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1015 2010. 7. 2. 15:02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노무현이 MB에게 주는 충고

 

 

굴욕적인 전작권 전환 연기, "심리적 의존 관계를 벗어나 대등한 외교 관계 구축해야"

 

 

2010년 06월 27일 (일) 18:27:57 이정환 기자 ( black@mediatoday.co.kr)

이명박 대통령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당초 2012년 4월17일로 예정됐던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시점을 2015년 12월1일로 연기하기로 합의한 것과 관련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6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전작권 이양 논란이 한창이던 그 무렵, 이 모임에 참석해 20분 정도 간단한 인사말을 하기로 돼 있었는데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1시간10여분 동안 열변을 토해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국민들이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 "심리적 의존 관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전작권 전환 연기를 주장하는 세력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기 나라 자기 군대 작전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전작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모여서 성명을 내는 군 수뇌부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비난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이 완전히 대등한 외교는 할 수 없다"면서도 "최소한 자주국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군에 전작권이 있을 때 외교상 대화를 할 때 말발이 선다"면서 "유사시에 폭격을 할지 말지 그것도 자기 맘대로 결정을 못하는 사람이 북한이나 중국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유명한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전작권 전환 연기 사실을 발표하면서 "작전권 이양과 관련해서는 정식으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현재의 안보 환경과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2015년 말까지 이양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께서 수락해주신 것에 대해 또한 고맙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작권 전환 연기는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졌으며 청와대는 그동안 물밑 협상을 계속하면서 언론에는 보도유예 요청을 해왔다.

 

한편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노골적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요구한 것과 관련, 전작권 전환 연기의 대가로 한미FTA 비준의 걸림돌이었던 쇠고기자동차 부문을 양보하기로 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향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이나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 비용 부담 증액, 한국군의 아프간 파병 확대, 미국 주도의 미사일방어체제 참여 등에서도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 이명박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2008년 2월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연합뉴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피를 흘려도 우리가 흘려야 한다, 그래야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노 전 대통령과 "우리 군이 전작권을 돌려 받을 때 갖춰야 할 능력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다"고 시인하면서 한미FTA 재논의라는 혹을 달고 온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 차이는 매우 크다. 향후 한미FTA의 재협상을 둘러싼 반발과 함께 군사주권을 포기한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도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2006년 1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 연설 가운데 전시작전통제권 관련 발언 발췌.

 

 

대한민국 군대들 지금까지 뭐했나 이거야. 나도 군대 갔다 왔고 예비군훈련까지 다 받았는데 심심하면 세금 내라하고 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 위에 사람들은 뭐해서 자기 나라 자기 군대 작전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놔서 그렇게 별들 달고 나 국방부 장관이요. 나 참모총장이요.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까. 작전통제권 회수하면 안 된다고 줄줄이 모여 가서 성명내고 자기들 직무 유기 아닙니까. (박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들 하고 작통권 돌려받으면 한국 군대 잘 해요. 경제도 잘 하고 문화도 잘 하고 영화도 잘 하고 한국 사람들 외국 나가보니까 못하는 게 없는데  전화기도 잘 만들고 차도 잘 만들고 배도 잘 만드는데 왜 작전통제권만 왜 못한다는 이야깁니까. (박수)

 

실제로요. 남북 간에도 외교가 있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도 외교가 있는데 준비하고 있는데. 북한의 유사시라는 건 있을 수가 없지만 전쟁도 유사시는 있을 수 없지만 그러나 전쟁과 유사시를 항상 전제하고 준비하고 있는데 중국도 그렇게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한국군이 작전통제권이 있을 때 북한과 우리가 대화하는 관계, 중국과 우리가 외교상 대화할 때 동북아시아 안보문제를 놓고 대화를 할 때, 그래도 한국이 말발이 좀 있지 않겠습니까. 작전통제권도 없는 사람이 민간 시설에 폭격을 할 건지 말 건지 그것도 맘대로 결정을 못 하고 어느 시설에 폭격을 할 건지 그것도 자기 맘대로 결정을 못하는 사람이 그 판에 가서 중국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북한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외교상의 실리에 매우 중요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한국군이 방위력이 얼마만큼 크냐, 정직하게 하자. 언제 역전된 걸로 생각하십니까. 대개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 실질적으로 역전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까. 이제는 국방이고 뭐고 경제력 때문에, 그게 1985년이라고 잡아봅시다. 20년이 지났습니다. 북한의 국방비의 여러 배를 쓰고 있습니다. 두 자리수 아닙니까. 10배도 훨씬 넘네요. 이게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근 20년 간 이런 차이가 있는 국방비를 쓰고 있는데 그래도 한국의 국방력이 북한보다 약하다면 1970년대는 어떻게 견뎌왔으며 그 많은 돈을 우리 군인들이 다 떡 사먹었느냐, 옛날의 국방부 장관들 나와서 떠들고 있는데 그 사람들 직무유기 아니냐. 그 많은 돈을 쓰고도 북한보다 약하다면 직무유기한 거죠.

