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내안의 정원 2008. 1. 21. 17:25

 



서양 미술사 서론
-----미술과 미술가들에 관하여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색깔 있는 흙으로 동굴 벽에 들소의 형태를 그리는 그런 사람들이 미술가들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물감을 사서 게시판에 붙일 포스터를 그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그 밖에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들이 미술이라 부르는 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며 고유 명사의 미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한 이러한 모든 행위를 미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도깨비나 영험이 있다고 숭배를 받는 그런 대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미술가에게 그가 방금 완성한 것이 그 나름대로는 대단히 훌륭한 것일지 몰라도그것은 "미술"이 아니라고 말해줌으로써 그의 기를 꺽어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가 그 그림 속에서 좋아하는 것이 미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고 일러주어서 그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조각상이나 그림을 좋아하는 데는 아무런 그릇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풍경화가 그의 집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친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초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우리들은 모두 그림을 볼 때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영향을 끼치는 여러 가지들을 연상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기억들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즐기게 도와준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다만 우리가 우려해야 할 점은 어떤 엉뚱한 기억이 우리들에게 편견을 갖게 할 때이다. 예를 들어 등산을 싫어하기 때문에 산 그림으로부터 본능적으로 등을 돌린다든지 할 때에는 그 그림을 즐기는 것을 방해한 혐오감의 원인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한다. 미술 작품을 싫어하는 것은 여러 가지 그릇된 이유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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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판1)루벤스Peter Paul Rubens. Portrait of a Boy (Nicholas Rubens). 1619....▲ (도판2)뒤러Albrecht Durer, [뒤러 어머니의 초상]Portrait of Durer"s Mother. 1514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다. 우리는 모두 자연의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그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간직해준 미술가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런 미술가들 자신도 우리들의 이런 취향을 퇴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플랑드르의 위대한 화가인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그의 어린 아들을(도판 1)그렸을 때 그는 분명히 아들의 귀여운 얼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들이 그의 아들을 귀엽게 보아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주제에 관해서 이런 편견을 갖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매력이 덜한 주제를 다룬 그림을 거부하게 만든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도 루벤스가 자기의 포동포동한 아들에게 가졌던 것만큼의 애착과 사랑을 가지고 그의 어머니(도판 2)를 그렸을 게 틀림없다.

    고생에 찌들린 늙은 어머니를 진실되게 그린 습작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줄 만큼 충격적이다. 그러나 뒤러의 이 그림은 위대한 진실성을 담고 있는 명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음에 느낀 반감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도판3)무리오Murillo,[부랑아들]..(도판4)호흐Pieter de Hooch, ▲ [사과껍질을 벗기는 여인이 있는 실내]Woman Peeling Apples


    스페인 화가 무리요 Murillo(도판 3)가 즐겨 그렸던 부랑아들이 엄격하게 말해서 아름다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그가 그 어린아이들을 그린 후에는 그들은 분명히 대단한 매력를 지니게 된다. 그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터 데 호흐(Pieter de Hooch)의 화려한 네덜란드 실내 모습에 나오는 아이의 그림(도판 4)이 매우 평범하다고 하겠지만 이것 역시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아름다운 것에 관한 문제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에 관한 취향과 기준이 그처럼 다르다는 데 있다.


    ▲(도판5)포를리Melozzo da Forly,[천사].................(도판6)멤링Hans Memling,▲ [천사]

    (도판 5) 와 (도판 6)은 둘 다 15세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기타와 비슷한 악기인 류트를 켜고있는 천사의 그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유럽의 화가 한스 멤링(Hans memling)의 작품(도판 6)보다는 동시대의 이탈리아 화가인 멜로초 다 포를리(Melozzo da Forli)의 그림(도판 5)을 더 좋아할 것이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두 그림을 다 좋아한다. 멤링의 천사가 지니고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단 그 천사가 어딘가 힘 없고 어색하다는 인상을 떨쳐버린다면 우리는 그 천사가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판7)레니Guido Reni,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 (도판8)토스카나의 한 미술가,▲[그리스도의 얼굴]


