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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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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2018. 9. 9.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함석헌-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역사적 시간대에 태어난다. 그러면서 그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를 동경한다. 인간에게 영원의 세계와 역사 현실의 세계는 둘 다 필요 불가결한 세계다.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온몸으로 참여하는 일과 종교적 신앙심을 영적으로 성숙시켜 나가는 일을 결합한 존재, 그가 함석헌이 생각한 참된 종교인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에게 성속(聖俗)은 하나였고, 신의 도시와 세속 도시 사이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었다.
  비록 함석헌이 살던 시대는 끊임없이 흑백 논리가 강요되던 시대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 인간의 역사는 곧 하느님의 역사였다. 그는 역사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로 파악했고,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의 기록을 역사라고 보았다. 인간의 초월적인 면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재적인 면을 강조하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의 계시는 그저 공중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구체적인 인격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에게는 현존하는 인간이 곧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대변자였다. 인류가 진화해 왔듯이 하늘나라와 하느님에 대한 개념도 계속해서 진화되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 결론은 없다. 인생은 그저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외형적이고 현실적인 성과만을 두고 보자면, 함석헌이 이루어 낸 바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함석헌은 자주 간디에 비견되었지만, 간디처럼 민중을 이끌고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는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다. 민주화 운동을 벌여 나가는 과정에서 강력한 지도력과 조직력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를 변화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당대에 커다란 메아리를 얻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정점에 달한 한반도의 현실에서 이는 아마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 것이다. 그 현실은 '올바름'이 아니라 '세속적 성공'을 제일의 가치로 삼았고, 그것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같은 마키아벨리적 인간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이러한 인간형의 정반대 편에 있는 인물이었다.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치밀한 계산 아래 움직이는 것이 마키아벨리적 인간형이라면, 함석헌은 씨알의 저항을 위해 잘 짜여진 어떤 전략이나 전술 프로그램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자가 남을 조종하는 데 익숙한 반면 함석헌은 누구에게도“무엇을 하시오”라는 지시나 명령을 하지 않았다. 권력욕에 불타는 전자와 달리 함석헌에게 '민족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이나 의욕이 있었다고 보기란 어렵다. 그 결과 현실의 승리와 영광은 늘 전자의 몫이었고, 함석헌의 삶은 실패자의 그것으로 비쳐지기 마련이었다.  
  평범한 상식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개인으로서나 가족 관계에서나 함석헌이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28년에서 1938년에 이르는 시기를 제외하면 그는 한번도 안정된 직장이나 고정된 수입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의 가난은 필연적이었다. "아버님은 집안일이나 가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셨다. 아버님의 주요 관심은 언제나 '조국의 운명', '독립', '민족', '정의', '평화', '진리' 등이었다"고 함석헌의 둘째 아들 함우용은 전한다. 사위 최진삼도 "함 선생님은 정의를 위하여 살고 정의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제게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히 떠오르는 것은 공적 대의에 몰두하는 가장 탓에 어쩔 수 없이 희생자의 역할을 떠맡은 가족의 모습이다. "타인의 안녕과 이웃의 편안한 삶을 위해 나의 가족을 희생자로 만드는 일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라는 넬슨 만델라의 물음에서 함석헌도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에도 충성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간디는 인도를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헌신했지만, 간디의 아들은 그 와중에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그런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 간디는 '민족의 영웅'으로 보이지 않았다.“당신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그것은 어머니 덕인줄이나 아시오”라는 것이 아버지 간디에 대한 아들의 비판이었다. 넬슨 만델라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에블린은 만델라가 자신이나 자녀들 아닌 어떤 것에 더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만델라를 영원히 떠났다.
  공공의 대의를 향한 사심 없음과, 가장이나 생활인으로서의 무능 혹은 무책임 사이의 이런 모순과 관련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함석헌이 이 모순을 감추거나 합리화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세속적 무능을 두고 스스로를 '바보새'에 비유한다.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 놈이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먹다가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일본 사람은 그 새를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입니까?"
    
  다른 자리에서는 자신의 인생 역정을 실패자의 그것으로 규정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사회가 억압과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모든 가장들이 자신의 안녕이나 성공, 가족의 이익을 앞세운다면 사회의 혼란과 억압을 바로잡아 그들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일은 언제까지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외딴 마을에 불이 났을 때 자신의 가족을 피신시키는 데만 열중한다면 결국 모든 가족이 피해를 입는 결과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과 마찬가지 이치다.

