금은본위제도의 수용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우선 1882년(고종 19)에 3종의 은표(銀標), 즉 대동삼전(大東三錢)·대동이전(大東二錢)·대동일전(大東一錢)을 주조, 유통시켰다. 이것은 전근대적 칭량은화가 근대 금은본위제도하의 은화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형태의 은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83년에는 격증하는 국가재정수요에 충당하기 위해 당오전 상평통보를 주조, 유통시키는 동시에 근대 금은본위제도를 실시하기 위해 상설조폐국으로서 전환국(典환局)을 설치하고 독일로부터 근대 조폐기술을 도입하였다. 전환국에서 1888년에 역사상 최초로 15종류의 근대 금·은·동전을 주조, 유통하고자 하였으나, 한갓 시험 단계에 그치고 말았다.

    정부는 1891년에 은본위제도의 수용을 골자로 하는 <신식화폐조례 新式貨幣條例>를 공포하고, 인천전환국에서 은전을 비롯해 백동전·청동전·황동전 등 5종의 근대화폐를 주조했으나 발행하지는 못하였다.

    정부는 문호개방 이후 이상과 같이 개화정책의 일환으로서 화폐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하였으나, 소요재정의 조달난, 정파간의 의견대립, 화폐주조관리와 조폐기술의 미숙성 및 청·일의 간섭으로 그때마다 소기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추진과정에서 일본의 화폐제도를 본떠서 <신식화폐발행장정 新式貨幣發行章程>을 공포하여 역사상 최초로 근대 은본위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오량은전(五兩銀錢)만을 본위화폐로, 나머지 1냥은전·백동전·청동전·황동전 등을 보조화폐로 주조, 유통하게 되었다.

    전문 7개조로 된 <신식화폐발행장정> 제7조에는 신식화폐가 다량 주조되기까지는 국내화폐와 동질(同質)·동량(同量)·동가(同價)의 외국화폐의 병용을 허가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에 따라 일본화폐의 국내 통용이 합법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신식화폐발행장정>의 실시로 화폐제도의 근대화는 이루어졌으나 국가 화폐권의 자주독립성이 침해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장정이 공포, 시행된 뒤 본위은화는 극히 소량만이 주조, 발행되고 보조화인 악화 백동화만이 합법 또는 불법적으로 남발됨으로써 화폐가치는 폭락하는 반면 물가가 폭등하는 등 이른바 백동화인플레인션이 일어났다.

    이에 겹쳐 국내정세가 혼란되고 우리나라를 둘러싼 일·러 양국간에 세력균형의 변화가 일어나자, 이같은 사실들이 직접·간접적인 원인이 되어 1901년(광무 5)에는 금본위제도를 채용하는 이른바 <광무5년 화폐조례>가 공포되었다. 전문 11개조로 되어 있는 이 화폐조례는 제1조에서 화폐의 제조발행권은 일체 정부에 속한다는 점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20환 금화를 비롯하여 은전·백동전·적동전 등 7종의 화폐를 주조, 유통시킬 것을 제3조에서 규정하고 있다. 이밖에도 법화규정, 구화폐의 교환규칙, 사조화폐의 통용금칙규정, 구화폐 병용규칙 등이 규정되었다.

    이 화폐조례는 1894년에 실시된 은본위제도를 폐지하고 금본위제도를 채용한 것으로서, 아관파천 이후 국내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행사한 러시아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친러정권 내지 친러배일정권의 주도하에 공포되었다. 요컨대, 친러정권은 금본위제도의 실시를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한편, 화폐권의 침탈에 집착해온 일본의 강한 영향력하에 채택된 <신식화폐발행장정>의 중단에 대응하여 화폐권의 자주독립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광무5년 화폐조례>를 제정, 공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화폐조례의 공포에 대한 반발로 일제는 1902년에 국가의 화폐권을 크게 침해하는 불법적 행위로서 일본은행권(日本銀行券)의 국내 통용을 시도하였다. 즉,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은 주권국가인 대한제국정부로부터 어떠한 사전허가나 양해도 없이 다만 자국정부의 불법적인 특허만 받아가지고 <주식회사 다이이치은행권규칙>을 제정, 1902년 5월부터 국내에 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당국과 상인층을 비롯한 일반 대중이 일본은행권 통용반대운동을 전개했으나, 군함까지 동원한 일제의 무력시위로 좌절되었다. 국가의 화폐권 수호를 위한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은행권 통용반대운동이 좌절됨으로써 일제의 화폐권 침탈행위는 한층 더 노골화되었다.