    아름다움의 진실은 또한 표현의 진실과 같다. 사실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의 표정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을 좋아하게 만들거나 싫어하게 만들 때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좋아하며 그 때문에 깊이 감동받기도 한다.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는 십자가에 못박힌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도판7)를 그렸을 때 분명히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예수의 얼굴에서 수난의 고통과 영광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세주의 표현에서 용기와 위안을 얻곤 했다 이 작품이 표현하는 감정이 얼마나 강렬하고 분명했던가 하는 것은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예배당이나 외딴 농가에 이 작품의 복제판을 걸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곧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강렬한 감정의 표현에 쉽게 마음이 끌린다하더라도 그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표현된 그림에서 등을 돌리거나 해서는 안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또 다른 예수상(도판 8)을 그린 중세의 한 이탈리아 화가도 레니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 진지하게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작업방식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이처럼 상이한 표현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레니의 작품보다 표현이 덜 분명한 작품들을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말과 몸짓을 적게 사용하면서 많은 것을 상대방이 추측하도록 남겨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추측하고 곰곰히 생각할 여지를 주는 그런 회화나 조각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술가들이 지금과 같이 사람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표현하는 데 숙련되지 않았던 문예부흥기 이전의 작품들을 대할 때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는가를 알고 나서 더 큰 감동을 받을 때가 많다.



    ▲(도판9)뒤러Albrecht Durer.[산토끼] A Young Hare. 1502.▲ (도판10)렘브란트 드로잉

    그러나 여기에서 미술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실제 생활에서 본 것들을 똑같이 그려내는 화가의 솜씨를 칭찬하고자 한다.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실물과 꼭 같이" 닮아 보이도록 그린 그림이다. 물론 이같이 실물처럼 표현해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가시적인 세계를 충실하게 표현하는 데 쏟아부은 그들의 끈기와 솜씨는 정말 찬양할 만하다. 과거의 위대한 미술가들은 세밀한 데까지 조심스럽게 기록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뒤러의 산토끼를 그린 수채화 습작(도판 9)은 이처럼 가상스러운 끈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가 그린 코끼리의 소묘(도판 10)를 세부 묘사가 덜 되었다고 해서 누가 감히 그의 작품을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렘브란트는 목탄으로 그린 몇 개의 선만으로도 코끼리의 주름진 피부의 느낌을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그런 요술을 부리고 있다.



    ▲(도판11)피카소,[암탉과 병아리들]... ▲(도판12)피카소,[수탉]


    그러나 "실물과 꼭 같이" 보이는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게하는 것은 스케치 풍의 화법만이 아니다. 그들이 더 더욱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생각되는 것들로서, 특히 거기에 대해서 미술가가 "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현대의 작품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사실 현대 미술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흔히 들리는 불평인 자연 형태의 왜곡의 문제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디즈니의 영화나 만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듯이 사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르게 변형시켜서 묘사하거나 때로는 왜곡시키는 것이 옳을 때도 있는 것이다. 미키 마우스는 실제의 쥐를 닮은 데가 거의 없지만 독자들은 그 꼬리의 길이에 대해서 신문에 격분한 투서를 보내지는 않는다. 디즈니의 매혹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더 이상 고유명사의 "미술"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이 디즈니 쇼를 보러갈 때에는 현대 미술 전시회에 갈 때와 같은 편견으로 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현대 화가가 어떤 것을 자기 나름대로 그렸다면 그는 간주되기 쉽다. 그런데 우리가 현대 미술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들이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 설령 그들이 정확하게 그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않은 그들의 이유는 월트 디즈니의 이유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판 11)은 현대 미술 운동의 선구자인 피카소(Pablo Picasso)가 그린 것으로 <박물지(Naturll Hlstory)>에 실린 삽화의 도판이다. 아무도 암탁과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들을 그린 이 매력적인 그림에서 결함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겄이다. 그러나 그가 수탉(도관 12)을그릴 때는 단순히 닭의 모습을 재현해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않았다. 그는 수탉의 공격성, 뻔뻔스러움과 우둔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풍자화법에 의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 풍자화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도판13)제리코Theodore Gericault, [엡송의 경마] The Derby at Epson. 1821....▲(도판14)에드워드 에이브리지, [달리는 말의 동작]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림의 정확성을 가지고 흠을 잡으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미술사를 더듬어 가면서 우리는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물이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을 성급하게 믿는 경향이 있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습관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 점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이룩된 놀라운 한 발견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 동안 말이 질주하는 것을 보아왔고 경마와 사냥을 했으며,말들이 싸움터로 질주하거나 사냥개의 뒤를 쫓는 그림을 보아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말이 달릴 때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를 눈여겨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17세기의 유명한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ricault)가 그린 [엡솜의 경마](도판 13)와 같이, 당시의 그림이나 스포츠 해설도는 거의가 달리는 말들이 네 다리를 쭉 뻗고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약 50년쯤 뒤에 말이 질주하는 순간을 스냅으로 촬영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카메라가 등장하자 화가와 관객들이 모두 그때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달리는 말은 우리들에게 그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런 포즈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진은 말이 차례로 다리를 땅에서 떼었다가 다시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도판 14) 우리는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말이 이와 다르게는 뛸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발견을 그들의 그림에 적용해서 말들이 실제로 달릴 때의 모습처럼 그리자 사람들은 그 그림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했다.


