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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해니 2008. 1. 2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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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희, 태권도 창시자인가, 작명자인가
<무카스뉴스 = 신준철 기자> (2008/01/10) ㅣ 추천수:3 

[ITF 태권도를 말한다 - 2]


최홍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1918년 11월 9일 함경북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2002년 6월 15일 말기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국제태권도연맹(ITF) 故 최홍희 총재.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에서 ‘태권도(跆拳道)’는 최홍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군창설 요원으로 육군 소장시절 군에 태권도 보급, 대한태권도협회 창설, 국제태권도연맹 창설, 북한을 비롯 세계 123개국에 ITF 태권도 보급 등. 최홍희가 태권도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크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최홍희에 대한 국내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

군 장성 출신인 최홍희는 타협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밀어 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이는 태권도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같다. 생전 최홍희는 “내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이 되고,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제정 된 것은 각 관(館) 대표들이 육군 소장이라는 자신의 권위에 눌려 순순히 응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1972년 최홍희는 박정희 정권시절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전개한다. 이로 인해 그는 캐나다로 망명(도피라는 시각도 있다)하게 된다. 이후 1980년 북한에 ITF 태권도를 보급하게 되는데, 당시 한국은 북한을 ‘북괴’라고 지칭하며 철저하게 냉전의 각을 세우고 있던 시기이다. 당연히 국내 태권도계는 물론 한국 정부는 최홍희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국내 젊은 태권도인들 중 상당수는 최홍희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20년 가까이 태권도를 배워온 기자도 최홍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그만큼 최홍희는 국내에서 철저하게 은막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것이 계획적이었는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50년 분단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김대중-김정일’의 역사적인 만남은 얼어 있던 남북관계에 따뜻한 기류를 만들어 냈다. 이는 WTF와 ITF로 나눠져 있는 태권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내외 언론들은 최홍희를 조명하기 시작했고, ITF 태권도를 소개했다. 두 단체의 통합에 대한 논의가 이때를 기점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최홍희는 WTF와 ITF의 통합을 강하게 열망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각자 떠나온 길이 너무 멀어진 상황에서 통합은 간단하게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 최홍희는 한국행을 강하게 희망했으나 무산되었다. 사후에는 1944년 11월 평양 학병의거 사건을 모의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실을 근거로 2005년 5월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최종 보류 됐다. 한국에서 최홍희는 아직까지 친북인사인 것이다.


태권도의 작명자?

ITF 태권도인들은 최홍희를 태권도의 창시자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창시(創始)’의 사전적 의미는 ‘처음 시작함’인데, 이는 최홍희가 태권도를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르게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태권도 역사를 오랜 기간 연구한 한 교수는 “최홍희 총재는 태권도 창시자가 아니라 작명자다. ‘태권도’가 1955년 그의 제안에 의해 작명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태권도를 창시했다는 근거 자료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며 “50~60년대 태권도협회 임원으로 활동했던 원로들조차 그를 태권도 창시자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ITF 태권도인은 “최홍희 총재님이 태권도를 창시할 당시에 총재님을 밖으로 몰아내면서 비방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라며 “북한에 태권도를 전파했다는 이유로 친북인사로 몰아세우고, 단순한 작명가로 취급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태권도의 역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가라데 모방설이다. 최홍희가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에 심취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는 자서전 ‘태권도와 나’에서 “당시 동경시내에 서 있던 전봇대 중 나의 손이나 발에 차이거나 얻어맞지 않은 전봇대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가라데 2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권도인들 중에는 ITF 태권도를 가라데의 아류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ITF 태권도인들은 “태권도 9개관(창무관, 무덕관, 청도관 등) 창설자 중 가라데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지 궁금하다”며 “최홍희 총재님이 창시한 태권도는 오랜 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편견에 휩싸여 폄하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주장했다.

WTF 태권도 품새 제정에 참여한 한 원로는 “최홍희 총재가 개발한 창헌류 형은 가라데에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한국적인 품새를 만들자는 뜻을 모아 만들어 낸 것이 지금의 품새”라며 ITF 틀보다 WTF 품새가 우월하다고 은근히 강조했다.

반면, 과거 대한태권도협회 임원이었던 한 원로는 “몇 몇 국내 태권도인들이 ITF 태권도를 가라데의 아류라 말하는데, 품새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WTF 태권도가 가라데의 아류에 가깝다”며 “품새의 명칭만 봐도 ITF 태권도(도산, 천지, 단군 등)가 훨씬 역사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WTF 태권도 품새가 오히려 가라데에 영향을 더 받았다”고 설명했다.

최홍희가 태권도의 창시자인가 작명자인가란 논란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최홍희라는 인물이 태권도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끝)

[신준철 기자 / sjc@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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