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들/금융편

    이노 2006. 8. 11. 04:16
    '금본위제의 역사와 경제학'

    금 가격따라 金貨의 실제가치는 달라지는데…

    환율의 변동은 경제 전반에 여러 가지로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환율이 하락해 자국통화의 가치가 상승하면(예를 들어 1달러에 1000원에서 900원으로 환율 하락) 수출은 어려워지고 수입은 증가함으로써 국제수지가 악화된다. 그러나 수입 물가의 하락으로 물가 상승은 다소 억제될 수 있으며, 대외 채무의 상환부담도 완화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변동의 방향이나, 폭 그리고 속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거래 당사국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환율제도에는 정부 당국이 지속적으로 개입함으로써 환율을 일정 수준에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도와 외환시장에서의 수요 공급에 따라 환율이 자유롭게 변동하는 변동환율제도가 있다. 1973년 브레튼 우즈체제의 완전한 종식 이래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다. 두 제도는 모두 일장일단이 있으나, 최근 들어 환율의 변동 폭이 커지고 그 변화에 대한 예측이 어려워지면서 변동환율제의 부정적 영향이 더 크게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고정환율제, 그 가운데서도 금본위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금본위제의 연원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영국은 금과 은을 모두 통화표준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복본위제(bimetallism)를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차(茶)를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심각한 대(對) 중국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차가 하나의 귀족문화가 되면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차를 가공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 수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가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중국이 전통적으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은으로 모든 무역결제를 하도록 요구했고, 이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심각한 은의 유출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 내에 있는 은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었고, 당연한 결과로서 은의 가격은 높아졌다. 이는 곧 은이 더 이상 화폐로서 유통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영국의 통화체제는 이때부터 '사실상'의 금본위제였던 것이다.

    여기에 적용되는 경제원리가 바로 그레샴의 법칙이다. 그레샴의 법칙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는 것이다. 여기서 악화란 액면 가치가 실제 화폐의 가치보다 높은 것을 말하고,양화란 반대로 화폐의 실제 가치가 액면가치보다 높은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지금 금의 가격이 한 돈에 7만원이라고 하자.이 경우 조폐창에서 금 한 돈을 가지고 액면가격 7만원짜리 금화를 만들어 유통시킨다고 하자. 일단 금화가 만들어지면 그 액면가격은 바꿀 수가 없다. 그러나 시중에서 유통되는 금의 가격(혹은 금의 가치)은 시장 수급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이유에서건 귀금속으로서의 금의 가격이 올라서 한 돈에 8만원이 되었다고 하면, 7만 원짜리 금화는 표면에 7만원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가치는 8만원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경우 금화는 양화가 된다. 겉에 표시된 것보다 실제 가치가 더 높으니 양질의 동전인 것이다. 반면 금의 가격이 떨어져서 6만원이 되었다고 하면 금화의 실제 가치는 액면가보다 낮아지게 될 것이고,이 경우 금화는 악화가 된다.

    그렇다면 악화나 양화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악화의 경우 귀금속으로서의 가치보다 액면가치가 더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동전으로 사용하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양화의 경우 표면에 표시된 가격보다도 귀금속으로서의 실제가치가 더 높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동전을 녹이거나 하는 방법으로) 귀금속으로 사용하길 원할 것이다. 즉 악화는 통화로서 유통이 되지만,양화는 더 이상 통화로 유통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레샴의 법칙인 것이다.

    오늘날 그레샴의 법칙은 선한 것은 위축되고 악한 것이 발호하는 현상을 묘사하는 데 자주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말하면 이 법칙은 경제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선악의 가치판단과는 별개의 문제인 까닭에 남용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재화.서비스 사용자 많을수록 가치 높아져