    이것은 물론 극단적인 예이지만 이와 비슷한 오류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드물지는 않다. 우리는 모두 인습적인 형태와 색깔만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들은 때때로 별이 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별표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림에서 하늘은 푸르러야 하고 풀은 초록색이어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이러한 어린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에서 다른 색채를 보면 화를 낸다. 그러나 그들이 초록색 풀과 푸른 하늘에 관해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것을 다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면 혹은 마치 우주 탐험 여행 중에 다른 혹성에서 돌아와 지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본다면. 우리는 주위의 사물들이 엄청나게 놀라운 다른 색채들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가들은 때때로 그러한 우주 탐험을 다녀온 것 같이 느낀다. 그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고 사람의 살은 살색이고 사과는 노랗거나 빨갛다는 기존의 관념과 편견을 버리고자 애쓴다. 이러한 선입견을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단 거기에 성공한 미술가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때가 많다. 이러한 화가들은 우리들에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존재를 자연에서 찾으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우리 자신의 창에 벗어나 그들의 세계를 한번 힐끗 내다 보기라도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않는 태도이다. 친숙하게 알고있는 주제를 뜻밖의 방법으로 표현한 그림을 대했을 때 그것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하곤 한다. 우리는 작품에 표현된 이야기를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듯이 예전과 비슷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성경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는 흥분하기 쉽다. 우리는 모두 성경이 예수의 생김새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하느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가시화할 수도 없으며, 그리고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예수의 상들을 처음으로 그려낸 사람들은 바로 과거의 화가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형태로부터 일탈하는 것을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대체로 대단한 정열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본 모든 그림들을 잊어버리고,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목동들이 아기 예수를 찬미하러 찾아오고, 魚夫인 베드로가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의 정경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 보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성경을 참신한 안목으로 읽으려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그러한 노력이 분별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격분하게 만든 경우는 수도 없이 발생했다.



    ▲ (도판15)카라바조,[성 메테오]................(도판16)카라바조Caravaggio. ▲ [성 마테오]St. Matthew and the Angel. 1603


    이러한 "물의"를 빚은 전형적인 예로서 카라바조(Caravaggio)를 들 수 있는데 그는 1700년경에 활동했던 대담하고 혁명적이었던 이탈리아 화가였다. 그는 당시 로마의 한 성당 제단을 장식할 성 마태오의 그림을 위탁 받았다. 그 그림은 성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의 집필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한 천사를 그리도록 되어 있었다.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하고 타협을 모르는 젊은 화가인 카라바조는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였던 마태오가 갑자기 앉아서 책을 쓰게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내느라 고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묻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거머쥐고. 익숙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성 마테오](도판 15)를 그렸다. 그의 옆에는 방금 천상에서 내려와 마치 선생님이 어린 아이에게 하듯이 노동자의 손을 공손하게 잡아 이끌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천사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제단 위에 걸게 되어있는 이 그림을 성당에 납품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했다. 그 그림이 수락되지 않아 카라바조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 이번에는 그도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인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인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도판 16)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카라바조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훌륭한 그림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그림이 첫번째 그림보다는 덜 정직하고 보다 불성실해 보인다.