 

정직하게 보는 관점에서 국방력을 비교하면 이제 2사단은 뒤로 나와도 괜찮습니다. 그거 뭐 공짜 비슷한 건데 기왕 있는 건데 그냥 쓰지 시끄럽게 왜 옮기냐. 저도 그렇습니다. 시끄럽게 안 하고 넘어가면 좋은데 제가 왜 그걸 옮겼냐 옮기는데 왜 동의했느냐. 심리적 의존관계, 의존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국민들이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고 있어야 국방이 되는 것이지. 미국에게 매달려서 바짓가랑이 매달려서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빽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이 안보의식일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박수)

 

인계철선이란 말 자체가 염치가 없지 않습니까. 남의 나라 군대를 갖고 왜 우리 안보를 위해서 인계철선으로 써야 합니까. 피를 흘려도 우리가 흘려야지. 그럴 각오로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무슨 경제적인 일이나 그 밖의 무슨 일이 있을 때 우리 호주머니 손 넣고 그럼 우리 군대 뺍니다. 그렇게 나올 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당당하게 그러지 마십쇼 하든지 예 빼십쇼 하든지 말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나 나가요 하면 다 까무러치는 판인데 대통령이 혼자서 어떻게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26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직후. 연합뉴스.  

 

 

완전한 대등한 외교는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입니다. 그런 헛소리는 하면 안 되고 미국의 힘에 상응하는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줘야 합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그것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다. 최소한 자주국가 독립국가로서의 체면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때로 배짱이라도 내 보일 수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박수)

 

그런데 2사단 빠지면 다 죽겠다는 나라에서 다 죽는다고 국민들이 와들와들 사시나무 떨 듯 떠는 나라에서 무슨 대통령이 무슨 외교부 장관이 미국의 공무원들과 만나서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겠습니다. 심리적인 의존 관계를 해소해야 합니다. 그래서 뺐습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메모 :

 
 
 

김대중 대통령

1015 2009. 8. 24. 21:26

 

 

 

[추모]청년 김대중에 대하여

 

 

2009.8.19.수요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가? 야당 지도자 였으며,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서 민주화에 투신하였고, 온갖 고초를 넘기면서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룩하고, 노벨평화상을 받고, 6.15공동선언을 이끌어 내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뭐 이 정도가 대부분 알고 있는 전부 아닌가? 자, 그럼 1971년 이전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렇다. 언론이건 뭐건 간에 1971년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언제 태어났는가 그 정도만 -그것도 고령의 나이를 강조하기 위해- 언급할 뿐이다.

 

전공자의 입장에서도 한국 현대사를 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1971년에 아무런 배경없이 도깨비 방망이에서 뚝딱 튀어나오듯이 역사에 갑작스럽게 그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김대중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저 그렇게 튀어나올 수 있는 사람인가? 그의 비전과 철학, 가치가 그저 1971년 이후 수많은 탄압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차근차근 성장해 온 결과물을 1971년부터 보게 된 것일까?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필자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연설과 자료들을 보게 되었으며,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나는 그 분의 면모를 계속 새로 발견하게 되고, 경의와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가 잘 모르던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보면서 그 분의 거대한 가치에 대해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김대중은 처음부터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인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때야 동영상도 많이 남아 있고, 최근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자료를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료들도 극히 일부분을 확대 과장하거나(좃선벼룩 류의 '김대중 분석'이 그러하다.) 어떤 이야기를 끌어 나가기 위해서 일부만을 차용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일단 확인된 사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생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제대로 호적에 올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따라서 1923년~1925년까지 여러 설들이 있다. 웃기지 않는가? 무슨 고대사 인물 탐방도 아니고, 출생연대부터 분명하게 알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보다 오히려 더 자료가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김대중 대통령은 우등생으로 자라났고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좌익활동을 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 선언문

 

 

여기서 잠깐! "역시 김대중은 빨갱이 씨앗이네, 젊을 때부터 빨갱이 짓이었구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딴지에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술자리에서 빨갱이론에 대처하기 위해서 논리를 제공한다면 아래와 같다.

