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의미있는 1001번의 세계사 이벤트를 자세하게 정리해서 알려드립니다.

태양이 가려진 날, 이산들와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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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011. 10. 5.

이번 이야기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이 노리고 나선 원정에서 아프리카 왕국의 원주민 전사에게 전멸당한 이산들와나 전투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이 전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수십 년 전 ㅡ.ㅡ 비디오 가게에서 땡처리 비디오(줄루전쟁)를 구입하면서 입니다. 그냥 늘 그랬던 소수의 영국군이 압도적인 원주민을 제압하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 진행이 영국군의 패전으로 흘러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영화였습니다. 제가 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결정적인 전투 장면에서 테이프가 씹혀있어서 재생이 안되었고 누가 이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야 출장 길에 DVD를 구입했습니다만.

 

그리고 역사 자료를 정리하다 보면 상당히 불편한 용어들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000의 난 또는 000 폭동같은 용어입니다. 제국주의자들 입장이나 전제군주에게는 폭동이고 반란이겠지만 식민지 통치대상의 국민들이나 민초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저항운동이었을 뿐이죠. 그렇다고 인도 세포이의 민족운동이라는 생소한 용어를 쓸 수도 없고... 더 좋은 용어가 합의될 때까지는 제국주의 역사학자들의 용어를 그대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태양이 가려진 날, 이산들와나 전투

 

남아프리카, 창으로만 무장한 줄루 전사가 세계 최강의 빅토리아 군을 전멸시킨다.

 

Ian J. Knight (Military History 특별판)

 

1879 1 22일 저녁 7시 정도가 되었을 때에, 영국군 로드 쳄스포드(Lord Chemsford) 준장이 남아프리카 줄루왕국(Zululand) 이산들와나(Isandlwana)라는 큰 봉우리 아래에 설치된 캠프로 돌아왔다. 아침에만 해도 적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자신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었다. 그는 하루 종일 10km나 떨어진 바위 산들을 뒤지며 공격준비를 하고 있을 줄루 부대를 찾아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거꾸로 뒤에 남겨둔 캠프를 적이 위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상황을 직접 확인하려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림 설명: 챨스 에드윈 프립이 그린 이산들와나 전투입니다. 이산들와나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영국군 제24 연대의 마지막 병력이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당히 역동적인 그림입니다. 클릭해서 보시면 중앙에 소년병이 있는데, 감상적으로 만든 의도인지 아니면 북치는 소년병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갈수록 귀차니즘때문에 스캔 품질이 안좋아집니다...

 

그가 캠프로 돌아왔을 때에는 밤이 내리고 있었다. 여명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줄루 전사들이 캠프 북쪽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캠프가 있었던 이산들와나의 산자락에서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쳄스포드의 부대가 산등성이로 접근하자 많은 시체들이 발길을 막았다. 처음에는 줄루전사의 시체가 보이더니 그 다음부터는 붉은 군복이 벗겨진 백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캠프 근처에 도착하자, 시체가 산을 이루어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캠프에 들어서지 못할 정도였다. 줄루전사와 영국군이 서로 엉켜 쓰러져있었고 말, 당나귀, 황소도 모두 죽어 넘어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줄루시체에는 근접사격의 총탄이나 총검에 의한 끔찍한 상처가 나있었던 반면, 영국군은 모두 찔린 상처였다. 많은 시체의 내장이 사라졌는데, 줄루부족은 죽은 전사의 영혼은 내장을 통해 후손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곳곳에 부상입고 쓰러진 줄루전사는 병사들이 총검으로 처리했다.

쳄스포드가 캠프에 남겨둔 1,700명의 영국군과 아프리카 동맹군 중, 1,300명 이상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프리카인으로, 줄루전사만큼 빨리 뛸 수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했다. 영국군 중에서는 60명 정도만이 살아 남아 전투상황을 전해주었다. 쳄스포드 장군이 주변에 펼쳐진 대재앙의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에, 참모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캠프에 1,000명이나 있었는데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느꼈던 충격은 125년이 지난 지금도 전사연구가들을 사로잡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있었던 수 많은 전투 중에서 이산들와나는 가장 충격적인 전투였을 것이다. 1842년 카불(Kabul) 퇴각이나 1880년 마이완드(Maiwand, 아프카니스탄에서의 패전) 패전보다 더 많은 영국군이 죽었고 심지어 워털루에서보다 더 많은 고급장교가 죽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영국인들이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총만 쏘면 놀라 자빠지리라 생각했던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국군은 아프리카 오지에서 왜 패전을 했던 것일까?