  넬슨 만델라는 모든 인간에게 인생의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족이나 부모에 대한 의무이고 또다른 하나는 조국이나 인류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다. 안정되었거나 사회 정의가 자리잡은 사회에서 각 개인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런 의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이 묵살당하고 독재와 거짓이 판을 치는 나라나 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다. 부정부패나 불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조국이나 인류 공동체에 대해 올바른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개인은 권력에 의해 처벌받거나 소외되기 일쑤다. 그럼으로써 그는 불가피하게 가족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강요받게 된다. 나치 정권 아래서 죽어 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나 과학자 알버트 아인쉬타인의 경우가 적절한 예일 것이다. 넬슨 만델라가 그랬듯이, 함석헌은 처음부터 가족의 안녕을 등지고 공공의 안녕을 위해 일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의와 독재로 점철된 20세기 한반도에서 씨알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곧 자식과 남편,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귀중한 기회를 가차없이 빼앗기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그가 살았던 시대에 한정시켜 평가한다면, 예수 역시 실패자, 패배자라고 할 수 있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죽음은 한 식민지 청년 지식인의 최후였을 뿐이다. 예수가 죽은 다음 제자들은 두려움에 질려 모두 도망갔고, 가장 가깝다던 반석 같은 제자 베드로는 스승 예수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때 예수는 얼마나 참담한 실패자였던 것이랴!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당대의 세속적 실패는 곧 영속적인 진리의 승리였다.
  비록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나름의 한계와 단점,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었던 함석헌의 삶도 그의 당대를 지배하던 가치로써 성공과 실패 여부를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살던 시대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시대였다. 이것은 많은 부분 오늘날도 그러하다. 그래서 자기가 내세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의 올바름을 고려하지 않았던 박정희나 김일성 같은 인물이 한반도를 지배했고, 오늘에도 여전히 기념관이나 동상을 세워 기념할 인물들로 여겨지고 있다. 박정희의 반공주의와 부국강병 논리, 그리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비할 때 함석헌의 평화 사상이나 이타적 도덕주의는 냉엄한 현실에 비추어 대단히 무력하게 보인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가 판을 치는 세태에서 우리는 박정희가 주장한 단순한 물리적 힘의 가치관이 함석헌의 이상주의적 가치관보다 유효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끌릴 수 있다.

  박정희는 "인간사에는 경제가 정치나 문화보다 우선한다"고 말했다. 말할 것 없이 인간은 우선 먹어야 사는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박정희의 잘못은 무슨 방법을 써서든 먹고사는 일만 해결해 주면 독재가 정당화된다고 생각한 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생존 경쟁에 뛰어들 자유만을 인정하면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가능성을 제 마음대로 제한하였다. 그 결과는 외형적인 경제 성장으로 나타났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마음과 정신은 병들었다. 돈과 지위, 권력, 그밖에 자기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남을 짓밟을 수 있는 인간이 한국을 이끄는 인간형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이다. 박정희와 그를 따르고 숭배하는 이들은 한국 사회를 전쟁 후의 궁핍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가차없이 관철되는 또다른 전쟁터였다.                   
  앞에서 우리는 마키아벨리적 인간의 삶의 기준에 비추어 함석헌이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질서가 메마르고 황폐한 전쟁터의 그것이라고 할 때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억압과 공포가 없고 낱낱의 생명이 존중되는 바람직한 삶의 질서를 위해서 마키아벨리적 인간형과 그들의 가치관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 정반대편에 있는 함석헌의 삶과 사상에는 미래에 있어야 할 가치관을 선구적으로 제시한 공헌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반도를 지배해 온 가치의 하나는 민족주의이다. 이 이름 아래 역사적으로 수많은 범죄와 죄악이 행해져 왔다. 그것은 강한 민족은 약한 민족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는 힘의 논리를 따른 결과이다. 일찍이 함석헌은 '세계사의 하수구'이자 패배자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반성하는 가운데 이러한 강자의 민족주의를 거절, 부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패배자 한국 민족에게 세계인과 세계사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수난의 여왕인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함석헌의 질문은 세계사 안에서 억눌린 자, 탄압받는 자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피땀어린 영적인 시도의 맥락 안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함석헌의 생각은 매우 독특하고 새로운 민족주의론이었지만 그는 결코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통해 북한 특유의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남한에선 이승만과 박정희가 반공과 부국강병이란 이름으로 남한만의 민족주의를 선언할 때, 함석헌은 흑백 논리와 좌우의 이념 장벽, 그리고 민족주의를 넘어선 보편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게는 한국 민족의 권익만큼 다른 민족의 권익도 중요했다. 그는 서로 간에 힘을 재는 식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인류는 이제 세계주의의 목표를 향해 모두가 함께 더불어 가야 한다고 믿었다. "세계는 하나가 될 때가 되었다. 우리 전체 인류가 결국은 한 조상으로부터 온 한 형제 자매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싸움과 전쟁을 그칠 것이다."
  함석헌에게, 민족이나 국가는 인간의 궁극적 가치가 아니었다. 부와 권력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것들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느라 오늘의 세계는 병과 근심이 갈데까지 깊어지지 않았는가. 그래서 영국의 퀘이커 조나단 데일은 묻는다. "세계는 이제 승리자, 권력자, 부자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함석헌의 생애는 그 '다른 가치관'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 바쳐졌다. 그 가치관은 이제까지 살펴본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서 드러나는 대로 이타적 사랑, 너그러움, 검소함, 정직,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용기 등을 내용으로 가질 것이다. 함석헌은 인간의 가치를 이러한 도덕의 기준으로 보았고 인간성의 핵심을 도덕성에 두었다.