 

당시 미군정에서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우파는 겨우 10%,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무려 90%가 나왔다. 1920년대부터 민중들에게 침투하고, 지하조직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좌익세력은 이미 대중화 되어 있었다.  당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이상, 민중 뿐만 아니라 소위 글 좀 읽고, 쓴다는 사람은 모두 좌익계열이었다. 김대중 빨갱이론을 펼치는 사람에게 '까놓고 니 조상도 전부 빨갱이였어'라고 정중하게 설명해주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후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고초를 겪지만, 이런저런 사람이 나타나서 간신히 목숨은 부지하게 된다. 또한 북한군이 남침했을 때에는 북한군에 의해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이렇게 냉전은 어린 김대중 대통령에게 큰 상처로 남기고 만다. 보통 이쯤 되면 어느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상이다. 뉴또라이처럼 되거나 혁명가가 되거나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기울기보다는 유연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대단히 드문 경우이다. 특히 목숨을 잃을 뻔 했다면 더더욱 드물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의 유연한 사고가 나타나는 것이 바로 1955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로 인해서 젊은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그런데 <한국노동운동의 진로>라니. 무슨 꼭 80~90년대 운동권적인 제목의 글 같지만 1955년의 글이다. 이 글에는 당시 1950년대의 한국노동운동의 모습과 대안이 매우 잘 제시되고 있다. 실로 80~90년대의 이론과 비교해봐도 글의 수준이나 통찰력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사상계 창간호

 

 

이 글은 일단 반공을 주장하면서 시작한다. 북한과 사회주의는 철저히 배격하는 듯한 모습을 나타내지만, 실제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동의 유연성' 어쩌구 저꺼구 씨부려대는 뉴또라이들이나 재벌들의 논리와는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단 노동자와 농민이 연대하여야 하고, 관료자본주의 지배체제를 극복하여 합리적인 경제시스템을 얘기하고,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한다. 잘 들어보면 흡사 민주노동당 분위기를 나타내는 이 글의 일부를 옮겨 본다.

 

 

 

...전략...

 

여기서 장황하게 정치론을 늘어놀 여유는 없지마는 여하간 자본주의의 제도하에서는 노동자의 복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가 없는 것은 이미 세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경제의 후진성을 지양하고 근대적 생산을 급속히 확충 발전시켜야 함을 서두른 나머지, 우선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놓고 그 후 서서히 노동자의 후생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논자가 많은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에 고인 물속에서 구원을 호소하는 고기더러 동해 물을 끌어들일 때까지 기다리라는 개철지어의 장자고어와 마찬가지 모순으로서 그간에 있어서의 노동자와 전 근로계급의 고초와 희생을 무엇으로 감당해낼 것이며, 기술한 바 공산당과 대항해서 노동자가 어떻게 굳센 민주 진영의 선봉으로서 싸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가?
 

그렇다고 필자는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당장에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실시하도록 투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초보조차 제대로 못 갖춘 우리 나라 경제 형편으로 사회주의를 꿈꾼다는것은, 그것이 노동자에 의한 생산수단만의 관장을 주장하는 소극적 사회주의건 생산, 소비 양면의 장악을 목적하는 적극적 사회주의건 도저히 현실을 무시한 공상에 불과한 것인 동시에 사회주의 그 자체 역시 각국에서의 실험의 결과 상당한 결함이 있다는 것도 이미 주지되어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노동운동이 지향할 길은 죄악적인 착취와 지배를 자행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일방, 우리의 실정이 용납지 않고 겸하여 전체주의적인 통제와 생산 능률의 후퇴를 면치 못하는 사회주의 자체도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 결국 사유재산과 개인의 창의는 이를 어디까지나 존중하되 종래와 같은 자본만의 우위지배를 단연 배격하고 노동, 자본, 기술의 3자가 평등한 입장에서 서로 협동함으로써 생산의 급속한 향상을 기하고 그 이윤의 분배에 있어서도 노동자와 기술자 역시 응분의 참여가 허용될 것을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종래 사회주의가 생산 수단의 사회화에만 중점하던 것을, 이제 생산수단보다도 기업운영과 이윤분배에 있어서의 사회화라 할까, 즉 노동자와 기술자를 자본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처우함으로써, 생산능률화의 감퇴를 가져옴이 없이 사회주의 본래의 목적인 근로계급의 복리의 증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새로이 각성된 세계적 사조의 지향이며, 이러한 경향은 북구제국을 위시한 구주 여러 나라와 심지어 자본주의의 본가인 미국에서까지 현저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이며 , 지금 미국에서는 각 기업체의 주권을 노동자에게 적극적으로 분배하는 노력이 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후략...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54년 전에 쓰여진 글이다. 그럼에도 현재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물론 그 만큼 우리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당시 31살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분석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영민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연거푸 실패한다. 1954년 총선에서도 떨어지고, 뒤이어 강원도 인제에서도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에 첫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강원도 인제에서 1961년 5월 14일 민의원 보궐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16군사정변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국회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된다.

