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들/금융편

    이노 2006. 8. 11. 04:43
    전봉관,《황금광시대》- 황금광 시대의 아이러니

    독립운동 혐의를 받고 수감되었던, 대학교수 출신의 저명한 민족주의자는 출감하자 곧장 자신 소유의 금광으로 달려갔고, 전직 조선일보 영업국장은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어 평북과 충청도의 금광을 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독립운동가는 활동을 접고 귀국해 금광으로 갔고 근우회 집행위원장을 지낸 여성운동가는 광업회사 현장소장으로 부임했다. 조선노동총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던 사회주의자도 운동을 그만두자 황해도의 금광으로 달려갔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배경이나 지식, 이데올로기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 금광이라는 한 배에 동승한 동업자였던 것이다. –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5, pp. 30-31.

    채만식은 한때 금광 기술자와 투자자를 연결하는 금광 브로커였다. 그의 작품 <<금의 정열>>은 픽션이라기보다는 논픽션에 가깝다. 브로커로 나서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매너와 언술, 교양과 인맥 그리고 매물에 대한 전문 지식이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적 모멸감 따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강력한 내공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 브로커들은 대체로 인생의 끝을 본 지식인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채만식은 김기진과 마찬가지로 낮에는 금광에서 금을 찾아 헤매고, 밤에는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고단한 일과를 이어갔다.

    금광 열풍이 엄습했을 때, 제일 먼저 금광으로 달려간 소설가는 조선프롤레타리아트예술동맹(KAPF)의 결성에 산파역을 맡았던 팔봉 김기진이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가 1933년 1월 금광 재벌 방응모에게 인수되자 ‘금전꾼’ 밑에서는 기자 노릇 할 수 없다며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 금전꾼 밑에서 기자 노릇 하기 싫어서 스스로 금전꾼이 된 것이었다. (…) 이렇다할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한 금광 덕대(광산의 현장 책임자) 출신 방응모는 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동경 유학을 거친 당대 최고의 엘리트 김기진은 금광 덕대가 되려하는 당시 상황은 황금광시대가 만들어낸 기막힌 아이러니였다. (…) 노다지를 얻어 신문사를 차리겠다는 김기진의 꿈은 불과 넉 달 만에 막을 내렸다. - 같은 책, pp. 31-33.

    1929년의 세계는 공황의 세계였고 그 여파는 1930년 1월 일본과 조선에까지 미쳤다. 황금광시대가 막 시작될 무렵인 1930년, 풍년이 들었지만 풍작의 상황은 오히려 공황으로 이어졌다. 풍작 공황은 새롭게 이식된 자본주의적 생산구조가 낳은 비극이었다. 조선인구의 80%는 여전히 농민들이었지만, 사회구조는 이미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자본주의로 재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상은 어느덧 밥만 먹고는 살 수 없고 돈이 생겨야 살 수 있는 시대로 바뀌고 있었다. 농산물 가격의 폭락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은 최악의 경제 위기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1930년 1월 11일 일본은 그동안 금지했던 금수출을 재개한다고 선포했다. 금본위시대로 다시 접어든 것이다. 금본위시대에 금은 현금과 동일했고, 국제간 무역거래에서의 원칙적인 결제수단이 되었다. 은행에 금을 가져가면 돈으로 무한정 바꿔주었다. 모든 상품의 가격이 폭락했지만 유독 금값만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공황의 시대, 가격이 떨어지지 않고 생산되는 족족 팔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황금은 충분히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금본위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금본위제 하에서는 금의 해외 유출을 통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1931년 12월 금수출은 다시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의 변화와 상관없이 국제통화로서의 금의 위상은 손상되지 않았다. 금본위제의 포기는 금 수출의 금지인 동시에 금 수입의 금지를 의미했다. 각국은 금을 보유하기 위해 전보다 더 열을 올렸다. 해외에서 사올 수 없었으므로 땅을 파고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부는 대대적인 산금정책을 폈다. 1930년대 한반도의 골드러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금광으로 몰려들었다. 하루 일과가 끝난 금광 입구에서는 고약한 풍경이 펼쳐졌다. 광부들이 벌거벗고 줄지어 늘어서서 항문을 들이밀었고, 감독들은 혹시나 금이 박혀 있을까 남의 항문을 찬찬히 검사했던 것이다. 금 밀수출도 기승을 부렸다. 폭이 100미터도 되지 않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가서 금을 팔면 조선의 시세보다 10-50%까지 높은 값을 받았다. 1백8십돈의 금을 숨겨 압록강을 넘으면 한 번의 기차여행으로 최소한 1백8십원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신문기자 월급은 40원 정도였다. 금을 둘러싼 각종 투기, 사기, 강도 사건들도 넘쳐났다. 백주에 강도가 금반지를 낀 젊은 부부의 손을 단칼에 잘라 도망간 사건도 있었다. 실로 금에 미쳐 돌아간 시대, 말 그대로 황금광(狂) 시대였다.

    "이 모든 것을 읽고나면 한탕주의는 비뚤어지고 파탄난 심성에서 파생된 시속時俗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사태라는 자각이 떠올라 오며, 지난 90년대의 아수라장에서 거의 다 패배해버리고, '지금 남은 게 별로 없는데, 남은 인생 뭐 있겠어'라는 말들을 합창하는, 그 패기차던 선배, 후배, 동료들의 오늘의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진다. 참으로 징그런 세상이다." (armarius.net)

    이 책을 읽으며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가 떠올랐다. 황금에 미쳐 돌아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살던 세상에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에서 볼 수 있는 근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 참조
    - 전봉관, <<황금광시대>>, 살림, 2005
    - 황금광 시대 (서평)
    - 올해의 책 (http://armariuscasting.net)

    * 덧붙임
    금본위제 하에서 화폐와 그것이 폐지된 오늘날의 화폐는 기본 개념이 틀렸다. (220쪽)
    '틀렸다' => 달랐다.

    금본위제가 실시된 당일 물건 가격은 일제히 30%씩 폭락했다. 화폐가치가 높아진 까닭이었다.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금본위제 실시 직전 화폐보유를 줄이고 부지런히 상품, 부동산등을 사모아야 했는데, 무지한 농부들은 그러한 이치도 모르고 도리어 시장에 쌀을 내다팔아 손해를 자초하기도 했다. (226쪽)

    * 이 부분은 금본위제의 내용에 부합하지 않습니다.(저자에게 이메일로 문의하여 확인한 내용입니다.)

    - 금본위제가 선포되면 금을 제외한 모든 물건의 가격이 전보다 낮아집니다.
    -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금본위제 실시 직전 화폐보유를 줄이고 부지런히' 금을 사모았을 겁니다.
    -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그냥 안쓰고 최대한 버티면서 현금을 확보하고 있는 게 유리할 겁니다.
    - '농부들이 그러한 이치도 모르고 시장에 쌀을 내다' 팔았다면, 그래서 현금을 확보했다면 손해를 본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었을텐데요... 100원 받고 팔았던 쌀을 90원에 되살수 있으니까요.
    - 금본위제 실시로 물가가 낮아지면 화폐 가치는 올라갑니다.
    - 전에는 100원에 사야했던 것을 이제 90원에 살 수 있습니다.
    - 이것은 당장 먹고살 걱정이 없는 부자들에게는 기회입니다.
    - 돈을 풀지 않는 것이 유리하겠지만 이것은 동시에, 헐값에 동산, 부동산을 [나중을 위해] 사들여 쟁여둘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현금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재산도 별로 없는 서민들에게는 희망이라곤 오로지 금밖에 없습니다.

    글 :: 리드미 (12/06/2005) | http://readmefil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