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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황후 견황후(甄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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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상식

2007. 11. 4.

견황후(甄皇后)
 
문소황후(文昭皇后). 본명 복(宓) (182~221)
 
난세를 겪어간 여성들은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천하의 미인이라면 그 운명은 한층 더 파란만장해진다. 난세에는 힘을 가진 자가 미인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견황후의 경우도 그러하다.

당대 최고 권력을 자랑한 원씨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갔다가 이를 몰락시킨 조씨 가문으로 개가하면서 운명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죽고 적장의 아들에게 시집가 황후가 되기 전에 모함으로 죽은 후 자신의 아들은 황제에 오른 여성.

 
*아래는 견황후의 일생을 요약한 것이다.*
 
난세라는 시대적 배경은 견씨를 이러한 파란만장한 운명으로 바꾸어 놓기 충분했다.
 
견황후는 태보를 지낸 견감의 후손이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녹봉 2천 석의 관원을 배출해 낸 명문가이다. 그녀의 부친 견일은 현령을 지내다 불행히도 견씨가 3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은 워낙 전답을 많이 소유해 경제적인 어려움은 크지 않았나 보다.

견황후가 10살 때 일이다. 당시에는 전란이 끊이지 않던 때이다. 여러 호족들이 세력확장을 벌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백성들은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먹고살기 위해 가지고 있던 금품들을 팔았다. 그때 견씨 집안에서는 이 금품을 대량 사들였다. 이를 보고 견황후가 모친에게 말했다.
 
"지금 세상은 혼란스러운데 금품을 사들이고 있으니, 이는 도의가 아닙니다. 주위를 보니 백성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습니다. 부디 곡물을 베풀어 은덕을 베푸시길 바랍니다."
 
10살 소녀가 벌써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난세라는 배경이 그녀를 조숙하게 만든 것일까.
 
어쨌든 견황후의 이러한 행동으로 그녀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후한 말기 하북을 통치한 원소 집안의 며느리를 들어가게 된 배경이 될 수도 있다.
 
견황후는 원소의 둘째 아들인 원희와 결혼했다. 하지만 원희는 나약하고 큰 재목이 아니었다. 원소도 그를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원소는 막내 원상을 가장 총애했고 실제로도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맏이 원담과 원상 사이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로 보건대 견황후가 원씨 집안의 며느리가 된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나약하고 시댁은 내부 분열이니, 앞날이 불안하기만 했을 것이다.
 
건안 5년(200년) 조조가 원소를 관도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의 운명은 한층 더 꼬인다. 당시 견황후는 시어머니와 업성에 남아 있었고 남편 원희는 원소의 명으로 유주, 지금의 북경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원소는 조조와의 싸움에서 대패한 것이 화근이 되어 2년 뒤 병사한다. 원소가 죽은 뒤 1년 후 조조는 원소의 근거지였던 업을 점령한다.
 
조조는 업을 점령한 다음 병사들에게 일체 약탈을 금지하고 원소의 가족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이는 비록 적이지만 젊었을 때 친구였던 원소에 대한 예우였다. 그러나, 당시 18세이던 조비는 아버지 조조와 함께 업에 머물러 있었다. 조비는 소문을 통해 견황후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릴 들었고 그녀에게 마음이 가 있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견황후를 보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간 시점이 조조가 원소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 시기보다 앞선다. 그렇다면 이는 조비가 조조의 명을 어긴 셈이 되는 것인데 당시 조조는 군법을 엄하게 적용하고 있어서 이러한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세설신어>에서는 조조가 견황후가 천하절색이라는 소릴 듣고 그녀를 불렀으나 조비가 데려갔다는 소릴 듣고 "이번 싸움은 다 그 녀석을 위한 것이었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얘기다.
 
더구나 나관중은 조조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이 말을 그대로 인용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어쨌든 조비는 그녀의 소문을 듣고 아내로 맞이하고자 다짐을 했을 터이고 조조는 이를 승낙했다.
 
하지만, 견황후의 불행은 조비가 한 헌제의 선양으로 황제에 오르면서였다. 조비는 곽귀빈을 총애하면서 점차 견황후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조비는 황제에 오르자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그 때, 견황후는 업성에 남게 되었는데 사실상 소박(?)을 맞았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견황후는 만감이 교체했으리라. 더구나 업성은 첫 남편인 원희와 지내던 곳이 아닌가.
 
조비의 총애를 받은 곽귀빈은 곽영의 딸로 미색도 뛰어나고 총명했다. 그녀도 어릴 때 기구한 운명을 지내다 조조가 위공이 되었을 때 동궁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녀는 지모로 조비에게 접근한 뒤 조비를 많이 도와줬다. 그 결과 조비가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비는 이러한 곽귀빈을 총애했고 반비례로 견황후를 서서히 멀리하게 된 것이리라.
 
사서를 보면 견황후가 조비가 후계자 다툼 때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 언급이 없다. 따라서 구체적인 내막은 알기 어렵다.
 
곽귀빈은 야심이 컸던 모양이다. 내심 황후에 오르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후실이 정실이 되는 일은 위계질서에 반하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견황후가 무심코 조비를 원망한 말 한마디가 전해진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찾아주지 않은 여인의 자연스러운 한탄이었지만 곽귀빈은 이를 놓치지 않고 견황후를 모함했다.
 
그러고는 견황후가 조비를 저주하는 것처럼 꾸몄고 조비는 단순하게도 이를 믿어버렸다. 결국 조비가 제위에 오른 지 1년이 좀 지나 견황후는 사약을 받았다.
 
견황후가 죽은 다음 날 일식이 있어 위나라 조정은 견황후의 죽음을 심상치 않게 받아들였다. 위나라 대신들은 곽귀빈이 황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조비는 결국 곽귀빈을 황후로 앉혔다.
 
곽귀빈은 자식을 낳지 못해 견황후의 소생인 조예를 키우게 되었다. 조예는 원수와도 다름없는 곽황후를 극진히 섬겼고 조예는 이러한 태도를 인정받아 다음 황제에 오르게 되었다.
 
조예는 황제가 된 뒤 견황후 추존사업을 했고 견씨 일족을 불러 들여 재능과 능력을 보고 임용했다. 그 후에 곽황후가 유언으로 간소하게 장례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조예는 이를 쫓았다. 후세 사람들이 조예가 곽황후 장례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 사족 -
 
견황후를 남몰래 그리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건안 시대 최고의 시인인 조조의 아들 조식.
 
그 조식의 <낙신부>라는 시가 있다. 이는 형수였던 견황후를 그리워하는 조식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데 아름다운 낙수의 신 복비를 보고 견황후를 떠올리며 지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