    정부는 1904년(광무 8) 8월에 러일전쟁이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고,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인 메카다쇼타로(目賀田種太郞)를 재정고문으로 고용, 국가재정은 물론 화폐와 금융에 관한 모든 업무를 위임하였다. 정부는 메카다의 건의에 따라 백동화남발의 본산으로 알려진 전환국을 1904년 11월에 폐지하고, 조폐업무를 일본 오사카조폐국에 위탁하였다. 그리고 1905년(광무 9) 1월에 금본위제도를 채택하는 이른바 <광무9년 화폐조례>를 공포하였다.

    <광무9년 화폐조례>의 내용을 보면, 제1조 본국 화폐의 가격은 금을 가지고 기초로 삼아 본위화의 근거를 공고히 한다. 제2조 위 조항에 의하여 광무 5년(1901)칙령 제4호로 정한 화폐조례는 올해(1905) 6월 1일부터 실시한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이 화폐조례는 금본위제도 실시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서, 1901년에 이미 법률상으로 채택되었으면서도 실시되지 못하고 있던 <광무5년 화폐조례>의 내용을 약간 수정, 보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05년부터는 일본 다이이치은행이 발권은행이 되어 새로운 화폐주조에 착수하였다. 금화의 순금양목(純金量目)은 2푼(1푼은 0.375g)을 가격의 단위로 정하고 이를 환(환)이라 칭하기로 하였으며, 50전을 반환, 100전을 1환이라 칭하기로 하였다. 화폐의 종류는 모두 9종으로 하여 20환·10환 및 5환 액면의 금화, 반환·20전·10전 액면의 은화, 5전 액면의 백동화, 1전·반전 액면의 청동화가 있었다.

    정부는 일본 다이이치은행과 <화폐정리사무집행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여 이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을 법화로 통용하게 하였다. 또한 다이이치은행으로 하여금 서울·평양·인천·진남포 등지에 화폐교환소를 설치하고, 화폐제도문란의 원인이 되었던 백동화와 상평통보를 회수하는 등, 화폐정리사업을 담당 수행케 하였다.

    이로써 한국 역사상 최초로 근대 금본위제도는 확립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의 자주독립권이 거의 상실된 상황에서 확립된 금본위제도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의 한계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5) 일제강점기의 화폐
    대한제국정부는 1903년(광무 7) 이래 국가의 화폐·금융권의 강화를 위해 중앙은행의 설립을 시도하였다. 이같은 목표는 1909년 11월 한국은행설립으로 달성되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발족초기부터 은행권의 독점적 발행을 추진했으나, 여건의 미비로 종래의 다이이치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발행하였다.

    한국은행이 처음 은행권을 발행한 것은 1910년 12월이었는데, 먼저 1원권을 발행하고 이듬해 6월에 5원권과 10원권을 발행하였다. 한국은행권은 명칭·행장(行長)·근거 등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 양식은 다이이치은행권과 큰 차이점은 없었다.

    일제는 1911년 3월에 <조선은행법>을 공포, 그해 8월에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조선은행의 설립시기를 한국은행이 설립되었던 1909년 11월로 소급, 적용시켰다. 조선은행은 한국은행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승계하여 한국은행권은 조선은행권으로 인정되고, 조선은행이 발족한 얼마 뒤까지 한국은행권이 발행되었다.

    조선은행은 1914년 9월에 이르러서 100원권을 발행하고, 이듬해에 1원권·5원권·10원권을 발행하게 되었다. 조선은행권은 계속 발행되어 만주지방과 중일전쟁 당시에는 중국본토에까지 유통되었다. 조선은행권의 발행고는 한국은행이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인계받았을 때 1180여만원이었던 것이 1945년 8. 15 광복 때에는 49억원으로 증가되었다. 조선은행의 발권제도를 보면, 신축제한제도로서 보증준비에 의한 은행권 발행한도는 처음에는 3,000만원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필요시에는 제한외의 발행을 할 수 있었지만, 다만 이 제한외 발행분은 연 5%의 발행세를 납부해야 하였다.

