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코

1015 2011. 3. 11. 16:57

[종교학자 오강남의 인류의 스승]

 

 

성 프란체스코(1181-1226)

 
 
 
청빈·무소유로 ‘참된 자유’ 보여준 성자
 
 
기사등록일 [2008년 11월 24일 16:45 월요일]

 

 

기도 중 내면의 목소리 듣고 고행 선언

나병환자-거지 돌보며 부자 후원 거부

교황·가난한 이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

자연 사랑…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 추앙

 
성 프란체스코 초상화.


“주여,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시옵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뿌리게 하시고,
상함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그리고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되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줌으로 받게 되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고,
우리 스스로에게 죽음으로 영원한 삶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라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기도를 쓴 성 프란체스코는 본명이 지오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로서, 1181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목상으로 자수성가한 부자 아버지의 덕택으로 어려서부터 부유한 환경에서 걱정 없이 자랐다.

 

그 당시 유럽에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것은 기사(騎士)들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이상의 여인을 그리며 지어 부르던 낭만적인 음유(吟遊) 시들이었다. 어린 프란체스코도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시를 좋아하여, 그들의 시도 열심히 읽고 또 부자 아버지의 돈으로 화려하고 멋있는 프랑스식 옷을 사 입고 다니기도 했다. 이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의 ‘프란체스코’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것이 결국 그가 태어날 때 받은 본명보다 더 유명해진 이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프란치스코’라 표기하기도 하고, 영어로는 ‘프란시스(Francis)’라 한다.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도 이 성인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프란체스코도 기사가 되고 싶었다. 이웃 도시국가인 페루지아 원정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 1년간을 감옥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나폴리를 침공하는 전투에 참여했다.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에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기가 할 일이 군인으로 사람을 죽이는 전장의 기사가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줄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는 것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아시시 외곽 언덕 위 다 허물어져 가는 성 다미아노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입상이 그에게 친히 “프란체스코야,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보수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교회 건물을 보수하는 일에 착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보수 공사비를 마련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 몰래 아버지 포목점에서 포목을 잔뜩 내다 팔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대노하면서 부자간의 연을 끊고 유산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프란체스코는 주교가 관장하는 재판에서 아버지의 돈을 되돌려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명령대로 돈뭉치를 건네고, 그 위에 자기의 화려했던 옷도 벗어 던지면서, 이제 ‘가난 양(孃)’과 결혼하여 고행자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프란체스코와 같이 놀던 친구들 중 몇 명도 그에게 합류했다. 처음에는 이들이 ‘신의 광대(Jongleurs de Dieu)’로 알려졌다. 그들은 광대가 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삶이 지금보다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권리를 추구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지만, 청빈과 무소유의 삶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이런 태도와 생활 방식을 채택하기로 한 자기나 자기 친구들이 많은 사람들 눈에는 바보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기왕이면 하느님을 위해 참된 바보가 되리라 결심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거지들과 나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돈 많은 부자나 추종자들이 자기를 후원하겠다고 제안해 와도, 그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나병환자 수용소 옆 오두막에서 살았다. 모두 그를 정말로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다.

 

프란체스코가 출가하고 3년이 지난 1210년, 그는 11명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수도회 창설 승인을 받기 위해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를 알현하러 갔다. 남루한 행색을 하고 나타난 이들을 보고 교황이 처음에는 청원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 날 밤 교황의 꿈에, 어느 촌사람이 교회를 떠받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남루한 갈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새끼 끈으로 허리를 동여매고 나타났던 프란체스코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교황은 프란체스코의 수도회가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야 한다는 단서를 내걸고 순회 설교 수도회로서의 창설을 허가했다. 수도회 창설로부터 10년 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상징이 된 거친 갈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의 숫자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갈색 제복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고, 한국에도 서울 중구 정동에 ‘프란치스코회’에 가면 이런 수도사들을 볼 수 있다.