지독히도 정치에 운이 없던 김대중 대통령의 초기 정치 이력은 함께 회자되는 경쟁자(나는 결코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자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수준이 맞아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이력과도 비교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개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하고 그리고 대개 선거에 '떨어진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토호인 부모의 든든한 후원과 정치적 후원자의 지원으로 비교적 무난하고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차이가 바로 3당 합당 당시 엇갈린 두 사람의 선택으로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드디어 국회의원 뱃지를 달게 되는 것은 1963년 6대 국회의원선거였다. 고향 목포에서 승리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 전라도에서 민주당 달고 이기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냐?'라고 하겠지만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11곳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휩쓸었다. 전라북도는 2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민주공화당이었다. 당시는 우리가 아는 그런 지역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때였다.

 

국회에 간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만큼이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다. 특히 1964년 4월 21일에는 김준연이라는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통과될 상황에 처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무려 5시간 19분에 걸쳐서 의사진행발언을 하였다.(이는 현재 한국 기네스에 올라있다.).6대 국회의원 활동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은 유력 야당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1967년에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김대중 대통령은 목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건 더욱 의미가 있는 선거였다. 당시 전라남도의 19개 선거구 가운데 무려 16개 지역에서 민주공화당이 승리하게 된다. 이는 당연히 박정희 정권의 관권선거가 포괄적으로 개입된 것이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하는 쇼까지 보여주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뚫고 승리한 것이었다.

이 선거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였다. 왜냐하면 이 선거를 기점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을 확고히 하게 된다. 당시 선거 연설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흡사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 연상되게 하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나의 비원이 있습니다. 내 소원은 돈이 아닙니다. 2억도 싫고 20억도 싫고 200억도 싫습니다.

 

내 소원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신라 삼국통일 이래 1500년 동안 처음으로 이렇게 국토가 갈라져 있는 사실을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해방후 국토가 20여 년이나 분단된 이 사실이, 나는 통일이 없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평화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건설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박정권 아래에서 건설입네, 수출입네, 증산입네, 하면서 몇 사람만 잘살게, 몇 사람만 부자되게, 몇 사람만 배떼기 부르게 만들고 부익부... 재벌은 더욱 더 대재벌을 만들고 모든 국민은 헐벗은 가난뱅이요, 모든 국민은 더욱 빈익빈하게 만드는 이 특권경제를 타파하고, 내가 주장하고 우리 당책으로까지 채택된 중산층과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한 대중경제체제를 실현해서 나라의 혜택이 국가의 혜택이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 모든 사람의 피부와 뼈끝까지 골고루 돌아갈 그러한 올바른 경제정책이 이 나라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나의 절대적인 소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몇몇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얘기하면서 '반독재 투쟁, 민주화, 민족화해-평화노선'은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되면서 박정희 정권의 견제를 받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타동적인 외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60년대에 새로운 시대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적 흐름이나 과정에서 타동적으로 묻혀가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만들었고,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내놓았다. 그것은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권을 쥔 세력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비전들을 더욱 구체화하여 1970년에 <1970년대의 비전>이라는 글을 쓴다. 그 글을 살펴보면 그의 구상이 얼마나 튼튼한 철학적 기반 위에, 얼마나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 이 글이 나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이 글을 읽는 당시 기득권 세력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위협으로 느껴졌을 지 그 심정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잠시 살펴보자.

