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

내안의 정원 2008. 1. 22. 04:29

 

사막에 핀 꽃, 요르단  페트라유적

 

 

 

    페트라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시대에 걸쳐 아랍 왕국의 중심지였던 고대도시.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셀라가 이렇게 바뀐 것 같다. 이곳에 갈 때는 대개 동쪽에서 좁은 시크 계곡을 따라간다. 페트라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후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아랍족의 하나인 나바테아인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았던 BC 312년 이전에 도시가 어떠했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의 통치 밑에서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106년 로마인들이 침입하여 나바테아인을 몰아낸 뒤에도 페트라는 로마 제국 치하의 아라비아 지방에 편입되어 계속 번영했으나 무역로가 바뀌자 상업이 점차 쇠퇴했다.
 
7세기에 이슬람 제국이 침입한 뒤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마침내 1812년에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가 여행중에 발견되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조사에서 영국고고학대학 예루살렘 분교와 미국동양학대학의 조사단은 로마 통치 이전의 페트라에 관해 많은 것을 알아냈다. 여러 바위 유적지 중의 하나인 앗데이르는 정면을 기둥으로 장식한 모습이 인상적이며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페트라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무덤인데, 많은 무덤이 정교한 겉모양을 가지고 있어 지금은 거주지로 쓰이고 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며 기원전 1400-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 나오는 에돔의 셀라(Sela)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이 유적지는 주외에 온통 바위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 밖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또한 페트라 유적으로 가기 위해서는 햇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좁고 복잡하게 얽힌시크(Siq)를 2km나 걸어가야 한다. 시크는 아랍어로 협곡을 뜻하는 단어이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가 페트라를 묘사 하였듯이, 페트라 유적을 둘러싼 사암은, 장미처럼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러나 좁고 긴 시크를 따라가다보면, 갑자기 높이 25m에 이르는 거대한 석굴 신전이 나타난다. 바로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에   나왔던 그 알카즈라 신전이다.
 

 

 인디아나 죤스 영화를 볼때,  그 거대한 암벽속에 신전은 단지 컴퓨터 효과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존하는 석굴이다.
 바로 페트라 유적중, 가장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알 카즈네 ,  우리말로 번역하면 보물 창고이다.

 

 





알 카즈네 :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도굴꾼에 의해  조각이 파괴었는데,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그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진 하나의 거대한 도시이다. 
 

 

 또한  페트라의 규모는 2만여 명을 수용할수 있으며,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천연의 요새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 이처럼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 울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바로 물 즉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페트라 주변 오아시스에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유적을 만든 사람들은 나바티안 이다.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 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하였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 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하게 되었고,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유럽세계에서 그곳은 잊혀진 도시였다. 하지만 나바티안 인들은, 이곳이 신성한 곳이며 또한 알카즈네의 신전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곳이 유럽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랍인들은 요한을 추격하였고, 아랍인으로 위장한 요한이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등을 비롯한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 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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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여전히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세계의 불가사의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세계 7대 불가사의를 평가하는 기준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집트의 피라밋, 영국의 스톤헨즈, 이스트 섬의 거석상, 알렉산드리아 등대, 사라진 공중정원, 아스카 문명의 거대그림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7대 불가사의로 불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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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바로의 궁전 :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원형 극장 :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가 40m에 이르는 원형 극장은 2세기 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하나의 바위산을 깎아 만들었다.

 

 

 

 

 

 

 수도 암만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5일 요르단의 고대 유적지 페트라에서

여자친구 브루니의  아들을  어깨에 태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카를라 브루니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에서 여행을 즐기고있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