1870년대는 영국이 제국주의로 절정을 달리던 시기였다. 크림(Crimean) 전쟁과 인도 반란(Indian Mutiny) 이후, 해상장악, 산업혁명과 최신식 무기체계가 어우러져 영국은 절대강국이 되었다. 프랑스와 같은 전통적인 경쟁국은 내부 문제로 혼란스러웠고, 독일과 미국 등의 신흥국은 아직 세계무대에 등장하지 않았었다. 영국은 아시아, 북미,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 걸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계속 확장하던 참이었다.

줄루왕국과 전쟁이 벌어진 것도 제국주의의 확장욕때문이었다. 영국은 19세기 초에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Cape Town)의 네덜란드 식민지를 점령하면서 디딤돌을 마련했다. 그 당시만 해도, 영국은 식민지 획득보다는 세계전략을 구상하고 있었고 유럽, 아프리카, 인도에 걸친 긴 항로를 나폴레옹이 교란하지 못하게 만들려면 케이프 타운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는 이미 네덜란드 정착민과 같이 경쟁국이 진출해있었고 내륙으로 계속 확장하면서 아프리카 토착민과 충돌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40년 넘게 영국은 현재 미국이 그러는 것처럼 제국주의의 경찰노릇을 하려고 했지만 정착민과 토착민을 서로 분리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무력충돌을 막으려면 상당한 비용과 희생이 필요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자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좀 더 공격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1868년 킴벌리(Kimberley)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아프리카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런던의 제국주의들은 남아프리카에 도로와 철도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잘 갖춰놓으면 내륙의 상품과 인력이 항구를 거쳐 전세계에 공급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영국이 지원하는 식민지보다는 보어(Boer, 또는 Afrikaners)인들이 주축이 된 반 영국 정착지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다른 지역은 아프리카 토착왕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런던에서 찾은 해결책은 서로 단절된 사람들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되 영국이라는 우산 아래 모으는 연합전략이었다. 1877년 영국은 트란스바알(Transvaal)의 보어 공화국을 합병하고 고위관료 헨리 바틀 프레레(Henry Bartle Frere)를 남아프리카에 파견해 연합정책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그는 케이프 타운에 도착하자 마자 그 지역에 대해 조언을 얻는 일부터 시작했다. 몇 개월 만에, 그는 연합시킬 수 있는 빠른 방법 중 하나는 줄루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설명: 줄루 왕국과 영국군의 주요 전투지입니다. 줄루왕국의 샤카라는 전사왕이 1,000년 전에 태어났었다면 우리는 또 다른 알렉산더를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줄루의 영토는 남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으로, 인도양과 카흐람바(Kahlamba-Drakensberg) 사이에 있었다. 줄루는 유명한 전사왕 샤카(Shaka)의 지도력덕분에 19세기 초에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1824년 영국 모험가들이 나탈(Natal, 현재의 더반)항으로 알려진 곳에서 교역소를 만들었다. 1877년이 되자 줄루영토는 세 방향에서 식민지 정착지에 둘러쌓이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영국의 나탈, 동쪽으로는 보어 트란스바알, 북쪽으로는 포르투갈 모잠비크에 둘러쌓인 것이다. 트란스바알이 영국에 합병되면서 줄루 국경에서는 영국이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된다.