 

 

 


오늘날 우리 나라 국민들은 적어도 헌법이념상으로는 ‘교양과 재산’을 가진 시민계급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하는 19세기의 근세 초기 민주주의의 제한된 시대에 살지 않고, 만 20세 이상의 성년이면 누구나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20세기의 보편화된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이 나라의 기본법과 법률제도는 외관상으로 다른 어느 선진 민주제국과 비교해도 과히 손색이 없는 이념과 가치를 선언하고 있고, 또 이들 제도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1인 1표제의 원칙에 입각해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대중의 권익을 보호, 신장하는 데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 우리 나라의 정치체제는 겉으로 드러난 상징과 제도만을 가지고 규정한다면, 데이비드 이스튼 교수가 그의 명저 『정치체계론』에서 정의한 바 ‘정치체계 속에 투입되는 모든 요구를 설정시키고 모든 결정을 유효케 하는 방법의 규제조치로서의 체제가 민주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서와 이론상에 비친 그림 속의 떡 같은 정치체제일 뿐 우리 국민대중이 지금 이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감하는 실제의 정치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중략...

 

철인정치를 구가한 고대 희랍의 플라톤으로부터 오늘의 개발독재 옹호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엘리트에 의한 통치의 효율성을 믿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대중이 지배하는 정치를 혐오하고 비판했다.

 #1 대중은 무식하고 학식이 없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2 대중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3 대중은 허망한 것을 약속하는 선동정객에 표를 매수당한다. #4 대중은 언제나 권위지향적이며 자조력도 발전의욕도 없다. #5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가 똑같이 1표씩 갖는 것은 불공평하다.

 
개발독재 옹호자들은 대중의 자치역량을 지나치게 회의하고, 지식수준의 열악함을 개탄하여 대중에 의한 지배를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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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에 대한 피상적 관찰의 산물이다. 

 

 국민대중은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개발독재 지지자들이나 엘리트 통치예찬자들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우매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다.

 봉건정치의 이론적 대종인 공자조차 대중을 가리켜 ‘지극히 어리석되 가히 속일 수 없는 존재’라고 갈파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대중은 언제나 자기의 올바른 지도 세력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독재정권의 타도에 앞장섰다.

 대중은 언제나 역사의 편이었으며 또한 최후의 승리자였다. 나폴레옹도 진시황도 대중 앞에서는 무참한 패자가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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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박정권의 경제건설이 외국의 반완제품을 도입 가공하는 매판적 건설이며 이것이 국부를 한없이 해외로 유출시키고 있으며 농업을 희생으로한 건설이 도시, 농촌 간의 이중구조를 극대화하고 경제기반의 파탄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고 그 청산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적 분업관련의 심화에 의한 내포적 공업화와 농공업간의 긴밀한 관련발전 위에 국민경제 전반의 통일성 있는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인 재생산권의 형성을 촉진하여 우리 경제의 상대적인 자급자족 체계의 실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둘째, 공업화의 과정에 있어서는 국가는 전력 수송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투자하는 동시에 민족자본인 중소기업의 보호육성과 이의  경제적 단위에로의 발전을 위하여 관련기업간의 수평적 계열화를 적극 지원하도록 유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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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농업은 식량의 자급자족과 경제발전의 기본 여건으로서 가장 중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업의 구조는 한국농업이 지니고 있는 제조건에 비추어 자발적인 농민참여에 의한 협업농의 창설과 자주농업의 안정에 그 중점이 두어질 것이다. 이를 토대로 공업과 농업간의 분업 관련의 심화를 위해 상업적 농업의 전개가 권장될 것이다. 특히 어떠한 정책방향도 경제적 유인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이를 유도하는 조치가 꾸준히 취해져야 할 것이며 농업취업자와 공업취업자간의 소득 균형을 위한 적정한 농산물 가격과 이중가격제도, 가격예시 및 유지정책이 취해져야 한다.

 

 넷째, 계층간 분배구조는 산업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에 의한 자본에 대한 약간의 간섭과 근로자의 경영참여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근로자의 경영참여는 단순히 권익확보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의 향상을 위한 협력에도 큰 의의를 둔다.

 근로자의 정당한 배분참여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기업체에 있어서 노동조합의 경영참여, 종업원 특수제도를 법제화할 것이다.

