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다큐:호국보훈의 달 특집]호국의 현장을 찾아< 1 > '사적 제225호 강화도 초지진'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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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6.

 

 

 

신미양요 당시 포탄에 맞은 초지진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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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지켜낸 경기도 산성을 가다] 39. 강화도 초지진

온몸으로 외세침략 저항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다

 

 

인천 앞바다에서 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강화도 초지진 전경.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의 화포가 전시돼 있다.

김포에서 초지대교를 건너면 만나는 강화도 초지진. 초지진은 150여 년 전 조선의 최전선이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초지진은 서양열강의 침략을 한 번도 비껴갈 수 없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강화성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양헌수 부대가 도하했던 곳이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낡은 화승총으로 첨단의 레밍턴 소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미 해병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조선군의 결사 항전으로 프랑스군과 미군은 아무런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조선의 승리로 받아들인 대원군은 어떤 외세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팔도에 척화비를 세웠다.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계아만년자손(戒我萬年子孫) 병인작(丙寅作) 신미립(辛未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1875년에는 미국을 따라잡기에 성공한 일본이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함대가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해 일으킨 ‘운양호 사건’ 역시 강화도 초지진에서 시작됐다. 흥미롭게도 신미양요와 운양호 사건은 맞물려 있다.

■ 초지진에서 미 해병대와 싸우다
조선 효종7년(1656)에 안산에 있던 초지량 수군 만호영을 강화도로 이전했다. ‘초지’라는 이름도 이때 붙여졌다. 초지진은 병자호란 이후에 관방의 요새로 관리됐다. 첨사의 휘하에 130명의 군사와 전선 3척이 배속됐고 초지돈을 비롯해 장자평돈과 섬암돈을 관할했다. 따라서 현재 복원된 초지진만 봐서는 초지진의 원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1850년대부터 서양 배인 이양선이 강화도 해안에 수시로 출몰했다. 최강의 대국으로 생각했던 청국은 아편전쟁에서 패배해 1842년에 개항했으며 무사의 나라 일본도 미국의 거대한 흑선에 저항하지 못하고 1854년에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은 달랐다.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로 소홀했던 국방은 1863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너무나 더뎠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 대동강까지 진입해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분노한 조선 군민들에게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맞아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자국의 배가 불타고 국민들이 살해된 이 사건을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1871년 5월16일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지휘하는 조선 원정대가 나가사키를 출항했다. 80문의 함포를 탑재한 전선 5척에 해군 1천230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병인양요 때 길잡이로 나섰던 리델 신부가 이번에도 동행했다. 6월1일 강화도 광성보를 지키던 조선군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오르고 있는 함대를 주목했다. 조선군은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손돌목 내항으로 돌입하는 함대를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경고성의 포격에 미국 함대가 거센 반격을 가했다. 이렇게 발생한 ‘손돌목 포격사건’은 명백한 미군의 잘못이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이 자신의 국기를 모독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강화 유수는 “국가의 관문인 강화해협에 무장을 갖춘 군함이 무단 침입한 것은 엄연한 도발행위”라며 사과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조선이 자신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로저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강화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6월10일 오전부터 ‘48시간 전투’가 벌어졌다.

초지진은 병마첨사 이렴의 지휘 하에 군사 100여 명이 대포 12문과 전선 3척으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군 상륙정이 해안으로 접근하자 조선군이 대포를 발사했다. 포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에 탑재된 함포의 방향은 초지진에 집중됐다.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던 조선군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오히려 진지 대부분이 파괴되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렴은 엄청난 화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신미양요 당시 초토화된 초지진 내부

오후 2시부터 킴벌리 중령이 해군 546명과 해병 105명의 혼성부대를 이끌고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소형 전투함 4척과 상륙용 소형 단정 20척이 초지진으로 밀려들었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조선군의 무기를 바다에 버리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날 밤 이렴은 초지진 부근에서 야영하는 미군을 기습했다. 그러나 기습을 예상하고 있던 미군의 저항에 부딪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6월11일 새벽부터 포함 모노카시호는 초지진 옆에 있는 덕진진에 포탄을 퍼부었다. 덕진진의 조선군도 포격에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초지진과 덕진진에서 퇴각한 조선군은 광성보로 이동했다. 광성보에는 진무영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다. 어재연 부대는 전방 해상으로부터 함포 공격을 받고, 후방의 상륙 부대로부터 곡사포 공격을 받았다. 함포 사격을 끝낸 미군은 상륙부대를 투입했다.

어재연 휘하의 조선군은 적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우렁차게 군가를 불렀다. 미군 상륙부대는 3면에서 공격했다.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조선군은 진내로 진입하는 미군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고 소총을 휘두르며 육박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350여 명의 조선군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거나 강화 해협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미군은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데 그쳤다.

비록 전투에 패했으나 조선이 끝내 통상을 거절하자 아시아 함대는 결국 빈손으로 떠나야했다. 1871년 7월17일자 ‘뉴욕 타임스’에 ‘야만인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응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인에게 조선인은 야만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군이 보여준 불굴의 투쟁정신은 미군에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슐레이 소령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들어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낡은 무기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 일본의 무력 앞에 쇄국의 빗장이 풀리다
5년 뒤 프랑스와 미국조차 실패한 조선의 빗장을 일본이 열었다.

1875년 9월 나가사키를 떠난 운양호는 은밀하게 조선 서남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9월20일 행방이 묘연했던 운양호가 초지진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함선의 출현에 긴장한 초지진 수비병들이 운양호를 향해 경고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의도대로 조선군이 먼저 발포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전투태세를 갖춘 운양호는 초지진 전방 1천700m에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근대화된 일본 군함 운양호

 

초지진에서도 반격에 나섰다. 초지진에서 쏜 포탄은 운양호에 이르지 못했지만 운양호에서 쏜 포탄은 초지진을 초토화시켰다. 9월22일 운양호는 영종진에도 포격을 가한 뒤 22명의 육전대를 상륙시켜 성을 점령하고 무기와 군수품을 약탈했다. 다시 강화도를 포격한 후 민간을 약탈하고 살육했다. 이때 조선인 35명이 사망하고 16명이 포로가 됐다. 9월28일 무력을 앞세워 행패를 부리던 일본군이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초지진으로 상륙하는 미해병대.(당시 미군은 사진사를 대동하고 그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운양호 사건’이다. 일본 정부는 9월29일에 개최한 긴급 각료회의에서 “일본 기를 게양한 군함에 조선군이 먼저 대포를 발사한 것은 전쟁행위에 해당한다”고 성토하고 부산 초량에 있는 공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876년 1월5일 강화부 연무당에서 벌어진 조선 대표와 일본대사의 회담을 시작으로 담판을 거듭한 끝에 2월27일에는 마침내 굴욕의 ‘병자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됐다. 대비 없이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개방 후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 하지 않고 청과 일본과 러시아에 의지해 정권을 유지하려다가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졌다.

 
▲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강화 연무당 터. [자료사진 - 최현진]


초지진은 오랫동안 허물어진 채로 방치돼 있었다. 신미양요와 강화도조약으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흐른 1973년에 진을 복원해 사적 제225호로 지정했다. 초지진에 가면 지금도 포탄 자국이 선명한 소나무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변화의 기회를 놓쳐버린 조선 왕조의 탐욕과 무지가 만든 상처인 동시에 외세의 침략에 맞선 조선 무사들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한다.

김영호 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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