 

프레레가 생각하기에는, 줄루 왕국의 독립은 영국의 이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가장 굳건한 흑인왕국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자생력을 갖추고 있었고 군사력도 막강했고 고집있는 세츠와요 카므판데(Cetshwayo KaMpande)는 백인제국의 엄포에도 겁을 먹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줄루 왕은 영국령 나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지만 1860년대 내내 조금씩 영토를 확장하는 트란스바알과는 관계가 악화되었다. 영국이 트란스바알을 합병하자, 줄루 왕은 이전의 친구와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레레는 줄루의 영향력을 줄여 트란스바알에서의 이권을 확실하게 만드는 동시에 아프리카 민족이 유럽에게 힘을 합쳐 저항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림 설명: 줄루왕 세츠와요와 쳄스포드 장군입니다. 세츠와요 왕이 이렇게 증명사진을 찍은 것은 아무래도 포로가 된 후로 보입니다.

 

1878 12, 프레레는 일련의 사소한 국경분쟁을 트집잡아 세츠와요에게 최종 통고를 했다. 왕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일부러 내밀었고 1879 1 11일에 영국군이 줄루왕국을 침공했다.

프레레는 최신식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군이 창, 방패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줄루군을 쉽게 정벌할 것으로 믿었다. 정벌군의 지휘를 맡은 쳄스포드 장군은 50대로 크리미아와 다양한 식민지 원정에서 복무했었고, 최근에는 희망봉 동쪽의 소사(Xhosa) 민족과의 지리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낸 경험많은 장교였다. 전형적인 빅토리아 신사로 정중하고 조용한 매너로 유명했으며 절대로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지난 성공에서 아프리카 토착민은 전투능력이 열악하다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식민지 시대의 영국인 지휘관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적은 인력으로 많은 일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그림 설명: 쳄스포드의 1차 원정로입니다. 전력에 대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부대를 3개 대열로 나누어 침공했습니다.

 

쳄스포드는 줄루족이 25,000명의 전사를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탈과 줄루의 국경은 수백 km에 걸쳐서 돌산과 황무지가 있었고 줄루 부대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 쳄스포드는 영국군을 3개 대열로 나누어 전진하다가 줄루의 오느디니 울룬디니(oNdini-Ulundi)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2개 대열은 예비군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쳄스포드가 한 개 대열에 3,000명도 채 배치시키지 못했고 그 중 절반 정도만이 영국 정규군이었으며 나머지는 나탈 정착지에서 뽑은 지원병과 아프리카 용병이었다. 쳄스포트도 프레레와 마찬가지로 정규군의 화력을 이용해서 줄루족의 압도적인 숫자에 대항할 생각이었다.

쳄스포드의 전력은 양측면을 방어하면서 중앙에서 깊숙이 전진하는 것이었다. 1878년 말, 그는 중앙 대열을 헬프메카아르(Helpmekaar)라는 고지대에 집합시키고 자신이 직접 지휘할 생각이었다. 이 부대는 제24 보병연대의 제1 2대대로 구성되었으며 아프리카 지역을 잘 아는 병사들이었다. 여기에 나탈 지원병의 제3 연대와 식민지 정부가 모은 약간의 기병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7파운드 경포 한 문이 주어졌다. 100대 이상의 우마차가 부대의 텐트, 장비, 음식과 탄약을 실어 나르기로 되어 있었다.

 

1879 1월 초, 중앙 대열이 헬프메카아르를 떠나, 1 11일에 프레레의 최후 통고시한이 넘자마자 강을 건너 줄루왕국으로 전진했다. 짙은 안개가 껴있었지만 줄루족의 저항이 없이 강을 무사히 건넜고 주변의 요충지는 모두 안전한 것으로 정찰되었다.

쳄스포드는 아직 줄루 부대의 이동경로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병사를 이끌고 몇 km 더 들어가 시하요 카송고(Sihayo kaXongo)라는 줄루 추장의 마을을 불태웠는데, 추장은 마침 전제부족 회의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웠지만 마을에는 수 백 명의 전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돌산을 따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력이 상대가 안된 줄루 전사는 마침내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영국군은 최초의 전투에서 줄루 전사는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편견을 다시 한 번 굳히게 된다. 위험한 자만심이 쳄스포드 군대 전체에 흐르게 된다.

 

그림 설명 : 줄루 전사의 전통적인 전투방식입니다. 이들은 주로 찌르는 단창-투창이 아닌-이나 곤봉으로 무장했으며 일부는 구식 화승총을 구비하기도 했습니다.