    1918년 <조선은행법>의 개정으로 보증준비 발행한도가 3,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확대되었고, 1924년에는 조선은행에 대한 감독권자가 조선총독에서 일본의 대장대신으로 바뀜에 따라 제한외발행의 인가권자도 일본 대장대신으로 변경되었다. 발행조건으로서 정화준비는 금화 및 은화, 지금은(地金銀)외에 일본은행권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은행권의 조선은행권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증준비는 공채증권(公債證券), 정부증권(政府證券), 증권(證券) 및 상업어음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정지하게 되자, 금본위제도를 이탈하여 관리통화제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은행권의 금태환정지에 관한 긴급 칙령을 공포, 시행하여 태환은행권의 금화태환을 정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행의 지배하에 있는 조선은행도 금화태환의 의무를 지지 않게 되어 조선은행권도 종래의 태환은행권에서 불환은행권으로 전환되었다. 이로부터 국내의 화폐제도는 관리통화제도로 전환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6) 광복이후의 화폐
    1945년 8. 15 광복 이후 미군정법령에 의해 <조선은행법>은 존속되고 일본은행·대만은행권 및 점령군 보조군표 등이 회수되었기 때문에, 조선은행권만이 유일한 법화로서 계속 통용되었다. 화폐발행고를 보면 광복 당시 49억원이었던 것이 1949년 말에는 751억원으로 팽창하였다. 그 중요한 원인은 광복 직후 일본인에 의해 종전 대책비란 명목으로 다량의 화폐가 증발된 데 있었다.

    이와같은 통화량의 팽창으로 조선은행권의 중심권종도 소액권으로부터 고액권으로의 이행이 불가피하여 1948년 이후에는 100원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49년에 최고발행한도를 책정하고 새로운 양식의 5원·10원권과 5전·10전·50전권 등 소액권도 발행하는 등, 화폐제도의 정비를 시도하다가 1950년 6월 한국은행을 발족시키게 되었다.

    1950년에 제정된 <한국은행법>에는 은행권발행에 있어 금 또는 외환준비를 전혀 요구하지 않고 은행권발행에 대한 최고한도도 설정하지 않아 완전한 관리통화제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은행은 1950년 7월에 1,000원권과 100원권을 한국은행명으로 제조하여 대구에서 한국은행권이 최초로 발행되었다.

    6. 25 전란 중 북한은 남침지역에서 조선은행 100원권의 남발을 자행하여 경제를 교란시켰다. 이에 정부는 1950년 8월에 적성통화를 배제하기 위해, 대통령긴급명령 제10호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53년 1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했는데, 이를 제1차 통화조치라 한다. 제1차 통화조치 이후 1952년 10월에 한국조폐공사를 신설하여 1,000원권과 500원권을 발행하고, 그 뒤부터 한국은행권의 제조는 전적으로 한국조폐공사에서 맡게 되었다.

    제2차 통화조치는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전인 2월에 과잉구매력의 억제와 재정·금융 및 산업활동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통령긴급명령 제13호에 의해 취해진 조처였다. 그 당시 한국경제는 전란으로 인해 모든 생산활동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는 데다 막대한 군사비 지출에 따른 통화증발을 불가피하게 하여 인플레이션의 압박이 심각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원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모든 거래와 원화표시 금전채무는 백분의 1로 절하시켜 화폐단위를 ‘환’으로 바꾸었다.

    제3차 통화조치는 5·16 군사혁명 다음 해인 1962년 6월에 취해졌다. 이 통화조치의 목적은 부패한 구정권과 결탁하여 부정축재한 퇴장자금을 산업자금화하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투자자원을 동원하는 한편, 예견되는 악성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막으려는 데 있었다. 통화조치의 내용을 보면, 구환화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고 통용가치를 십분의 1로 절하하는 동시에 모든 자연인·법인·임의단체의 구은행권과 지급지시를 금융기관에 예치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환화표시금액을 원표시금액으로 변경, 1원·5원·10원·100원권 등 각종 ‘원’화가 통용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경제성장으로 화폐수요가 급증됨에 따라 5,000원권과 10,000원권 등 고액권을 발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