    이 이야기는 그릇된 이유 때문에 미술작품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저지를 수 있는 피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미술작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떤 신비스러운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만든 물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림이 액자에 끼워져서 벽에 걸리면 우리들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박물관에서는 으례히 전시된 작품을 만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원래 손으로 만지고 다듬어서 완성된 것이며, 거래의 대상이 되고 논쟁과 물의를 일으킨 대상이었다. 그리고 작품의 여러가지 특징들 하나하나가 미술가의 결단에 의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화가는 그 특징들을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것들을 여러번 고쳤을 것이며, 저 나무를 배경에 남겨둘지 아니면 다시 그릴지 여러 번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르고, 우연히 그는 붓획이 햇빛을 받은 구름에 예기치 않은 생동감을 주는 것을 보고 흡족해 하였거나, 또는 고객의 성화에 못이겨 어떤 인물을 더그려넣었을지도 모른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그림과 조각작품들은 원래 미술품으로서 진열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술가가 작품을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그 작품을 만드는 명확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반면에 우리 문외한들이 걱정하는 아름다움이나 표현에 관한 관념을 미술가들이 언급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언제나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수세기 동안 그래왔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그 부분적인 이유로는 대개의 미술가들이 "아름다움"과 같은 거창한 말을 쓰는 것을 난처하게 생각하는 수줍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의 표현"에 관해서 말을 한다든지 또는 그와 비슷한 문구를 사용하게 되는 경우에는 어딘가 어색하고 딱딱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들은그러한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토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하나의 이유이자 매우 훌륭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미술가의 실제적인 걱정거리 중에서 이러한 관념이 차지하는 부분은 문외한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화가가 그의 그림을 계획해서 스케치하고, 그림이 완성되었는지 아닌지를 고심할 때 화가가 걱정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의 그림이 "제대로" 그려졌는지 아닌지를 걱정한다고 말할 것이다. 미술가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를 우리가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가장 겸손한 말로 표현되는 바로 이 "제대로"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 때인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미술가가 아니며 그림을 그려보려고 진지하게 시도해 보긴나 그러한 의향을 가져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미술가의 삶을 구성하는 것과 유사한 문제에 봉착해본 경험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실 나는 제아무리 보잘것 없는 방식으로라도 이러한 유형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의식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한 다발의 꽃을 가지고 색깔을 뒤섞거나 이리저리 맞춰보며 꽃꽂이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성취하려는 조화로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어도 형태와 색채를 조화시켜서 생기는 이 이상한 감흥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석기에 한 움큼의 붉은 꽃을 더했을 때 다른 꽃들을 달리 보이게 만들기도 하며 푸른 빛깔의 꽃은 그 자체로서는 좋을지 몰라도 다른 색깔과 "어울리지" 않으며, 초록색 잎들이 달린 작은 가리하나가 갑자기 모든 것을 다 "제대로"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이상 손대지 말자 이제 완성되었다"라고 우리는 외친다. 모든 사람이 다 꽃의 배합에 대해서 그렇게 세심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되기를 바라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옷에 잘 어울리는 벨트를 발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접시 위에 놓인 푸딩과 크림의 적절한 비율이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인상적으로 보일지 궁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러한 경우 우리는 조그만 차이가 균형을 깨트리거나 또는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므로 가장 어울리는 관계란 하나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꽃이나 옷이나 음식에 관해서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까다롭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그처럼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으로 보이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미술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의 가치를 발휘할 때가 많다. 형태를 배합하고 색을 배열하는 문제에 있어 미술가는 언제나 "까다롭거나" 아니면 극단적으로 괴팍스러워질 필요가 있다. 화가는 우리들의 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명암과 질감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것들보다는 훨씬 더 무한하며 복잡하다.
    그는 두세 가지의 형태, 색깔, 또는 취향을 조화시켜야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형태와 색깔과 취향을 교묘히 다루어서 요술을 부려야 한다. 그는 그의 그림이 "제대로" 되었다고 보일 때까지 화폭 위에서 수백 가지 색조의 농담과 형태를 조화시켜야 한다. 짙은 푸른색과 근접해 있는 초록색의 작은 색면이 갑자기 너무 노랗게 보인다고 그림을 망쳤다고 생각하거나 눈에 거슬리는 색조가 있어서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가지고 고민한 나머지 밤을 지새우며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그의 그림 앞에 서서 여기에 한 점의 색을 보탤까 저곳에 보탤까, 아니면 그것을 다 지워버릴까로 고심하기도 한다.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하든지 그 차이점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그가 성공하면 우리는 그가 아무것도 더 이상 덧붙일 수 없는 그 무엇, 제대로 된 그 무엇, 즉 대단히 불완전한 세계에 완성이라는 것의 본보기를 그가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도판17)라파엘로 Raphael.[초원의 성모] Madonna of the Meadow. 1505 or 1506 ▲(도판18)라파엘로, [초원의 성모를 위한 습작](그림代替)


