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안의 정원 2008. 1. 15. 21:10

 

 

 

 

 

 

데이비드 린치 감독 "인랜드 엠파이어"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디지털은 트랜스포머다

 

 

소니 피디 150으로 찍었다고 한다. 필름을 버리고 HD로 달려가는 이즈음 데이비드 린치는 이제는 아마추어 수준의 디지털 동영상 카메라로 간주되는 카메라로 3시간짜리 영화를 촬영했다. 2006년 2년 반 정도의 제작기간을 가진 뒤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됐고, 데이비드 린치는 DVD 배급도 자신이 독자적, 독창적으로 해보겠다고 이 영화의 제작을 맡았던 프랑스의 카날 플러스에 제안했다. 제작과 배급, 양자의 독보적 길을 찾는 중인 것이다.

 

 

 

나는 이 포스트 셀룰로이드 시대에 데이비드 린치가 럭셔리 HD가 아닌 소니 피디 150으로 겹겹으로 구성하고 다시 해체하는 이미지와 굉장한 사운드 디자인이 오케스트레이션 해내는 음향과 분노, 공포, 유머가 뒤섞인 소리의 세계 그리고 이 카메라가 거의 침투할 듯이 가깝게 근접해 로라 던의 ‘말처럼 길고 마른’ 얼굴을 와이드 앵글로 잡아내는 것에 넋을 잃었다.

 

3시간 동안 마음을 졸이며 난 이 예측 불가능한 영화가 주는 긴장을 즐겼다. 넋을 잃을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변화무쌍한 영화의 변덕을 ‘말이 되는 말’로 분석하고 다루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보다 말의 힘이 우선

 

 

<트윈픽스>로 미국 TV드라마에 일종의 시각적, 서사적 혁명을 가져왔던 데이비드 린치가 (아직도 미드는 <트윈픽스>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실 21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디지털카메라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늦은 감이 있다.

 

 

이 영화가 참조하는 세계 중 하나는 셀룰로이드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빌리 와일더의 <선셋대로>다. 글로리아 스완슨보다는 젊은 여배우 로라 던, 니키 그레이스가 할리우드의 대저택에 앉아 있다. <선셋대로>의 감독 빌리 와일더는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이나 지금은 폴란드인 지역 출신이다.

 

 

나도 이런 식의 짜맞추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니키 그레이스의 상대역 데본(저스틴 서룩스)에게 영화 속 영화에서 붙여진 이름은 빌리다. 그 난데없는 폴란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고 몇개의 조각 에피소드들이 있은 뒤 니키 그레이스는 폴란드 악센트로 영어를 구사하는 이웃 여자의 방문을 받는다. 아, 우린 이 여자를 안다. <트윈픽스>에서 로라 팔머의 어머니 사라 팔머 역할을 했던 그레이스 자브리스키다. 니키 그레이스는 <슬픈 내일의 환희>(On High in Blue Tomorrow)라고 번역된 영화의 여주인공에 캐스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선셋대로>처럼 집사가 정중하게 하녀를 대동해 등장해 이들에게 커피를 대접한다.

 

 

여기서 폴란드계 이웃집 여자, 그레이스 자브리스키는 상당히 긴 이 영화의 다른 부분에선 별로 사용되지 않는 실마리를 던진다. 불길한 예언이다. 그녀는 이 영화가 살인을 담고 있다고 말하고, 니키의 남편도 관계가 있다고 말하나 정작 니키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이 이웃집 여인은 니키가 그 역에 캐스팅될 것이며 내일 건너편 소파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니키는 ‘fxxx’ 단어를 사용하면서 살인을 이야기하는 이 이웃이 재수 없다고 느껴 그만 떠나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매우 다행히도 그레이스 자브리스키는 떠나지 않고 영화에서 이후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되는 ‘폴란드 민담’을 던진다. 두개의 버전이 있는데 소년판은 소년이 세상에 놀러 나간다. 그러나 문을 나서면서 그림자를 보고 그때 악이 탄생한다. 소녀판은 소녀가 세상에 놀러 나간다. 시장이다. 그녀는 길을 잃는다.

 

다음날 그레이스 자브리스키의 예언대로 건너편 소파에서 니키는 여자 동료들과 담소하다가 매니저로부터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니키는 고전 할리우드 시대의 배우처럼 사운드 스튜디오를 방문해 수위로부터 ‘미스 그레이스’라는 호칭을 들으며 시나리오 읽기 리허설을 갖는다.

 

 

 

이 리허설 장면이 낮고 우아하면서도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슬그머니 들떠 있다. 그리고 니키와 데본이 서로 대사를 주고받는 음성의 톤은 유혹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감독 킹슬리 스튜어트(제레미 아이언스)가 가세한다. 데본은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이 사운드 스테이지에 누군가가 기웃거린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를 따라가나 유리창 위에서 자신의 그림자만 본다. 처음의 예언대로다. 소녀판의 예언도 영화 전개 속에서 구현된다. 데본이 침입자를 찾으러 갔다가 다시 돌아오자 킹슬리 스튜어트는 예의 폴란드 이웃 여자에 이어 또 하나의 불길한 이야기를 한다.