 

전초전은 제2 대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초전 소식이 줄루 수도 울룬디니에 도착하자, 세츠와요 왕은 군대를 모아 전쟁의식을 준비하게 하고 줄루족 지휘관은 3개 대열 중 중앙대열이 가장 위험하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1 17, 25,000명의 줄루전사가 쳄스포드의 부대를 막기 위해 수도를 떠난다.

반대편에서는 쳄스포드가 다시 전진한다. 줄루영토로 20km 더 전진해 이산들와나라는 정상이 평평한 이상한 모양의 절벽 밑을 지나게 된다. 여름 비가 내려 수송마차가 지날 길이 없어져 잠시 행군이 중단되었지만 1 20일에 다시 전진해 이산들와나의 동쪽 경사면에 캠프를 차린다.

 

그림 설명: 이산들와나 산 자락으로 모이고 있는 영국군입니다.

 

전투 결과만 놓고 보면, 이산들와나의 캠프위치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곳 외에는 캠프를 차리기에 적당한 곳이 없었다. 나무와 물을 구할 수 있었고 울룬디니 방면으로 20km 정도가 열려있어 관측에도 유리했다. 반면에 다른 주변은 언덕과 낮은 구릉이 계속되어서 캠프가 수 백 미터에 걸쳐 길게 늘어졌다. 암벽지대라 참호를 팔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실제로 쳄스포드는 이산들와나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 아니었다. 부하들이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텐트를 세우는 동안, 그와 참모는 남과 동쪽 방향의 언덕을 정찰하고 있었다. 언덕이 연이어지다가 강을 만나는 지점을 보자, 쳄스포드는 줄루 부대가 이 지형을 이용해 공격해올 것으로 느꼈다. 밤에 캠프로 돌아가자 마자, 그는 네탈 기병부대를 보내 언덕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네탈 기병부대는 21일 새벽에 출발을 해 21km 정도 떨어진 망제니(Mangeni, 쳄스포드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 골짜기를 향해 언덕을 훑고 다녔다. 흩어졌던 기병대원들이 다시 모일 때까지만 해도 그 일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탈 기마경찰대가 반대편 언덕에서 이동하고 있는 소수의 줄루전사를 발견했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나서자 마자, 수 백 명의 전사가 갑자기 산꼭대기에서 나타났다. 경찰대의 다트넬(Dartnell) 소령이 급히 망제니에 있는 지원부대로 후퇴했다.

소령은 어찌할 줄 몰랐다. 쳄스포드는 밤에 이산들와나로 복귀하라는 명령이었지만 쳄스포드가 가장 염려하던 곳에서 적을 발견했고 어두울 때에 캠프로 돌아간다면 길을 잃거나 배후를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밤을 보내고 쳄스포드에게 상황을 보고하기로 한다.

 

쳄스포드에게는 오전 2시에 보고가 전달되었고 그는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이라고 판단하고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쳄스포드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병력 중 절반 정도를 즉시 캠프 밖으로 이동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달빛조차 없는 밤이었지만 운이 좋다면 새벽에 망제니에 도착해 줄루 전사들을 기습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로르케(Rorke)에 대기하고 있던 안쏘니 던포드(Anthony Durnford) 휘하의 예비부대에게 이산들와나로 전진하라고 명령한 후에 자신은 캠프를 떠나 망제니로 향한다.

 

그림 설명: 캠프를 지휘하던 풀레인이 쳄스포드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고 짧게 보낸 통신문입니다.

 

쳄스포드는 새벽에 망제니에 도착했지만 다트넬이 보고했던 줄루 부대가 이미 계곡으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즉시 언덕으로 병사들을 풀어 줄루 부대를 찾게 했다. 곳곳에서 모여있는 줄루족을 발견하고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본대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실망한 쳄스포드는 캠프에 남아있던 병력에게 텐트를 걷고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몇 시간 후에, 캠프 지휘관에게서 줄루 부대가 대대적인 공격을 하고 있어서 캠프를 걷을 수 없다는 간단한 보고가 전해졌다. 당황한 참모가 고지대에 올라 망원경으로 캠프를 살펴봤지만 텐트가 줄지어 서있는 캠프는 별다른 일이 없어보였다.