    라파엘로(Raffaello,S.)의 유명한 마돈나 그림 중에서 <초원의 성모>(도판 17)를 예로 플어보자. 이것은 분명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림으로 인물들이 훌륭하게 그려져있음은 물론이고 두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성모의 얼굴 표정은 정말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그림을 위해 그린 라파엘로의 습작 스케치(도판 18)를 보던 그가 가장 고심했던 점은 그러한 인물 묘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러한 인물 묘사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성취하려고 거듭 노력했던 점은 인물들 사이의 올바른 균형. 즉 가장 조화로운 전체를 구성하는 올바른 관계였다. 구석의 빨리 그린 스케치에서 화가는 아기 예수가 그의 어머니를 돌아다보면서 걸어가는 구도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는 아기 예수의 움직임베 화합하는 성모의 머리 위치를 다르게 해 보았다. 그 다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돌려세워서 성모를 쳐다보게 했다. 이번에는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하여 어린 성 요한을 등장시키고 아기예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그림 밖으로 돌리는 구도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초조해져서 다시 한번 아기 예수의 머리를 여러 위치에서 그려보았다. 그의 스케치 북에는 이러한 종류의 그림이 대여섯 장 있는데 그는 이 세 인물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조화시킬 수 있을지를 거듭해서 탐구했다. 그러나 그의 최종 작품을 다시 보면 우리는 마침내 그가 목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그림에서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라파엘로가 노심초사한 끝에 이룩한 인물의 자세와 조화는 우리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조화가 마돈나의 아름다움을 더 고조시키고 어린아이들의 귀여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미술가가 올바른 균형을 이룩하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지만 만약에 우리가 그에게 왜 이러저러하게 바꾸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떤 고정된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그가 가야 할 방향을 느낌으로 갈 뿐이다. 사실상 어떤 시기의 일부 미술가나 비평가들이 그들의 미술의 법칙을 공식화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즉 신통치 않은 미술가들은 이러한 법칙을 적용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한 반면에 위대한 대가들은 그러한 법칙을 깨트리면서도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새로운 형태의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화가였던 조슈아 레이놀즈 (Joshua Reynolds)경이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푸른색은 그림의 전경에 칠해서는 안 되고 먼 거리의 배경이나 지평선 위의 희미한 언덕 등을 그리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의 경쟁자였던 게인즈버러(Gainnsborough)는 그러한 전통적인 규칙들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보려고 유명한 <푸른 소년>이라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소년이 입고 있는 푸른 옷은 그림의 중앙 전경에서 온화한 갈색의 배경과 대조적으로 당당하고 두드러져 보인다.