 

 다섯째, 국민경제의 운용에 있어서는 혼합경제의 한국적 형인 대중경제는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추진하다. 그리고 경제의 계획적 운용을 위하여는 약간의 기간산업을 국가가 소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 범위는 한정적이고 과도적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할 것은 대중경제는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기능을 존중하는 대중경제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발전과 운용은 크게 격려될 것이며 그것이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공헌하는 한 결코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바이다.

 

 여섯째, 대중경제는 재정금융세제의 운용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소수 특권층 위주를 단호히 배격하고 이미 지적한 바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 중소기업의 육성, 농업경제의 급속한 발전 위주의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 폭넓은 중산안정계층이 형성됨으로써 우리의 경제가 무한한 발전을 지향함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의 물질적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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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내가 기득권 세력이라도 이건 가만히 둬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의 비전은 점점 정교해지고, 구체화 되었고, 또한 확대되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은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젊은 김대중 대통령 속에 그 분이 겪을 험난한 여정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글을 쓴 지 무려 28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비상 상태였고, 그의 '70년대 비전'은 나온지 무려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현실화 하지 못하고 있다.

위의 글을 쓴 다음해, 1971년에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로 나오게 되었고, 박정희와 인상적인 한판을 벌이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한 선거였지만, 온갖 관권 선거와 부정 개표로 간신히 김대중 대통령을 따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는 김대중 대통령을 죽이려 하였고, 거기서부터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살펴보면서 왜 그가 그토록 탄압받았는지,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역량은 너무나 높았기에 탄압받을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그를 이겨낼 역량까지 함께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노무현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비전이라고 생각하며, 김대중 대통령은 극복해야 할 구시대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연설과 글을 보면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차이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시대가 달랐을 뿐이고, 세련함이 달랐을 뿐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너무 영민했으며, 너무 앞서간 인물이었다. 보통 이런 인물들은 시대상황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독재자와 기득권의 공세에 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늘 거꾸로만 돌았던 역사의 수레바퀴는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으로 역주행을 멈추게 되었으며, 노무현 정부의 정책으로 잠시나마 역사의 온전한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기득권과 독재권력에게는 진땀나는 위험인물이었고, 거대한 역사의 역주행을 홀로 막은 거인이었으며,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바로 보여준 최초의 정치인으로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끝으로 이명박 정부에게 말하는 듯한 글이 하나 있어 인용하도록 한다. 이것은 1973년에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에서 펴낸 <행동하는 양심으로>라는 책에 있는 -경애하는 국민에게-라는 글의 첫머리 부분이다.

 

나는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의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결정되느냐 하는 점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느냐, 또는 얼마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국민을 대했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자기 나라 국민을 존경하고 사랑했느냐,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들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런 정책을 실현시키기위해 노력했는가 - 즉, 어느 정도로 충실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봉사했는가, 그 실적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 방식을 철저하게 가진 인물이라면 가령, 그 사람이 높은 지위에 앉았던 기간이 비록 짧았더라도 그리고 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은 역사 속에서 길이 기억하며 존경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국민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정치의 기본 이념과 신조로 삼고 있다. 나는 국민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국민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것과 같은 정치 자세를 경멸하며 또한 증오한다.

 

 

역사전달자(lim1498@gmail.com)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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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1015 2009. 8. 24. 19:37

"사랑합니다..존경합니다"

 

김대중 전대통령 추모사 -문규현 신부

 

2009년 08월 22일 (토) 11:47:59 [조회수 : 375] 문규현 .

 

 

   
▲ 사진/한상봉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죄스럽습니다. 어둡고 안타까운 나라 걱정 속에 먼 길 떠나시게 해서 죄스럽습니다. 님께서 평생 동안 온 몸 온 정신을 다해 쌓아올리신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화해라는 그 장엄하고 숭고한 역사를 탄탄하게 발전시켜 더 좋아진 나라, 긍지와 희망 속에 님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님께 빚진 역사, 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한없이 많은 저희가 이 무겁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다시 님께 의지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통하게 보내드리고, 파괴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광장을 바라보며 저희 마음도 자근자근 부서지고 많이 아파서 다시 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님이 희망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오래 사시라, 조금만 더 저희와 함께 하며 이끌고 품어주시라 투정했습니다. 떠나실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가지 마시라 붙잡았고,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도 어쩌면 좋겠냐고 님께 기댔습니다.