    금본위제는 영국에서 이미 18세기에 '사실상'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한 것은 1819년이었다. 앞서 산업혁명기 영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구축효과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영국은 1793년부터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금 유출이 발생하자 영국정부는 1797년 금태환을 정지시켰다. 1815년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영국 내에서는 금본위제의 부활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819년 공식적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국제적으로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독일 영방들(독일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 이전에는 여러 개의 영방으로 구성돼 있었다)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러시아, 중국 등은 여전히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금과 은을 통화의 표준으로 사용하는 복본위제를 1870년대까지 유지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경우 그레샴의 법칙으로 통화의 안정적 운용이 어렵다. 시장에서 금은의 수급에 따라 가치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840년대 말과 1850년대 초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호주 등에서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의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가 1859년에는 미국의 네바다에서 대량의 은이 생산되면서 또다시 은의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국제적으로 금과 은의 흐름은 상당히 어지럽게 요동쳤고, 복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던 나라들은 통화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상당히 고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본위제가 1870년대까지 유지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첫 번째는 동전을 만드는 기술적 이유로 금화의 가치가 너무 높아 일상적인 거래에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단위의 금화도 근로자의 3~4일치 임금에 해당될 정도였으니 더 작은 단위인 은화로 보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이유로 은화의 유통을 금지시키는 것, 즉 폐화(demonetization)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은화를 폐화시킬 경우 전체적으로 통화가 줄어들게 되고 이는 물가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전통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상대적으로 부채가 많은 농민들이었다. 물가가 하락하면 실질부채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른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s)다. 네트워크 효과란 한마디로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그 재화나 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화라고 할 수 있다.
    전화는 아무리 비싼 전화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전화기를 가지고 있을수록 내 전화기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주변에서 이러한 예를 더 찾아보자) 다른 사람이 사용함으로써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i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화제도를 채택하는 경우에도 다른 나라들과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하거나 자본거래를 하면서 어떤 제도를 택하는가에 따라서 효율성이 달라질 수 있다.

    영국과 같이 이미 금본위제를 채택한 나라도 있고 아직 은본위제를 고집하는 나라도 있다면 중간에서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것이 네트워크 외부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과 독일의 중간에 위치했던 네덜란드는 이런 이유로 복본위제를 유지했다. 또한 영국과 교역이 많았던 스웨덴 같은 경우에도 은본위제를 기본으로 하되 영국과의 교역을 고려해 금본위제를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국가들이 복본위제를 시행하고 있다면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것이 동전을 사용할 때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각국으로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경제 환경이 변하면서 복본위제로부터 금본위제로 통화체제가 바뀌어간 것도 결국 네트워크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경제사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국제수지적자->통화감소->물가하락->수출증대


    네트워크효과에 의해 복본위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면 전 세계적으로 금본위제가 채택된 것 역시 네트워크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금본위제로 진행한 나라는 독일이었다. 보불전쟁의 발발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이 태환을 정지함에 따라 독일은 복본위제를 유지할 명분이 없어졌다.
    더구나 독일의 대외무역거래는 상당 부분 영국의 런던에서 스털링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은 1871년 금본위제를 채택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네트워크 외부성을 촉발함으로써 덴마크 네덜란드 등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줄줄이 금본위제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이 1879년 금본위제에 합류함으로써 세계 주요국들이 모두 금본위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고,이때부터 1차대전의 발발로 국제통화시스템으로서의 금본위제가 해체된 1914년까지의 기간을 '고전적 금본위제의 시대'(the classical gold standard era)라고 부른다. 이 기간 중 국제수지의 조정과 관련해 금본위제가 작동된 원리는 흄(D.Hume)의 가격-정화-이동 메커니즘(price-specie-flow mechanism)이었다. 이는 금본위제 하에서 국제수지의 불균형은 통화의 흐름과 이에 따른 물가의 변동을 통해 자동으로 균형을 회복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국제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가 있다고 하자. 외국에 판 물건보다 외국에서 사들인 물건이 더 많기 때문에 이 나라는 통화인 금이 외국으로 흘러나가게 된다. 그러면 이 나라에 있는 금의 양이 줄어드는 것(통화량이 감소하는 것)이므로 물가가 하락하게 된다.(통화량의 변동이 물가에 영향을 주는 것은 피셔의 교환방정식을 가지고 설명한 바 있다) 물가가 하락하면 그 나라의 물건이 외국에서 더 잘 팔리게 되고, 상대적으로 더 비싸진 외국의 물건은 그 나라에서 잘 안 팔리게 된다. 즉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수지 적자는 국제수지 균형으로 돌아오게 된다.

    국제수지 흑자인 나라도 통화량의 증대->물가상승->수출감소·수입증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흑자폭이 줄어들고 마침내 수지 균형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격-정화-이동 메커니즘이다. 가격-정화-이동 메커니즘은 논리의 단순 명료함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경제환경이 변하면서 흄의 논리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환경의 변화 가운데 첫 번째는 국가간 자본의 이동이 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자유무역주의의 확산은 상품과 생산요소의 국가간 이동을 증대시켰고, 따라서 자본 또한 국가간 이동이 크게 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기자본의 이동 역시 금본위제 하에서 국제수지의 균형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기저로 작동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작용한다. 먼저 무역수지의 적자로 인해 국내통화량이 감소하면 단기에 있어서 금리가 상승한다. 금리가 상승하면 외국으로부터의 자본유입이 발생하게 되고 적자의 일부가 보전됨으로써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국제수지는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이 같은 상황은 일부 국가에서 정부 정책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되기도 했다. 즉 무역적자로 통화량이 감소할 경우 물가에 하방경직성이 작용한다면(즉 물가 하락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경기침체가 발생한다.
    정부는 경기침체를 피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함으로써 외국으로부터 자본을 끌어들여 무역수지에서의 적자를 보전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가 1차대전 이후 영국의 경우이다. 1차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1925년 금본위제로 복귀하면서 파운드화의 가치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 정함으로써 파운드화의 가치를 고평가했다. 이는 무역수지의 악화를 초래하고 통화량의 감소를 가져왔으나 가격은 하락하지 않아 결국 경기가 침체되는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1929년에 시작된 인류 역사상 초유의 대공황이 발생한 원인의 일부를 이러한 영국의 경기침체에서 찾기도 한다.