     

    ▲Sir Joshua Reynolds - Brown Boy / Thomas Gainsborough , ▲ Portrait of Jonathan Buttall(The Blue Boy), 1770

    미술가가 얻으려고 하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미리 예견해서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술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일단 옳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하나의 그림이나 조각이 어떻게 되어 있어야 제대로 된 것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규칙은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 미술 작품을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대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어느 작품이나 다 마찬가지라거나. 사람들의 취향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러한 논의들이 별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논의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림을 보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림을 많이 보면 볼수록 이전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장점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각 시대의 미술가들이 이룩하려고 고심해 온 그런 종류의 조화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이러한 조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풍부해질수록 그만큼 더 그런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제일 중요한 점이다. 취향에 관한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는 속담이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취향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할 수는 없다. 이것은 또한 누구나가 아주 작은 분야에서 시험해볼 수 있는공통적인 경험의 문제이다. 차를 마시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한 종류의차가 다른 종류의 차와 맛이 다르다는 것을 못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이 차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맛을 음미할 여가와 의지와 기회가 있다면 그들은 선호하는 차의 유형과 혼합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감식가로 발전할 것이며 또 그들의 보다 큰 지식이 최상의 차를 즐길 수 있는 데 보탬이 되어줄 것이다. 미술에 대한 취향은 분명히 음식과 술에 대한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미묘한 맛을 발견하는 문제일뿐만아니라 훨씬 진지하고 중요한 것이다. 결국 위대한 대가들은 미술 작품에 그들의 모든 것을 바치고 그 작품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으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최소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미술 작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있는것이다.

    우리가 미술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이다. 미술에는 언제나 발견해야 될 새로운 것들이 있다. 위대한 미술작품들은 우리가 그 작품을 대할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처럼 다함이 없고 또 예측할 수없는 것 같기도 하다. 미술은 그 자체의 불가사의한 법칙과 모험을 가지고 있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자극적인 세계인 것이다. 미술에 관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누구도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즉 이러한 작품들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암시를 포착하고 숨겨진 조화에 감응하려는 그런 참신한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며, 그 마음가짐은 무엇보다도 상투적인 미사여구나 진부한 경귀같은 것에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 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 이런 위험은 대단히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내가 여기서 설명하려고 하는 단순한 점들을 잘 파악한 사람들은 표현의 아름다움이나 정확한 소묘와 같은 분명한 자질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작품 가운데서도 위대한 작품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지식을 너무나 자만하기 때문에 아름답지도 정확하게 그려지지도 않은 그런 그림들만을 좋아하는 체하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너무도 분명히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해 주는 듯한 그런 작품을 좋아한다고 고백할 경우 무식하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어쩐지 불쾌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대단히 흥미 있는" 작품이라고 부르는 속물이 되고 만다. 나는 그러한 오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 또한 그렇게 무비판적인 방법으로 신뢰를 반기보다는 오히려 전혀 신뢰를 받지 못하는 쪽을 택하겠다.


    나는 다음 장들에서 미술의 역사, 즉 건축, 회화, 조각의 역사를 논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미술 작품을 보는 우리들의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키워 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혼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위험이 따르지 않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이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화랑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탈로그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다시 걸어간다. 그런 사람들은 그림을 거의 보지 않은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차라리 집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단지 카탈로그를 체크했을 뿐이다. 그것은 그림의 감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

    미술가에 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들은 하나의 미술 작품을 볼 때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렘브란트가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으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유식한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 "음, 훌륭한 키아로스쿠로로군"이라고 중얼거리며 다음 그림으로 옮겨간다. 나는 이러한 설익은 지식과 속물 근성의 위험성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기 쉽고, 또 이와 같은 책이 그러한 속물들을 증가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을 돕는 것이지 입을 헤프게 놀리는 일을 돕자는 것은 아니다. 미술에 관해서 재치있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신한 눈으로 그림을 보고 그 그림 속에서 새로운 발견의 항해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더욱 값진 일이다. 우리가 그런 여행에서 무엇을 얻어가지고 돌아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출처 : ★아름다운 미술관★
    글쓴이 : 5060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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