 

 

실, 이 영화는 한번 만들어질 뻔했으나 주인공 두 사람이 죽으면서 무산됐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뭐, 이런 이야기는 할리우드에 떠도는지라… 킹슬리는 대단치 않게 말한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에는 폴란드에서 이전에 만들어지던 영화의 잔영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멀쩡하게 사람들은 폴란드어를 하고, 니키는 자신은 폴란드어를 못한다고 말하지만 옆사람은 ‘사실은 좀 해’라고 추임새를 놓는다.

 

변형, 변호, 전환을 계속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이 영화는 말하자면 이미지보다는 말의 힘이 우선이다. 언어의 실마리가 주어지면 그것은 영화적 비주얼과 서사의 미래가 된다. 영화는 텍스트의 육체성 안으로 그 언어를 수태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한다. 아니 동일한 언어적 발화가 여러 개의 상황을 갖게 된다.

 

 

예컨대 “난 동물들과 잘 지내잖아”라는 말이 내뱉어지면 영화는 표면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여러 상황들을 구성해내서 그 말이 말로 되게 한다. 그 말이 영화적 재현성, 육체성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니키의 남편은 느닷없이 예의 대사 “난 동물들과 잘 지내잖아”를 한 뒤 집시들과 함께 서커스단 동물들을 돌본다고 집을 나간다.

 

 

이 대사는 토끼 분장을 한 TV시트콤이나 다른 데서도 사용된다. 동물들과 잘 어울린다면서 서커스단 동물을 돌보는 직업을 얻어 집을 떠나는 남편들이 그렇게 빈번, 평범한 사례들로 보이진 않기 때문에 사실 위 대사가 들어가게 되는 맥락은 말이 말로 되는 것 같지만 사실 더 어처구니없는 상황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부조리극도 수수께끼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데이비드 린치가 만들어내는 포스트 셀룰로이드, 디지털의 세계다. 한 문장이 영화적 신체성을 가진 시퀀스로 무한 증식 가능하지만, 셀룰로이드 필름과는 달리 이미지와 사운드는 그 필름에 하나의 아날로그 요소로 틀어박히지(ingrained )않는다. 디지털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테이프에 기록되지만 그것은 변형, 변모, 전환을 위한 기록일 뿐이다. 남아 있을 것은 없다.

래서 디지털은 결국 트랜스포머다.

그래서 <인랜드 엠파이어>는 한편으로는 현실, 실재, 판타지, 꿈, 그들 사이의 횡보적 경계들에서 그 경계들을 환기시키면서 지워나가던 데이비드 린치의 전작들을 인용하지만, 근본적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인도를 받는 영화다. 즉 디지털 기술에 대한 고찰이 서사와 이미지, 사운드의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워나갈 경계가 없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유동(flux), 넘침, 탈구되어 있다. 실재와 환상, 영화와 현실, 무엇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무엇이 무엇을 초래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문이 또 다른 문으로 예상치 못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차이로 분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가 ‘어딘가 다른 곳’이고 모든 시간이 시간성을 잃는다. ‘시간과 장소’는 영화의 제목이면서 캘리포니아의 실제 지명이기도 한 ‘인랜드 엠파이어, 내지의 제국’의 판타지에서 중요한 현실을 구성하는 지칭 기호가 아니다.

 

 

영화 재료로서의 셀룰로이드는 어떤 장소를 ‘박을’ 때 그것을 박는다. 필름에 그 장소는 새겨진다. 포스트 셀룰로이드로서의 디지털도 어떤 장소를 박는다. 테이프에 그 장소가 새겨진다. 그러나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 그 새겨짐은 모든 전환(transform)의 재료가 된다. 현실의 인덱스가 사라지는 것이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디지털이 보여주는 그 변형을 거꾸로 3시간의 영화적 구성 속에 도입해 디지털 시대의 논리를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다. 영문판 영화의 포스터에는 제목 밑에 이 영화의 주제를 ‘여성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이 영화는 물론 여성의 문제이면서 디지털 시대의 문제다. 동시대 이중의 공포가 영화를 배회하는 것이다. 이미 다가왔으나 여전히 미지의 공포를 느낄 사람들에게 영화는 니나 시몬의 음악 삽입 뒤 이렇게 말한다.

“달콤하고 말고 sweet!” 여자의 얼굴을 바짝 클로즈업하면서 말이다.