 

이산들와나에는 정규군 6개 중대, 2문의 7파운드 포와 수 백 명의 지원병 기병대와 잡부들이 남겨졌다. 캠프는 주로 행정 업무만 담당했던 헨리 풀레인(Henry Pulleine) 중령이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쳄스포드는 물론이고 그도 캠프를 적이 직접 공격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캠프 북쪽에 줄루 부대가 나타났을 때에도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 풀레인은 보병들에게 전투대열을 갖추게 했지만 줄루 전사들은 내려오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캠프에서도 이들이 감히 내려올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정도가 되자 줄루 부대는 자취를 감춰버렸고 던포드 대령의 부대가 로르케에서 캠프로 합류했다.

 

그림 설명: 이산들와나 전투의 진행그림입니다. 줄루 지휘관은 본대를 가슴(Chest)에 배치하고 양쪽(왼쪽과 오른쪽 뿔)으로는 우회시켜 협공/포위섬멸하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영국군이 이들의 기동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고, 줄루 부대의 규모도 영국군의 화력을 압도했습니다.

 

계급으로는 던포드가 풀레인보다 높았고 캠프의 총지휘자가 되어야 했지만 그는 독립부대를 맡고 있었고 쳄스포드에게서의 새로운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다. 던포드도 캠프 주변에 별다른 상황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북쪽에 있던 줄루 부대가 쳄스포드와 캠프를 단절시켰다면? 풀레인은 줄루 부대의 이동을 몇 km 밖에서부터 정찰할 기병대가 부족했는데 방금 전에 도착한 경찰대 덕분에 기동력을 얻게 되었다. 던포드는 아직 다른 명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북쪽 골짜기 쪽으로 줄루 부대의 움직임을 정찰하기로 한다. 그는 풀레인에게 약간의 보병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풀레인은 캠프를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주저하다가 결국 1개 중대를 더 높은 지대로 보내 주변을 정찰하는데 동의한다.

 

그림 설명: 영국은 워낙 많은 식민지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정규군만으로는 도저히 작전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줄루 원정에서도 경찰, 현지 무장시민 뿐만 아니라 협조적인 현지 원주민까지도 모두 동원합니다.

 

던포드는 오전 11:30 시에 캠프를 떠났다. 병력을 둘로 나눠, 하나는 캠프 바로 북쪽 위에 있는 산등성이를 정찰시키고 자신과 나머지 병력은 절벽 아래를 따라 동쪽으로 훑고 지나갔다. 그의 계획은 고지대에 있을 줄루 부대를 협공해 캠프에서 멀리 내쫓는 것이었다. 3년 전, 커스터(Custer) 중령이 리틀 빅혼(Little Bighorn) 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이 병력을 둘로 나누었고 적에게 기습으로 치명타를 날릴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커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곧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기병대는 캠프 북쪽에서 소수의 줄루 정찰대를 보고 그들을 쫓아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기병대가 산 정상에 오르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반대편 넓은 계곡에 25,000명의 줄루 본대가 대기하고 있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쳄스포드가 줄루의 작전에 대해 예측한 것이 모두 틀리지는 않았다. 줄루 본대는 망제니 지역에 하루 전에 도착해있었던 것이다. 영국군의 우익을 단절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북쪽으로 이동해 쳄스포드의 왼쪽으로 돈 것이다. 21일 저녁, 다트넬은 본대에 뒤떨어져 이동하던 줄루 전사를 붙잡았다. 줄루 전사들이 들키지 않고 캠프 근처를 지나쳐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 전투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22일 저녁은 불길하다고 믿는 줄루의 미신 때문에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었는데, 산 위에 영국군 기병대가 나타나자 줄루 전사들은 전쟁을 시작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줄루 부대가 영국군을 향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야영하던 부대도 공격에 합류했다. 몇 분만에 모든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어쩔 줄 모르는 지휘관들만이 뒤에 남겨졌다.