    金이라는 단일 재화에 각국 통화가치를 고정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유지되어 왔던 고전적 금본위제는 국제결제시스템의 효율성을 제고함으로써 세계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금본위제의 기본 구조는 금의 수출입에 통제를 가하지 않음으로써 국제 금가격이 단일 가격으로 형성된 가운데 각국이 자국통화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고정하는 것이다.

    금본위제의 효율성은 금이 '뉴머레어(numeraire)'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뉴머레어'란 가치를 갖는 재화를 교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화폐가 없던 시절, 쌀이라든가 옷감 등을 다른 재화의 거래에 있어 기준으로 삼는다면 쌀 혹은 옷감이 뉴머레어가 되는 것이다.

    뉴머레어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의 효율성은 간단한 수학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쌀·호미·옷감·신발·쇠고기 등 5가지 재화가 있는 경제를 생각해 보자. 화폐가 없는 경우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려면 각 재화 간에 교환비율이 정해져야 한다. 즉 '쌀 1말에 호미 두 개', '신발 한 켤레에 옷감 한 필' 등의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 모든 재화 사이에 각각의 교환비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수학적으로 보면 5개의 재화를 5각형 형태로 늘어놓고, 모든 재화를 연결하는 선을 그어 해당되는 각각의 선마다 교환비율이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5각형의 꼭지점을 연결하는 모든 선의 개수는 n(n-1)/2의 공식에 따라 총 10개가 된다. 다시 말해 화폐가 없는 상황에서 5개의 재화가 거래되기 위해서는 총 10개의 교환비율이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재화 가운데 쌀을 거래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자. 그러면 모든 재화에 대해 쌀과의 교환비율만 정해두면 거래가 가능해진다. 쌀 한 말에 호미 두 개, 쌀 한 말 반에 신발 한 켤레와 같은 식으로 교환비율이 정해지면 호미와 신발 사이에는 3 대 1의 교환비율이 자동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총 4개의 교환비율만 정하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큰 절약인가!

    한 경제 내에 거래되는 재화와 용역이 100개인 경우만 생각하더라도 뉴머레어가 없으면 4950개의 교환비율이 있어야 하지만 뉴머레어가 있으면 99개의 교환비율이면 된다. 그런데 경제 내에 100가지의 재화와 용역만 있는가.
    따라서 뉴머레어가 존재하는 경우의 효율성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본위제의 장점은 바로 이러한 효율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각국이 서로 다른 통화를 사용하는 경우 통화 간의 교환비율이 정해져야 하는데, 각국이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통화가치를 정한다면 모든 나라는 다른 모든 나라와 각각 환율을 정해야 한다. 그러나 금이라는 공통의 재화에 대해 통화가치를 정한다면 환율의 가짓수는 크게 줄어들게 되고 국제무역 거래에 있어서 효율성이 대폭 향상될 수 있는 것이다.(물론 금의 수출입에 통제를 가하지 않음으로써 각국에서의 금 가격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전제조건이며, 이를 금본위제가 운영된 기본원칙:rules of the game 가운데 첫 번째로 꼽는다)

    1차대전이 끝나고 각국이 전쟁 이전의 형태로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나, 2차대전 이후 브레튼 우즈체제가 출범한 것은 국제거래에 있어서의 효율성을 제고함으로써 세계경제 발전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브레튼 우즈 체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1920년대 세계경제는 1차대전의 폐허로부터 전후복구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한 정도의 붐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금본위제의 부활은 상당한 진통을 겪는데, 여기에는 전후 국제경제 환경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즉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의 상대적 지위가 약해진 반면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미국의 경제적 지위는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1차대전 이전에 영국의 주도 아래 유지돼 왔던 고전적 금본위제를 부활시키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려워진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경제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금본위제의 부활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함으로써 국제경제 체제의 효율성이 저하된 것이 1920년대 말 미증유의 세계대공황을 초래한 기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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