  공자와 맹자는 모두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악하며 이 악한 세상에서 인간의 선한 본성은 수많은 유혹에 끌려 부패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면서 세상에 가득 찬 유혹을 경고한다. 장자는 세상에 선한 이는 드문 반면 악인은 도처에 넘쳐 흐른다고 탄식한다. 현대의 철학자 라인홀트 니버는 인간 각자는 도덕적인데 이러한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는 부도덕한 사회라고 지적한다.. 이런 조건에서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도덕적 사회를 꿈꾼 함석헌은 현실주의자라기보다 이상주의자였다. 토마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이상과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며,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간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현실 세계의 달콤한 유혹이나 외부의 혹독한 조건에 관계없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이상과 꿈, 그리고 원칙을 지킨다. 함석헌은 그런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상주의자, 그것이 내가 보는 함석헌이다.

  함석헌의 이상주의는 어쩌면 밤하늘의 북극성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북극성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행성이기에 가까이 있는 언덕보다 더 결정적인 표준, 더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북극성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북극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인간에게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인류는 목적보다는 수단과 과정이 존중받는 사회, 권력자나 승리자가 아니라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영원히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노력마저 멈출 수는 없다. 그 노력들이 쌓이는 만큼 바람직한 삶의 영역은 한 뼘이라도 넓어지고 밝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된 세속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인류가 영원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진보, 향상되어 간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도덕을 규정하는 마지막 표준도 가족이나 민족을 넘어선 세계 공동체에 있다고 믿었다. 그 점에서 그는 낙관주의자였다. 비록 온 세계가 부패, 불신, 무지, 탐욕으로 넘쳐나는 곳일지라도 함석헌은 그것을 실패의 세계, 버려야할 세계로 보지 않았다. 냉랭한 배신의 키스를 입에 받으면서도 유다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예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에 비추어 보면, 상대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실패니 성공이니 하는 것은 함석헌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함석헌은 이와 같은 이상주의와 낙관주의, 신앙심을 가지고 한반도의 현실에 직접 몸으로 부딪침으로써 동시대의 도전과 질문에 대응하였다. 빨리 달리는 사람일수록 강한 바람의 저항을 받을 것이다. 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큰 일을 할 사람에게 뼈와 살을 깎는 고난의 훈련을 시킨다. 격동으로 가득 찬 삶을 통해 함석헌은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 가혹한 역경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에 찌든 원한과 분노의 인간이 아니라 유연한 사랑의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국의 씨알은 이러한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조국의 미래를 향한 희망과 격려를 얻을 수 있었다. 올바른 정치를 위한 그의 제언은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종교적 관용주의의 호소는 권위주의적이고 편협한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에 불붙는 도전장이 되었다.

  1945년의 해방 이후 한반도의 역사는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의 시대였고 함석헌의 시대가 아니었다. 훗날의 역사가가 이 시대 역사의 한 장을 '함석헌의 시대'라고 명명할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 준 것처럼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적 영향은 정치적 영향력보다 가치 있고 오래 지속한다. 인간 역사를 통해 오직 극소수의 인물만이 양심적인 방법으로 민족과 사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함석헌은 그런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노자와 예수가 가졌던 삶의 좌우명이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는 데 아주 적절한 듯하다:
 

  "선한 이에게, 나는 선하게 대한다. 선하지 않은 이에게, 나는 역시 선하게 대한다."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신다."
    

이 논문을 위해 필자와의 단독 인터뷰에 응해준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나다 순: 신분은 면담할 당시의 것이며 면담은 1992년, 1993년, 1998년에 행해짐):

계훈제(재야 인권운동가), 김경재(한신대 신학과 교수), 김동길(전 연세대 부총장, 국회의원), 김용준(고려대 화학과 교수), 노명식(한림대 사학과 교수), 송건호(한겨레신문사 대표), 안병무(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민중신학자), 이태영(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장기려(부산복음병원 명예원장), 함우용(농부, 함석헌의 차남) 외.