 

영국군 캠프에서는, 풀레인에게 엄청난 수의 줄루가 고지대에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산들와나 산자락에 있던 그는 고지대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는 교란공격일 뿐이고 주력보대는 망제니에서 쳄스포드와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움직였다. 총소리가 울려퍼지며 고지대에 있던 중대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또 다른 중대를 보내 그곳을 보강하기로 한다. 그리고 캠프에서 2문의 대포도 아래 쪽으로 옮기고 나머지 병력을 대포 옆에 횡렬로 전개한다.

 

그림 설명: 줄루 전사들의 필수품인 가죽방패입니다. 창이나 곤봉에 대해서는 대단한 방어효과를 가졌겠지만 현대식 소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지대에서는, 기병대가 풀레인이 보낸 중대 쪽으로 후퇴를 했다. 영국군은 줄루족이 중앙(가슴, Chest)에 본대가 서고 양측면(뿔, Horn)의 병력은 황소 뿔처럼 돌출하는 대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줄루 본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영국군은 고지대를 포기하고 캠프 근처의 풀레인의 병력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줄루 본대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동안 평원에서는 던포드가 절벽 아래를 정찰하다가 갑자기 반대 방향에서 전진하던 줄루의 왼쪽 뿔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병력을 펼치고 전투를 벌이며 캠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일제사격을 가하며 줄루 부대의 전진을 지연시켰다. 줄루가 20m 내로 접근하면서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지원병들이 흔들릴 수도 있었지만 던포드의 지도력덕분이었던지 대열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후퇴하다가 캠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협곡을 만나자 협곡 깊숙이 말을 숨기고 병사들은 줄루에게 발사했다. 뿔 끝에 있었던 젊은 줄루 전사들이 큰 피해를 입고 무너졌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이제 줄루의 공격은 전체로 번졌다. 수 천 명의 줄루 중앙이 고지대를 내려왔고 풀레인의 수비군은 보다 나은 방어를 위해 뒤로 조금 물러났다. 중앙 대열은 영국군 대열에서 겨우 200m 밖에 안떨어졌지만 몸을 숨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이 탁 트인 공간이어서 중앙대열은 더 전진하지 못했다.

풀레인의 우측은 상당히 위험해졌다. 우익의 병력과 협록에 있던 던포드 사이에는 거의 1.5km의 공간이 있었고 여기로 줄루 부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풀레인은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뒤로 물려 십자포화를 퍼부어 줄루 전사를 다시 멈추게 만들었다. 줄루 부대는 영국군의 양측면으로 우회하려고 했고 영국군은 이제 탄약도 얼마 남지 않았다. 풀레인은 너무 서둘러 캠프에서 나왔기 때문에 탄약마차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보급병들도 전투의 혼란 속에서 탄약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던포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캠프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문제는 그가 후퇴하면서 풀레인의 우측이 완전히 무인지경으로 노출된 것이다. 순식간에 영국군의 진형이 무너져내렸다. 생존자에 따르면, 던포드는 풀레인에게 지나치게 길게 늘어진 수비선을 포기하고 캠프로 돌아가 대형을 다시 갖추자고 했다고 한다. 줄루 전사는 나팔소리가 울리자 영국군이 사격을 멈췄다는 회고를 했다.

 

영국군의 대열에 맞선 줄루 전사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상체를 드러낼 때마다 총알이 쏟아져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산 기슭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줄루 지휘관 느췽와요 카마홀레(Ntshingwayo kaMahole)는 위대한 전사 므코사나(Mkhosana)를 보내 전사들을 재촉했다. 므코사나는 쏟아지는 총탄에도 불구하고 몸을 세우고 바닥에 엎드려있는 전사들을 나무랐다. 결국 그가 총에 맞고 쓰러지자 땅에 엎드려 있던 줄루 부대가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달려나갔다.