         인랜드 엠파이어

 

 

 

 

 

할리우드 인근인 미국 LA 동쪽, 산베르디날도 카운티와 리버사이드 카운티를 묶어 일컫는 ‘인랜드 엠파이어’에는 상류층 인구 400만이 거주한다.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의 공간적 무대는 이곳이다. 주인공인 금발의 스타 여배우 니키(로라 던)는 할리우드에서 작가로 칭송받는 킹슬리 스튜어트 감독(제레미 아이언스) 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엄청난 기대감에 부푼 그녀. 감독으로부터 “이 영화가 실은 (오리지널이 아니라) 폴란드 어떤 영화의 리메이크작”이며 “원작의 두 주연배우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린치의 여느 영화들처럼 범상한 미스터리물인 척 시치미를 떼고 시작해서 꿈, 상상, 무의식과 판타지 등 비현실계를 현실계와 뒤섞으며 내러티브를 해체해간다. 몇 가지 이야기틀로 정리되지만 이야기틀간의 질서는 없다. 관계는 전복되고 위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DV카메라로 핸드헬드 기법을 써서 촬영한 저예산 다큐 스타일의 화면은 현실-극-기억의 경계가 무너질 때 더 강렬한 역설의 효과를 낸다. 놀랍게도 <인랜드 엠파이어>는 해피엔딩이다. 할리우드식 전통 내러티브와 그것을 관습대로 즐기는 관객의 태도를 조소한 뒤 영화 관람의 순수한 쾌락- 특히 해피엔딩에서 비롯되는 기쁨!- 을 선사한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우리가 영화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의 결정체 그리고 그것의 안팎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놀라운 ‘생각’이다.

 

          

 

                            인랜드 엠파이어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서 오금이 저렸다. 이렇게 무서운 영화인데 왜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을까 싶었다. 올해 나온 공포영화 가운데 <디센트>와 <기담>이 좋았지만 <인랜드 엠파이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귀신, 괴물, 연쇄살인마, 좀비, 흡혈귀, 그 어느 것도 나오지 않지만 3시간 내내 온 신경이 두려움과 불안에 꽁꽁 묶인 것 같았다.

 

일반적 의미의 장르영화가 전혀 아닌데 공포의 효과가 이토록 강력한 이유는 뭘까? 그 비밀은 영화의 줄거리로는 설명이 안 된다. 내게 이 기묘한 이야기의 매듭을 풀 능력도 없기도 하거니와 영화 전체가 그 매듭을 풀어보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야기의 매듭을 풀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무시무시하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상이 재현하는 의미의 법칙을 전부 빨아들여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설계된 거대한 미궁이다.

 

 

 

<인랜드 엠파이어>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인식의 혼란을 유도한다. 폴란드의 어느 거리, 토끼탈을 쓴 인물들이 나오는 세트 같은 거실, 여배우의 저택, 영화 세트처럼 보이는 작은 집 등 영화 속 공간은 인물의 이동과 무관하게 변화한다. 공간이 자유로이 바뀌는 만큼 시간도 관객이 알아차리기 전에 바뀐다. 현재와 미래가 만나고 과거가 현재를 만나는 기묘한 비틀림으로 인해 사건이 일어난 시제를 알 수 없거나 착각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 헷갈리는 동안 인물의 정체성도 혼란스럽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로라 던이 특정 장면에서 연기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맞히기란 쉽지 않다. 그녀의 이름이 달라지는데다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다보니 지금까지 본 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회상인지, 영화 속 영화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것이다. 대사라도 의미전달에 충실한가 하면 그렇지 않다.

 

 

<인랜드 엠파이어>의 대사는 얼핏 미궁의 출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처럼 보인다. 그걸 따라가면 출구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지만 한참을 가도 제자리를 맴돌 뿐임을 느끼게 된다. 데이비드 린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도 이런 미로를 만들었지만 이번엔 더 극단으로 나아갔다. 혼란은 그가 인물의 형상을 왜곡하고 프레임의 견고한 틀을 허물면서 가중된다.

 

디지털카메라는 이 지점에서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심도가 깊지 않은 이 카메라는 그 흐릿함으로 인해 우리가 보는 것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인물의 구분은 더 모호해지고 인물의 표정은 더 기괴해져서 영화에서 현실이며 현재라고 믿었던 대목마저 불안에 휩싸인다.

 

 

프레임의 경계마저 필름카메라처럼 확고부동한 버팀목이 되지 못해 화면 밖에서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팽팽하다(실제로 얼굴 클로즈업이 갑자기 등장하는 어떤 장면에선 관객 중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 무엇도 확정할 수 없는 이 불안한 세계는 정말 무섭다. 시간도 공간도 프레임도 형상도 모든 것이 녹아 흘러내리는 느낌.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가 영화적으로 실현되는 순간이다.

2

 

001년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각각의 요소가 제대로 완성되면 모든 요소의 총합보다 거대한 총체가 드러나는 마법이 일어난다”는 말을 했다.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일어난 일이 그런 것이다. 대사, 연기, 촬영, 조명, 사운드, 세트 등 각 요소는 시간, 공간, 캐릭터, 형상, 프레임, 이야기 등을 해체해 마침내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영토다. 덧붙이자면, 공포영화를 만들려는 감독들은 <인랜드 엠파이어>를 꼭 한번 봤음 좋겠다. 공포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근원적인 질문을 할 기회가 될 것이다.

 

 

                                                                       시네21 / 남동철 편집국장

 

 

 

새해들어 좋은일만 많이 있으시길 바라며
음악이나, 영화 가져다가 잘 보겠습니다!!^^
지나가다 자취를 남겨 봅니다.. 잘보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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