님께서는 결코 국민을 탓하고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변함없이 국민에 대한 신뢰,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하셨습니다. "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고 일기에 적으셨습니다. 걷기조차 불편하고 힘든 몸, 목소리내기조차 어렵게 날로 쇠약해지면서도 마지막 시간까지 국민에 대한 충실함, 역사적 상황에 대한 통찰과 과제 풀기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고 매일 정성을 다해 다짐하며 마지막 한 점 한 점의 기력조차 다 내놓고 바치신 님, 부족하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저희를 그래도 믿으며 “후배님들, 뒷일을 잘 부탁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웃으신 님,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님께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시던 199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방북하였다가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바 있습니다. 당시 방북은 1989년 8월 당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있던 임수경 학생과 동행하여 남으로 내려오도록 사제단이 저를 파견한지 10주년 됨을 기념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당국이 사제단 방북을 동의해주어 참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서울로 귀환한 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저는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보수세력을 의식하고 달래기 위한 처사였을 겁니다. 아픈 기억입니다.

그러나 그 쓰린 사건조차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민족의 역사를 위해 바쳐진 작은 희생제물이었습니다. 님께서 남북정상회담을 결단하시고 마침내 남과 북 정상이 평양에서 포옹하던 2000년 6월의 역사적 순간, 6.15 남북공동선언문이 발표되던 그날 그 때, 저는 제 상처와 아픔을 다 치유했습니다.

님께선 민주주의와 민족화해, 민족통일의 큰 지도자이셨으나, 속내를 보면 우리 모두에게 참된 인생의 안내자요 다정한 스승이셨습니다. 무엇보다 님께선 진정으로 참된 신앙인, 하느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산 참 제자이셨습니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자 했던 힘의 원천은,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라며 신념과 생명력으로 가득할 수 있었던 그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뜻에 대한 한결 같은 충직함이었습니다.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 들고 살아왔다.’-2009년 1월 15일 일기.

님께서는 이 시대 참 신앙인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자의 길, 순교영성을 고스란히 온전한 제자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번듯한 말과 화려한 성당 안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억눌리고 고통받는 이들, 서민들, 눈물짓는 이들 현장에 머무신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잊지 않고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님의 2009년 1월 6일자 일기를 읽습니다.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가택연금, 망명..., 개인의 삶에서든, 어느 역사에서든 그 무엇 하나 용납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허나 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겪으셨으니 이 나라 역사에 그 모든 인장을 자기 삶에 점점이 다 새긴 사람이 님 말고 누가 있습니까. 그 험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도 한 점 후회 없이 이토록 담담하고 아름답게 생을 정리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지난 6월 11일, 63빌딩에서 진행된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연설에서 하신 말씀을 또한 기억하고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지금, 그토록 안타까워하시던 남북대결과 단절이라는 상황조차 님의 서거 속에 다시 조금씩 풀리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북 간에 하늘 길, 땅 길, 마음 길이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하신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들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의연하게 진실을 찾기 위한 치열한 싸움의 길에 있습니다. 그들도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님께서 언제나 믿어온 국민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조차 국민과 민족의 운명을 안쓰러워하며 나아가야할 방향을 안내하시는 님. 님과 함께 한 정의와 평화의 여정, 화해와 통일의 역사는 참으로 행복하고 위대한 시간이었습니다. 님과 같은 지도자를 만나 저 험한 세월을 이겨온 저희 인생도 아름다웠노라고, 발전하는 역사 속에 함께 했음도 크나큰 자부심이라고 고백합니다.

님께서 온몸으로 일구고 온몸으로 가르치신 인생, 역사, 사랑, 헌신, 이제 저희 몫입니다.
후세들은 님에게서 배웁니다. 일기에 적으신 것처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님을.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임을.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라는 것을. - 2009년 1월 14일.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마지막까지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이제 한 가닥 연민과 눈물의 무게조차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십시오. 남은 역사적 과제들일랑 용기를 내어 예수님 뜻을 따르는 이들, 정의와 평화의 사도들에게 맡기고 주님 품안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드십시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하셨으니, 이제 민족의 혼, 민족의 정신이 되시어 남과 북 훨훨 자유롭게 다니시며 금수강산 온 산천 진달래랑 갖은 꽃 모두 누리십시오. 진달래 영산홍 지천일 때, 님을 보는 듯 활짝 반기겠습니다. 님의 영원한 반려자 이희호 여사의 연서를 빌어 저희도 님께 마지막 인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2009년 8월 22일 문규현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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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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