영국군의 대열이 흐트러졌다. 지금까지 잘 버텨주던 지원병과 용병부대가 무너져 뒤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정규군의 대열 곳곳에 구멍이 생겨났다. 줄루 전사들은 구멍이 생길 때마다 거기를 뚫고 들어가 정규군이 대형을 다시 갖추지 못하게 했다. 영국군이 점차 후퇴를 하면서 사격빈도가 줄어들자 줄루 전사가 백병전을 펼칠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들어왔다. 던포드가 후퇴하면서 생긴 우측의 커다란 공백으로 줄루 부대가 텐트까지 밀려들어오면서 영국군의 퇴각로가 막혔고 수 천 명의 줄루 전사는 병사뿐만 아니라 캠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창으로 찔러 넘어뜨렸다.

그림 설명: 전투의 최종 장면입니다.

 

이산들와나 아래의 도로까지 무사히 갔던 병력도 공격을 받았다. 전투 초기에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던 줄루의 오른쪽 뿔이 산 뒤를 돌아 갑자기 캠프 뒤를 공격해왔다. 겁에 질린 일부 병사가 줄루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달아났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뒤로 물러날 곳이 없어져버렸다. 이제는 탄약도 떨어져갔고 줄루 전사는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두 무리의 병사들이 결국 창에 맞아 모두 쓰러졌고 일부 병사만이 줄루 전사의 공격을 피해 계곡으로 도망쳤다.

던포드도 줄루의 왼쪽 뿔을 막던 식민지 지원병의 대열에 합류했다가 죽었다. 풀레인도 전사했는데,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버티던 무리 속에서 병사들을 격려했었다고 전해진다.

전투가 한창일 때에 태양에 부분 일식이 일어나면서 줄루 전사들이 "태양이 가려졌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캠프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병사들도 모두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며 줄루 전사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 사람도 많았다. 24연대 제1 대대의 두 장교는 연대기를 구해 강까지 도망칠 수 있었지만 급류에 휩쓸려 깃발을 잃어버리고 나탈 강변에서 죽었다.

 

그림 설명: 연대기를 안전한 곳으로 가져가는 영국군 장교 두 사람입니다.

 

줄루족도 이 승리를 위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1,000명이 죽었고 수 많은 전사가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의미있는 승리였다. 영국군 캠프가 통째로 사라져버렸고 최신식 소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쳄스포드가 그날 밤 캠프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14일 전에 건넜던 나탈 국경을 다시 건너가는 수 밖에 없었다. 로르케의 국경초소에서 150명의 영국군이 3,500명의 줄루 전사의 또 다른 공격을 막아내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지만, 그렇다고 이산들와나의 패배가 감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 설명: 로르케 방어 그림입니다. 줄루 영화가 두 편이 만들어졌는데 한 편은 이산들와나, 다른 한편은 로르케 방어입니다. 혹시 영화를 보시더라도 영국군이 무사히 방어하는 영화는 로르케 방어입니다. 이산들와나를 제외하고는 영국군이 줄루 전사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승리하게 됩니다.

 

이산들와나 전투는 대영제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제국의 자존심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고 쳄스포드에게 충분한 병력을 보내 줄루족에게 보복하게 했다. 이 때조차도 6개월이라는 긴 전투를 벌여야 했다. 쳄스포드는 영국에 남아프리카를 정복한 승리자로 귀국할 수 있었지만 그는 다시는 야전 사령관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영국은 이 전투의 패배로 연합 정책을 포기하고 다른 정책을 모색했다.

줄루족은 이산들와나 전투의 승리로 더 큰 보복을 가져왔고 결국 100년 가까이 식민지의 신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 전체를 괴롭혔던 제국주의와 인종차별 속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역사에서도 그렇게 기록되고 있다.

 

그림 설명: 영국군의 엄중한 호위 하에 끌려가는 줄루왕입니다.

다음은 역시 Osprey 출판사의 자료입니다. 별다른 설명없이 인용하고 그 다음에는 줄루 전쟁 영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화질이 안 좋은데 상당히 오래 전 영화라 그 정도는 인내하고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로르케 방어전의 마지막 장면도 있으니까 여유있게 즐기시기 바랍니다.

 

중간의 줄루 전사들의 그림이 비슷하면서도 틀린데, 줄루 부대도 연대 단위로 조직되었고 특색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은 이산들와나 전투가 아니고 로르케에서 벌어졌던 150명의 영국 수비대의 전투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