 

프란체스코의 갸륵한 뜻과 정열에 감동을 받고 그에게로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한 동네에 살던 클라라(1194-1253)라는 소녀가 있었다. 프란체스코처럼 부유한 가정의 딸이었지만, 프란체스코의 열정적인 외침을 듣고 자기도 청빈과 정절과 순복의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프란체스코는 클라라를 일단 분도 수녀원으로 보내 그녀를 보호했다.

 

1212년 클라라는 자기 여동생 아그네스, 그리고 다른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프란체스코가 그 전에 보수한 성 다미아노 교회에서 그의 지도를 받으며 ‘프란체스코 빈자 클라라(The Franciscan Poor Clares)’ 수녀회를 창립했다. 프란체스코가 죽기까지 클라라는 프란체스코 주변에서 그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다. 클라라는 1255년 성인으로 추대되어 ‘성 클라라’로 알려져 있다.

 

클라라와 프란체스코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었을까, 혹은 천상의 사랑이었을까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둘 사이의 이 지고지순한 사랑은 둘이 다 하느님께 대해 함께 가지고 있던 절대적 사랑을 매개로 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프란체스코가 1224년 라베르나 산 위에서 단식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의 몸에 성흔(聖痕, stigmata)이 나타났다.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 때 양 손, 양 발, 옆구리 등 다섯 군데에 찔림을 받아 피를 흘리셨는데, 프란체스코의 몸에서도 똑 같은 곳에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성흔은 아물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에게 계속 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1226년 10월 3일 해질 무렵에 프란체스코는 동료 수도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기고 45세의 나이로 ‘죽음 자매’를 맞았다. 죽은 지 2년 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고, 성 조르지오 성당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230년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프란체스코가 청빈을 강조하고 스스로 실천했지만 결코 ‘음울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도 행복을 추구했다. 단 그 행복을 찾는데 보통 삶과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 사물을 얻는 데서 즐거움을 얻으려 했지만 프란체스코는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자유로워져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모든 것을 다 즐길 수 있을 것임이라.” 하는 식이었다.

 

프란체스코는 한 때 불신자들을 개종시키겠다고 성지로 여행한 적이 있다. 그 여행에서 이슬람교도에게 사로잡혀 술탄 앞에까지 끌려갔다. 프란체스코는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했지만,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대신 프란체스코에게 후한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물론 그는 그 선물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프란체스코가 처형되지 않고 이렇게 대접까지 받으며 무사히 석방된 것은 그가 너무나 유쾌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프란체스코 평전을 쓴 체스터튼에 의하면 프란체스코의 특징은 ‘교황에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자기 궁전에 좌정하고 있는 시리아의 술탄에서부터 숲에서 기어 나온 누더기 강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불타는 듯한 갈색 눈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가 정말로 세상에서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라고 했다. 계급과 명예가 중시되던 중세 시대에 사람들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르거나 가치 있다 없다로 차별하는 일이 없이 “보통 사람들을 모두 왕처럼 취급했다.”

 

프란체스코는 사실 사람들만 사랑한 것이 아니다. 자연도 함께 사랑했다. 막연히 자연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꽃 혹은 동물을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치 친동생을 대하듯 당나귀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여동생에게 말하듯 참새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가 행한 기적들 중에는 새소리로 교향곡을 연주하게 했다든가 이리를 길들였다는 것 등이 있다.

 

프란체스코의 사랑은 사람이나 동식물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말년에 눈이 멀 지경에 이르러 자원해서 자기 눈을 뜨거운 송곳으로 지지게 했는데, ‘불 형제’를 초청하여 그 일을 하게 했다고 한다. 달 자매, 해 형제, 물 자매 등을 노래했고, 그의 노래는 아직도 이탈리아 어린이들이 부르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계와의 완전한 동질성을 느꼈던 셈이다. 사사무애라고 할까. 아무튼 이런 사실들을 감안해서, 그는 1939년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것 이외에,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프란체스코는 ‘나의 집을 보수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그전까지 권력을 축적하고 지반을 굳히는 데 여념이 없던 교회를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세상에 사랑을 나누어주는 교회로 바꾸는 데 혼신을 다한 셈이다. 이런 혁명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미움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성자로 칭송받고 있는 그는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모두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성자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975호 [2008년 11월 24일]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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